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07. 4. 29. 17:55
 

 
시집 『디지털 사계』를 받아 들고


김인섭 교수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오늘 저는 정년은퇴를 기념하여 시집을 간행하시는 이재관교수님의 퇴임예배에 귀중한 순서를 맞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까마득한 사람이 이 엄숙하고 뜻 깊은 자리에 서기까지 망설임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맑고 깨끗한 마음을 정갈한 언어로 담아 시집으로 발간하시는 교수님을 뵈면서 축하드리는 일에 사양만 하는 것은 시 전공자로서 도리가 아니다 싶은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집이 발간되자마자 건네주신 시집을 받아 읽고 저는 기존 시에서는 흔히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동을 받았고, 교수님의 시적 경지에 크게 놀랐습니다. 이런 감동과 경탄의 마음을 여러분 앞에서 말씀 드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남다르게 얻게 되어 오히려 감사드리고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집 뒤에 수록되어 있는 교수님의 경력과 논저목록만으로도 학자로서 학문적 업적과 성과가 가히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죄송스럽게도 이 분야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시피 합니다. 그렇지만, 교수님의 시집 속의 작품 하나하나를 통해, 한 시인이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온 마음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의 치열한 시가 도달하고자 했던 정신의 세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환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시집을 내는 일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특히 한 평생 학문에 매진한 분에게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는 예술의 한 장르로서 문학입니다. 문학에는 시 외에도 소설과 희곡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장르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할 때 흔히 희곡은 ‘놀이’, 소설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시는 ‘노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 일과를 도식적으로 나누어 보면, 낮에는 세상 속에서 실제의 삶을 살아갑니다. 무대 위에서 놀이를 하는 희곡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낮 동안의 행동으로는 다하지 못했던 삶들을 찻집이나 술집에서 이야기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이야기로도 못다 푼 마음 속 깊은 감정은 나중에 노래방에 가서라도 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시는 이야기 끝에 풀어내는 노래와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쌓이고 쌓였던,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깊은 생각, 그윽한 감정을 은밀하게 표현하는 문학입니다.


또한,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여 만든 예술입니다. 언어를 가장 정교하게 갈고 다듬는 과정이 요구되는 예술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공기와 같은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는 이미 탁해질 대로 탁해졌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언어를 다듬는 일은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좋은 마음을 갈고 닦는 일이기도 합니다. 번잡한 세계에서 조용히 물러나 이 세계를 고독하게 깊이 음미하는 자들의 과업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시집을 받아 든다는 것은 이같은 고귀한 작업이 빚어낸 작품들을 접하는 그야말로 정밀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입니다. 시집을 받아든 우리는 교수님을 직장의 동료나 선배, 일상인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시인의 영혼과 교감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집을 읽다가 이 분이 한 평생 시를 쓰셨더라면 우리 문단에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하셨을 거라는 생각을 금방 하게 되었습니다. 시 세계가 남다르고, 시적 수준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집에 들어 있는 시 몇 편을 잠시 들여다 보겠습니다. 먼저, 시집 50쪽에 실려 있는 <새>라는 시를 보겠습니다. 이 시는 전체 다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마지막 연은 놀라운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새’는 그 자유로운 비상 때문에 시인들이 즐겨 표현하는 시적 소재입니다. 그래서 예사 표현으로는 진부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새’를


