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4. 16. 12:04

                                                                                                                                   

 

                                                                                                                                                                                                                                     조규익

 

난세에 정당을 이끌만한 아무런 식견도, 정치력도, 순발력도, 카리스마도 갖추지 못한 황교안!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언제 당을 만들어 세속의 권력을 탐하셨더냐? 군중들을 광장에 모아 불의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지를 보여주었으면, 그 다음 일들은 정치인들에게 맡겨야지. 어찌 세속의 권력을 탐하여 정당까지 만들고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자초한 감옥살이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전광훈!

 

탄핵당한 박근혜의 이름으로 완력을 자행하려 파당을 만든 조원진, 홍문종, 김문수 등 두서너 명의 냄새나는 정치인들! 지금도 그대들의 행위가 정녕 박근혜를 위한 일,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강변하는가? 박근혜를 팔아 그대들의 입신양명을 도모하려 함이 아니던가?

 

그동안 잘 닦아온 지역구에서 의원들을 빼내다가 엉뚱하게 다른 곳에 꽂아 넣거나 제법 잘 해온 의원들을 낙천시키고 휘하의 함량미달인사들을 공천한 것을 참신함으로 위장한 정치적 낭만주의자김형오! 지금이 그런 '멋 아닌 멋'을 부릴 태평성대인가?  ‘다리를 건널 땐 말을 바꿔타지 않는다는 평범한 금언을 잊었는가?

 

전략적으로 만든 비례전문 정당을 잠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게 웬 떡이냐?’ 쾌재를 부르며 꿀꺽 삼키려다 배탈이 난 멍청이 한선교와 공천위원장 공병호!

 

반문의 기치를 내세우고 지역구 의원들을 각개약진 식으로 통합당에 보내놓고 정작 자기는 오불관언(吾不關焉)’ 거리를 유지하면서 잊을만하면 정치적 선문답이나 날린 철부지 안철수! 지금도 그 방법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가?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함으로써 보수진영을 '확인사살한' 몇몇 저질 정치인들!

 

***

 

무능하고 부도덕한 좌파 권력이 던져 주는 몇 푼의 돈에 판단력을 매수된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전략과 전술에 길들여져 남미의 민중으로 전락헸고, 정치인 아닌 정치꾼들은 온갖 사술(邪術)로 국민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으며, 이들을 대신할 보수야권의 인재들마저 보이지 않는 이 현실!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영원히 저들을 이길 수 없다.

바야흐로 무법천지의 난세가 펼쳐지고 있다. 어찌 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13. 12:11

 

가짜 영웅 전성시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있다.

()에 포위된 조()나라 왕이 합종을 위해 초()나라 왕에게 평원군을 파견했을 때였다.

평원군은 모사와 책사들로 20명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마지막 한 명이 모자랐다. 그 때 식객 중 모수란 자가 스스로 나섰고, 결국 그가 일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다. 처음 모수의 정체와 능력을 의심한 평원군과 모수 사이에 오간 대화가 바로 낭중지추(囊中之錐)’. 대저 어진 사람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는 법인데, 식객으로 있던 3년 간 모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평원군의 물음이었고, 그동안은 주머니 밖에 있었으니 이제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응수한 것이 모수의 답변이었다. 그래서 결국 모수는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어려울 때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한다는좋은 뜻으로 쓰여온 것이 '모수자천'이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스스로 나서려 한다는 부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

 

너도 나도 민의를 받들어 나라를 경영해보겠노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모수자천식으로 등장한 인물들의 병아리 셈법이 참말 가관이다. 땅 덩어리 크기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텍사스 주의 7분의 1, 캘리포니아 주의 4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 서너 명의 고만고만한 인물들(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새삼 나까지 손목 아프게 이들의 실명을 이곳에 기록할 필요는 없으리라)이 등장하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날마다 보고 있노라면, 기가 찰뿐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건 원대한 포부나 숭고한 뜻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당장 국민의 눈을 호려보자는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전부인 듯하다. 누구의 말대로 현대판 천명(天命)’이라 할 수 있는 민의(民意)를 왜곡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참칭(僭稱)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시대를 읽는 눈이나 천하 질서의 재편을 노리는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하다못해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의 아픔을 읽는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들의 아첨과 계략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골목대장에 지나지 못하는 존재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

