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AI 연구 활성화 위한 ‘머신러닝 캠프 제주’ 개최
오는 7월 3일부터 진행…최신 AI기술 강의 및 국내외 유명 연구자 멘토단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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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최금남표해록>>
최부 선생의 표류 및 귀환 노정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회장) 박사로부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파릇파릇하던 시절, <<금남선생 표해록>>을 읽고 언젠가는 그 길을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흘러간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끔찍한 표해(漂海)의 노정은 뒤로 미루고, 선생의 고향인 남도에서 그 분의 뜨거운 자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9월 3일 토요일. 추석맞이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는 만원이었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는 중이었다. 답사 참가자 12명을 태운 버스가 1차로 선 곳은 광주 광산구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고려 인종 때의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후손인 선생을 비롯하여 최윤덕(崔允德)ㆍ유희춘(柳希春)ㆍ나덕헌(羅德憲) 등이 배향되어 있었다.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1927년 건립, 매년 음력 9월 6일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택당(以澤堂) 좌우로 합의문(合義門)과 합인문(合仁門)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쪽에 낙호재(樂乎齋)와 성지재(誠之齋)가 좌우로 서 있었으며, 몇 계단 위에 무양사(武陽祠)가 높직이 앉아 있었다. 9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원 전체가 단정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무양서원 현판
무양사
무양서원 묘정
측면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거기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나주목 관아(금성관). 아직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목사골 나주의 위용과 분위기는 당시의 모습인 듯 고풍스러웠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이 바로 선생의 탄생지였으나, 시간 상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선생을 배향한 강진의 강덕사(康德祠,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14호/군동면 라천리 1044)에서 ‘탐진 최씨 청년 화수회’ 최윤영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창건된 강덕사에는 고려 인종(1122-1146) 때 왕을 호종하여 이자겸의 난을 좌절시키고 나라를 보존시킨 어의 최사전을 주벽으로, 선생과 함께 최표ㆍ최극충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해남 시내에 입성, 해남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목 정수루(正綏樓)
나주목 의열각(義烈閣)
나주목 망화루(望華樓)(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
나주목 금성관의 내삼문
나주목 금성관(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
나주목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쯤 우측 성벽 옆의 각종 송덕비들
나주목사 행렬행차
나주목사 행렬 행차
나주목 행정 관할도
조선시대 20목 분포도
입구에서 보이는 강덕사
강덕사 대문
강덕사 묘정비
강덕서원 뜰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
강덕사의 아름다운 단청
강덕사 앞면
강덕사와 탐진 최씨 문중에 대하여 설명하는 후손 최윤영 선생(미래상사 대표)
관광호텔 밖으로 내다보이는 어둘녘의 해남읍
9월 4일.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 답사단은 해남향교를 찾아 전교인 임기주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정위인 문선왕의 위패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나, 바다를 건너 온 공자의 위패를 모신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강화도의 교동향교보다 이곳이 먼저라는 것이 그 분의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해남향교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일 뿐 ‘최초’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향교도 해남정씨와 결혼한 뒤 해남에 정착하여 관서재(官書齋)를 열고 후학을 기른 선생의 활동영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외손자 유희춘(柳希春)과, 윤효정(尹孝貞)ㆍ임우리(林遇利)ㆍ 유계린(柳桂隣) 등을 해남유학의 핵심으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해남군 지도
해남향교
해남향교 대성전
해남향교 주벽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자리
해남향교 공자(대성지성 문선왕)의 위패
해남향교에 모신 기국술성공 자사의 위패
해남향교의 각종 제기들
해남향교 진설도
해남향교 명륜당
해남향교 장서각
향교를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은 해촌서원(海村書院). 거울 같은 금강골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서원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였다. 선생과 함께 임억령(林億齡), 유희춘,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이 지역의 6현이 배향되어 있었다. 효종 3년(1632) 임억령 선생이 처음으로 배향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니, 여섯 분이 배향되기까지 무려 290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도 금남 선생이 으뜸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그 분의 강학비(講學碑)가 우뚝 솟아 있는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해촌서원
해촌서원
해촌서원과 금강골 저수지
해촌서원의 최부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의 최부 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을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이 송나라가 해로를 통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닿았다는 관두량(關頭梁). 중국과의 국제적 무역항이자 제주도와의 교역항이었다. 송나라의 사신들도, 상인들도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니, 당시 이곳의 번화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성종 18년(1487) 11월 11일 관두량에 도착해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질펀하게 넓은 바다가 고요하니, 당시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손색이 없었으리라.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그 옛날 배가 닿고 떠나던 포구는 마을과 논으로 바뀌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내륙의 수면 위로는 하얀 전어들이 뛰고 있었다. 관동리 주민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 몇 분이 구전해오는 마을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려 줄 뿐 이곳에 남아있을 선생의 행적을 알아낼 재간은 아예 없었다.