        영혼의 날개로

        우주와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시집(詩集)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자신의 고독을 표상하는 이미지로써 ‘까마귀’라는 새를 즐겨 상징화한 적이 있습니다. 김현승 시인도 이 까마귀를 두고서 ‘영혼의 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시의 새는 영혼의 날개로 우주와 입 맞춘다고 하여 김현승시의 비유보다 매우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시적인 관습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오규원 시인이 <한 잎의 여자>라는 시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서 ‘시집같은 여자’라고 비유한 적이 있는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시집’이라는 말을 시의 비유로 표현했던 유일한 경우가 아니었나 합니다. 비유의 구체성이나 파격성에서 기성 시인에게서도 흔히 느낄 수 없는 참신한 표현을 보여주었고, 그 때문에 시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함축적이고도 탁월한 표현에서 교수님의 시인으로서의 태도와, 시에서 추구하고 있는 시정신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현승의 경우처럼 이 시인에게 있어서도 ‘새’는 영혼으로 표상되면서 시인에게 있어서는 시적인 분신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영혼’이며, 그 영혼은 지상의 온갖 굴레와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우주의 신적인 세계와 교감하고자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혼입니다. 그런데, 더욱 아름다운 대목은, 이러한 새는 다름 아닌 ‘시집’ 자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교수님께서 쓰신 모든 시들은 영혼의 새가 비상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지상의 척박한 삶을 벗어나 신성한 우주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고뇌와 희열이 담긴 언어의 파노라마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는 동안 찬송가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라는 찬송의 리듬을 마음 속으로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 독수리 같이 모든 싸움 이기고 근심 걱정 벗은 후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 주 앙모 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라는 노래 말입니다. 이 시를 통해 저는 영혼이 강건한 인간의 힘찬 상상력을 접하였고 속된 세계를 일거에 승화시키는 신성한 전율에 휩싸이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만약 김현승 시인의 시표현처럼, 하나님께서 더욱 값진 것으로 바치라 하실 때, 이 시인이 신에게 드릴, 가장 나중까지 지니고 있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을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운 시집이 아니겠습니까?


조규익 교수님께서 시집 말미에 교수님의 시세계에 대해 치밀하고도 체계적인 해설을 덧붙여주셨습니다. 적절한 안내를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교수님의 시정신의 근저에는 언제나 절대자에 대한 구도자적인 겸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를 하나 더 보겠습니다. 시집 84쪽에 있는 <엄동설한>이라는 시를 그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첫 연만 읽어보면


       닫힌 그대의 창은

       빙벽처럼 날마다 두꺼워지고

       위엄 있게 빛나,

       다가서는 내 모습만

       말없이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시인이라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겸허한 자들입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한 시인의 본령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그대’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창’은 빙벽처럼 날마다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에게 단절감을 주는 부정적인 게 아니라, 위엄 있게 빛나는 존재입니다. 나아가 그 존재는 시인을 되비추어 스스로 성찰하게 만듭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 시의 3연에서 보는 것처럼 스스로 잠재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그대의 세계로 성급하게 나아가고자 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는 그분 앞에서 눈도 뜨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라는 겸허한 성찰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부분의 두 연에서는 “낮엔 반사되는 햇빛에 / 눈을 뜨지 못하고 / 밤이면 / 가랑잎 구르는 소리조차 / 과분한 낭만”이라거나,  “거울마다 갉아 지워지는 / 내 반쪽 모습이 / 엄동의 고요를 / 초침처럼 구릅니다.”라는 표현을 접하게 됩니다. 위엄 있게 빛나는 절대자와 지상의 어둠 속에 쇠락해 가며 뒹구는 인간존재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엄정한 질서를 시인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깊은 신앙은 이같은 겸허한 자세에 굳은 뿌리를 내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예로 든 이 작품 외에도 이 시집에는 신앙적인 시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게 실려 있습니다. 신앙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상력의 근저에 신앙심이 작용하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시집의 미덕은, 종교적인 신앙과 문학 예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팽팽한 긴장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들이 신성성과 심미성이 잘 어우어진 품격 높은 정신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시에서도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수님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연어의 회귀>를 들고 싶습니다. 시집 46쪽에 실려 있는 작품 전문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담수에 비해 바다는                      그러나 떠남이 운명이었다면

 짜고 험하고 거칠었지만                 회귀(回歸)는 더 끈질긴 본능.

 내게 광활한 자유와 풍요와

 환상을 주었다.                            잉태와 부활을 위한

                                                변치 않는 DNA 안테나가

 어려서 떠날 때에는                       내게도 있었다.

 스틸헤드 치어처럼

 머뭇거렸으나                              돌아갈 고향은

 금방 대양에 익숙해지고                 좁고 가파르고 위험한 시내

                                                아무 교통표지판도 없는 계곡.