 

제갈량(諸葛亮)은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자신의 주군인 유비로 하여금 그 한 나라를 차지하게 했다. 이른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그것이다.[각주:1] 그도 궁극적으로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노렸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 천시(天時)를 타고 난 조조,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과 달리 유비는 인화(人和)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 제갈량의 생각이었다. 영웅이 되려면 천하를 호령할만한 권능을 지녀야 하고, 책사가 되려면 모름지기 주군의 장점을 꿰뚫어 보는 제갈량의 안목과 배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착안과 전략은 대국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실천은 작은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은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세계는 국익에 따라 혼란스럽게 요동치는데, 눈앞의 식어가는 잿밥에만 눈이 먼 술사(術士)들이 자신들의 암매한 주군을 모시고 조막만한 권력을 차지하겠노라 동분서주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이번에야말로 천명이 자신들의 주군에 내려졌다고 믿는 것일까. 세속적 욕심 그득한 평원의 필부들을 영웅으로 둔갑시켜 내세운 채 만인의 눈을 속이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영웅이란 말인가. 바야흐로 가짜 영웅들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이 소극(笑劇)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제갈량

 

 

 


유비

 

  1. 혹자는 필자가 이곳에 언급한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안철수의 신당 창당과 결부시키려 할지도 모르나,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새 글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0. 1. 16:21

안철수가 걸린 또 하나의 덫

                                                                                                        백규

나는 평소 안철수 선생에 대하여 호감을 가져 왔고, 그 마음을 작은 글로 이곳에 올린 적도 있다.[백규서옥 블로그 http://kicho.tistory.com 참조] 따라서 이 글 역시 그런 호감과 걱정의 연장선에서 쓰게 되었을 뿐, 특정 진영이나 인물에 대한 '호(好)/불호(不好)'의 차원에서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

최근 대통령 예비후보 안철수 선생에게 닥친 악재(惡材)는 서너 가지다. 그 가운데 부동산 ‘다운 계약서’는 목하 거론 중이고, 연구업적 문제는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나머지 문제들도 곧 입줄에 오르내릴 전망이다.

오늘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한겨레신문[http://hani.co.kr]의 1면 톱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연구업적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세대학 강모 교수의 뛰어난 작문실력에 놀랐고, 아무리 뛰어난 작문실력으로도 그의 치부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장문의 글을 소상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다고 표절이라니…어이쿠!”라는 매우 선정적인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제목은 강 교수의 의도가 너무 빤하게 읽혀져서 오히려 애처로웠다.

