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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8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1
  2. 2008.06.11 역사의 진화(進化)는 완성되었는가?
글 - 칼럼/단상2010. 11. 8. 11:17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강의·연구로 학문분야 두축 이끌어… 이젠 국가·사회가 처우개선 나서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을수록 사회의 소외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듯 경쟁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다수 구성원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정함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경쟁의 필수 전제조건이라 할 '공정함'의 결여에 대하여 애써 눈 감고 있는 의식의 원시성은 언필칭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 건'일 수밖에 없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기 시작한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소외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약점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매주 정해진 시간만 강의하고 일정액수의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전임 교수 아닌 지식인들이 바로 시간강사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들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의 노동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당을 벌 수 없듯이, 강사들은 학기 초에 대학 혹은 학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그 학기의 수입은 없다. 하루와 한 학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일용직 근로자와 강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듯이 학기 단위로 살림을 꾸려나갈 강사들의 삶 또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형식 논리로 친다면야 그런 말도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자체가 정책의 오류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적절한 방안만 강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대학이나 지식사회 혹은 학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은 국가의 학문정책에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정부가 그런 학문정책을 세우기 위해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왔다면 그런 나라들이 강사들에 대하여 어떤 처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를 포함한 국가의 인재들을 세밀히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문진작'이란 명분으로 쏟아부은 천문학적 재원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가, 그런 정책들은 과연 그렇게 다급했으며 합목적적이었는지 등을 돌이켜 본다면, 그런 일들이 '강사들의 현안해결'보다 우선적인 것이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학문정책의 중요도나 시급성에서 선후관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처가 곪아 터져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금에서야 겨우 대책을 내놓는 관련부서의 무심함이 답답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생활고와 암담한 미래 때문에 목숨을 끊는 강사들이 속출하고, 3년이 넘도록 천막 속에서 농성하는 강사를 보고 나서야 이 땅의 교육 당국은 겨우 움직이는 시늉 정도를 보여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책 또한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니, 더욱 답답하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마해온 해당 분야의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면서, 지금까지 그들은 전문성이나 실력보다는 '시간강사'라는 '품위 없는 용어'로 통칭되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이 강사를 거친 사람들이며, 현재의 강사들은 전임교수로 대학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그래 왔듯이 조금만 고생하면 전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 아닌가'라는 속 편한 계산으로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뒷전으로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40%에 육박하는 대학 강의를 이들이 맡고 있으며, 모든 학회들에 집행부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이들이 맡고 있다. 강의와 연구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두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약도 없는 '교수사회에 진입할 날'을 무작정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는 말만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늦기 전에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6. 11. 12:07
 

*이 글은 『어문생활』 127호(한국어문회, 2008. 6.)의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에 실려 있습니다.



   역사의 진화(進化)는 완성되었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읽고-


                                          조규익(숭실대 교수/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


 엄혹(嚴酷)한 냉전체제 속에서 내 삶은 시작되었고, 3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공산진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암울하던 어린 시절. 등굣길에 나서는 아침마다 북으로부터 날아온 삐라를 줍는 게 일이었다. 동네 어귀까지 바닷물 들어찬 어느 보름사리 한밤중엔 간첩선이 들어와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다. ‘야수 같은’ 공산당을 저주하며 우리는 온몸에 소름 돋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틈날 때마다 너덜거리는 세계지도를 보며 빨갛게 칠해진 공산주의 국가들이 왜 그리도 넓고 위압적인지,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실체를 보지 못한 공산당이 내 실존을 위협하는 불안과 초조의 근원이었다. 라디오에서는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보도되고, 툭하면 ‘북괴타도 궐기대회’가 열리곤 했다.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을 지체 없이 신고해야 했고, 여차하면 얇은 고무신 벗어들고 달아날 태세를 갖춘 채 산길을 가야 했다.

 그렇게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 사회로 진입했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도 치러냈다. 그 무렵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소련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몰락의 대서사시가 전 세계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장년을 눈앞에 둔 내 정신세계에도 드라마틱한 파도가 일었다. 그 때 이미 우리는 정보화 사회를 거쳐 고도 정보화 사회에 진입하려던 차였다.

 그 무렵 우리는 어린 시절의 굶주림을 거의 완벽하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역설하며 좌익사상에 빠져든 친구들도 배고픔을 참으려 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누리는 자본주의의 풍요를 저주하는 모순을 범하곤 했다.

 그렇게 ‘도둑처럼’ 찾아온 세계의 변화를 설명해줄만한 선생님이 내겐 없었다. 그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 권의 책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역사의 종언(終焉)과 최후(最後)의 인간’이란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헤겔이 신봉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야말로 후쿠야마가 명쾌하게 설명한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이었다.

 5공, 6공,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권력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도 존엄한 존재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처럼 인류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 ‘멋진 사건’을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행복이었다. 흡사 길바닥에서 말라가던 물고기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연못으로 던져진 격이었다. 연못 안에는 뱀도 있고, 생활쓰레기도 있으리라. 그런 것들을 몰아내고 치워가면서라도 살아야지, 이곳을 떠나면 갈 곳 없는 우리들이다.

 보라, 우리의 반쪽은 아직도 진화의 물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유년시절의 굶주림과 절망이 그들의 산하를 덮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노동자 농민의 천국’임을 강변하고 있다. ‘이밥에 고깃국’ 타령을 얼마나 더 읊어야 그들이 소원(所願)하는 ‘역사의 종말’은 올 것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