 생의 희로애락을

 바닷물에 듬뿍 적셔                       그래도 회귀는

 돌아올 날이 있는 줄은                   바다보다 더 자유롭고

 까맣게 몰랐다.                            더 크게 거칠게 다가오는

                                                전율의 은총이었다.


저는 이 작품을 이 시집 전체의 에필로그로 읽고 싶습니다. 에필로그의 시라면, 시집 전체는 이 한 편의 시를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시가 너무 좋아 오랫동안 감상해보고 싶습니다만, 사정상 그렇게 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정말 좋은 시는 설명 필요 없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입니다. 이 시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읽은 소감을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3연과 5연, 그리고 7연에서 시 속으로 한 동안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3연에서 ‘까맣게 몰랐다.’는 이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저에게는 깊이 울려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혹은 인간 사이에서 정말 ‘까맣게’ 모를 일은 흔치 않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는 빈번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까맣게 몰랐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제야 어떤 근본적인 각성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각성을 얻게 된 계기는 누가 마련해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은총’을 베푸시는 분의 지극한 사랑의 섭리 아니겠는가 합니다.


5연에서 말하는 “변치 않는 DNA 안테나”는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테나는 누군가와 수신하고 송신하는 장치입니다. 그렇다면 DNA 안테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의 입김으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맺은 신과 인간의 생명적인 관계를 계속 교신해가는 안테나이며, 그것은 영적인 안테나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또한 지상으로 잉태해 내려와 부활 승천한 예수의 위대한 삶을 이끌었던, 그의 아버지와 연결된 안테나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안테나가 나에게도 있었음을 비로소 확인하고 감사하며 은총을 예감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회귀는 안테나의 저쪽에 계신 분에게서 비롯된 은총이며, 그 은총은 바다보다 더 자유롭고 더 크게 거칠게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초월적인 전율에 휩싸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지를 박목월 시인은 그의 말년의 신앙시 <크고 부드러운 손>이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크고 부드러운 손이 / 내게로 뻗쳐 온다. / 다섯 손가락을 / 활짝 펴고 / 그득한 바다가 / 내게로 밀려온다. / 인간의 종말이 / 이처럼 충만한 것임을 / 나는 미처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돌아가는 삶에 대한 각성과 그 벅찬 은총을 실감하는 두 시인의 상상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은 이렇게 보편적인 감동과 고백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저는 이 시를 앞으로 저의 ‘기독교문학’ 수업시간에 좋은 작품의 사례로써 학생들에게 소개할 생각입니다. 시심과 신앙심이 어우러져 이처럼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작품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시집 <디지털 사계>을 읽고, 엄정한 신앙인이자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탁월한 시인 한 분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시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이렇게 귀한 시인이 같은 교정에 계신 줄은 저야말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맞이하여서야 비로소 물밀듯이 밀려오는 한 시인의 시적인 전율을 느낍니다. 일생을 몸 바친 학교를 떠나시면서 예술의 향기와 빛깔로 옷 입힌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아 있는 저희 식구들의 마음마다에 아로 새겨주셨습니다. 소중하게 남겨주신 선물 감사드리며 받겠습니다.


학자로서 듬뿍 적신 노고는 이제 풀어놓으시고, 시의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자유로운 노래를 맘껏 부르셨으면 합니다. 육신의 몸은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럴수록 시를 쓰시는 신성한 창조적 에너지는 더욱 새롭게 솟아날 것입니다. 우주와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시들을 앞으로도 더 많이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수님의 앞날과 또 그와 함께 잉태될 시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2월 23일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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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9. 16:58
퇴임사 수필 칼럼

2007/02/23 12:49

http://blog.naver.com/jack2816/100034595852

 