관두량 포구와 이를 설명하는 신춘호 박사
포구의 한켠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관두량 방조제 안쪽의 내륙 수로
관동리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함께
관두량을 떠나 백포리의 윤두서 고택과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을 들러 무안 지역으로 이동,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이른바 ‘늘어지 마을’의 양지바른 산록이었다. 선생 부부는 부모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굽이도는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명당의 음택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선생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한참을 달려 나주군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 있다는 선생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심조심 마을길을 달려 막다른 곳에 도착, 촌가의 담장 옆을 통해 올라가니 생가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 관리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주의 한촌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인근 무안에 묻힌 선생. 그 분의 일생은 당시 중세 조선의 정치적 격랑을 거슬러 가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림파 문인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선생의 무덤과 생가 터는 차로 달려 30여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의 거리, 아니 시종일관 생사가 교차하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과연 선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녹우당의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녹우당 현판
고산 윤선도 선생 사당
금남 선생 묘소가 있는 '늘어지 마을' 표석
금남 선생 부자묘 입구
금남 선생 사적비
금남 선생 묘소
금남 선생 묘소에서
늘어지 마을의 아주머니들
금남 선생 생가터 비석
금남 선생 생가터 앞에 열린 감
***
금남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초창기 조선조의 사림파는 ‘유교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결국 훈구파를 누르고 노론을 형성하여 망할 때까지 조선조를 끌고 나간 사림파. 서슬 퍼런 선비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나간 인물들이었다. 제주에서 부친의 부음을 받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표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선생. 북경에 호송되어 황제에게 사은하게 되었을 때도 친상을 당한 자식으로서의 예가 아님을 내세우며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강요에 의해 잠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귀환 후에도 왕명으로 8일 만에 표해록을 작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 다음 즉시 내려가 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왕명으로 중국에서 목격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1년 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선생은 4년 동안이나 복을 입게 된 것이다. 탈상 후 선생을 아끼던 성종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표류한 뒤 중국에서 많은 시문을 지은 것, 비록 왕명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즉시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여러 날 서울에 머물면서 표류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애통함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대들었으니... 당시의 젊은 신료들 또한 선생과 같은 류의 무서운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일찍 하세하고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무오사화의 와중에 점필재의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그 6년 뒤 갑자사화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끔찍한 참형을 받고 효수까지 당했다. 51세의 창창한 나이로, 파란 많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남도의 이곳저곳에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선생의 자취는 인간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교과서였다. 조만간 ‘제주-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행적을 다시 밟아볼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가 마냥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제주박물관에서
아, 제주!
모처럼의 제주행이었다. 몇 년 째 중국인들이 제주를 접수한다고 난리를 쳐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인 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답사에는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끝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현장강의 좀 해달라는 학생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강심장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주는 얼핏 보기에도 포화상태였다. 하늘에는 육지를 오고 가는 양 방향으로 늘 비행기가 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5분 만에 한 대씩 뜨고 내린다니, 혼잡의 극치랄까. 전엔 공항 문을 나서기 무섭게 팜나무와 야자수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으나, 이젠 그들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암담한 체념의 한숨만 내뿜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말라버린 이파리들을 처리할 의욕마저 상실한 듯 공항청사 주변의 녹색은 많이 낡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자동차들, 육중한 관광버스들이 넘쳐났고, 그들이 방출하는 매연과 분주함의 독기가 제주의 인상을 시들게 했다. 참, 그동안 많이도 망가졌구나!
국립박물관 전시 유물들. 참으로 곱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따스해졌다. 갤러리 1~6, 특별전시실 등, 차분히 느끼기엔 숨이 벅찰 만큼 넓은 공간들이었다. 특별 전시되고 있는 고산리 신석기 유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석기와 토기, 각종 생활사 자료들, 유배 지식인들의 유물 등등 어느 지역의 박물관보다 옹골찬 컬렉션이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으로 이어져 나온 삶의 모습이야 여기라고 다를 순 없을 터. 박물관이 내 상상력의 샘터임을 여기서도 재확인한다. 유약 아닌 원시인들이 뿜어낸 입김과 손때가 토기들의 안팎에 칠해져 있지 않은가. CD에 새겨진 것처럼 토기의 물결무늬엔 그들의 노랫소리 또한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손때를 보며 그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소중한 체험이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지만, 쌍쌍이 어울려 재잘거리는 젊음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어찌 수만 년 전 유물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랴.
