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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사계 제42호(2021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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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조규익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야기 속의 삶과 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땅. 우리 민족은 한시도 바다와 떨어져 살 수 없었다. 아무리 내륙으로 숨어도 바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특히 먼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세상을 벗어나 알 수 없는 이계異界로 나아감을 의미했다. 바다는 물고기와 해초, 소금을 구하는 현실의 공간이자 알 수 없는 환상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늘 바다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비좁은 땅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다 밖을 몽상하는 일이었다.

 

신라 진평왕 9년 7월 바다 밖으로 떠나간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은 그 시기에 이미 바다 밖의 세계를 꿈꾼 인물들이었다. 대세는 친구 구칠에게 “이 좁은 신라의 산골 속에 파묻혀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못물 속의 고기가 바다 큰 줄을 모르고 조롱 속의 새가 산림 넓은 줄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장차 떼를 타고 바다에 두둥실 떠 오나라·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아 따르려 하네. 명산에서 도를 구하여 만약 속태를 바꾸고 신선을 배운다면 바람도 잡아타고 훨훨 허공 위로 날 것이니 이야말로 천하에 신기한 놀음이요 장관 아니겠나?”[《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평왕조]라고 설득하여 둘은 드디어 바다로 떠났고, 결국 역사의 기록으로도 남게 되었다.

 

성격이 약간 다른 기록들 둘만 더 들어보자. 첫째는 강원도 고성 땅의 유동지가 동네 사람들과 동해로 미역 따러 나갔다가 풍랑에 떠밀려 고성으로부터 31만 리 밖 단구丹邱라는 절 도絶島에 표착한 사건이다. 그 섬에서 그들은 마찬가지로 고성 땅으로부터 표류해와 정착한 노인의 보호를 받고 50여일을 지냈다. 그 섬에서의 하루는 인간세계의 일 년에 해당하므로 표착 시점부터 50년이나 지났으니, 섬에서 그냥 머물러 지내는 게 좋을 거라고 노인은 말했다. 그 말을 거부하고 돌아와 보니 부모와 처자는 모두 죽고 손자마저 이미 늙어 있었다. 화식火食을 재개하면서 함께 돌아온 두 사람은 죽고 유랑은 단구에서 훔쳐 온 경액 덕분에 200살을 살았다는 것이다.[〈식단구유랑표해識丹邱劉郞漂海〉, 《청구야담》(권19), 학고방, 2017].

 

또 하나는 청주 상인이 제주도에서 만난, 다리 없는 노인으로부터 들은 경험담으로 젊은 날의 노인은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한 섬에 도착했다. 극심한 배고픔과 갈증에 한 집으로 들어갔다가 엄청난 체구에 검은 얼굴, 움푹 파인 둥그런 눈, 나귀 같은 음성의 식인거인食人巨人에게 일행 중 총각 한 명이 잡아먹힌 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고, 배가 파선되면서 혼자만 살아남았으나 몹쓸 고기에 두 다리를 잃었다는 이야기였다.[〈대인도상객도잔명大人島商客逃殘命〉, 임명덕 《한국한문소설전집》(권 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대세와 구칠의 이야기〉는 큰 꿈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바다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음을 암시했으니, 그 때의 바다는 도전을 통해 극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애물로서의 공간이었고, 〈식단구유랑표해〉의 바다는 선계를 설정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킨 환상적 공간이었으며, 〈대인도상객도잔명〉의 바다는 제주도 남쪽 먼 곳 어떤 섬에서 식인종을 만나 고난을 당한 이야기로서 험난한 고통의 현실적 공간일 수 있다.

 

이것들이 상당부분 흥미로운 허구를 뼈대로 삼아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삶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바다가 없었다면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인간 현실의 복잡한 삶을 표본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것이 서사문학인데, 바다 이야기들 대부분은 삶과 바다가 하나로 결합된 서사가 그 주축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우리 문학에 나타나는 바다는 경험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중적 의미의 공간이고, 바다의 이런 성격은 동시대나 후대 서사문학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어왔다.

 

 

노래문학 속의 삶과 바다

 

원래 말로 만들어져 존속되던 이야기나 노래들을 문서로 기록한 것들이 우리 고전문학이다. 이야기나 노래에 쓰인 말들 대부분 일상의 구어口語였으므로, 고전문학이 특정 지식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모든 계층이 이야기와 노래에 쓰인 개념어와 사물 지시어 등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래문학이나 이야기문학에 바다가 소재 혹은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들은 적지 않다. 향가·악장·가곡창사[시조]·가사 중 몇 작품들을 통해 바다의 의미를 찾기로 한다.

 

현실적 고통에 시달리던 중생들을 깨우치고 구세하려는 목적으로 지은 노래가 균여대사의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였다. 한시 아닌 일상의 구어로 부르고 향찰鄕札로 표기하여 중생들이 쉽게 부르며 얻은 깨달음을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 향가다. 이 노래의 몇 군데에 바다[海]가 등장하는데, 바다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기대지평이 명료하게 반영되어 있다. 〈보현시원가〉 중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의 ‘無盡辯才叱海(끝없는 말재주의 바다)’·‘際于萬隱德(갓 없는 덕의 바다)’,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의 ‘燈油隱大海逸留去耶(등유는 큰 바다 이루거라)’,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의 ‘佛體叱海(부처ㅅ바다)’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의 ‘際毛冬留願海(갓 모를 소원의 바다)’ 등에 나타나는 바다는 불교의 종지宗旨를 드러내기 위한 유의喩意이다. 관념적 용어이긴 하나 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경우 노래로 불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현시원가》의 바다는 관념과 경험 양자를 절충하여 당대의 보편적 인식을 드러낸 사례이다. 당대에도 실재의 바다는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의 세계였고, 외경스럽고 위력적인 대상이었으며, 깊고 충만하고 무한·광활하며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의 근원이자 실체였다. 이런 관념적 바다와 달리 경험적 공간인 바다가 미래의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속악가사俗樂歌詞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사례도 있다. 이 노래 제6연의 “살어리 살어리랏다/바ᄅᆞ래 살어리랏다/ᄂᆞᄆᆞ자기 구조개랑 먹고/바ᄅᆞ래 살어리랏다”에서 ‘나마자기와 구조개를 먹는’ 바다는 ‘머루랑 다래를 먹는’ 청산[제1연]과 함께 한계상황에 부닥친 화자가 돌아와 살고 싶은 두 갈래의 이상향 들이었다. 세속에서 버림받은 시적 자아에게 바다는 청산과 함께 허여許與된 유일한 대안이자 선택지였던 것이다.

 

조선조로 넘어오며 의미심장한 첫 바다는 《용비어천가》 제2장[“ᄉᆡ미기픈므른 ᄀᆞᄆᆞ래아니그츨ᄊᆡ내히이러ᄇᆞᄅᆞ래가ᄂᆞ니”]에 등장한다. 건국신화·영웅신화의 모티프를 뼈대로 이루어진 교술적 서사시 《용비어천가》는 궁중 의례문학儀禮文學으로서의 악장이면서 노래문학의 모범적 선례이기도 했다.