퇴임사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39년 근속한 교수직을 떠나며,



  바쁘신 중에 오셔서 인자한 말씀으로 축사를 해주신 존경하는 이효계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순서를 맡아주신 교무처장, 교목실장, 경영학부장, 그리고 유한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축도 순서를 맡아주신 김기태 목사님 감사합니다. 김목사님은 과거에 육군사관학교 교회 담임목사와 국방부 군종실장을 하실 때 저의 신앙생활을 가까이 지켜주셨던 은인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시낭송을 해주신 김종천, 송광석군 감사합니다. 저는 숭실에서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가까운 곳에서 항상 도와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신 숭실대 교직원 선생님들께 최고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준 재학생, 졸업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잘 가르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동안 16명의 박사후보가 저의 지도를 받았는데 14명만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떠나버린 2명의 얼굴이 요즘 자꾸 어른거려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멀리서 오신 김용준 교수, 김병우 교수, 권오탁 교수, 강성안 박사, 가까이서 행사를 준비해주신 윤재한 교수, 박유동, 정청식, 홍성의, 김선희 박사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긴 세월 한 울타리에서 형제보다 가깝게 우정을 나누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경영학부와 경상대학 교수님들께 어떻게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연구실인 경상관 505호는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별세하신 고 이길영 교수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505호실로 짐을 들여놓으면서 그 분의 못 다하신 일까지 더블로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요일, 공휴일 가리지 않고 주당 근 80시간씩 연구실을 지켰습니다. 밤을 새운 날까지 합치면 아마 20년에 해당하는 지난 10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0년을 더했다면 75세 은퇴를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정년은퇴가 천만다행이고 즐거운 은퇴입니다.


  마지막 1년을 시 쓰기에 몰두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문 한두 편 더 쓰는 것도 좋겠지만, 마지막 1년이 색다르게 장식되었으니 참 좋습니다. 시를 쓰면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과학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종종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회과학도는 이 세상을 한심한 나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저의 전공인 품질경영 Total Quality Management와 커뮤니티는 한국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인증제가 도입되고 대학들도 인증을 얻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인증제는 TQM과 커뮤니티의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아, 언제 봄이 올 것인가. 그런 갈등 심리가 저의 시, ‘나의 봄’, ‘색상반전’, ‘신화’ 등에 부분적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시에 집중하면서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 자료를 프린트한 수 만 페이지와 전공서적 수백 권을 연구실에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대학원생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언젠가 또 필요할지 모른다는 마음에 자료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연구실을 비우면서 일부는 도서관과 단대 도서실에 기증했고, 나머지 절반은 집으로, 절반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기분이 한결 좋습니다. 물방울 품은 꽃잎처럼, 잠시만 내 곁에 머물러줘도 감사할 일입니다. 노트와 수만 장의 뭉치를 던져버리는 내가 마치 낙엽을 떨구는 가로수 같다 생각하고 휘파람 불면서 방 청소를 끝냈습니다.  


