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09.15 23:34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몇 년이나 지났을까.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가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가 마무리 멘트로 던진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일 내로 쓴물이나 한 잔 허세!”

 

쓴물이라?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커피를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무릎을 쳤다. 그 날부터 아침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그가 깨우쳐 준 쓴 물의 다의성(多義性)과 함축성을 곱씹기 시작했다. 최근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우리네 막대커피의 우수성(?)을 서양인들도 인정하기 시작했다지만, 사실 커피의 매력은 쓴 맛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양동이만한 커피 잔을 안고 다니는 게 일종의 패션처럼 되어 있다. 대부분 나로선 이름도 외우기 힘든 달달한 커피 일색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친구들, 쓴물의 철학적 원리나 약리(藥理)를 알 리가 없다.

 

공자는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이요. 忠言逆於耳而利於行)"고 말씀하셨다. 내 경험상 익모초 달인 물을 비롯, 전통사회의 약들은 으레 몸서리쳐질 정도로 쓴 것들뿐이었다. 현대인들의 병 가운데 상당수가 당분의 과다섭취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요즘 대부분의 약은 달콤한 설탕을 겉에 바른 당의정(糖衣錠)’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쓴 약은 먹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인간의 본능적 기호(嗜好)를 역으로 잘 보여주는 경우 아닌가.

 

쓴물과 비슷한 표현에 쓴잔이 있고, 그것을 한자어 고배(苦杯)’로 쓴다. 어떤 시도가 실패할 경우 고배를 마셨다고들 한다. 그러나 쓴물혹은 쓴잔고배가 항상 같은 의미범주인 것은 아니다. 인류사 최고의 극적인 쓴물은 성서에서 발견된다. <<신약성서>>마태복음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은 그야말로 지극한 의미의 쓴잔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예수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당하신 온갖 모욕과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말 속의 쓴잔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경우의 은 패배의 그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적 고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쓴맛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도 있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을 다투던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에 관한 고사다. 치고받고 싸워오던 과정에서 위기를 모면한 월왕 구천이 다시 월나라로 돌아와 곁에 쓸개를 놔두고 항상 그 쓴맛을 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하다가 결국 패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니, 쓴맛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약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승리의 환희보다 패배의 고통을 훨씬 자주 경험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패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승리는 큰 의미가 없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입장에서 보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의 삶도 알고 보면 성공과 실패’(혹은 승리와 패배’)가 반반, 아니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남의 성공만 볼 뿐, 실패는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실패 속에 고심참담하던 그들의 모습은 아예 보려하지 않는다. 남의 화려한 성공만을 보고 부러워하는 게 장삼이사들의 보편적인 심성이기 때문이다.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내 친구의 허허로운 이 말 속에는, 성공을 소망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장삼이사의 철학이 들어있다. 툭하면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그들, 아니 우리들. 늘 실패를 맛보면서도 내일은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새로운 도전의 결기를 다지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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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09.15 23:09

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최금남표해록>>


 

 


최부 선생의 표류 및 귀환 노정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회장) 박사로부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파릇파릇하던 시절, <<금남선생 표해록>>을 읽고 언젠가는 그 길을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흘러간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끔찍한 표해(漂海)의 노정은 뒤로 미루고, 선생의 고향인 남도에서 그 분의 뜨거운 자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93일 토요일. 추석맞이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는 만원이었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는 중이었다. 답사 참가자 12명을 태운 버스가 1차로 선 곳은 광주 광산구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고려 인종 때의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후손인 선생을 비롯하여 최윤덕(崔允德)유희춘(柳希春)나덕헌(羅德憲) 등이 배향되어 있었다.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1927년 건립, 매년 음력 96일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택당(以澤堂) 좌우로 합의문(合義門)과 합인문(合仁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쪽에 낙호재(樂乎齋)와 성지재(誠之齋)가 좌우로 서 있었으며, 몇 계단 위에 무양사(武陽祠)가 높직이 앉아 있었다. 9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원 전체가 단정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무양서원 현판

