글 - 칼럼/단상2019. 1. 27. 21:23

 

 

     좋은 영화 <말모이>

의무감으로 찾았다가 감동 받고 돌아오다!

                                                                                                                                                        

                                                                                                                                                               조규익

 

 

얼마 전부터 말모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말모이라는 영화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모이? ‘국어사전이란 뜻인데? 한일합방 전후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사들이 쓰기 시작한 말인데...

 

그렇다. ‘조선말 큰 사전편찬까지의 우여곡절을 사건의 축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겪은 수난(조선어학회 사건)을 그려낸 영화였다. 사실 처음엔 볼까 말까 고민했다. 수없이 읽고 들어, 익히 안다고 자부하던 사건이었다. 2019년 들어오며 겹치기로 찾아온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비참한 역사를 반추하며 우울증을 심화시킬 이유는 더더욱 없었던 것. 모른 척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나를 움직인 것은 중국 조선족 대학원생의 말이었다.

 

교수님, <말모이>란 영화 보셨어요? 최근에 본 영화 중 최고였어요. 할아버지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그런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첨 알았어요. 감동이었어요. 꼭 보세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중국에서 온 너도 그런 말을 하는데. 명색이 한국어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내가 너만도 못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나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지원할 때만 해도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 훌륭한 한국인들을 기르겠다.’는 것이 내 꿈이었다. 애국의 순정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격랑 속에 가슴 속의 정열은 모두 식어버려, 그냥 국어국문학 선생으로습관화된 삶을 지탱해오고 있었구나!

 

따분한 역사 이야기와 상투적인 메시지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일자무식 소매치기 김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핵심요원 류정환(윤계상)의 조우, 판수의 조선어학회 합류, 자녀들(덕진과 순희)을 통한 판수 가족의 생활고, 경성제일중 이사장 류완택(송영창)과 아들 류정환의 갈등, 치밀하고 집요한 일본 경찰과 그들을 통해 고발하는 일제의 야욕 및 만행, 막바지에 무산되는 공청회와 말모이의 원고를 두고 일본 경찰과 벌이는 추격전, 김판수의 장렬한 죽음, 해방 후 천행으로 되찾은 원고, 그 원고로 만들어진 <<조선말 큰 사전>>...그와 함께 사건들의 치밀한 배치와 주도면밀한 서사전략이 돋보이는 영화예술의 격을 맛보게 된 건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비율이나 배합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겐 중요했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말과 글이 민족의 정신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축, ‘어느 순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의(大義)에 동참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축, ‘일본이 우리를 정신까지 집어먹기 위해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는가를 보여주는 제3의 축이 동아줄 꼬이듯 엮여 나간 것이 이 영화의 서사였다. 사실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 사람의 한 발자국이 더 큰 것이고 그것들이 모여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이룬다는 말이 감동적이긴 하나 예술성을 흠집 낼 상투적 요소로 저평가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관객들이 그 말을 들으며 전율했다면, 이 영화의 흠을 더 이상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시경 선생

 

이극로 선생

 

조선어학회 사건에 고초를 겪은 인물들

 

조선말 큰 사전 원고

 

조선말 큰 사전 원고

 

 

 

 

또 하나. 일본이 동해상에서 초계기 장난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영화의 타이밍이 절묘하다.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볼 이유도 없고, 본다 한들 자신들의 야만적 잔인성을 인정할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식민지의 문자와 글을 뿌리 뽑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것을 강압적으로 심으려는 시도를 인류사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에서나 약간 찾아 볼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까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한 만행의 주체로 일본 같은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

 

시간과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영화가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영화 속의 저들은 대체 왜 말도 안 되는탄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단 말인가. 잠시 잊고 있던 역사적 진실이 가슴 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났다. 예술적 팩션(faction)으로 감동을 선사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8. 11:33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

 

 

 

그 옛날의 우물터

 

현대식 관정

 

 

 

 

 

                                                                                                                                    조규익

 

 

노후 전원생활의 꿈을 심고 있는 에코 팜에 얼마 전 우물을 뚫었다. 둥글거나 네모난 형태의 전통 우물을 판 것이 아니라, 드릴(drill)로 뚫고 내려가 지하수맥을 연결하여 물을 길어 올리는 형태의 관정(管井)이니 뚫었다는 말이 맞다.