지금 안철수의 연구업적에 대하여 벌이는 논란의 핵심은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한 것이 표절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지금 세상에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거나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표절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강 교수는 흡사 세상 사람들이 ‘안철수가 자신의 석사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표절했다고 비난한다’라는 엉뚱한 논지의 제목을 붙이고 말았다. 따라서 ‘표절’이란 잣대를 끌어대어 ‘안철수 논문 논란’이 어불성설임을 강변함으로써 그에 대한 도덕성을 따지려는 세상의 비난을 잠재우거나 물타기하려는 강 교수의 논의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논란의 골자는 이렇다. ‘세 사람이 공저로 되어 있는 영문 논문 한 편이 서울대학 발간의 모 학술지에 실렸는데, 안철수도 저자의 한 사람[제2저자]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원래 제1저자의 석사학위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한 논문이라는 것. 그런데 안철수가  그 논문에 대하여 기여한 내용이 모호하다는 것[그 논문을 지도했거나, 그 논문의 어느 부분을 작성했거나, 실험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이름을 붙일만한) 기여를 했다면, 그의 이름이 저자의 한 사람으로 끼어 들어간 것이 이공계의 관행으로  미루어 얼마간 양해가 될 수는 있을 텐데, 그것을 도통 알 수 없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더욱 해괴한 것은 그 논문에 대한 기여도를 안철수 스스로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 알려진 바로는 지금까지 그의 연구업적은 석⋅박사논문 두 편과 세 편의 학술지 논문을 합쳐 총 다섯 편이란다. 그 세 편 가운데 바로 이 논문이 핵심연구업적으로 서울대학 당국에 제시된 모양이다. 자신의 핵심 연구업적으로 제출된 논문이 어떤 경로로 타인의 석사논문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자신이 그에 대하여 무슨 기여를 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누가 그 연구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겠는가. 만에 하나 그 논문의 발행일자가 그야말로 수십 년 전이라면 혹시 기억을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들은 대개 5년 이내의 업적물 만을 임용심사 자료로 요구하고, 그 가운데 임용 신청자가 지적한 핵심 업적에 대해서만 실제 심사에 붙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5년 이내[아니 좀 더 여유를 두어 10년이라 해도 좋다!]의 연구물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면, 우리는 학자로서 안철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의 논문을 집필하기 위해 1년, 2년 혹은 수년의 실험과 검증을 거친다고 볼 때,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논문이 완성되었는지 모른다면, 애당초 연구자의 자격이 없었거나, 남의 논문에 이름만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약간 과장할 경우 최근 자신이 써낸 논문의 토씨 하나까지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학자들의 기본 생리이자 의무임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참으로 면구스런 가설이지만, 연구업적이 모자라는 안철수를 동정하여 누군가가[석사논문 작성자 자신 혹은 그의 지도교수?]‘앞으로 별 문제될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어떤 논문의 공동저자로 안철수를 끼어 넣어주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그는 ‘힘 하나 안 들이고’ 흡사 ‘이미 차려진 밥상 위에 수저를 올리듯’ 남의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손  쉽게 연구업적을 부풀린 것 아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안철수 스스로가 부탁하여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것들이 바로 항간의 식자층에서 갖고 있는 의혹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에 올라온 해당 글의 필자 강 교수는 흡사 세상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안철수가 표절을 행했다!’고 공격하는 것처럼 호도하여 세상사람들이 몰상식하고 무지몽매하다는 투로 ‘적반하장(賊反荷杖) 식’의 언설을 농(弄)한 것이다. 이른바 ‘교묘한 물 타기’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안철수 교수가 스스로 각종 콘서트나 예능프로그램, 저서 등에서 밝힌 바 있듯이, ‘연구진실성’의 문제는 한 인간인 연구자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잣대로 활용될 수 있고, 또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과연 그는 이 논문의 한 부분이라도 실제로 쓴 것일까. 원래의 석사논문과 영문번역 후의 학술지 논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에 대하여 안철수는 몇 %나 기여했는가 등은 시급히 밝혀져야 할 문제다. 사실 '논문 진실성‘의 문제는 지금 거론되고 있는 ‘다운 계약서’문제보다 오히려 크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 쪽 캠프 인사들의 인식대로 ‘다운 계약서’는 과거에 흔하게 자행되던 관행의 문제로 칠 수 있다 해도, 활자로 찍혀 후세에 두고두고 학문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논문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양심과 양식의 소산(所産)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궁한 논리로 그를 변호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모두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이라는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밥을 먹고 있는 교수들이라는 사실이다. 흡사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 같이 훌륭한 대학의 교수들이 별 일 없다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왜 왈가왈부하느냐?’ 라고 질타하는 듯한 논조다. 실제로 강 교수의 논리 가운데는 ‘학문에 무지한 세상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불순하기까지 하다’는 투의 ‘진짜로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제1저자와 제3저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의 연구진실성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거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비교의 대상으로 끌어와 안철수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는 강 교수가 참으로 가엾기까지 하다.