 

깊은 샘물은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고, 바다는 자손만대 왕조의 번영을 상징한다. 원래 샘과 바다는 물을 공유하는 공간들이며, 그것들 모두 생생력生生力의 근원적 실체들이다. 샘물처럼 유래가 오랜 조상으로부터 바다같이 무한한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한 것이 이 노래다. 《용비어천가》 제53장[사해四海ᄅᆞᆯ 평정平定ᄒᆞ샤 길우희 양식糧食니저니]을 포함,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사해四海ㅅ믈이여 오나ᄂᆞᆯ 마리예 븟ᄉᆞᆸ고 태자太子를 셰ᄉᆞᅀᆞᄫᆞ니]·〈감군은感君恩〉[오백년五百年이 도라 사해四海ㅅ므리 ᄆᆞᆯ가] 등의 악장들에 두루 사해四海가 등장한다. 이 경우 ‘바다’라는 유의喩意와 ‘온천하’라는 취의趣意들로 이루어진 ‘사해’는 불덕佛德 혹은 왕이나 왕조의 치공이 미치는 범위를 최대한 넓혀 표현하려는 욕망의 소산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 실제 바다가 지닌 무한無限[무변無邊]의 이미지로부터 나왔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관념의 바다와 현실이 결부되어 나타난 사례가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라고 할 수 있다. 〈춘사春詞 제1연〉[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ᄒᆡ비췬다/밤믈은 거의디고 낟믈이 미러온다/강촌江村 온갖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추사秋詞 제3연〉[수국水國의 ᄀᆞᄋᆞᆯ히 드니 고기마다 살져읻다/만경징파萬頃澄波의 슬ᄏᆞ지 용여容與ᄒᆞ쟈/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동사冬詞 제4연〉[간밤의 눈갠후後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압희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ᄂᆞᆫ 천첩옥산千疊玉山/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등에는 바다와 대비되는 현실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나타나 있다. 어로인漁撈人 아닌 작자가 어부漁父의 페르소나를 빌려 쓴 채 실제 바다에서 자신을 버린 세상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한 부분들 각각의 앞부분 두 구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다를 객관적으로 그려낸 내용인 반면, 마지막 구절들[강촌江村 온갖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 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은 인간세상과 대비되는 바다를 윤선도 자신의 감정에 적셔낸 것들이다. ‘먼 빛이 더옥 좋다’든가 ‘멀수록 더욱 좋다’는 것은 부정적인 세상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세상에 대한 윤선도의 혐오를 암시한다. 바다로 갈수록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니, 세상이 좋아 보이는 것은 현재 그가 세상으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며 바다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사夏詞 제2연〉[년닙희 밥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청약립靑篛笠은 써 잇노라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냐/무심無心ᄒᆞᆫ 백구白鷗ᄂᆞᆫ 내 좃ᄂᆞᆫ가 제 좃ᄂᆞᆫ가]를 보면 작자가 비록 가어부假漁父에 불과하다 해도 전형적인 어부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앞의 노래들처럼 부정적인 세상에 대한 이상공간으로서의 바다를 노래하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바다의 활력을 제유提喩하는 백구와 시인의 자아가 합일되는 경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분명 초창기에 비중이 높았던 관념의 바다로부터 현실적이며 미학적인 바다로 옮겨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사의 경우 다른 시가장르들과 달리 호흡이 길고 작품의 길이에 제한이 없었던 만큼 관념이나 압축보다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바다가 주류를 이룬다. 유배가사 중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니진항구梨津港口의 쥬즙舟楫을 뎡돈整頓ᄒᆞ야/동풍東風이 건듯 불며 쌍범雙帆을 놉히 다니/창파묘망滄波渺茫ᄒᆞ며 물밧근 하ᄂᆞᆯ일다/고도孤島ᄅᆞᆯ 지졈指點ᄒᆞ니 흑ᄌᆞ黑子만 계유하다/시야쟝반時夜將半ᄒᆞ매 광풍狂風이 졉텬接天ᄒᆞ니/듕뉴실타中流失柁ᄒᆞ야 호흡呼吸의 위ᄐᆡᄒᆞᆯᄉᆡ/장년長年 쇽슈束手ᄒᆞ고 쥬듕舟中이 실ᄉᆡᆨ失色ᄒᆞ니/묘연渺然ᄒᆞᆫ 이 내 몸이 ᄉᆞᄉᆡᆼ死生이야 관계關係ᄒᆞ랴], 박인로의 〈선상탄船上嘆〉[ᄇᆞ람조친 황운黃雲은 원근遠近에 사혀잇고/아득ᄒᆞᆫ 창파滄波ᄂᆞ 긴하ᄂᆞᆯ과 ᄒᆞᆫ빗칠쇠/(…)/대양大洋이 망망茫茫ᄒᆞ야 천지天地예 둘려시니 진실로 ᄇᆡ아니면 풍파만리風波萬里밧긔 어ᄂᆡ 사이四夷 엿볼넌고],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이윽고 ᄒᆡ돗거ᄂᆞᆯ 장관을 ᄒᆞ여보ᄉᆡ/ᄉᆞ면을 ᄇᆞ라보니 어와 장ᄒᆞᆯ시고/구만니 우듀속의/큰물결 분이로ᄉᆡ/동남을 도라보니 바다히 ᄀᆞ이업ᄂᆡ/슬프다 우리길이 어ᄃᆡ로 가ᄂᆞᆫ쟉고] 등은 가사에 묘사된 바다의 모범적 사례들이다.

 

광풍 속에 키를 잃은 뱃사공들이 어찌 할 바 모를 정도의 위급하고 고생스런 상황을 그려낸 것이 〈속사미인곡〉이다. 이 작품에서 바다로부터의 가혹한 시련을 묘사한 점은 표류설화나 표해록들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선상탄〉과 <일동장유가>에는 다른 모습의 바다가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좌절도사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참전한 박인로의 <선상탄>에는 천지를 둘러 나라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 같은 바다가 묘사되어 있다. 배만 없었다면 왜구들이 이 땅을 넘보지 못했을 거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약간은 소극적인 바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서정적 공간으로서의 바다가 <일동장유가>에는 등장한다. ‘어와 장ᄒᆞᆯ시고’, ‘슬프다’ 등 감탄구들이 정서의 핵심 포인트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바다의 서사적 흥분이나 긴장보다는 자아와 대상의 합일을 미학적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가며

 

예로부터 다양한 산문들과 운문들의 배경으로 사용하거나 개별 작품들의 주지主旨를 드러내기 위한 이미지로 바다를 끌어왔다. 대부분의 산문들에서 바다는 위기와 시련으로 점철된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현실적 공간으로, 운문들에서는 이미지를 통해 작자의 미적 인식과 작품의 미학을 완성시켜주는 서정적 공간으로 각각 사용되어 왔다. 관념과 현실, 서사와 서정의 병행이나 착종錯綜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온 공간이 바로 바다였다. 심해深海 탐사 기술이 발달한 현재도 바다의 깊은 속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겉만 알고 속을 모르면, 그걸 안다고 할 수 없는 법, 바다 속을 모르니,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공포와 경외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며 당하는 시련은 인간의 공포와 경외심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바다의 맥을 잡는다거나 의미를 구조화시키는 것이 그다지 수월한 일은 아니다. 고전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되던 각 시대의 미의식과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관념, 서사와 서정을 적절히 조합하여 바다를 아름답게 형상해낸 우리 고전문학은 매우 소중하다. 미친 듯 파도치는 대양을 일엽편주로 건넌다든가 사투 끝에 괴물 같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행위를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지의 승리’로 그려내는 현대 해양문학의 전통적 발판이 바로 고전문학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19. 21:09