삼성혈의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제주의 키워드를 말해줬다. 신화, 무속, 해녀, 4ㆍ3과 향토문학 등을 제주라는 고운 보자기로 감싸 젊음들의 가슴에 넣어주고 싶었다. 우주창세의 과정을 보여준 설문대할망 신화, 독립된 나라를 세워 영속시키고 싶었던 ‘삼성(三姓)’의 탐라건국신화, 무조(巫祖)의 내력을 읊어나간 무속 본풀이들, 부자간 쟁투의 현실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 「김녕괴내깃당본풀이」 등. 육지에서 들어보지 못한 신화들의 성지가 제주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결론은 늘 ‘현실’이었다. 주도권 다툼, 더 많이 갖기 경쟁, 사랑과 미움 등등... 그래서 나는 ‘신화란 상상된 현실’이며 ‘현실이란 가시적으로 구현된 신화’임을 강조했다. 부모로부터 내쳐졌던 괴내깃또가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치러 왔을 때, 그는 어떤 말을 건넸을까. 아들 신검에게 권력을 빼앗긴 견훤, 아들 방원에게 패배한 이성계, 평생 일군 부를 아들에게 빼앗긴 재벌 등등. 현실은 신화의 연속일 뿐이다. ‘허황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꿈이자 정신의 모습이고 현재 인간의 모습까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언술’이 신화라는 캠벨(Joseph Campbell)의 말도 있지 않은가.
애월의 밤. 마늘밭 가의 숙소 공터에서 우리의 젊은 풍물패들은 제주의 밤을 마구 두들기고 깨트렸다. 마늘밭 한 평에 250만원이나 한다는, 지상의 현실과는 상관없는 꿈의 난장을 벌인 것이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을 애월의 제주인들은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 무리들’의 춤과 소리에 놀라 깨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 끝 바다 끝까지 닿을 진동의 힘은 잠든 세상을 무력하게 했다. 상큼 짭짜름한 갯물 내음은 창틈으로 스며들어와 뒤척이는 잠자리를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고, 퉁탕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젊음의 열기까지 합세해 대책 없는 불면의 밤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설문대할망의 꿈.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5백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 놓았던 것일까. 어찌하여 무지막지한 돌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섬을 만들려고 했을까. ‘180만 년 전 신생대의 화산활동이 이 섬을 이토록 오묘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야말로 너무 단순하여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태초의 제주에서 설설 뛰던 불꽃들과, 세월이 흐른 뒤 식은 불꽃 사이를 조심조심 뛰어 놀았을 온갖 짐승들과, 불꽃이 만든 흙과 짐승들을 재료로 삶을 이어 나온 인간들의 지혜를 함께 버무려 생각하기로 하자. ‘형이하(形而下)’의 물질에만 정신이 팔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해 설문대할망은 이 땅에 강림하신 것 아닌가. 세상을 낳은, 위대한 지모신(地母神). 오랜 세월 제주를 감싸온 그녀의 오지랖 안을 뒤지니 텅 빈 동공뿐이었다.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을 보며 무엇을 상상하는가. 빠져나간 몸들의 건강한 환락을 상상하는가. 아니다. 무수한 삶의 재생과 반복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허물이다. 그러니 피가 돌지 않는다 하여, 기름기가 빠져 있다하여 그 허물들을 짓밟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 땅에 남겨진 허물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는 법. 신화를 사랑하자. 그 옛날 그 분들의 현실과 꿈을 오롯이 갈무리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우리의 끝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지 않는가. 삶이 어찌 ‘오늘의 우리만으로’ 끝나는 일이랴. 오로지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의 나만을 위해’ 세상은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신화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아득한 후손들을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현재의 내 아픔을 참아낼 수 있게 될까.