과연 우리는 자기편에 대해서는 한 없이 너그럽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한 없이 엄정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자가당착적 잣대나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현실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강 교수가 결론이랍시고 자못 ‘사자후라도 토하듯’ 자신의 글 말미에 달아놓은 언설을 참고자료1로, 황우석의 연구비리를 밝혀냈고 현재 안철수의 연구진실성 문제에 대하여 뜨거운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트 BRIC(http://bric.postech.ac.kr)
의 토론글 한 편을 참고자료2로 아래에 적어 두노니, 강호의 제현들은 몸소 읽고 판단해 보시라. 존경하는 안철수 선생은 더 이상 함량 미달의 지식인들 을 보호막으로 삼지 말고, 대중 앞에 직접 나서서 자신의 연구진실성, 아니 윤리와 도덕의 바탕인 양심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명하기 바란다. 만약 답변이 궁하다면, ‘미안하다. 다음부턴 안 그러겠으니 이번만은 너그럽게 봐주라’는 식으로라도 사과하기 바란다. 그런 다음 국민들에게 표를 요구하기 바란다.<2012. 9. 29.>
  

   참고자료 1

“또 하나의 논쟁거리는 발표된 학술지 논문에 누구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안철수 후보의 경우 이 문제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즉 이번 논문의 제1 저자인 석사학위 논문 제출자, 그리고 지도교수로 추정되는 제3 저자 이외에 안철수 후보가 이 논문의 작성에 기여를 했는지 여부이다. 그랬다면 제2의 공저자로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안 후보가 한 일도 없이 ‘숟가락 하나 얻은 격’으로 학자들 사이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제1, 제3 저자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논문 분석 결과도 안 후보의 기여가 있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이러한 저자권(authorship)의 문제는 제3자가 평가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고,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학자들 사이의 논란 거리지 학자의 정치력을 평가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서 유재석의 오스틴파워 풍 댄스나 노홍철의 저질 댄스가 싸이의 미국 진출에 기여한 여부를 정치부 기자가 예단해서 말할 능력이 있는가와 비슷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문의 저자에 누가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학계의 주장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현대 과학이 진행되는 일반적인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여가 필요하다. 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제안하는 단계, 실제 연구와 실험을 수행하는 단계,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고 토의하는 단계, 그리고 최종적으로 논문을 작성하고 투고하여 심사를 받는 단계 등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국제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여 중 3가지 이상에 참여하면 저자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고, 따라서 제자의 학위 논문이라도 그 학위 논문이 작성되는 과정에 위와 같은 기여가 있었다면 지도교수나 관련된 다른 사람이 학술지 논문에 공동으로 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한국의 관례가 아니라 국제 학계의 윤리이다.

정치인의 개인적인 도덕성과 윤리성에 대해 꼬치꼬치 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 이로 인해 우리 공직자의 윤리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나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지 않은 정쟁적 비난은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 뿐이다. 또 더 나아가 학자들의 연구 활동이 위축되거나 우수한 인재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모두 도로교통법 위반이긴 하지만 음주운전을 해서 인사 사고를 낸 운전자와 새벽 4시에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슬금슬금 지나간 운전자 모두를 다 똑같은 놈이라 비난하고 같은 정도로 처벌하는 것도 공정치 못하다.

제발, 주요 일간지 정치부 기자들은 어줍잖은 술자리 얘기들로 아까운 지면을 소비하지 말고, 대선 후보자들의 정책에 대한 정확한 분석, 비판, 실현성 여부 그리고 대안 제시로 내용을 채워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정치인도 바뀌겠다고 난리인데, 이젠 언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이상의 자료문은 <http://hani.co.kr>에서 퍼옴>

 

 

참고자료 2

안철수 팀 논문(1993년)의 표절에 관하여
빈쿨룸
(2012-10-0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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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팀 논문(1993년)의 표절에 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안철수 팀의 논문 표절에 관한 글을 올린다. 표절 대상으로 의심되는 논문은 1992년, 안철수 팀의 논문은 1993년에 발표되었다. 전자는 국문이고 후자는 영문이다. 그러나 학계(인문, 사회, 이공, 의학 모두)에서는 국문 논문이라도 영문이나 기타 외국어 초록(요약문)을 싣게 되어 있다. 필자는 인문계통 전공자인 관계로 두 논문의 본문은 비교 분석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두 논문의 영문 초록을 비교해보았다.

1. 제목

1992년 논문 - 토끼 단일 심실근 세포에서 Cyclic GMP의 Ca2+ 전류 조절기전에 관한 연구/ Modulation of Calcium Current by Cyclic GMP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s of the Rabbit.

1993년 논문 - Effect of Cyclic GMP on the Calcium Current in the Ventricular Myocytes of the Rabbit.