 

내 어린 시절엔 곡괭이와 삽으로 물 나올 때까지 한 뼘씩 파 들어가는 것이 샘 파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껏 여남은 길 파내려 가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고 메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물 뚫어 대번에 물이 나오거나 맑고 맛있는 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 집의 복이었다. 십 여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거나, 나온다 해도 맑지 않거나 맛이 안 좋은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삽이나 곡괭이만으로 샘을 파는 일이니,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파 내려가는 땅 속에 암반이 누워있는 경우라면 얼른 포기해야 하고, 자갈이 많은 땅도 쉽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은 얼마간 파 내려가도 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였다. 수맥이 어디에나 뻗어 있는 건 아니었다. 간혹 수맥이 얕은 경우도 있겠지만,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웬만큼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 싶으면 옆으로 옮겨 다시 파기 일쑤였다. 물이 안 나와도 진득하게 파 내려가다 보면 대부분 물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성질 급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파게 되고, 그러다가 끝내 우물 파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사실 수맥 잡는 기술이 일반화되고 있는 요즘에도 샘 파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물 팔 땐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일까.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야 성공한다는 뜻인데, 지금도 과연 이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사실 나는 한 우물세대다. 어려서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말이 한 우물속담이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것들은 이 말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에도 이 말은 지켜야 할 금언이었다. 우리 시대까지 남자도 여자도 한 번 결혼했으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법이었다. ‘결혼한 뒤 맘에 안 맞으면, 헤어지고 다른 여자(혹은 남자)를 취하라, 전제조건 부대의 가언명법(假言命法)으로 바뀐 것은 겨우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니 맘에 맞지 않아도 맞춰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불문법(不文法)이었던 것이다.

 

남녀문제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공부도, 직장도 그랬다. 한 번 대학에 들어가 전공으로 택하면 졸업 후 밥 먹고 사는 일도 그 전공 혹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직장도 평생직장이라야 했다. 멀쩡한 직장을 중도에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보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일부라고 생각되긴 하지만)에는 해괴한 규정이 있었다. 신임교수를 채용할 때 전공적합도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학부-석사-박사가 일치해야 만점인 30점을 주는 규정이었다. 나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학부에서 영문학,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더러 있었고, 학부는 이공계,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간혹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가점을 주고 싶었으나, 선배들은 엄격하고 가차 없었다. ‘학문도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통념의 힘이었을 것이다.

 

학부에 들어가 외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이 석박사에서 국문학으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사실 당시에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국문학으로 바꾸어도 승산이 있다’, ‘바꾸는 게 절대로 유리하다’, ‘바꾸고 싶다는 등의 판단과 절박한 욕망이 있었거나 바꾸어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기에 바꾸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발발 떨며 올라와 국문학을 택한 내 처지에 전공을 바꾸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시골에서 옛날 하던 식으로한 우물을 파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이니, 대학에서도 옛날의 관행이나 규정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박을 국문학으로 하신석학 조동일 선생을 이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아직도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예의 한 우물인습이 갖는 힘이리라.

 

오늘 작은 아이가 직장을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봉으로도 안정성으로도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최 상위 대기업의 사원인 그였다! 공교롭게도 전직(轉職)을 결정하는 날,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까지 한 터였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시공사(施工社)의 관리직으로 평생을 보내기보다는 좀 더 역동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투자금융사의 경력직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그의 선언에 격려말고는 달리 대꾸할 말이 궁했다.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도 나이가 들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대기업의 냉혹함을 미리 깨달았던 것일까. 아직 30대 초반의 팽팽한 그의 입장에서 새로운 성공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로선 가슴 떨리는신선함과 두려움의 단안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분명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한 직장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착각이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음이 분명하렷다?

 

***

 

한 우물을 파면서도 용케 패자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이제 한 우물만 파다가는 목도 축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의식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내가 파온 한 우물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문득 그 옛날 시골의 나간 집 우물을 떠올려 본다. 우물은 쓰지 않으면 반드시 퇴락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괜히 빈 집의 우물에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고 떠난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날아들고, 큰물에 자갈들이 밀려들기도 한다. 낮으로 밤으로 우물 밑바닥에는 흙이 솔솔 들어찬다. 그러다가 한 십년 지나면 언제 그곳이 우물이었던가 싶게 평평해진다. 우물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삶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열심히, 죽을 때까지 새롭게 파거나 보수하지 않으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게 우리네 우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곡괭이를 메고 그간 매달려 온 '한 우물'을 더 파기 위해 집을 나선다.

