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29. 14:38

어수선한 새해를 맞으며

 

 

 

 

 

 

정유년이 밝았다.

닭의 해라지만, 첫날 새벽에도 상서로운 닭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TV를 켜기가 무섭게 보기 싫은 얼굴들이 화면 가득 밀려온다.

이른바 국정농단의 세력이 밉지만, 권력을 좇는 부나비 군상(群像)도 밉상이긴 마찬가지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도 국민들의 눈만 속이면 그만이라는 모양새들이다. 누구를 뽑아도 그놈이 그놈이라지만, 안 뽑을 수도 없으니 고민이다.

 

몇몇 부나비들의 현란한 춤에 민초들은 마음 둘 곳이 없고, 언론 매체들은 칠팔월 각다귀들처럼 날뛴다. 물 건너에서는 전대미문의 듣보잡이 등장하여 조자룡 헌 칼 쓰듯대권을 휘두를 태세이고, 휴전선 이북에서는 막 되먹은 애송이 하나가 위험한 칼춤을 추고 있으며, ‘깡패국가중국과 왜구 나라일본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 길길이 날뛰고 있다. 이 판에 우리만 좁디좁은 한반도 남쪽에서 굿판 아닌 굿판을 벌이는 중이다. 굿판의 끝이 어떨지 뻔히 보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한 작두춤 속에 환호작약 시끄럽다.

 

젊은이들에겐 힘 쓸 만한 일자리가 없고, 일찌감치 일자리를 잃은 젊은 노인들은 한숨 속에 시간만 죽인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은 일신 편한 것만 도모하고, 돈 있는 자들은 긁어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젖도 안 떨어진 피붙이에게 금 수저 물려주기 바쁘고, 부와 권력 허세 속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사람을 키우지 못한 죄, 제대로 사람을 키우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죄, 좋은 싹들을 모조리 경쟁으로만 내 몰아 온 죄, 잘 하는 자와 훌륭한 자를 존경하지 않고 줄줄이 매장시켜 온 죄, 감당도 못할 자리에서 시위소찬(尸位素餐)만 즐겨온 죄, 코드 맞는 자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권력과 이익을 독점해 온 죄, 오늘만 살고 내일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탐욕죄...

 

돌아가는 형세가 어찌 올해라고 나아질 수 있을까.

누군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지만,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면, 그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 오늘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오늘로 이어진 어제의 그 아수라장을

무슨 수로 견뎌낼 것인가.

 

지금은 난국.

정유년은 어쩌면 그 난국의 시작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어리석음을 반복한 통절의 정유재란을 기억하는가.

부나비들에게 깨달음을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일일까.

유황불이 몸을 태워 역한 냄새를 뿜어내면 모두가 괴롭다.

나라의 내일을 위해, 후손을 위해,

제 몸들을 스스로 파묻어, 모두를 살려야 할 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2. 28. 13:36

 

 

역사상 우리의 중세를 지배한 사상은 유학이었고, 그 이데올로기는 통치의 이론적 근간이 되어 왔다. ‘염치란 현대의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하나인데, 그 역시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지금 대부분의 국어사전이나 한자사전들에는 남에게 신세(身世)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狀態)” 혹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등으로 설명 되어 있으나, 한자를 그대로 풀면 부끄러움을 살핌부끄러움을 행동이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마음이 바로 염치다. 그래서 염치는 예의(禮義)’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남들의 사회적 행동을 평가하거나 헤아릴 때 염치의 유무(有無)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가치기준이 바로 염치임에 틀림없다. 누구도 혼자 있는 상황에서 염치를 거론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처럼 염치를 중시하고, 염치 때문에 쭈뼛거리게 되는 집단정서를 갖고 있는 민족도 많지 않을 것이다. ‘찬물 마시고 이빨 쑤시면서도 배고픔의 기색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자존심 강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염치는 집단적 수퍼에고(super ego)의 가장 확실한 발현태(發顯態)라 할 수 있다.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누항사(陋巷詞>의 한 부분.

 

가뭄이 몹시 심하여 농사철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갠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흐르는 물을 반쯤 대어 놓고는

소 한 번 빌려 주마 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 없는 저녁에 허위허위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에헴' 하는 인기척을 꽤 오래도록 한 후에

, 거기 누구신가?”<*농민의 물음>

염치없는 저올시다.”<*박인로의 대답>

초경(初更)도 거의 다 되었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고?”<*농민의 물음>

해마다 이러하기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궁가(窮家)에 근심 많아 왔삽노라.”<*박인로의 대답>

 

 