‘4ㆍ3 평화기념관’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엉겨 분출의 시기만 기다리는 잠재적 활화산 혹은 휴화산의 분화구였다. 몇몇 인간들의 욕망과 착오가 빚어낸 오욕의 역사였다. 처음은 이랬을 것이다. ‘그래, 이 복잡한 시국에 그들 몇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귀찮음을 감내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듯한 이유와 명분을 내걸고 눈을 부릅뜨면 그대로 진정될 것인데. 이 외딴 섬에서 힘없는 사람 몇몇을 죽여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그렇게 끝이 나리라 착각했을 것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늘 그랬다. 하늘같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뻔뻔함과 물리력만으로 모면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우리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찌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인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사도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헤겔 식 ‘역사의 이성’을 우리가 믿는다면, 최소한 잘못된 계산을 그대로 넘길 순 없는 법. 3~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지금껏 쉬쉬하는 ‘권력의 속성’을 민초들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뒤엉긴 시신들의 사진 앞에 몇몇 젊음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깨달음을 문장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조리의 현장이 어찌 이곳뿐이랴.
해녀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물 깊은 바닥에서 건져 올린 소라며 전복이 꿈틀거리는 좌판. 그 좌판 언저리엔 가쁜 숨을 모아 만들어낸 ‘숨비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값을 깎아보려는 사람들에게 핀잔을 건네는 할머니 해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마음은 ‘해녀박물관’에 역사로 남아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설문대할망에서 시작된 제주 여성들의 기운이 해녀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나 아닐까. 호흡이 허락되는 그 짧은 순간에 단단히 뿌리박힌 소라와 전복을 따내야 하는 건 ‘생존경쟁 원리의 극적인 현시’ 아닌가. 그 힘이 지금 남자들을 능가하는 한국 여성들의 힘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제주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많이 망가져 있는 것도 사실인 듯 했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온전치 못한 법. ‘이제 제주를 떠나고 싶다’는, 한 제주친구의 음울한 말을 공항에서 전화로 듣게 되었다. 물론 ‘제주의, 제주인의 프라이드를 이제 거의 상실한 상태’라는 그의 말이 육지인인 내게 아직은 생소했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바람결 또한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물질해온 ‘갯것들’도 상큼하고 달았다. 새 공항이 생기고,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만 줄인다면, 아니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부피만 줄인다면, 설문대할망과 함께 제주는 영원할 것이다.
고려조의 청자, 조선조의 백자, 분청사기 등
근대 제주의 '곰박(석자), 솔박(되), 도고리(함지박), 국자' 등
물질의 도구인 태왁망사리
해녀물질의 도구들
용담동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이음독널'
각종 청자들
원삼국시대의 각종 토기들
삼성혈
애월의 멋진 숙소(힐링팰리스)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나무가 빠져나간 화산석'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어서 오세요 많이 반가워요 또 오세요!'랍니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하르방님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제주의 옹기 및 기와들
민속마을에서 만난 제주의 옛집들
제주 4ㆍ3 평화기념관
멋진 조화(이경재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하늘과 바다)
해녀박물관에서 만난 '빛 바랜 기념사진들
해녀박물관 밖에서 포즈를 취한 아름다운 여학생들
해녀박물관을 떠나며
돌문화공원 밖에서, 선남선녀들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제1화-
손 형,
참 오랜만입니다. 그간 본의 아니게 격조했었군요. 오늘은 형께 모처럼 ‘길 이야기’를 건네 볼까 합니다. 뜬금없이 웬 길 이야기를 하느냐고 타박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가 작은 발과 짧은 다리를 움직여 꼬박꼬박 넘어 다니던 그 옛날의 시골길이 생각나시나요? 고갯길, 원둑길, 논둑길, 고샅길, 신작로 등 갖가지 길들이 이어져 우리의 시골길을 이루고 있었지요. 형, 혹시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기억하시는지요?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목월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동리목월기념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시 속의 ‘나그네’가 단순한 존재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그는 어떤 복잡한 사연을 갖고 길을 떠난 게 분명하군요. 물론 무작정 길을 떠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달처럼 미끄러지듯 ‘남쪽을 향해’ 흐트러짐 없이 가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 속으로는 어떤 목적과 사연이 있을 겁니다. 그가 가고 있는 길 또한 단순한 ‘도로’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시인도 ‘남쪽지방으로 삼백 리나 벋어 있는 외줄기 길’을 말했을 겁니다.
그 ‘기~인’ 길에는 온갖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었겠지요. ‘사랑, 미움, 믿음, 배신, 약속’ 등등 몇몇 기호로 요약되는 복합적 인간사가 이 길바닥에는 깔려 있을 겁니다. 길목 마다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는 주막에는 늘 술이 익어가고, 그런 술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사가 좀 복잡합니까? 얼굴 반반하고 몸매 고운 주모라도 있는 경우라면 더 복잡해지겠지요. 고속도로와 철길이 생기면서 옛길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목월 선생은 그 옛길을 잘도 찾아내서 우리에게 힌트로 던져 주신 것이지요.