 

 

 

드릴로 관정 뚫는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6. 12:00

인생 후르츠를 에코팜에서...

 

 

                                                                                                          조규익 

 

 

 

 

 

 

아내의 손에 이끌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본 다큐영화 인생 후르츠를 보러 가는 길.

 

일본영화, 그것도 다큐라는 점이 매력을 반감시켰으나, 전원에서 삶을 마감해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에코팜 주인인 내 흥미를 끌었다.

잡답(雜沓)의 도회에서 적막강산 에코팜으로, 에코팜에서 다시 알 수 없는 저세상으로 입사(入社/initiation)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사실 적절한 참고서가 필요하던 차였다.

 

 

 

 

 

원제로 보이는 ‘Life is Fruity'.

인생은 감미로워라혹은 '인생 결실'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리라.

진세이 흐루--’ 라고 느릿느릿 나직이 깔리는 일본인 여성 내레이터(키키 키린)의 음성도 노인들의 호흡에 맞춘 것일까. Slow Life를 손에 잡을 듯이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아이치현(愛知県) 가스아이시(春日井市)의 고조지(高蔵寺) 뉴타운. 45,000의 인구가 모여사는 이 도시의 변두리에 그들의 집은 그림인  듯 온갖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 숲에 70여 종의 채소들, 50여종의 과수들이 모여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슈이치가  존경하던 선배 건축가 안토닌 레이몬드의 집을 본떠 지은, 40년 된 작은 집이다.

 

1950년 도쿄대학 요트부원이었던 슈이치와의 만남, 1955년의 결혼 등으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스토리는 1945년 패전, 1960년 나고야 교외의 뉴타운 설계, 1970년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 입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약간의 서사성이 가미된다. 그러나 최근까지 이어지던 그들의 서정적 삶은 1975년 뉴타운 안의 300평 토지를 구입하면서부터다. 숲을 남기고 바람 길을 만드는 꿈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던 슈이치의 마스터 플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박한 꿈이 실용주의에 밀려 상자를 모아놓은 것 같은 신도시의 모습으로 바뀌고 마는 현실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슈이치는 고조지의 뉴타운에 50년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슈이치가 90세 되던 해 사가현 이마리의 정신과 병원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고자 슈이치에게 조언을 구한 것. 사례금과 설계료 등을 일체 받지 않은 그는 멋진 설계도를 건넨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꾸준히,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라는 충고와 함께. 생전에 그 건물을 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8개월 되던 시점부터 이마리에는 슈이치의 설계대로 건축이 시작되었고, 완공 후 그 시설을 히데코가 방문하게 되었다. 가슴에는 슈이치의 사진을 안고...

 

90세의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의 이쁘고착한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둘이 합쳐 177이란 멘트가 자주 들려왔다. 177살을 살면 신선이 될 만한 나이인데, 그들은 과연 신선일까. 신선이 별 것이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면 신선이 된다. 애면글면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신선이다! 불로장수(不老長壽)의 해탈 경에 든 두 노인이 신선처럼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는 삶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한 폭의 수채화나 감미로운 서정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이파리가 떨어지면 흙이 비옥해진다

흙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맺는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내레이터는 간헐적으로 시 구절같은 이 말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허전했다. 생각해보니 생략의 미학이 구사되고 있었음을 영화가 끝난 뒤에야 깨달았다. 장난삼아 다음의 말을 덧붙여 본다.

 

열매가 떨어지면 싹이 튼다

싹이 자라면 나무가 된다

나무에 이파리가 달리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 생략된 부분을 채워 넣으니 윤회(輪廻)’의 한 고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함께 죽은 뒤 육신을 태워 남태평양에 뿌렸으면 좋겠다하얗게 웃는 히데코 할머니의 얼굴이 빛난다.

육신의 재가 태평양에 뿌려진 뒤 다시 무슨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노부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을 감싸고 돌아가는 자연의 모습만 되뇔 뿐이었다.

그 이상의 일은 자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초탈(超脫)의 경지랄까.

 

두 노인의 삶에서 복잡다단한 것들을 모두 약분하면 남는 건 성실과 무욕두 가지였다.