 

 


무양사

 

 


무양서원 묘정

 

 


측면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거기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나주목 관아(금성관). 아직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목사골 나주의 위용과 분위기는 당시의 모습인 듯 고풍스러웠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이 바로 선생의 탄생지였으나, 시간 상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선생을 배향한 강진의 강덕사(康德祠,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14/군동면 라천리 1044)에서 탐진 최씨 청년 화수회최윤영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창건된 강덕사에는 고려 인종(1122-1146) 때 왕을 호종하여 이자겸의 난을 좌절시키고 나라를 보존시킨 어의 최사전을 주벽으로, 선생과 함께 최표최극충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해남 시내에 입성, 해남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목 정수루(正綏樓)

 

 


나주목 의열각(義烈閣)

 

 


나주목 망화루(望華樓)(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

 

 


나주목 금성관의 내삼문


 

 


나주목 금성관(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

 

 


나주목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쯤 우측 성벽 옆의 각종 송덕비들

 

 


나주목사 행렬행차


 


나주목사 행렬 행차

 

 


나주목 행정 관할도

 

 


조선시대 20목 분포도

 

  


입구에서 보이는 강덕사

 

 


강덕사 대문

 

 


강덕사 묘정비

 

 


강덕서원 뜰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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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사의 아름다운 단청

 

 



강덕사 앞면

 

 

 
강덕사와 탐진 최씨 문중에 대하여 설명하는 후손 최윤영 선생(미래상사 대표)

 

 

관광호텔 밖으로 내다보이는 어둘녘의 해남읍

 

 

94.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 답사단은 해남향교를 찾아 전교인 임기주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정위인 문선왕의 위패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나, 바다를 건너 온 공자의 위패를 모신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강화도의 교동향교보다 이곳이 먼저라는 것이 그 분의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해남향교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일 뿐 최초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향교도 해남정씨와 결혼한 뒤 해남에 정착하여 관서재(官書齋)를 열고 후학을 기른 선생의 활동영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외손자 유희춘(柳希春),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등을 해남유학의 핵심으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해남군 지도

 

 


해남향교

 

 


해남향교 대성전

 

 


해남향교 주벽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자리

 

 


해남향교 공자(대성지성 문선왕)의 위패

 

 


해남향교에 모신 기국술성공 자사의 위패

 

 


해남향교의 각종 제기들

 

 


해남향교 진설도

 

 


해남향교 명륜당

 

 


해남향교 장서각

 

 

 

향교를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은 해촌서원(海村書院). 거울 같은 금강골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서원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였다. 선생과 함께 임억령(林億齡), 유희춘,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이 지역의 6현이 배향되어 있었다. 효종 3(1632) 임억령 선생이 처음으로 배향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니, 여섯 분이 배향되기까지 무려 290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도 금남 선생이 으뜸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그 분의 강학비(講學碑)가 우뚝 솟아 있는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해촌서원

 

 


해촌서원

 

 


해촌서원과 금강골 저수지

 

 

 


해촌서원의 최부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의 최부 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을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이 송나라가 해로를 통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닿았다는 관두량(關頭梁). 중국과의 국제적 무역항이자 제주도와의 교역항이었다. 송나라의 사신들도, 상인들도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니, 당시 이곳의 번화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성종 18(1487) 1111일 관두량에 도착해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질펀하게 넓은 바다가 고요하니, 당시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손색이 없었으리라.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그 옛날 배가 닿고 떠나던 포구는 마을과 논으로 바뀌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내륙의 수면 위로는 하얀 전어들이 뛰고 있었다. 관동리 주민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 몇 분이 구전해오는 마을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려 줄 뿐 이곳에 남아있을 선생의 행적을 알아낼 재간은 아예 없었다.