 


행사가 열린 컨벤션 센터

 

 

 


컨벤션 센터 로비

 

세계 한글작가대회에 다녀와서

 

 

해외 한인문학에 대한 작은 발표를 해달라는 이명재 교수의 부탁을 받고, 첨엔 망설였다. 창작문인들의 모임에 애당초 별 흥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고도(古都)를 제대로 가꾸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경주라는 지역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회식과 환영만찬이 열린 경주화백컨벤션센터. 약간 늦게 도착한 개회식엔 사람들이 그득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둘러보니, 황우여 부총리나 김관용 지사 등 헤드테이블에 자리 한 몇몇 인사들을 빼곤 모두 문인들이어서 낯설었다. 한글 영상[위대한 한글, 위대한 한국문학]이 상영되었고, 쾌팀의 대북 공연 <직지심경의 노래>가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JL싱어즈의 한글날 노래 <내나라 내겨레, 석굴암>이 우렁차게 대회장을 울렸다. 국제 PEN 한국본부 이상문 이사장의 인사, 황우여 부총리김관용 경북 지사최양식 경주 시장의 축사, 김후란 대회 조직위원장의 환영사, 문정희정현종 시인의 시낭송, 한국문화재 공연 팀의 뮤지컬 <용비어천가 하늘이 열리다’>의 공연이 있었고, 환영만찬이 이어졌다.

 

다음 날인 16일부터 17일까지 숨 막히는 강연들과 주제발표들이 이어졌다. 각 발표의 주제와 발표자 및 토론자는 다음과 같다.

 

특별강연: 모국어와 문학, 한글과 문학

발표1: The Sound of Languages/르 클레지오(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2: 모국어와 문학, 한글과 문학/김주연(숙명여대 석좌교수)

발표3: 훈민정음=한글의 탄생과 발전을 언어의 원리론에서 보다/노마 히데키(메이지가쿠인

대학 객원교수)

 

주제발표1: 한글, 한국문학의 세계화

첫째 마당: 세계 속의 한글문단, 한국문학(해외 한글문단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한국문학

전공자와 현지 활동가들의 논의)

 

좌장: 최동호(고려대 명예교수)

발표1: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장사선(홍익대 명예교수) 발표, 최석 시인 토론

발표2: 이념과 탈이념, 식민과 탈식민의 단절 혹은 지속/조규익(숭실대 교수) 발표,

홍규 시인 토론

발표3: 재미동포문단의 형성과 특징/장영우(동국대 교수) 발표, 명계웅 문학평론가

허대통 시인 토론

발표4: 남미 한글문학의 현황과 전망-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양왕용(부산대

명예교수) 발표, 최태진 작가정재민(한국외대 교수) 토론

발표5: 호주 한인문학의 현황과 전망/윤정헌(경일대 교수) 발표, 이효정 작가 토론

발표6: 유럽지역의 한글문단/이명재(중앙대 명예교수) 발표, 쾨펠 연숙 시인 토론

발표7: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다!/예은목 시인 발표

둘째 마당: 세계화 시대의 글쓰기(이중언어, 소수언어)(소수 언어가 소멸되는 시대에 한글

처럼 비주류 언어의 문학적 쓰임에 대한 현재와 미래를 진단)

 

좌장: 박양근(부경대 교수)

발표1: 재미교포 문학에 나타난 한국문화와 한국어의 정체성/최정자 시인(미동부지역

위원회) 발표, 한글은 나의 버팀목/박은주 작가 발표, 벽을 허무는 0.7% 문학/

타냐고 시인 발표

발표2: 독일에 있어서의 한국문학/서정희 시인 발표

발표3: 러시아 문화권에서의 한국어 글쓰기의 현재와 미래/니나 끄레스뜨(Nina Krest)

시인시극배우피아니스트

발표4: 일본 내의 한글과 한글문학의 현실과 전망/왕수영 시인

발표5: 이민 1세대 동포작가와 2세들의 한국어에 대한 인식/이정순 시인(국제PEN한국

본부 캐나다지역위원회 회장)

 

셋째 마당: 국내외 한국어와 한글교육 현황(한국어 사용실태와 한글교육현황에 대한 국내

외 학자, 현지 전문가들의 논의)

 

좌장: 이영숙(한양대 교수)

발표1: 국외 한국어 사용실태와 한글교육 현황/강현화(연세대 교수)

발표2: 한국어와 한글 교육 현황-아시아와 남미지역을 중심으로/김선정(계명대 교수)

발표3: 유럽과 미국에서의 한국어 교육/김정숙(고려대 교수)

발표4: 재외 한글학교의 한국어와 한글교육/이미혜(이화여대 교수)

발표5: 세종학당재단 사업 소개/이교택(세종학당재단 사무총장)

발표6: 베트남에서의 한국어 교육현황/도프엉투이(하노이국립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한국

문화학과)

발표7: 중국에서의 한국어 교육현황/김성란(중국 중앙민족대학교 외국어대학 한국어학

과 교수)

발표8: Expectation and Challenge on Using Cia Cia Script Adapted From

Hanguel in Cia Cia Laporo Sorawolio Community Baubau City/아비딘(

우바우 지역 교사)

 

 

주제발표2:

1) 세계 속의 한글문단(재외동포 한글문단)

좌장: 박덕규(단국대 교수)

발표1: 해외 한글문단과 한글문학 세계화의 길/김종회(경희대 교수)

발표2: 해외 한글문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승하(중앙대 교수)

 

2) 재외동포 한글문단

 

발표1: 러시아의 지역 문단 활동 및 매체/니나 끄레스뜨

발표2: 중국 조선족 문학 현황/우광훈(중국 연변작가협회, 작가)

발표3: 미국 서부지역 동포들의 현지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김영중(국제PEN한국본부

서부지역위원회 회장)

발표4: 미국 동부지역 동포들의 현지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정재옥 작가

발표5: 브라질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브라질 한인 문학의 50년 모습/안경자 작가

 

3) 모국어 문학 활약상

 

좌장: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상무이사)

발표1: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과제/민용태(고려대 명예교수)

발표2: 영어권에서의 한글문학 번역 문제/정정호(중앙대 명예교수)

발표3: (미국서부)이민생활에서의 한글문학/이승희 시인

발표4: 캐나다의 한글문단/이정순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캐나다 지역위원회 회장)

 

 

문학강연

 

1. The Music of Words/르 클레지오

2. 한글의 모습과 한글소설/윤후명(국민대 문창과 겸임교수)

3. Angst, Weltschmerz & Gemütlichkeit: German Krimii. How a booming genre

mirrors German National Identity-or the Lack of it/레굴라 벤스케

4. My Story: The Story of an Egyptian Woman Write/에크발 바라카(국제PEN여성위

원회회장)

한글문학축제: 편지낭송 및 시낭송(김홍신, 김일연, 김종상, 도종환, 문태준, 유안진, 윤제

, 정호승, 최금녀, 최양식, 허영자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참으로 성대한 행사였다. ‘세계 한글작가 대회라는 인상적인 타이틀에 걸맞게 한글문학의 존재와 당위가 찬연하게 진면목을 드러낸 자리였다. 지금까지 해외 한인 1세대는 그럭저럭 한글문학을 영위해 올 수 있었으나, 2세부터는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문학창작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어(母語).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 듯 어머니의 입놀림을 보며 배우는 게 모어(mother tongue)라면, 해외 한인 2세 이후 세대에게 한글문학 창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 조선족을 제외하고 발표에 참여한 대부분의 해외 문인들은 1세들이고,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글문학을 창작하고 있었으나, 힘에 부친 모습이 역력했다. 따라서 이번 행사는 한글문학 창작에 대한 욕구와 현실이 극명하게 교차한 내적 갈등의 현장이기도 했다.