엘크시티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
우리에게도 ‘삼백 리나 되는 남쪽 길’이 있었다는 걸 알려 주려는 노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제겐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서울에서 저 전라남도 혹은 경상남도 바닷가 어디쯤까지 이어지는 길’이었겠지요. 그걸 찾아내어 복원하라는 것이 목월 선생의 묵시(黙示) 아니겠는지요?
요즘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뜨면서 그와 유사한 ‘둘레길’도 나타난 모양입디다만. 숲이 있는 곳이면 마구잡이로 파헤쳐 길을 만들어 놓고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디다. 말하자면 요새 만들어지는 길은 ‘스토리 혹은 히스토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공간일 뿐이지요. 걷는 자들이 무언가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물리적인 길’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목월 선생이 발견하신 ‘남도 삼백 리’와는 비교될 수 없지요.
이중섭의 <길>(이미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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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지낸 몇 달 동안 여러 가지를 목격했습니다만, 가장 가슴 뛰는 일은 ‘66번 길’을 발견한 일입니다. 처음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참 할 일 없는 미국인들’이라고 빈정거리면서 말이지요. ‘넓은 땅덩어리에 필요하면 길을 뚫고, 그 길이 불편하면 뭉개버리고 새 길이나 다른 길을 뚫는 게 예사이지, 그 무슨 길을 가지고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가?’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한 번 두 번 지나다니면서 이게 예사 길이 아니라는 점, 길이란 그저 다니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하는 단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지요.
여덟개의 주[일리노이-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캘리포니아]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다니면서 적지 않은 걸 경험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에드몬드 시티(Edmond City) 근처의 아카디아(Arcadia)에서 발견한 POPS를 볼까요? 66번 도로를 달리다가 멀리 앞을 바라보니 '빨대 꽂은 음료수 병'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지나면서 보니 주유소였는데, 미국에는 주유소에서 음식도 팔고 물건도 팔지 않아요? 주유소라면 그 흔한 이른바 ‘폴 사인(pole sign)’을 세워 놓든가 영 뭣하면 주유기 표시라도 세워 놓을 것이지 대체 '빨대 꽂은 음료수 병'을 세워 놓은 건 참으로 ‘요상’했어요.
POPS 주유소 마당에 세워진 '빨대 꽂은 병'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번에 작정하고 이 주유소에 들어가 보았지요. 과연 레스토랑의 유리창이나 벽에는 온갖 음료수 병들로 또 한 겹을 이루고 있습디다.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해 놓고 벽 쪽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들고 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밖에 서 있는 거대한 병 모양의 조형물은 바로 이 음료수 병들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이더군요 글쎄.
POPS의 내부 앞쪽 창
종업원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기에도 내력이 있더군요. 이게 바로 체사피크 에너지(Chesapeake Energy)라고,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 회사이자 원유와 액화천연가스의 11번째 큰 생산회사로서 오클라호마 시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그 회사의 CEO 오브리 맥클레돈(Aubrey McCledon)이 아이디어를 내고, 건축가 랜드 엘리옷(Rand Elliot)d이 디자인한 것이라네요. 2007년 여름에 문을 연 뒤 급속하게 66번 도로 관광의 매력포인트로 부상했다는군요. 66번 도로 주변을 돋보이게 하는 66피트 높이의 소다 병이 바로 이것이지요. 그리고 이 POPS는 주유소 편의점 안에 비치되어 있는 수백 종의 소다 향들과 각종 브랜드들을 자랑하고 있지요. 이 뿐 아니라 이 편의점과 함께 각종 버거, 소다, 셰이크 등 다양한 식당 음식들도 갖추어져 있구요. 여기서 우리는 66번 도로가 살아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미 존재하는 66번 도로', 이 도로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 그리고 그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바로 66번 도로를 살려 낸 힘의 원천이었어요.
POPS 내부 마트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이 주유소에서 멋진 음료수 하나를 골라 목을 축인 다음 다시 길에 올랐지요. 한참을 가다가 루터(Luther)라는 지역의 경계에 들어오자마자 길가에서 주차장인지 마굿간인지 버려진 폐가인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 허름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어요.