일생을 건축가로 지내온 할아버지 슈이치는 자연과 어우러진 주거공간을 성실히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철학과 미학을 듬뿍 담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는, 일이 본 궤도에 오르면 슬쩍 빠지곤 했다.

열매를 탐하지 않겠노라는 무욕의 자세이리라.

등이 굽은 히데코 할머니는 일생 텃밭을 가꾸고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살아왔다.

텃밭의 딸기를 수확하여 굽는 케이크도 슈이치를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 할머니가 내놓는 아이디어에 언제나 좋아!’로 대응하는 할아버지 슈이치.

에덴동산에 내려 보낸 천상의 배필이다!

 

에코팜의 주인인 나는 종말에 인생 후르츠!’를 외칠 수 있을까.

정원에 가득한 모과나무, 감나무, 도토리나무들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삶의 이치를 깨닫고

성실과 무욕 속에 자적할 수 있을까.

잡초를 뽑고 나서 잠들었다가 잠든 모습 그대로 저세상에 입사(initiation)한 슈이치처럼 윤회의 한 도막을 추하지 않게마감할 수 있을까.

 

***삼가 슈이치 할아버지의 명복과 히데코 할머니의 행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1. 26. 19:01

 

 

모시는 말씀

 

 

동동동동지희(動動之戱)’는 고려시대 궁중연향에서 속악으로 연행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 아박이라는 명칭으로 󰡔악학궤범󰡕 「시용향악정재에 등재된 가악 융합의 무대예술 작품입니다.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에서는 그 동동을 실연(實演)과 연구발표를 통해 설명하는 실험적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역사상 최고최대의 궁중악무 봉래의를 무대(“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를 타고 하늘로 오르다!”/국립국악원/20131121)에 올린 감동과 추억을 잊지 못하며, 다시 한 번 가슴 뛰는 도전을 결행하고자 합니다.

 

마음속의 뜻을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나, 말만으로 부족하니 탄식하고, 탄식만으로 부족하니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흔들어 춤추고 발을 움직여 뛰게 된다모시(毛詩) 대서(大序)의 절묘한 아포리즘이야말로 기실 후대 동동의 예술성 해명을 위해 예비한 것이나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모시 대서가 밝힌 노래등 메시지 전달의 수단들은 서로 대체재(代替財)나 독립재(獨立財)가 아닌 상호 보완재(補完財)의 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보다 함께 쓰는 것이 메시지 전달의 효율성이나 예술성은 훨씬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동동은 여성의 예술입니다. 임에게 바치고픈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설명하기엔 사랑이란 개념어가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노래로 음악으로 춤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려 한 것이나 아닐까요?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불변의 서정이 융합 무대예술 동동의 핵심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바치는 자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가악으로 표현하려 힘쓴 것을 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최근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전통예술분과의 유능한 트로이카 문숙희 박사(한국음악)손선숙 박사(궁중무용)성영애 박사(한국음악사) 등은 동동의 예술적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초겨울의 문턱, 꼭 참석하시어 전문가들이 짚어드리는 동동의 예술 세계를 공감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8. 12. 1.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0. 9. 11:25

 

 

 

 

 

*누군가의 글에서 빌려 온 사진. 매우 감동적이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다시 이곳에 퍼다 붙입니다. *

 

 

70년대 이전 우리 어머니들의 고뇌가 압축되어 있는 광경입니다.

 

아궁이의 불은 가난, 속 썩이는 남편과 자식들, 구박하는 시부모 등으로 늘 가슴 태우던 마음 속의 불을 상징하고요. 매캐한 연기는 신산(辛酸)한 삶을, 그 연기로 인한 눈물은 소리 죽여 우시던 우리 어머니들의 슬픔을 상징하지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지어낸 밥을 자식들의 입에 넣어 주시면서 잠시 시름을 달래곤 하셨지요. 지금 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난'이 이 한 장의 사진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흙과 돌멩이를 뭉치고 다져 만든 부뚜막, 간신히 걸어놓은 가마솥, 축축하게 젖은 검부나무, 울퉁불퉁 흙바닥, 연기 안 빠지는 쪽문, 등 없어 컴컴하고 비좁은 공간...

 

우리 어머니들의 슬펐던 삶은 불과 40년 전에도 우리의 고향에 뚜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를 키우신 어머니들의 눈물, 잊어도 되나요?

 

                                                                 <조규익 페이스북>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7. 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