 

***

 

이번 행사의 초점은 몇 명의 외국인들이고, 그 가운데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와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 교수는 그 중심이었다. 이미 지난 세기 말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된 르 클레지오 선생의 감동적인 강연은 발표의 서막을 장식했다. 2008년도 노벨상 수상자인 그가 어떤 연유로 서구 지성들 가운데 드물게도 지한파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말과 글자, 문화에 대한 애정은 강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강연은 엄청난 재능과 체험으로 계발된 인간의 영혼을 시현하는 이벤트였다. 강연의 말미에 그는 작가들은 사회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등을 뛰어넘는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는 요지의 일갈을 던졌는데, 멕시코 고대사 분야의 박사로서 지적 탐구여행을 지속하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멘트이기도 했다. 값싼 감성에만 기대려는 일부 한국 작가들을 부끄럽게 만든, 선사(禪師)의 할()과 같은 것이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노마 히데키 교수 또한 우리에게 긴장과 부끄러움을 안겨 준 석학이었다. 일본 최고의 한글 전문가인 그는 시종 여유 있고 담담하게 언어 원리론의 입장에서 한글의 창제와 발전을 설명했다. 우리나라 언어학자나 한글학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껏 들어온 한글 관련 강의 중 으뜸이라는 것이 좌중의 평가였고,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학 이론의 탄탄한 바탕, 성실하고 근면한 학구,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말과 글자에 대한 흥미나 사랑이 밑바탕임을 그의 말에서 느껴 알 수 있었다. ‘한글이란 유라시아 동방의 극점에 나타난 에끄리뛰르의 기적이란 말을 일본인 학자로부터 듣는 기분이 묘했지만, 한편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학문적 논리에 근거를 둔 점에서 그 타당성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적 같은한글의 장점을 잘 모르고 살아온 그간의 내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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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야말로 앞으로도 쉽게 꾸릴 수 없는 문화적 성사(盛事)이리라. 엄청난 돈과 인력을 들여 외국의 한인들을 불러들이고, 국내의 유관인사들을 모으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까. 이런 행사의 결실을 광범하게 유포하고 알려야 한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을 우물 안 개구리신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막행사장

 

 

 


축사중인 황우여 부총리

 

 


개막 축하 공연 <용비어천가-하늘이 열리다>

 

 


개막 축하 공연 <용비어천가-하늘이 열리다>

 

 


강연하는 르 클레지오 선생

 

 


강연을 하는 노마 히데키 교수

 

 


주제발표회장에서

 

 

 


토론을 맡은 흑룡강성 TV 방송국 부국장 리홍규 시인

 

 

 


토론을 하는 알마티의 최석 시인

 

 


대회장 인근의 풍경

 

 

 


포근함을 안겨주는 경주의 대능원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5. 1. 7. 15:22

 

 

 

 

 

 

 

 

세종대왕이 만든 조선조 최고의 악무  봉래의를 복원ㆍ해석  

봉래의에 대한 음악ㆍ문학ㆍ무용의 융합 연구결과를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으로 출간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저는 을미년 벽두에 문숙희 박사(전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손선숙 박사(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봉래의(鳳來儀), 그 복원과 해석>>(민속원)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7’로 출간했습니다.

 

지난 3년간 3회에 걸쳐 봉래의 복원 공연을 국립국악원의 무대에 올렸고, 그 결과를 DVD로 담아 이 책에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문학 분야인 악장의 연구를 제가 맡았고, 음악을 문숙희 박사가, 무용을 손선숙 박사가 각각 맡았습니다. 제 분야인 악장이야 그다지 보실 만한 건 없으나 음악이나 무용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봉래의를 복원한 점은 무엇보다 내놓고 자랑할 만합니다. 이 책을 찬찬이 읽어 보시면 세종대왕이 그리던 새 왕조 조선의 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 연구 작업을 통해 왕조의 미래에 대한 꿈을 엄청난 규모의 예술로 승화시켜 놓은 세종대왕의 능력과 통찰에 새삼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을 추려 아래에 붙여 놓습니다.

 

***

 

‘2014년 한국연구재단 우수 연구 성과로 선정된 바 있는 이 책은 문학음악무용 분야를 전공한 세 저자들이 융합적 시각에서 세종대왕이 지은 조선조 최대 악무(樂舞) 봉래의를 복원하고 해석한 결과물이다. 1443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그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했으며, <용비어천가>를 노랫말로 올린 가악의 종합예술체인 봉래의를 몸소 만들었다. 1445(세종 27) 왕명으로 지어올린 <용비어천가>의 일부 가사를 악곡에 올리고 무악(舞樂)으로 구성하여 조선조 후기까지 연행(演行), 조선조 최대의 창작 악무가 바로 봉래의인 것이다.

 

봉래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으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악무다. <<서경>> <익직(益稷)>으로부터 나온 봉래의란 말은 잘 다스려진 상황을 비유한 표현인데,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봉황래의(鳳凰來儀)’라는 명칭을 붙인 후대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여민락(與民樂)’여민동락(與民同樂)’ 혹은 여민해락(與民偕樂)’과 같은 뜻으로 <<맹자>> <양혜왕 장구 하>에 등장하는 여민동락에서 나온 말이다. 임금이 덕을 지닌 경우 징발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임금을 위해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에서 임금이 즐기는 모습을 기뻐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여민동락의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봉래의 악무의 첫 정재를 여민락으로 잡은 세종의 뜻은 하늘의 뜻으로 세운 왕조에서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는 첫 조건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라는 점에 있다. <용비어천가>1~4장과 졸장 등 다섯 개의 장을 뽑아서 구성해 놓은 것이 바로 여민락이다.

 

치화평(致和平)’<<주역>> <하경> ‘택산함괘에 대한 정자(程子)의 설명에 등장하는 말로서 천지와 인심의 감통(感通)에 바탕을 둔 조화가 천하태평의 요체임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정자의 설명 가운데 핵심은 천지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하는 이치와 성인이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정을 가히 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그것이 바로 치화평이다. 치화평에서는 <용비어천가> 1~16장과 125장의 국한문 가사들을 악장으로 끌어다 사용했다.