양반 박인로가 소 한 마리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부자 농민에게 쭈뼛거리며 찾아가 수모를 당하는 광경이다. 의 핵심은 염치. 염치가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염치를 잠시 접어둔 정황이 드러난다. 생각해보라. 어엿한 양반으로서 임진왜란에 수군의 하급 장교로까지 참전해가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지도적 신분계층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그토록 중시했으며, 같은 작품에서 일노장수(一奴長鬚: 노비의 길게 기른 수염)는 노주분(奴主分: 노비와 주인의 명분)을 잊었다고 변화된 세태를 탄식하기도 한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과 가족들의 배고픔 때문에 염치 불고(不顧)하고 상민에게 찾아가 구차한 말을 건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한 그는 집에 돌아와 밤새 잠 못 이루며 번민하던 끝에 결국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념적 허울 속으로 들어가 잠시 잃어버렸던 염치를 찾아내고 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 땅의 지도층이 추상같이 지키려던 염치였다. 구복(口腹)의 억압을 뛰어넘어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의 문고리가 바로 염치였다.

 

중세시대 이래 우리는 늘 염치를 강조해왔다. 비록 쌀독이 비어도 염치를 잃어선 안 된다고 역설해온 것이 우리 민족이었다. 그 염치는 체면이고 자존심이다. 굶어죽을지언정 돼지우리 속의 밥알을 줍지는 않겠다는 오연한 패기가 바로 염치다. 허균(許筠)이 말한 도문대작(屠門大嚼)’ 즉 돈이 없어 푸줏간을 그냥 지나치면서도 크게 입 벌려 씹는 시늉을 하는 행위는 고기를 먹고픈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구차한 말을 건네지 않고 내면의 욕망을 억누르는 염치의 극적인 표출이었다.

 

그동안 세월은 참 많이도 변했다. 어느 사이 염치란 무능이나 무력함을 합리화하는 값싼 수단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다수가 되었다. 99원 갖고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1원을 빼앗아 더 부유하게 되는 사람을 치열한 승자로 선망하는 사회, 달랑 몇 푼 되는 재산이나마 덜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을 비아냥 거리는 시대, 배고프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좀 더 가진 사람을 배 아파하며 욕심 부리는 시대가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재물까지 탐하는 게 일상이 된 것이다. 반대로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재물을 이용하여 명예까지 확보하려 애쓴다.

 

권력을 지닌 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앗아내려 하니, 공동체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로 이보다 더 악독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런 비정(秕政)들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음에도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며 오욕(汚辱)의 삶을 부지하고자 하니, 이런 통치자의 몰염치한 사례가 과거 역사의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단 말인가. 탄핵이네 특검이네 복잡한 악다구니 속에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한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염치만 되찾는다면, 벌써 해결되었을 사건이 아닌가. 염치 앞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조상들의 오연한 기개만 떠올려도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 아닌가. 눈꼽만큼의 의혹에도 내려와야 할 자리이거늘, 이미 벌여놓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건들 앞에 자기변호의 둔사(遁辭)나 농하고 있는 몰염치는 과연 무어란 말인가.

Posted by kicho
알림2014. 3. 22. 17:35

 


도검무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저서

 

 

 


자신의 서재에서 곽낙현 박사

 

 

 

 

칼과 무예의 학문적 재조명을 통해 구체화된 도검무예(刀劍武藝)’의 존재

 

-곽낙현 박사, <<조선의 칼과 무예>>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4로 발간-

 

 

 

 

 

곽낙현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정보화실 전임연구원)가 조선의 칼과 무예를 학문적으로 분석하여 <<조선의 칼과 무예>>(학고방)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4로 발간했다.

곽박사는 이 책에서 임진왜란 이후/18세기/18세기 이후로 나누어 도검무예의 수용으로부터 보급에 이르는 전 과정을 소상히 살폈다. 임진왜란 이전의 도검이 갖는 의미나 역할,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검무예가 도입되고 수용된 양상, 임진왜란 이후 변화해간 도검무예의 추이나 변화를 논한 것이 첫 부분이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내용을 바탕으로 18세기 도검무예의 정비나 기법을 상세히 분석한 것이 둘째 부분이며, <<대전통편>>•<<만기요람>>•<<어영청중순등록>>•<<장용영고사>> 등에 나오는 도검무예를 분석한 것이 셋째 부분이다. 특히 정조 14(1790)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도검무예 가운데 10[쌍수도, 예도, 왜검, 왜검교전, 제독검, 본국검, 쌍검, 월도, 협도, 등패]를 중점적으로 수용하고 표준화하여 기법적 특징을 분석, 제시한 내용은 이 책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치밀한 분석과 정치한 논리전개 뿐 아니라 많은 사진과 도표를 많이 활용한 점은 이 책이 지닌 장점들이다.