안철수팀의 영문 논문을 국역하자면 <토끼 심실근 세포에서 Ca2+ 전류에 대한 Cyclic GMP의 영향(효과)> 정도가 되겠다. 논문 제목만으로도 두 논문의 주제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록에서 드러나지만 안철수팀의 논문에서도 “단일” 심실근 세포를 분석한다. 두 논문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Cyclic GMP에 의한 변화과정이다. 1992년 논문은 그 변화과정을 “조절기전”(Modulation)으로 표현하고 1993년 논문은 “영향/효과”(effect)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논문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1993년의 논문이 동일한 분석대상을 통해 1992년 논문과 다른 분석결과를 제시한다면, 안철수팀의 논문은 독창적인 연구가 될 것이고 표절에 관한 모든 논란은 무지한 자들의 헛짓거리가 된다. 이 부분은 의학계 전문가들이 밝혀낼 필요성이 있다.

2. 첫 문장

1992년 논문 -

In order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ntracellular cyclic GMP on the calcium channel, whole cell patch clamp technique with internal perfusion method was used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

1993년 논문 -

In order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ntracellular cyclic GMP on calcium current, the whole-cell patch clamp technique with internal perfusion method was used in isolated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싱크로율 98% 이상의 동일한 문장이다. 정확히 3군데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

1) on the calcium channel - on calcium current

안철수팀의 초록에서는 the를 빼고 channel 대신에 current를 넣었다. 두 단어는 다른 뜻인가? 거의 동일한 뜻이다. 사실 두 논문이 공통으로 다루는 주제가 어떤 “관”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channel도 current도 모두 “경로”, “전류”, “통로”, “관” 등으로 유사어라 할 수 있다. 혹시 표절을 피하기 위해 the를 의도적으로 뺐다면 꽤 꼼꼼한 처사라 하겠다.

2) whole cell - the whole-cell

이 부분은 별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역시 the와 - 으로 차이를 둔 것뿐이다.

3)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 in isolated ventricular myocyte

외국어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부분은 참으로 간교한 작업으로 보인다. isolated는 무슨 뜻인가? 격리되거나 분리된 것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따로 떼어놓고 그것 하나만 본다는, 즉 “single”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오히려 the를 뺌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1992년 논문의 영문 제목 끝부분이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이었음을 상기하자.

3. 두 번째 문장

1992년 논문 -

Cyclic GMP, cGMP analogues, cAMP, isopernaline and forskolin were perfused into cells and their effects on the calcium current were analysed by applying depolarizing step pulese of 10mV in amplitude for 200msec from holding potential of -40mV. (원본)

1993년 논문 -

Cyclic GMP, 8-bromo-cyclic GMP, cyclic AMP, were perfused into cells and their effects on the calcium current were analysed by applying depolarizing step pulse of 10mV in amplitude for 300msec from holding potential of -40mV.

역시 98% 싱크로율인데, 좀더 교활해보인다. 또 세 군데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

1). Cyclic GMP, cGMP analogues, cAMP, isopernaline and forskolin - Cyclic GMP, 8-bromo-cyclic GMP, cyclic AMP

1992년 논문은 더 추상적인 동시에 더 구체적인 주체를 제시한다. 더 추상적이라 함은 “cGMP analogues”, 즉 “cGMP과 유사한 것들” 혹은 “cGMP 류의 것들”로 표현하기 때문이면, 더 구체적이라 함은 “isopernaline and forskolin”을 첨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팀에서는 1993년의 추상적 표현 대신에, “cGMP”는 “Cyclic GMP”로 풀어서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8-bromo-cyclic GMP”를 덧붙였다. 그리고 1992년 논문의 “cAMP”는 “cyclic AMP”로 풀어서 표현했다.

달리 말하면, 표현들이 조금씩 다를 뿐 분석 내용은 같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2) pulese - pulse

1992년 논문의 철자 오류 pulese를 안철수팀이 pulse로 바로잡았다.