차를 세우고 보니, ‘66번 도로의 경계선 레스토랑[The Boundary Restaurant on Route 66]’이란 멋진 이름의 식당이었어요. 버려진 길가 건물을 외부는 그냥 두고 내부만 수리하여 레스토랑으로 개업한 경우이겠지요. 내가 보기에 내부는 온갖 앤틱 풍의 재료들로 덕지덕지 혼란스러웠지만, 미국인들의 성향은 잘 반영하고 있었지요.
66번 도로 Luther에서 만난 길가 '바운더리 레스토랑'
'바운더리 레스토랑' 의 문
옛날 화폐를 이용한 이 식당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에 띈다.
바비큐, 핫독, 소세지 등을 팔고 있는 그 집 음식의 맛은 그저 그랬지만, 중동계 이민의 후예로 자신을 소개한 주인은 자신의 요리와 식당의 인테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식대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끊임없이 들어 왔지요. 그들이 만약 속도와 시간의 경제성에 충실한 현대인이었다면, 이 길로 접어들어 오지도 않았겠지요. 경제성에 충실한 사람들 사이에 살다보니 많이 피곤을 느낀 사람들이 옛날의 66번 도로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고, 입맛이나 분위기 또한 지난 시절의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겠지요.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주방장 겸 주인이 요리하는 모습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음식. 옛날 식 음식이라 함.
'바운더리 레스토랑'에서 주인과 함께
그런 분위기, 복고풍이랄까요? 실제 삶에서는 절대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 성향 아니겠어요? 그런 현대인들이 가끔씩 자신의 공간 밖에서 ‘순간적인 일탈’을 꿈꾸는 것이고, 그런 일탈의 욕망이 66번 도로에 대한 향수로 표출되는 것이겠지요. 66번 도로를 복원시킨 사람들도 일반인들의 그런 심리를 간파한 것이겠고요. 그래서 이 길을 ‘현대인의 경제논리를 넘어서는[beyond economic logic of modern people]’ ‘수퍼 하이웨이 66번 도로[Super Highway Route 66]’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물질에 나서는 해녀들>
<물질을 마치고 뭍에 오르는 해녀들>
토론문(2011. 11. 2.)
조규익(숭실대학교 교수)
지역학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들이 참여하여 현대학문의 전향적 흐름인 통섭(統攝)이나 융합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학문적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분야입니다. 제주학연구센터의 신설을 통해 제주지역학을 진작(振作)하려는 제주발전연구원의 미래지향적 도전에 경의를 표합니다. 주강현 교수님, 조동오 교수님의 발표와 「제주학연구센터 운영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잘 읽었습니다. 주 교수님과 조 교수님의 발표는 「제주학연구센터 운영 기본계획」을 크게 보완해주시는 내용으로 생각되며, 저는 두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저는 두 분의 발표와 「기본계획」을 읽은 소감 정도의 소박한 견해를 표명하는 선에서 토론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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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연구센터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지역학을 연구하는 기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학연구소의 철학이나 비전이 시대정신에 맞게 제시되어야 하고, 활동의 방향성 또한 그에 맞추어 고안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주는 한국 속의 제주이기도 하고 세계 속의 제주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제주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한국 혹은 세계 안의 한 부분이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본토 및 세계와의 적절한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주의 정체성은 살아날 수 있고, 세계화와 지방화라는 일견 상충되는 방향성 또한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제주의 특수성만을 강조할 경우 제주학은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특수성을 몰각(沒却)한 채 보편성만 추구한다면, 제주도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상반되는 두 방향성을 발전적으로 통합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길이 제주학연구센터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기본계획」의 모두(冒頭)에 밝힌 ‘계획수립의 배경’에서 저는 현실적인 고민을 발견했습니다. 제주지역이 풍부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지만, ‘세계화의 흐름과 국제자유도시 지향 속에 제주인의 문화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 ‘제주인들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제주학의 대중화 실현이 요구’된다는 점 등이 해당 내용의 핵심입니다. 이런 현실인식은 뒤쪽에 제시된 제주학연구센터 설립의 비전[“지역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제주학 정립” : 「기본계획」, 64쪽]과는 약간 어긋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제주인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당위와 ‘세계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현실의 상충을 「기본계획」의 첫머리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도처에서 제주학연구센터의 차별화를 모토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 뿌리를 찾는 작업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지역주민에게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여 궁극적으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기본계획」 67쪽]을 해야 한다거나, ‘제주지역을 대상으로 제주지역의 내재적 발전을 위한 실천적 활동을 지향하며, 제주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추구해야 한다’는 등 대상과 활동의 범주를 제주로 국한하는 논조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간적 범위를 한반도, 일본, 동남아, 몽골, 중국, 대만, 연해주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전 지구로 확대해야 한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기본계획」, 70쪽] 이처럼 「기본계획」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어긋남은 역설적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제주학연구센터가 유지해야 할 방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제를 다음과 같이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제주학의 중심은 제주이고, 한반도와 세계는 그 변방이다.