 

취풍형은 <<시경>> <주송> ‘집경13구인 기취기포(旣醉旣飽)’<<주역>> <하경> ‘뇌화풍(雷火豐)’괘에서 따온 개념이다. 취풍형이란 말 속에는 군신이 배불리 취해도 예에 어그러짐이 없음/풍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함이란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다. 즉 군신이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즐기면서도 예에 어그러지지 않는 절도를 지켜야 하며,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절제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용비어천가> 1~9장 및 125장의 국한문 가사를 악장으로 끌어다 쓴 것이 취풍형의 악장이다.

 

이처럼 봉래의 악무에 들어 있는 세 정재[여민락, 취화평, 취풍형]들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용비어천가>의 주제로 제시된 경천근민[敬天勤民: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해야 함]’의 행동강령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백성들과 함께 하거나 신하들과 함께 하며, 백성신하와 함께 해도 공통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후왕들이 경천근민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처럼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을 종합한 봉래의 악무에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상대로 조선왕조 건국의 의의와 육조(六祖)의 시련을 깨우쳐 주고, 후왕들이 나라를 잘 보수(保守)함으로써 왕조가 영속될 수 있도록 하라는 세종의 뜻이 주제의식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봉래의 다섯 곡은 전인자 3소박 8박자여민락 2소박 8박자치화평 3소박 4박자취풍형 323 혼소박 6박자후인자 3소박 8박자의 리듬으로 진행된다. 음악의 템포는 노래와 무용 모두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악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궁중 정재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또 가사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템포가 타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래의를 구성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의 본체는 만()()()으로 구분되었고, 여민락과 치화평의 템포는 메트로놈 상으로 유사했고, 취풍형은 이 둘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나타났다. 여민락은 2소박이고 치화평은 3소박이기 때문에 여민락이 치화평보다 조금 더 느리다고 할 수 있다.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은 각각 길고 복잡한 장단으로 되어 있으나, 이번 복원 공연에서는 긴 장단 속에 세분되어 있는 리듬 단위로 장단을 짧게 단순화하여 연주했다. 그 결과 장고가 음악과 무용을 이끌기에 용이했고 또 액센트가 짧은 주기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에 생동감을 주었다.

 

무용의 경우 확실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난점이 있었다. 즉 문헌에는 무기(舞妓)들의 대형 형태, 이동과정, 춤사위 등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어느 시점에 어떤 발로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돌아 어느 위치로 이동해야 하는지 등 실연(實演)에 필요한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래의의 무용을 복원함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악학궤범>>에 수록된 여러 정재들과 정재의 무도(舞圖)들을 통합비교하여 음악과 노래, 무기들의 위치 및 이동 공간 등의 상호 관계를 통해 찾아냈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는 봉래의 춤 전체의 진행 구조를 통해 찾아냄으로써 봉래의 춤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음악이나 무용도 악장 내용의 전개와 함께 함을 확인했는데, 이렇게 가악으로 임금에게 교훈적인 말을 전달하고자 한 제작 의도는 가악의 융합정신이 봉래의라는 종합예술 속에서 충분히 구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상과 같이 세 연구자는 음악이 기보되어 있는 <<세종실록악보>>, 춤 순서 및 노래 가사가 기록되어 있는 <<악학궤범>>을 통해 봉래의를 융합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악에 관련된 여러 전제조건들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봉래의의 종합예술체적 성격을 완벽에 가깝도록 복원한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고, 그것은 세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공연 팸플릿

 

 


세종실록

 

 


세종대왕

 

 


공연에서 세종으로 분장한 배우 정훈씨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7. 31. 08:07

 


표지

 

 


내용

 

 


악장이 가창되던 무대예술로서의 정재들

 

 


우측이 첫 책(1990), 좌측이 두번째 책(2005)

 

 

새 책 <<조선조 악장 연구>>가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새 책 <<조선조 악장 연구>>(새문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고전문학으로 범위를 좁혔으며, 석사논문을 쓰면서 아예 고전시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20대 후반 경남대학교의 전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같은 방향의 연구를 지속했으나, 숭실대학교로 옮긴 뒤부터는 조금씩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관심을 가져 온 여러 대상들 가운데 악장은 초기부터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1990년에 이 분야의 첫 저서인 <<선초 악장문학 연구>>(숭실대학교 출판부), 2005년에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민속원)을 각각 펴냈고, 이제 <<조선조 악장 연구>>를 펴냄으로써 저 개인의 25년 악장 연구사를 일단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물론 악장에 더 이상 파낼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내심으로는 해답을 찾지 못한 이 분야의 화두(話頭)’가 한 둘 더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마음이 바뀌어 옛날의 우물터를 다시 찾을지 알 수는 없으나, 지금 갖고 있는 앞으로의 연구 스케줄로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중한 후배들이 그들 나름의 통찰력으로 새로운 차원의 연구를 지속해 가리라 믿기 때문에 지금 제 관심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는 것뿐입니다.

 

이 책의 몇 부분에서 강조했습니다만, 텍스트와 콘텍스트 및 상호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찰 없이는 고전시가론이나 고전시가사 혹은 국문학사는 완벽을 기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고려조선의 시가문학은 비생산적 동어반복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관찬문헌인 조선조의 악서들에 고려의 악장[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고려속요’]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텍스트의 측면, 조선과 고려의 궁중 무대예술이라는 콘텍스트 혹은 시대문화적 맥락의 측면, 당악을 비롯한 외래 음악이나 공연과의 연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텍스트적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비로소 그 본질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악장에 관한 책은 다시 내지 않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논문이나 발표문 등을 통해 이 문제만은 더 심도 있게 규명해볼 생각입니다.

 

악장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한 초기에 비해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만, 그래도 악장에 대한 폄하의 분위기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동동>이 조선조 <<악학궤범>> 아박정재의 창사[혹은 악장]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고려의 시대정치문화적 맥락으로만 재단하려는 관성이 바뀌지 않고 있는 점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고려사 악지>>를 비롯한 몇 기록들에 간단히 기록된 동동관련 언급이 학자들의 생각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점으로도 분명해지는 문제입니다. ‘동동이란 노래가 고려 궁중에 수용되어 속악정재라는 무대예술로 꾸며질 때 이미 존재하던 당악정재들의 양식이 그 표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動動之戱 多有頌禱之詞 盖效仙語而爲之 然詞俚不載라는 말에서 선어(仙語)’란 말을 엉뚱하게 해석해온 것을 그 분명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등 당시에 성행하던 당악정재들 속의 선모(仙母)를 비롯한 신선(神仙)들이 잔치 자리의 좌상객인 임금에게 바치던 송도(頌禱)의 말이 바로 선어’[신선의 말’]이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성되어 있던 상호 텍스트적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습니다. 원천적으로 고려노래의 정체는 대부분 궁중의 음악에 쓰이던 악장들이었다는 점과, 조선조 악장의 모범적 선례가 고려의 악장이었다는 점만 인지했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경우는 악장 연구로 얻을 수 있는 단편적 소득에 불과합니다만, 연구하기에 따라서는 앞으로 이것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밝혀지리라 봅니다.