3) 200msec - 300msec

실험 수치가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수치는 동일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부디 실험 결과가 온전하게 나왔기를 바란다. 전문가들이 해결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cf. 중간에 두 논문 모두 수치를 통한 분석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이 두 논문 초록에서 차이가 나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In the presence of..." 문장이 두 초록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꽤 다른 듯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마지막 문장

1992년 논문 -

From the above results it could be concluded that cGMP increases the calcium current not through cAMP dependent protein kinase nor cAMP dependent phosphodiesterase pathway, but through independent phosphorylation pathway, possibly cGMP dependent protein kinase pathway.

1993년 논문 -

From the above results it could be concluded that intracellular perfusion with cyclic GMP increases the basal calcium current via a mechanism involving a cyclic GMP dependent protein kinase.

언뜻 보면 두 문장이 꽤 달라 보이지만, 사실 거의 흡사하다. 역시 3부분으로 나눠서 고찰해보자.

1) cGMP - intracellular perfusion with cyclic GMP

1993년 논문은 cGMP를 cyclic GMP로 표현하고 “intracellular perfusion”를 첨가함으로써 주어가 바뀐 듯한 문장을 만들었으나, 사실 연구 내용상 “intracellular perfusion”은 덧붙여도 삭제해도 마찬가지 의미의 문장이 될 것이다.

2) the calcium current - the basal calcium current

1993년 논문은 “basal”(기본적인)을 첨가했는데, 당연히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3) not through .... but through - via a mechanism

이런 부분을 보면 필자 또한 학자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외국어에 다소 무지한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1992년 논문에서는 친절하게 “... 이러한 점을 통해서 ..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저러한 점을 통해서 증가한다”라고 설명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1993년 논문은 증가의 이유가 아닌 부분은 필요 없어 보였는지, “via a mechanism”, 즉 “~ 저러한 과정(기제)을 통해”서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물론 두 논문은 증가의 이유가 동일하다고 결론 내린다. 단지 1992년 논문이 “cGMP dependent protein kinase pathway”라고 표현한 것을 1993년 논문은 “a cyclic GMP dependent protein kinase”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섬세하게 a를 첨가했고, 역시 “cGMP”는 “cyclic GMP”로 풀어서 표기했으며,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pathway”(통로)는 단호하게 삭제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4. 결론

두 논문의 영문 초록만을 보았을 때 1993년 논문이 1992년 논문을 표절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혹시나 1993년 논문이 다른 분석 결과를 내놓기 위해 동일한 분석 대상을 연구했다면 모르겠으나, 초록의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고려해볼 때 그 가능성은 없다. 본문의 표절 여부는 의학계의 전문가들이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 BRIC(http://bric.postech.ac.kr)>

참고자료 3

표절과 무임승차, 그리고 학자로서의 양식의 문제.
[일반인] 금빛노을
(2012-10-06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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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후보의 박사학위논문의 표절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다. 이 사안이 MBC에서 보도된 뒤, 서울대의 조국교수는 “(학계 규칙을) 모르고 안철수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고, 알고도 했다면 악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안철수후보 역시 2008년 8월 한 인터넷 매체 인터뷰에서 “표절에 대한 관대한 문화 역시 걸림돌이다. 학생들조차 표절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지식 산업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고 발언한 바 있다. 따라서 안철수후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조국교수처럼 표절시비에 대해 ‘무식’하고 ‘악의적’이라는 식으로 세치혀의 칼날을 휘두르기보다는 냉정하게 표절논란의 옳고그름을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