역사학, 군사학, 체육학 등 서로 다른 분야들의 통섭적 입장에서 조선의 도검무예를 조명해낸 이 책은 이론와 실제가 절묘하게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저자 본인이 검도를 비롯한 무도의 고단자로서 도검무예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은 이 책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임진왜란 이후 도검무예의 수용과 추이

1절 임진왜란 이전 도검의 역할

1. 전술체계와 단병무예

2. 근접전 전투방식에서 도검의 역할

2절 임진왜란 중 도검무예의 도입과 수용

1. 단병전술과 도검무예의 도입

2. <<무예제보>> 편찬과 도검무예 수용

317세기 이후 도검무예의 추이와 변화

1. <<무예제보번역속집>>의 도검무예

2. 김체건과 왜검의 추이

 

218세기 도검무예의 정비와 실제

1절 <<무예도보통지>> 편찬과 도검무예 정비

1. <<무예도보통지>> 24기 구성과 내용

2. 도검무예의 ()’

2절 도검무예의 실제

1. 쌍수도

2. 예도

3. 왜검

4. 왜검교전

5. 제독검

6. 본국검

7. 쌍검

8. 월도

9. 협도

10. 등패

3절 도검무예에 나타난 기법의 특징

 

318세기 이후 도검무예 보급과 실태

1절 도검무예 관련 시취규정

1. <<대전통편>>의 도검무예

2. <<만기요람>>의 도검무예

2절 도검무예 관련 군영등록

1. <<어영청중순등록>>의 도검무예

2. <<장용영고사>>의 도검무예

3절 도검무예의 특성과 의의

 

한국의 칼, 전통무예, 군제사, 전통문화 등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4, <<조선의 칼과 무예>>, 학고방, 2014.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8. 5. 7. 11:53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에서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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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외교섭의 채널이자 수단이었던 사행(使行)은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이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문제 해결’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하여 일본의 막부(幕府) 및 지방의 여러 세력들과 다원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대일사절은 외교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통신사(通信使),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호송사(護送使), 수신사(修信使)’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왜구문제가 해결된 15세기 중엽 이후에도 사행은 준비되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조선초기의 일본사행이 왜구문제의 해결과 함께 잠정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이후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에 사신파견을 요청하면서 속행된 통신사행 마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행은 ‘피로인(被虜人) 쇄환(刷還)’과 ‘회답(回答)’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사행이었기 때문에, ‘통신사(通信使)’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1636년(仁祖 14)이후 181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 막부로 파견된 사절단을 본격적인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약 500년 동안 일본막부가 있는 에도[江戶]로 가는 사신 행차를 통칭하여 '통신사(通信使)'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사행 전체를 ‘통신사(通信使)’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일본사행에 문화적 성격이 강해진 1636년 이후 1811년까지 막부를 대상으로 하던 사행을 ‘통신사(通信使)’라 할 수 있는데, 어쩌다보니 이 명칭은 일본 막부로 보내던 공식적인 사행들 모두를 의미하게 되었다.

통신사행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한양을 떠나 부산의 영가대, 일본의 오오사카[大阪] 등을 거쳐 막부가 있는 에도[江戶]까지 여행하였다. 6개월여의 오랜 통신사행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다양했던 만큼 그들의 관심사항도 제각각 많았다. 이에 따라 얻어지는 견문도, 기록자들이 남긴 내용도 다양하였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일본의 도시들은 화려함에 있어서 조선의 도시들과 달랐다. 더구나 도시에 몰려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를 썼다. 조선통신사 사행원과 일본인들 사이의 ‘글’과 ‘문화’를 매개로한 ‘상호소통’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조규익 교수가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머리말에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 기록들에 대한 해석 혹은 그 체계화”라고 했을 만큼 사행록의 연구는 조선통신사 연구의 주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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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통신사행에 대한 연구는 문학ㆍ역사ㆍ정치ㆍ외교ㆍ경제ㆍ회화ㆍ사상ㆍ민속(풍속)ㆍ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를 수탐(搜探)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숭실대학교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에서는 그간 발표된 국내·외 연구자들의 연구논문들을 두루 수집했고, 수집한 논문들 가운데 137편을 엄선하였다. 이 논문들을 내용 및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 이 총서다. 이 연구총서는 총 10권의 ‘연행록 연구총서’에 뒤이어 나온 결과물이다. ‘연행록’과 ‘조선통신사 사행록’을 아울렀다는 점에서 본 연구소는 ‘조선조 사행록’에 대한 연구결과를 망라하는 쾌거를 이룬 셈이다.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에는 60여명의 학자들이 연구한 논문 137편과 자료사진이 수록되었다. 문학(1-3권), 외교(4-6권), 역사(7-8권), 문화·회화(9-10권), 사상·인식·경제·무역·민속(11-12권)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13권에 우리나라와 일본 지역의 조선통신사 노정과 유적들을 답사하여 얻은 생생한 사진들을 엮어 넣음으로써 사행 현장을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연구총서의 발간으로 학자들은 기존 연구 자료의 수탐 및 정리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을 절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연구의 중복 또한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분야의 연구는 질적·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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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