참고로 이번에 출간된 책의 목차를 이곳에 들어놓겠습니다.

 

1부 총서: 지속과 변이의 원리, 그 구현체로서의 조선조 악장을 바라보며

. 계승과 극복 대상으로서의 고려악장

. 조선조 악장에 나타나는 지속과 변이의 양상

. 전환의 양상: 포괄화추상화에서 구체화로

. 앞 시대 유산의 포용과 새로운 정체성의 추구

 

2부 아악악장: 텍스트 및 주제의식의 중세적 관습성

왕조와 통치이념의 정당성, 제례악장의 모범적 선례: <문선왕 악장>

. 석전과 <문선왕 악장>

. <문선왕 악장>의 원형과 수용과정

. <문선왕 악장>과 조선조 아악악장의 형성

. <문선왕 악장>의 악장사적 위상

. <문선왕 악장>과 제례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왕조 존립과 영속의 당위성 및 자신감: <사직악장>

. 사직제의 위치

. <사직악장>의 텍스트 양상과 내용

. 악장제작의 관습과 <사직악장>의 위상

. <사직악장>의 중세적 보편성과 특수성

 

먹거리의 풍요에 대한 기원과 애민의식: <선농악장>

. 선농과 선농제

. <선농악장>의 텍스트와 주제의식

. <친경악장>의 텍스트와 주제의식

. 악장사적 위상

. <선농악장><친경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입을 것의 풍요에 대한 기원과 애민의식: <선잠악장>

. 선잠제와 <선잠악장>

. 선잠제 전통의 정착과 의미

. <선잠악장>의 텍스트 양상과 주제의식

. 악장사적 위상

. <선잠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우순풍조를 통한 백성들의 안녕과 풍요 기원: <풍운뇌우 악장>

. 풍운뇌우 제의와 <풍운뇌우 악장>

. 풍운뇌우 제의의 전통과 정착과정

. 풍운뇌우 악장의 텍스트 양상 및 내용

. 변계량 악장의 變改 문제

. <풍운뇌우 악장>과 중앙집권적 통치철학

 

3부 향당악악장: 텍스트 및 주제의식의 실험성과 조선조 악장의 독자성

 

천명에 의한 개국의 업적 찬양, 왕조의 무궁함 기원: <문소전 악장>

. 문소전 제례와 <문소전 악장>

. <문소전 악장>의 문헌적 양상 및 내용의 짜임

. 악장사적 위상

. <문소전 악장>과 정격 악장의 맥

 

왕조의 문화적 자부심과 독자적 미학의 발현: <석전음복연악장>

. 석전제와 음복연

. ‘신찬 등가악장의 내용적 짜임과 주제의식

. 악장 제작의 방법 및 시가문학사적 의의

. <석전음복연악장>의 독자성과 문화적 자부심

 

창업과 수성, 경천근민의 이상적 치도: <창수지곡><경근지곡>

. 제례 속의 음복연 절차와 두 노래

. 두 작품의 내용 및 악장사적 위상

. 제작상황

. <용비어천가>의 제작원리와 <창수지곡><경근지곡>

 

새 장르의 노래를 통한 합리적 생활윤리의 제시: <오륜가>

. 궁중악장 <오륜가>

. <오륜가>의 존재양상 및 의미

. <오륜가> 작자 및 창작 토양으로서의 시대 상황

. <오륜가),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기체가 식 표출

 

여민동락감응형통취포절제경천근민의 가르침: 봉래의 악장

. 조선조 최대의 창작악무 봉래의, 그리고 <용비어천가>

. 악무 명칭의 문헌적 근거와 악장 내용의 상관성

. 봉래의 악장에 아로새긴 세종의 철학, 왕조의 이상

 

제왕의 통치이념을 선양한 언어구조물: 봉래의 진퇴구호

. 퇴구호와 악장

. 봉래의 진퇴구호와 악장의 의미적 상동성

. 봉래의 진퇴구호의 텍스트 양상과 주제의식

. 봉래의 악장의 주제의식과 진퇴구호

 

4부 다른 각도에서 본 조선조 악장의 본질적 속성

 

정재 악장에서 확인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 및 지속양상

. 궁중악장과 콘텍스트로서의 송도 문화 및 선계 이미지

. 송도 모티프의 초기 양상

. 송도 모티프의 지속 및 확산과 문화적 의미

. 조선조 후기 창작 정재들과 선계 이미지의 변주

. 정재 및 정재 악장의 선계 이미지, 그 지속과 변이의 문화적 의미

 

시조와 궁중악장의 관계

. 악장과 시조가 공존하던 시공, 조선조

. 악장과 시조의 연계, 그 외연과 내포

. 악장과 시조,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

 

북한문학사와 악장

. 악장에 대한 일반적 관점과 북한문학사

. 북한문학사의 악장관

. 악장을 왜곡시킨 북한문학사의 이념적 경직성

 

고전시가교육과 조선조 고려속가 악장의 텍스트 및 콘텍스트: <동동> 지도론

. 고전시가와 고전교육, 그리고 악장

. 교육과정과 고전시가교육의 현실

. ‘동동의 속성 및 환경

. 고전시가 교육과 복합 텍스트로서의 궁중악장

 

5부 총결: 악장에 그려진 왕조의 이상과 현실, 그 거리를 음미하며

 

 

강호 고사(高士)들의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2014. 7. 31.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16. 08:00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이곳에 도착하면서 아시아사를 가르치는 Du 교수가 한국사에 관한 내용들을 수시로 물어왔다. 이것저것 설명해주면서 한국사 부분은 내가 가르칠까?’라고 농을 건넸더니, 그 말을 진짜로 알아듣고 이곳 생활이 겨우 안정되어갈 즈음 신라사 부분을 강의해줄 수 있느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신라를 비롯한 고대사 부분에 대한 지식이 지극히 엷은 탓에 강의안을 마련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야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 있다고 생각해온 여말선초, 특히 신흥사대부의 출현이나 국초의 분위기와 결부시켜 건국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강의하겠노라 역으로 제의하였다.

 

 ***

 

강의실에 들어가니, 한국 유학생 1명과 중국 유학생 2~3명을 제외하면 약간이라도 한국을 아는 학생들은 거의 없는 듯 했다. 사실 이 점은 이곳의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한국전에 참가했거나 참전한 부친으로부터 얻어들은 정보가 전부인 퇴역군인들을 이곳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한국 이미지 역시 ‘625 당시의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625 때 코 찔찔 흘리면서 쫓아다니며 껌을 구걸하던그 상태로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만 좁은 한국 안에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준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록 한국이 면적으로는 오클라호마 주의 반밖에 안 되지만, GDP로 따져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고 수출액으로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며, 5천년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지닌 단일민족임을 힘 주어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수긍하건 말건 이 사실만은 분명히 주지시킨 다음 특강을 진행해야 내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

 


강의 중


강의 중


질의응답이 끝나고 남아 있는 학생들과

 

***

 

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하라고 하자 너도나도 손을 들고 한국사의 궁금한 점을 물어왔다. 그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내용은 왕명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점, 한글의 존재와 쓰임새, 당시의 사회구조, 왕조의 지배체계, <용비어천가>를 올려 부른 궁중예술(court performing art) 등 다양했다.