 

 

 


관두량 포구와 이를 설명하는 신춘호 박사

 

 


포구의 한켠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관두량 방조제 안쪽의 내륙 수로

 

 


관동리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함께

 

 

관두량을 떠나 백포리의 윤두서 고택과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을 들러 무안 지역으로 이동,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이른바 늘어지 마을의 양지바른 산록이었다. 선생 부부는 부모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굽이도는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명당의 음택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선생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한참을 달려 나주군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 있다는 선생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심조심 마을길을 달려 막다른 곳에 도착, 촌가의 담장 옆을 통해 올라가니 생가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 관리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주의 한촌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인근 무안에 묻힌 선생. 그 분의 일생은 당시 중세 조선의 정치적 격랑을 거슬러 가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림파 문인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선생의 무덤과 생가 터는 차로 달려 30여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의 거리, 아니 시종일관 생사가 교차하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과연 선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녹우당의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녹우당 현판

 

 


고산 윤선도 선생 사당

 

 


금남 선생 묘소가 있는 '늘어지 마을' 표석

 

 


금남 선생 부자묘 입구

 



금남 선생 사적비

 

 


금남 선생 묘소

 

 


금남 선생 묘소에서

 

 


늘어지 마을의 아주머니들

 

 


금남 선생 생가터 비석

 

 


금남 선생 생가터 앞에 열린 감

 

 

***

 

금남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초창기 조선조의 사림파는 유교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결국 훈구파를 누르고 노론을 형성하여 망할 때까지 조선조를 끌고 나간 사림파. 서슬 퍼런 선비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나간 인물들이었다. 제주에서 부친의 부음을 받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표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선생. 북경에 호송되어 황제에게 사은하게 되었을 때도 친상을 당한 자식으로서의 예가 아님을 내세우며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강요에 의해 잠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귀환 후에도 왕명으로 8일 만에 표해록을 작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 다음 즉시 내려가 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왕명으로 중국에서 목격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1년 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선생은 4년 동안이나 복을 입게 된 것이다. 탈상 후 선생을 아끼던 성종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표류한 뒤 중국에서 많은 시문을 지은 것, 비록 왕명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즉시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여러 날 서울에 머물면서 표류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애통함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대들었으니... 당시의 젊은 신료들 또한 선생과 같은 류의 무서운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일찍 하세하고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무오사화의 와중에 점필재의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6년 뒤 갑자사화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끔찍한 참형을 받고 효수까지 당했다. 51세의 창창한 나이로, 파란 많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남도의 이곳저곳에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선생의 자취는 인간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교과서였다. 조만간 제주-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행적을 다시 밟아볼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가 마냥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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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09.01 16:42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책이 없어 곤궁하던 어린 시절부터 책이 넘쳐나는 지금까지 책과 뗄 수 없는 것이 내 삶이다. 남의 책들을 사 읽고 모으며, 가끔은 책을 펴내는 게 내 일 중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막 학계로 진출하던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엔 책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수와 지식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정보의 유통과 저장을 위해 책의 효용가치는 절대적이었다. 책 하나 펴내지 못하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마구 변하여 모든 지식정보는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이제 크고 무거운 책이 거추장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하루 24시간을 구부정하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시절이다. 종이 위의 깨알 활자들이 어찌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가 있겠는가.

 

누구의 한탄대로, 한국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졌다. 책이 빠져나간 공간을 옷 가게, 음식점, 술집, 커피 집 등이 파고들었다. 가끔씩 커피 집 창문으로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 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대다수는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성의 샘도 말라버린 것이다.

 

대학의 권력도 대부분 힘 있는 이공계가 잡고 있다. 총장도 보직교수들도(그 가운데 도서관장도) 책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린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도서관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도서관에서 값나가는 인문서적들이 차떼기로 퇴출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이렇게 반학문적, 반지성적 만행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현장이 대학이다. 그래서 종이책만이 책임을 믿으며 대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멸종을 눈앞에 둔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완주군 삼례읍은 특이하고 고결한 고장이다. 아주 오래된 비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고 각박한 삶에 지성의 문채(文采)를 입힌, 이 고장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소중하다. 2016829일은 이 땅에 타오를지도 모를 대한민국 판 르네상스가 바로 이 고장에서 점화된, 역사적인 날이다. 책을 잃어버려 마음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갈 길을 제시한 등대로 우뚝 선 날이다.