  시집을 계획한 것은 작년 봄부터입니다. 저는 HTML 태그를 배운 다음 자작시에 사진과 음악을 붙여서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중소기업대학원 35기 졸업생 오일균씨가 저의 게시물을 보고 도와주셔서 편집과 출판이 모두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오일균씨는 프로 사진작가입니다. 자기가 직접 촬영한 사진 수백장을 꺼내어 일일이 검토하고 주옥같은 70편을 무료로 기증해주셨습니다. 시의 내용과 사진작품이 잘 조화되도록 여러 차례 편집을 수정했고 또 출판비용까지 저렴하게 해주신 점, 너무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AMP 35기 여러분이 응원차 왕림하셨습니다. 임수경 35기 회장(미니골드 대표), 김선희 35기 총무, 김강삼 트레인즈 사장, 김기상 박물관 디자인 가나이넥스 대표, 이점옥 마이더스 대표, 여러분 감사합니다. 시집에 나오는 인물 모델은 대부분 AMP 35기 원우님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아무나 쓰느냐, 어떻게 검증을 받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하다가 영어영문학과 심방자 교수님께 애로사항을 호소했더니 김영호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누님 같으신 심교수님 조언은 정확했습니다. 김영호 교수님은 저의 습작수준의 시를 일일이 다 읽어주시고 준엄하게 그러나 자상하게 시정신과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시면서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멋쟁이 학자로서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시는 백규 조규익 선생님, 존경합니다. 문예창작학과 김인섭 교수님의 오늘 말씀은 인문대학 교수님들이 저에게 베푸신 마지막 코스 확실한 피니시블로의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습작생활을 해보라는 충고로 접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학문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무작정 달려드는 저의 무례를 참아주시고 오히려 감싸안아주신 인문대 교수님들의 협력과 인간미에 저는 홀딱 반했습니다. 이걸 모르고 그냥 목에 힘이나 주고 눈살 찌푸리며 캠퍼스를 떠나게 되지 않은 것은 망외의 행운입니다. 자기 전공만 최고인 줄로 알고 살았는데, 이번에, 학문영역 간 상호이해와 교류가 살아있는 전인교육의 숭실 캠퍼스를 흠씬 맛보고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이제 끝으로, 제 곁에서 묵묵히 그러나 걱정의 눈길로 긴 세월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내 조정자는 제가 육사 졸업반 때 전국대학생 학술토론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국농촌문제에 관한 발표를 아주 당당하게 했고 저는 그 때 사회를 맡았었습니다. 당시 대회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호 시인이 이번 저의 시집에 축시를 써주셨습니다. 보배 같은 친구의 시를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이 모든 감사의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숭실에 오게 된 것도, 여기서 근 30년이나 즐기며 마음껏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마지막 1년까지 참 사랑을 배우면서 떠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차고 넘치는 축복임을 느낍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저를 지켜 인도하신 주님께서 또한 좋은 것으로 이미 예비하신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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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4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언제부턴가 간현엘 가고 싶었다. 병풍 같은 돌벼랑으로 둘러싸인 계곡, 구석구석 간질이며 휘돌아 내빼는 섬강. 깔끔한 정밀(靜謐)을 시샘하며 가끔씩 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열차의 굉음이 장난스러운 곳. 고라니와 산토끼가 우두두 뛰쳐나올 듯, 잡목 숲이 음흉스레 펼쳐진 곳. 80여명의 젊음들과 함께 한 간현의 하룻밤이 드디어 잠자던 내 감성을 깨우고야 말았다.

모꼬지! 그래 비로소 우린 엠티(MT) 대신 모꼬지의 추억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끔한 제복과 구호가 각을 세우는 느낌. 그런 엠티보다야 자지러지는 꽹과리의 파열음 속에 막걸리 질펀히 흐르는 느낌의 모꼬지가 제격이지. 어차피 새내기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입사의례(入社儀禮)가 축제 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의 ‘하나 되는’ 잔치판은 모꼬지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랬는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의 열기에 익어가며 우리의 삶을 몸으로 느낀 그 놀이판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현의 젊음들



젊음이 싱그럽게 요동치는 모꼬지 판.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존재가 젊음이라고, 이 시대의 감성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일찌감치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무한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젊음들 속에 묻혀 날뛰던 ‘나’는 참으로 낯선 존재였다. 시인 이재관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MT(멤버십 트레이닝)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그랬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어정쩡한 중늙은이 하나가 젊음의 열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장면이 60년대 활동사진의 화면마냥 밤의 열기 속에 흔들렸다. 이제 갓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노랑노랑한 병아리들이라고. 폐계(廢鷄)가 다 된 중늙은이는 제법 노파심을 발휘하려 애써 보지만, 거친 부리를 갈아 아무리 세게 쪼아도 이미 폐계에게 세계는 닫힌 대상일 뿐. 그러니 종국엔 여린 부리의 그대들이 열어 갈 것이다, 새 세계를!

발랄과 자유분방이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간다는 진실을 오늘 드디어 깨닫곤 침묵하기로 한다. 마른 잎사귀를 밀어내고 연록의 새 이파리가 눈을 트는 이른 봄의 간현을 느끼며 헛된 말이 필요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똬리를 틀고 앉은 마른 등걸의 탐욕으로 태양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색의 생명을 규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라, 활활 펼쳐 보이는 그대들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별이 반짝이고 바람 싱그러운 간현의 밤이다. 이 틈에 나도 한 번 외쳐보자, ‘꾸라쥬’!!!
                                                                          (200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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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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