총선을 전후해서 문대성의원의 논문표절이 문제되었을 때, 조국교수는 <'참고문헌 빼고 72쪽 논문 중 9쪽(전체의 12%)을 따옴표 없이 출처도 명기하지 않은 ‘오타’까지 베꼈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MBC에서 지적한 것도 <따옴표 없이 출처도 명기하지 않고’ ‘오타’까지 베꼈다>는 것 아닌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문대성의원을 대상으로 지적하면 정의롭고 안철수후보를 대상으로 지적하면 무식하고 악의적이 되는가? 필요에 따라 임의로 잣대를 들이대거나 들이댄 잣대를 빼앗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석사학위논문을 수정하고 다듬어서 관련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분명 학계의 관행이다. 하지만 관행도 관행나름이다.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어서 관련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대개 연구쪽으로 진로를 정한 사람이 박사과정 진학을 전후해서 하는 것이지, 문제가 된 논문의 제1저자인 김규현처럼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이 그것도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한 지 5년이 지나서 영역한 것 외에는 거의 수정없이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김규현과 안철수후보는 1988년에 서울의대 생리학교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안철수후보는 석사를 받은 직후 박사과정에 진학해서 단국대 의대교수로 채용이 되었으니 당연히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어서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이 조국교수가 말한 ‘학계의 관행’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자신의 석사논문을 학술지에 싣지 않아도 무방했을 김규현은 석사학위 취득 후 5년이 지난 1993년에 학술지에 학위논문을 재수록하였고, 서울의대에서 조교도 지내고 단국대 의대 교수로서 학과장까지 했으니 마땅히 ‘학계의 규칙’을 따랐어야 할 안철수후보는 자신의 석사학위논문을 학술지에 싣는 대신 석사동기의 재수록논문에 제2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안철수후보가 석사동기의 논문에 제2저자로 슬쩍 이름을 올린 이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된 지 18년이나 지난 2011년에, 그것도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임용서류에 주요연구업적으로 실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를 공채할 때에는 응당 제출된 논문의 전공일치 여부를 심사한다. 그리고 연구업적은 대개의 경우, 석박사학위와 최근 5년간의 논문실적을 서류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안철수후보는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임용서류에 5편의 주요연구업적을 기재했는데, 석박사논문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이 모두 1993년에 작성된 논문이었고 문제가 된 김규현의 논문은 이 3편의 논문 가운데 한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안철수후보가 제3저자로 된 논문인데, 이 논문은 부산의 모 의대교수가 자신이 1993년 2월에 쓴 석사학위논문을 가필하고 안철수후보를 포함한 총 7명을 공저자로 하여 대한생리학회에 실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편이 역시 1993년에 대한의학협회지에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라는 제목으로 쓴 안철수 자신의 논문이다. 이들 논문은 모두 안철수후보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임용되기 위해 제출한 서류에 주요연구업적으로 기재되었고,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임용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들 논문에 대한 검증은 대한민국 대통령후보로서의 안철수에 대한 후보검증 이전에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대학교의 교수공채시스템에 대한 공정성과 절차적 적법성을 가리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다.

안철수후보는 2011년에 서울대학교에 제출하는 서류에 왜 하필이면 1993년에 작성된 논문들을 주요연구업적으로 기재했던 것일까? 그리고 안철수후보는 왜 1993년에 동기와 후배의 논문에 제2저자, 제3저자로 이름을 올린 것일까? 1993년 이후에 전문학술지에 실은 논문이 없어서라면 ‘석좌교수’나 ‘대학원장’으로 불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993년에 작성된 3편의 논문이 해당 학과나 해당 대학원과 무관한 논문이라면 굳이 이를 서류에 올릴 필요도 없는 것이고, 서류에 이를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논문에 대한 논란은 안철수후보 자신이 자초한 것이므로, 이들 논문에 대해 논란을 ‘무식’이니 ‘악의적’이니 하고 비난하는 조국교수의 발언이 오히려 무식하고 악의적인 것이다.

안철수후보가 자신의 이름을 동료와 후배의 논문에 제2저자, 제3저자로 끼워넣은 1993년 당시는 '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의 표현에 따르면 ‘커다란 공백기’였고 ‘의학연구를 할 수 없는’ ‘엄청난 고문’같은 시절인 군의관 복무시절이었다. 안철수후보는 39개월의 군복무기간을 ‘공백기’라고 하였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993년부터 2년동안은 서울의 연구소에 배치되어 집에서 출퇴근했다고 한다. 그의 말과 달리, 어느 정도는 공부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었을 법하다. 그런데 안철수후보는 의학공부 대신 컴퓨터바이러스백신 개발에 몰두해 있었다. 그 연구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컴퓨터바이러스백신 개발에 몰두했던 그가 그래도 제2저자, 제3저자로 의학학술논문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생리학관련 연구소에 근무했었을 듯하다. 그래서 팀원의 일원으로 이름이 올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역 이후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연구실적이 필요해서 동료와 후배의 논문에 슬쩍 이름을 끼워넣었을 수도 있을 듯하다.