 

이 날 몇몇 지인들과 책 마을 개관식에 참석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삼례는 책이다!”라는 현수막이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매달려 있었다. 삼례성당 좌측 창고에는 책 박물관, 박물관 건너편에는 목공학교가 가동 중이었다. 이 부분이 책 마을의 중심이었다. 박물관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만화 등 2~3개 주제의 상설전시와 매년 1~2회의 기획전이 열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건너편의 김상림 목공소도 책 마을의 전통성을 보태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전통 목공의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고, 목수들의 작업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 그곳 역시 멋진 공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삼례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북하우스, 한국학 아카이브,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북하우스는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구성되었고,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북갤러리에는 전시실과 강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북하우스로 들어가니 고서점 호산방이란 이름 아래 한국학 관련 고서, 신문, 잡지, 사진, 음반자료, 중국일본서양 관련 고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책마을 헌책방1층에는 아동도서와 향토문화 관련 도서 등이, 2층에는 인문도서들이 비치되어, 10만권의 빛나는 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책방의 1층 한쪽에 카페가 마련되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그것은 대물림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책에 관한 에디슨의 명언이다. 이제 위대한 천재들이 만든 책들이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물림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 ‘망아지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만간 책도 사람도 삼례로 보내라는 새로운 속담이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삼례는 책의 메카로 변신할 것이며, 대한민국 정신사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삼례 책 마을에 가서 잠시라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볼 일이다. 책의 의미와 책의 일생을 보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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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08.24 21:43

헬조선(토피아) 조선으로!

 

 

 

 

며칠 전, 작은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여러 세대가 골고루 섞인 자리. 젊은이들이 약간 많았다.

어쩌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한 논전이 들을 만 했다.

젊은 세대의 대부분과 비판적인 중늙은이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를 헬조선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말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고 든 소수의 온건한 젊은이들이 오히려 돋보이기도 했다. 물론 가스통 할배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헬조선이란 명칭의 부당성을 성토했다. 그 말이 생각보다 이념적 내포가 복잡하다는 것을 즉석에서 깨닫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처음 이 말을 고안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분열적 단면들을 뚜렷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말을 두고 우리 지식사회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잘 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나는 그들의 해석을 듣고 싶지 않다. 건방진 단정일지 모르지만, 보나마나 서구 이론가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생각을 현학적으로 분식하는 게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불행한 세대가 자조적으로 만들어낸 용어를 잘도 활용하여 논문으로, 저서로 찍어내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십중팔구 특별한 결론은 없을 것이다. 서양 학자들의 담론을 끌어다가 우리 젊은이들의 자포자기적 심정을 분석하여 논리화 시켜본들 무엇이 후련하단 말인가. 지금도 갈 곳이 없고, 이른 아침 직장으로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어 아침 식탁에도 못 나오는 자식들이 그득한 이 나라의 현실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학부 고학년의 강의를 맡고 싶지 않다. 생기 잃은 그들과 눈동자를 맞추는 일이 곤혹스럽다. 대학 강의에서는 눈빛만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 눈을 맞추지 못한다면,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고, 그들의 영혼과 만날 수도 없다. 대학을 나와도 휘파람을 불며 나갈 직장이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어쩌다 직장을 마련해도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일이 과중하고 직장의 분위기가 뭣 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보수가 쥐꼬리 만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계약직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상사들이 개차반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교통지옥에 파김치가 되어야 갈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처지의 또래들끼리 만나면, 무슨 좋은 말들이 나올 수 있으랴. 대충 짐작되는 온갖 불평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것들의 최대공약수로 뽑힌 말 하나가 바로 헬조선아닌가.