 

그들과 질의응답을 하며, 다른 나라 특히 미국 같은 영향력 있는 나라에서 우리의 역사를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동차 한 대, 스마트 폰 한 대 더 파는 것보다 대학들에 한국학을 개설하고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사의 작은 부분을 문학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데 그치긴 했으나, 앞으로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뚜렷한 해답을 얻은 셈이었다.

 

강의가 끝나자 청강하러 왔던 박사과정 학생 둘이 다가와 자신들이 만든 외교사 토론클럽이 있는데, 나와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지도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 요청을 받고, 한국사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스스로 하면서 그들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연구 활동 과정에서 얻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시아사, 특히 한국사가 미국학생들이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분야임을 알게 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의 국민들이 우리를 잘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얼마간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속된 표현으로 그저 '코딱지만한' 나라가 하나 있어, 동족끼리 맞붙어 크게 싸웠으며, 지금도 으르렁거린다는 점 외에 크게 아는 내용도 알고 싶어하는 내용도 없는 대상이 우리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길게 보아 우리자신에게 좋은 약이 되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분명 씁쓸한 일이었다. 

 

사실 중국 혹은 중국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느끼는 서양인들의 두려움이나 존경심, 일본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갖고 있는 서양인들의 호감을 6개월에 걸친 유럽여행에서 확인했고, 지금 미국에 와서 재확인하는 중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초조함에 우리의 조급함이 가세하게 되니,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은 나날이다. 그러나, 어쩌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요, 옹달샘이 있어야 강도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황소처럼 그냥 앞만 보고 나아갈 일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이 갖고 있는 '1950년대의 이미지'가 '펄펄 나는 21세기의 이미지'로 바뀌는 날도 있을 것 아닌가?     

참고로 강의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summary/special lecture for students of History Department

 

 

History as Literature, Literature as History

--Understanding Yongbi’eocheon-ga[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the epic poem praising the foundation of Joseon Dynasty--

 

 

                         Dr. Cho, Kyu-Ick

(Professor of Soongsil University, Seoul, Korea/Visiting Fulbright Scholar, History Department of Oklahoma State University)

 

                       

 

Foundation of Joseon Dynasty and Necessity of Creating

Yongbi’eocheon-ga[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Is there a point of contact between history and literature? If there is, what is it? And where is it? The key purpose of my speech is to disclose this point through Yongbi’eocheon-ga* [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as an epic that sang the history of the early period of founding Joseon Dynasty. The point of contact is just using imagination whenever we interpret literary materials and historical facts. I’d like to explain this issue through the heroic achievements in Yongbi’eocheon-ga as historical facts or literary materials.

 

Joseon was the dynasty occupied in the last part of Korean history before the modern age. The first King, Taejo Lee, Seong-Gye founded the dynasty after destroying the Koryeo Dynasty in 1392 A.D. Joseon is the dynasty that 27 Kings had ruled for 518 years until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4th King, Sejong the Great, created Han’geul, the independent letters to spell the Korean language. To test the usability of Han’geul, King Sejong the Great ordered his intellectual subjects to make Yongbi’eocheon-ga, which praised the achievements of the foundation of Joseon Dynasty by 6 ancestors from the 5th grandfather, Mokjo to his father King Taejong.

 

Lee, Seong-Gye, Taejo was a general of the late Koryeo Dynasty period. However, the late Koryeo Dynasty was facing a crisis of collapse because of the tyranny of a  small number of the aristocracy. Lee, Seong-Gye was a general with a strong military force, and the group in power that used his military force was the newly arisen aristocracy armed with Neo-Confucianism, also known as the Zhu Xi[Chu Hsi] school.

 

Eventually, Lee, Seong-Gye destroyed the Koryeo Dynasty and founded the Joseon Dynasty, using his own military force and the newly arisen aristocracy’s support. The Joseon Dynasty introduced Confucianism as its state religion, contrary to the Koryeo Dynasty that adored Buddhism, and enforced the bureaucracy led by the retainers group as a main axis at that time.

 

However, even if Lee, Seong-Gye grasped the Koryeo Dynasty’s military power, he was only a subject of his King. No matter how cruel the King was, the notion that a subject cannot get rid of his king was one of the kernels of Confucian ideology. In other words, the people at that time generally had a firm faith that all offspring had to practice filial piety toward their parents, wives had to respect their husbands, and subjects had to be loyal to their king.

 

In this respect, Lee, Seong-Gye’s taking the throne was a clear treason. Especially in respect to Confucianism, overthrowing their king was an indefensible treason. If the people think of their King as a leader of treason, who renders devoted service to him? How can a dynasty without people’s loyalty to their king be continued for a long time?

 

So, there were many resistance groups in the early stage of the dynasty, and the ruling foundation was not strong and steady. King Sejong the Great knew the problems well. He had pity on the people without their own letters, which are a means of expression about their thoughts and feelings. So, he made Hunmin Jeong’eum(it means ‘correct letters to instruct people’), developed the various science and technology, and strengthened the national defense.

 

King Sejong the Great thought his grandfather, King Taejo’s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after destroying the Koryeo Dynasty as a historical and political matter with quite a weak justification. He believed that he had to set a reasonable ground and logical basis for the historical facts surrounding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o do so, he needed to cite his 6 ancestors’ achievements and make a long epic poem like Yongbi’eocheon-ga. Through Yongbi’eocheon-ga, with showing that their outstanding achievements were results not from their own personal capacity but from Heaven’s Command, the authors succeeded to present the ground beyond ethics or morals. That is to say, the historical fact that Lee, Seong-Gye as a subject drove out his King and became King himself was a result not by human desire or ability but by Heaven’s order.

 

This is just an imitation of the “thought of Heaven’s Will” from King Wu of the Zhou Dynasty. The authors wanted to remind people to be nothing but loyal to the dynasty, because of its foundation from Heaven’s order. King Sejong the Great intended to stabilize his dynasty by elevating Yongbi’eocheon-ga to the level of history by brainwashing and teaching people.


 

 

Yongbi’eocheon-ga as the last defense logic of the existing interested group 

 

Yongbi’eocheon-ga was a product of this intention. So, it can be a historical writing as well as a literary work.  The newly arisen aristocracy that participated in Lee, Seong-Gye’s revolution held important posts as the meritorious retainers, and the power could be inherited to their offspring unless they had special problems.

 

In the era of King Sejong the Great, they had already become an existing interest group. Yongbi’eocheon-ga was the real example of an attempt of the intellectuals in charge of ideolog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o dilute the perceived weakness of justice and the frailty of morality in King Taejo’s revolution.

 

Arguing the same points that Joseon is the dynasty founded with Heaven’s order, the heartwarming hospitality for the meritorious retainers has to be sustained, and the integrity of the dynasty has to be eternal are the core contents of Yongbi’eocheon-ga. In the point that the intellectuals at that time paraphrased their own wish variously, also Yongbi’eocheon-ga was no exception.

 

Rather it can be said to put content inclination or thematic consciousness of the existing Akjang** together fully. Heaven’s Command is a condition to prove a dynasty’s legitimacy, and the political power’s legitimacy is one of the matters cared about by the ruling group. The matter of ideology also has a functional relationship with whether a group in power has legitimacy or not. When ideology falls into disorder, categorical propositions like as dynasty’s perpetuity cannot help but be threatened.