제주학의 특수성은 한반도와 세계 지역학의 보편성과 긴장의 관계를 갖는다.
탈식민의 시대인 지금, 그리움과 선망의 대상일지언정 제주를 변방으로 보는 본토인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토를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제주인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서울⋅부산⋅인천 등을 제외한 어느 지역도 제주만큼 타 지역이나 타국과 교류가 많았던 곳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제주인들 만큼 제주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느끼는 지역민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불변(不變)과 고착(固着)’에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질적인 것들의 섞임과 변화를 통해 ‘내 것’을 좀 더 선명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본토나 세계 문화와의 교류를 기피할 이유가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기존의 지역 연구소들이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업의 대상이나 범위를 자신들의 영역만으로 한정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계획」의 ‘비전’은 대단히 도전적이면서도 타당합니다. 그런데, 핵심 분야나 구체적인 사업으로 들어가면 비전의 내용은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핵심 분야[「기본계획」, 64쪽]에 ‘본토 및 세계와의 연계사업’이 들어가야 하고, 세부사업 추진계획[「기본계획」, 78쪽]에 ‘본토와의 비교연구/다른 나라들과의 비교연구’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제주도는 인구의 유입을 통한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주에서 출생한 사람’ 뿐 아니라 주제로 이주해온 사람은 당연히 제주인으로 넣어야 하고, 타지에 살면서 제주를 연구하는 등 제주에 일정부분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넓은 범위의 제주인’으로 넣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점은 연구팀 구성원을 제주도 내 인력에 국한하지 말고 본토나 외국인도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연구 주체의 존재에 대하여 ‘대학-외부 연구주체, 대학-사회’라는 맥락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는데, 제주 내의 연구자나 제주 외의 연구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주도 및 제주대 출신이거나 그와 연관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학문적 기반이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연구자체 사업’[「기본계획」, 86쪽]의 ‘제주도민 대상 제주학 교육사업 실시’에서 대상범위를 제주도민으로 한정한 것은 단견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제주도 밖의 주민들까지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제주학 교육사업’[「기본계획」, 79쪽]은 아카데미즘(academism) 일변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해녀학교/제주 민요학교/제주 민속놀이학교’ 등 놀이와 일이 통합된 체험적 교육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제주 해양문화 연구’[「기본계획」, 80쪽]에도 ‘제주 거주 작자의 창작문학 연구’ 혹은 ‘제주를 소재나 공간으로 한 문학 연구’ 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점들이 보완되면, ‘제주학연구센터의 단계별 발전과정’[「기본계획」, 76쪽]은 ‘제주학연구센터 독립기(2017)’에 ‘제주학연구센터 확장기(2020)’까지 추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학의 대상지역을 제주만으로 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토론자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본토의 해안이나 오사카 등지에는 출가(出稼) 물질 후 눌러 살게 된 해녀들이나 그 후예들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해안에도 북한의 해안에도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도 제주 해녀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단순히 물질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민속문화의 매개자로서 노 젓는 노래, 물질하는 노래, 각종 설화 등 많은 문화적 콘텐츠를 그런 지역들에 유포시킨 공로자들입니다. 제주학의 아카이브 구축 사업은 이런 현장조사를 병행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아카이브 확충의 방법들은 반드시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입니다. 아카이브를 소홀하게 생각해온 것이 우리나라 지역학회나 연구소들의 공통된 폐단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제주학연구센터는 그런 문제점의 해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삼아야 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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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교수님께서도 이미 언급하셨지만, 제주인에게 ‘변방의식의 극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적 영역의 확보를 통한 정체성의 확립은 제주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제주를 특별자치도로 설정한 것은 제주도민들의 변방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는 첫 기회라고 봅니다. 진정한 ‘탈식민’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행정조치와 함께 제주도민의 자생적 의식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방언, 민속 문화, 고유한 생활양식 등 제주의 문화를 살리고, 그것들을 통해 제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야말로 제주인들에게는 정신적 홀로서기의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학연구센터는 그 확실한 이론적⋅실제적 바탕일 수 있습니다. 센터를 중심으로 시대의 보편적 요구인 융복합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본토나 해외의 경험 있는 학자들이나 컨설팅 분야의 인력들을 초치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외국으로부터 섬 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이룩한 선례들을 활발하게 도입할 수만 있다면, 제주학연구센터의 발전 단계는 훨씬 앞당길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정부로부터 큰돈을 끌어오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제주 연구자들의 인력풀을 확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주를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의 개발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도 간접적인 투자방식으로는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주를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 팀을 꾸릴 경우 연구센터의 연구원이 공동연구자로 적극 참여하거나 소정의 절차를 거쳐 연구센터의 자료를 서비스하는 등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제주학연구센터가 출범한 이상 제주 지역 내 기존의 학회나 연구소, 대학 등과의 역할 중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발전적인 제휴를 맺고, 장기적으로는 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제주학연구센터는 빠른 시간 안에 지역학의 글로컬化를 이룩한 모범적 선례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문예연구소 새 책 5권 발간!!!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는 최근 학술총서 3권과 문예총서 2권을 펴냈다.