 

그렇다면, 그 헬조선의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 기성세대, 재벌, 정부여당 등 이른바 기득권세력, 그 중에서도 현실적인 힘을 가진 계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괜히 딴죽 걸기 좋아하는 이 땅의 운동권 출신들이나 좌파들이 이들을 만나 어울리게 되면, 그 장소는 자연스럽게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성토장이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헬조선의 책임을 몽땅 이들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들이 참 억울하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헬조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체로 젊은 세대나 좌파인사들임을 최근 확인한 자리가 바로 그 공간이었다.

 

가끔씩 배낭을 짊어지고 해외여행에 나서곤 하는 어떤 젊은이가 그 속에 있었다. ‘외국에 나가봐야 우리나라 좋은 줄 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그래, 누구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집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나보다 못한 이웃들을 만나 봐야 비로소 내 집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세계 최강 미국에도 1~2%만 빼곤 모두 허덕대는 장삼이사들이다. 심지어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몇 년 전 잠시 머물던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병원에 갈 일이 생겼었다. 예약이 필수라 하여 해당 진료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접수 아가씨가 대뜸 무슨 보험을 갖고 있느냐?’는 생소한 질문을 던졌다. 보험사 이름을 대니 자기네 병원과는 거래하지 않는 보험사란다. 세 번 째 전화를 걸고 나서야 비로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게 의료보험이 없었다면, 아예 병원을 갈 수 없는 곳이 미국이었다.

 

그 학교의 교수에게 물으니, 그의 말로는 미국인의 약 40%가 보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과장이겠지만, 그런 곳이 미국이다. 요즘 나는 툭하면 몸 이곳저곳에 문제가 생겨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든다. 그럴 때마다 이름과 주민번호만 내면 값싸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루 이틀 지나 몸이 좋아지면 미국 생각이 나곤 한다. 아무리 미국이면 무엇 하랴. 몸 아플 때 비싼 보험 없으면 아예 예약도 못하는 곳인 걸. 미국인들이 지방 어느 곳엘 가도 어느 병원엘 가도 의사로부터 친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임을 알게 된다면, ‘헬조선이란 말을 이해하겠는가.

 

우연히 문화일보를 서핑하다가 유머코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공감이 가는 글이라 송두리째 옮겨본다.

 

두 직원이 자기네 회사가 교도소보다 안 좋은 이유를 들먹이면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직원 A : “교도소는 세끼 밥을 무료로 먹여 주는데, 회사는 내 돈 주고 사 먹어야 하잖아?”

직원 B : “그러게 말이야. 교도소에서는 가끔 TV를 볼 수 있는데 회사에서 TV보면 바로 잘리지.”

직원 A : “하루 종일 2평짜리 공간에 갇혀 있는 건 교도소와 다를 바 없다니까.”

그때 공교롭게도 이 말을 들은 사장이 두 사람을 불렀다.

사장 : “기쁜 소식이 있네. 자네들은 가석방되었어. 이제 자유의 몸이라구!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네!”

 

절대적인 지옥이나 천당은 없다. 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 장점을 살려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헬조선을 노래하면 진짜로 우리나라가 지옥으로 변한다. 왜 지옥인지,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먼저 확인하고 자기 비하를 해도 늦지 않다. 케이팝(K-pop)에 취한 외국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환상의 나라로 알고 있다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돈 벌러 한국에 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만난 젊은 학자를 도와 우리나라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1년간 공부할 수 있게 해줬더니, 코가 땅에 닿게 고마워했다. 몇 년 전 학술 답사 차 중국에 갔다가 불편해서 죽을 뻔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 상공에 이른 것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좋은 우리나라의 장점을 우리만 모른 채 살고 있다. 괜히 종북주의로 의심받을 대열에 섰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북한으로 보내라!’는 욕을 얻어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한 친구가 있다. ‘헬조선의 주문(呪文)을 외우다 보면, 어느 덧 자신도 헬조선의 주민으로 고착되고 만다. 우리는 한 순간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헬조선(토피아)조선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나라를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 어느 정치인의 거짓말이 아님을 외국에 나가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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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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