 

In Yongbi’eocheon-ga the regime change from the Koryeo Dynasty to the Joseon dynasty but we can imagine that Lee, Seong-Gye used his military force to be persuasive. In addition, King Taejong[father of King Sejong the Great] was not the eldest son, King Sejong the Great also was not the eldest son who could not claim legitimacy. The illegitimacy of kingship which had repeated from King Taejo to King Sejong the Great was a critical matter possibly arousing the crisis consciousness of the ruling class.

 

If there were contradictions or irrationality like that, dynasty was difficult to continue. Dynasty’s perpetuity and prosperity are matters closely related to maintaining the vested rights of the ruling class. Akjang makers wanted to clarify that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the result of what they should do morally. The Koryeo Dynasty was a symbol of immorality, while the Joseon Dynasty was a subject of what should be morally. In light of justice, to destroy the Koryeo Dynasty was a matter which made people realize principles and rules of rewarding the good and punishing the wicked, and it was a basis for realizing the ideal order of Confucianistic ideology.

 

However, for them, to monopolize the power was most important as the ruling class of the new dynasty. In this situation, the ideal king on top of the power structure governs well with a right attitude of mind was only a way to perpetuate the power they fought for from age to age. In all times and places, the power group with vested rights stood on the central status of conservatives. The newly arisen aristocracy that led to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had been reforming power group in the first stage, however they eventually walked on the one way of conservatization after becoming the power group with vested rights as time went on.

 

They were able to emphasize justification of reformation when they were the subject of reformation. Their anxiety and consciousness of the reality was expressed in the works of Akjang including Yongbi’eocheon-ga as the end of the series of Akjang in Joseon Dynasty can be interpreted meaningfully, even in the history of politics and culture. If we attach the pre-existing conditions like features of the power structure and the authors in the political circles at that time, Yongbi’eocheon-ga is only a verbal representation of the Joseon Dynasty, wrapped up the leading group’s wishful thinking.


 

 

History and Literature as the interpreted facts or truth

 

 

Yongbi’eocheon-ga is a literary work as well as a historic writing as a narration about basic facts. The narrative represented symbolically in myth or tales is a genre of history in the classical era. Recently in Korea, some historical dramas  have become popular on TV. Accordingly, sometimes many people misunderstand it as a historical fact or confuse it with history. Dramatists use literary imagination, and historians use historical imagination.

 

People say that the literary imagination making fiction is different from the historical imagination dealing only with facts. However, is it really like that? In What is History, the author E.H.Carr explained two ways to write history, as objective and subjective. Literally, objective writing is the way only to list the facts as historical materials, subjective writing is the way to add an interpretation by a historian’s opinion on the subject.

 

Strictly speaking, there is no condition to guarantee the objectivity of supposedly objective writings. Although most historians are confident of their historical writing’s objectivity as something anyone can accept, usually it can’t be admitted, and we can’t say that the history written like that is a good one. Because it is an essential ability of the historian to select and interpret some historical facts. Here, the contact point between literary imagination and the historic one, that is to say, between history and drama, comes into being.

 

As a matter of fact, the intellectuals that created Yongbi’eocheon-ga utilized historical imagination and a literary one at the same time. They were prominent people, a combination of scholars of literature and historians. Undoubtedly, they did not work just to write a simple history book. They selected and interpreted historical facts, and mixed them in the bowl as literature.

 

Accordingly, Yongbi’eocheon-ga is in the form of an epic made with the happy combination of historical and literary imagination. Any reader with normal knowledge or insight can feel the authors’ literary sensitivity and historical strictness at the same time, I suppose. Because it shows the emotional horizon of the knowledge-based society at that time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about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If so, how is the composition? Let’s see the first 3 cantos and final canto***.  

(The original text is omitted.)

 

 

Foot Notes

 

 

*It was created in 1445[the 27th year on the throne of King Sejong the Great], and published in 1447[the 29th year on the throne of King Sejong the Great]. The first edition might be movable metal print book, however, all of the existing books are xylographic texts. Because it was created before promulgating Hunmin jeong’eum[it means ‘correct letters to instruct people’/Independent writing system for the Korean spoken language] by King Sejong the Great, it was the first document written in Hunmin jeong’eum. Jeong In-ji, Ahn Ji, Gwon Je created it, Seong Sam-moon, Park Paeng-nyeon, Lee Gae annotated it, Jeong In-ji wrote the foreword, and Choi Hang wrote the post script. The common structure of individual canto of Yongbi’eocheon-ga is composed of original text, translation in Chinese old letters, and the related historical facts.[About the meaning of ‘canto’, refer to the footnote 3) in pp.6-7.] 

 

**Akjang, one of the literary generic names, is used only in the learned world of Korea. It was used for the lyrics in the Joseon Dynasty’s court performing arts, namely, a composite art, a combination of playing music, singing, and dancing. Cf. Cho, Kyu-Ick, Literary Aesthetics of Joseon Dynasty’s Akjang, Seoul: Minsokwon, 2005.

 

***The canto is a principal form of division in a long poem, especially the epic. It is similar to ‘stanza’ in form, function, or meaning. The word comes from Italian, meaning ‘song’ or ‘singing’. Yongbieocheon-ga is composed of 125 cantos.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9. 4. 19. 00:35
연합뉴스 원문보기

숭실대 조규익 교수 '캠퍼스 단상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노무현 참여정부에 호의적인 논조를 보이는 말이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노비어천가'라 폄훼했다. 정권이 바뀐 지금,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러 그 반대편에서는 '명비어천가'를 부른다고 공격하곤 한다.

용비어천가가 일방적인 놀림 대상으로 전락한 셈이다.

하지만 용비어천가를 그 연구 대상 중 하나로 삼는 국문학도에게 이는 이만저만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 국문학도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토록 '철없는' 고관들의 언행을 툭하면 '용비어천가'로 몰아붙인다는 점이 국문학 전공자인 나를 분노케 한다"고 분개한다.

그렇다면 용비어천가는 왜 우리에게 '아부성 발언'과 동의어로 통용될까?

그 원인을 이 국문학도는 "용비어천가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용비어천가가 "지금의 대통령도 머리맡에 두고 밥 먹듯이 읽어야 할 정치의 이상적 아젠다요 텍스트"라고 단언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태민안(國泰民安). 민심은 곧 천심(天心)이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경천근민(敬天勤民)이야말로 용비어천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라는 것이 이 국문학도의 평가다.

그래서 이 국문학도는 "용비어천가를 모독하지 마라"고 강조한다.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조규익(曺圭益.52) 교수가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인터북스 펴냄)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부제 '캠퍼스 단상집'이 말해주듯 대체로 그 자신이 몸담은 대학과 교수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글들이 많다. 용비어천가에 대한 열렬한 옹호론도 그 중 하나다.

논문대필과 표절 문제, '가짜 박사' 범람, '교수와 조교', '국민수탈의 교육산업'처럼 고발성 짙은 글이 많다.

373쪽. 1만5천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