어쨌든 이들 논문에 대한 심사를 거쳐 바로 1년전인 2011년에 안철수후보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란 직함이 그가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데 있어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학위논문을 포함하여 5편의 논문에 대해 표절이든 무임승차든 논란이 생긴 부분에 대해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동안 교수출신의 유명인들이 장관등의 고위직 후보로 내정되어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자기표절’이니 ‘이중게재’니 하고 온갖 독설을 퍼붓던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가 엇갈린다고 해서 안철수후보의 석박사 학위논문과 여타 학술논문에 대한 표절시비와 무임승차논란이 확산된다고 해서 이를 ‘정치적 의도’라는 말로 차단막을 치고 ‘무식’이니 ‘악의적’이니 하는 막말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정치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모든 칭찬과 비판은 당연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논란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이 바로 이곳 브릭에서 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9. 2. 20:15

안철수가 아깝다!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람은 누구나 숨겨놓은 카드를 갖고 살아간다. 한 집안도 그렇고 사회나 국가도 그러하다. 집안이 망할 경우 털어서 가족들 목숨을 부지할만한 언턱거리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것이 보험이 되었든, 통장이 되었든, 조그만 땅뙈기가 되었든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가며 그걸 보호하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걸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게 있다고 믿는 한 고통은 참을만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절망하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

며칠 사이에 서울시장이 물러났고, 교육감도 위태위태하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들을 탐낸다. 이념적 패거리에 따라 이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저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속된 말로 ‘통밥 굴리기’에 여념들이 없다. 어제 오늘 사이에 안철수 교수가 거론되고 있고, 그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들로 어수선하다. 어중이 떠중이 가리지 않고 부나비처럼 정치에 뛰어들고 있는 지금, 안철수라고 언제까지나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지금은 때도 아닐뿐더러, 나설 자리도 아니다. 가난한 집 가족들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이 요긴하게 쓰려고 숨겨놓은 ‘보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안 교수 스스로는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꺼내놓는 순간 공동체 구성원들은 더 이상 마음 붙일 희망의 끈을 잃어버리게 된다. 국민들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안 교수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직은 그 동네의 꾼들 가운데 쓸 만한 존재를 골라 일을 맡겨도 되는 단계다.

***

<<장자(莊子)>>에 이런 비유가 나온다. 어떤 임금이 장자를 초빙하여 나랏일을 맡기고자 했다. 장자는 임금이 보낸 사자(使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여, 제사 때에 희생[제물]으로 쓰이는 저 소를 보게나. 아름답게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늘 맛있는 콩과 여물을 먹으며 소중하게 다루어지네. 그러나, 조상의 사당 앞에 끌려가 희생으로 쓰일 때가 되어서는, 그저 평범한 여느 송아지처럼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네.” 


그렇다. 지금 도덕과 정의에 둔감해진 이 땅의 정치꾼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희생 제단에 피를 뿌려줄 제물을 찾고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구덩이에 안철수같은 ‘깨끗한 영혼’을 집어넣고 ‘번제(燔祭)’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더러움을 일거에 씻어버리려는 앙큼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깨끗한 이미지를 자신들의 헌옷 위에 걸치고 백성들의 눈을 호려보고자 하는 검은 속내를 갖고 있다. 보라, 시장이나 교육감의 경우 그에 걸맞은 재목들이 있다! 소 잡는 칼로 닭의 목을 치려다가는 자칫 자신의 발을 다칠 수 있다. 그러니 닭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칼을 벼려야 할 것이다.

***

안 교수는 지금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국민들은 ‘아껴야 할 인재’들을 아끼고 싶어 한다. 지금 도살장으로 보내기에 안 교수는 너무 아까운 존재다. 그를 도살장으로 보낸 뒤 우리 모두 겪어야 할 상실감과 허무를 생각해 보았는가. 최후까지 아낄 건 아껴야 한다. 인재란 매일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안 교수는 부디 자중하셔야 한다.

 

2011. 9. 2.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