『섬사람들의 음식연구』(문순덕 지음, 학고방)를 학술총서 21로, 『한국희곡의 형식미학과 작가의식』(백로라 지음, 학고방)을 학술총서 22로, 『아리랑 연구총서 1』(조규익⋅조용호 엮음, 학고방)을 학술총서 23으로 펴냈으며, 『21세기 한국 공연계의 풍경』(백로라 지음, 인터북스)을 문예총서 8로, 『유두고도 이래서 졸았다-설교문 작성법과 말하기』(이민호⋅방민화 공저, 인터북스)를 문예총서 9로 각각 발간했다.
『섬 사람들의 음식연구』는 총론 격인 ‘제주 전통음식의 의미, 제주 전통음식의 역사’와 각론인 ‘마라도 사람들의 음식, 비양도 사람들의 음식, 가파도 사람들의 음식, 우도 사람들의 음식, 추자도 사람들의 음식, 오사카 재일동포들의 음식’, 제주 전통음식의 전승 양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1910년부터 광복이후 최근 2000년대까지의 제주음식 문화를 조사하기 위해 저자 문순덕 제주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은 1930~40년대 출생자 4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및 면접 조사를 펼쳤다. 특히 문 연구원이 주목한 점은 전통음식과 함께 살아남은 제주어다. 그는 “제주의 전통음식이 살아 남는다면 이를 부르는 음식용어 역시 살아남을 것”이라며 “조리법을 전수하면서 용어도 전승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희곡의 형식미학과 작가의식』은 1부[질곡의 역사와 부조리한 세계에 대응하는 미적 구조], 2부[재일동포 한국어 극문학의 양식적 특성과 작가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송영, 오영진, 오태석, 박조열 등 탁월한 극작가들의 작품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재일동포들의 가극, 시극, 극소품 등의 연극성⋅혁명성⋅대중성과 민족 이데올로기, 정체성 등 핵심적인 논점들을 분석했다.
『아리랑 연구총서 1』은 80년 아리랑 연구사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의 첫 번째 결실이다. 총 10권으로 발간될 예정인 이 총서의 첫 책에는 이광수⋅김지연⋅고권삼⋅이병도⋅양주동⋅심재덕⋅정익섭⋅임동권⋅최재억⋅원훈의 등 아리랑 연구 첫 세대의 대표적인 글들이 실려 있다.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실험적인 무대/사실주의 연극의 다양화 혹은 심화/독창적인 연극 미학적 세계의 추구/번역극 및 해외 초청 연극/뮤지컬⋅마당극⋅탈장르적 공연예술’ 등 5부로 이루어진『21세기 한국 공연계의 풍경』에서는 ‘바로 지금’ 대중들을 상대로 공연되는 연극들을 생생한 필치로 설명함으로써 비전문가들이 연극을 가까이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두고도 이래서 졸았다』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이 책은 목회자들을 위한 설교문 작성의 길잡이다. 2천년 전 바울의 설교를 듣던 청년 유두고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창틀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바울의 연민으로 유두고는 재생했다고 한다. “이 책 한 권이 오늘날 교회에서 졸고 있는 수많은 유두고를 깨우는 기적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힌 저자들의 말처럼, 이 책은 신도들이 졸지 않도록 목회자들로 하여금 좋은 설교문을 쓸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