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11.18 17:16

󰡔<거창가> 제대로 읽기󰡕를 내며

 

 



거창의 가을


거창의 여름

 

 20001023일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거창가>>를 낸 뒤 최근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창가>를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런데, 지난 해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가항목을 새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학계의 ‘<거창가> 담론을 대략 훑어보게 되었다. 17년 전의 논점에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그 책에 공개한 자료들은 <거창가>에 관련된 그간의 의문점들을 완벽하게 해소해줄 만큼 명료했다. 그러나 당시 새롭고 결정적인 자료를 공개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서였을까. 빠뜨린 부분들과 오류들이 적잖았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새로운 자료들을 탈초(脫草)하고 역주하는 데 꽤 고생을 했는데, 근자 그런 번역을 자신들의 것으로 도용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그 자료의 사진들을 자신의 저서에 무단히 갖다 쓰면서도 출처조차 밝히지 않은 연구자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내겐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일부 사람들의 말처럼 그런 것이 학계의 관행(?)이라면, 나는 관행조차 이해 못하는 국외자인 셈이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간 내 작업을 소중히 간수하지 못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이번의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조규익 본으로 명명한 <거창별곡>, 거창부 폐장 초(居昌府弊狀 抄)」•「취옹정기(取翁政記)」•「사곡서(四哭序)등을 연결시켜, 당시 거창에서 벌어지고 있던 수령과 아전들의 탐학(貪虐)을 평이하게 설명한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와 함께 역주 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무단 도용하는 철부지들이 잘못 된 부분까지 그대로 베끼는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거창 현지를 답사하여 그 땅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거창가>의 여운을 찾았고, 그것들의 상당 부분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문자 텍스트로 남아 있는 것이 <거창가> 류의 사실적인 고발문학이라 해도, 현지인들의 거주 공간과 산하(山河)는 그 노래의 진정한 모습과 의미가 투영된 또 다른 텍스트였다. 옛날 은사님께서 공부는 발로 하라는 말씀을 진지 드시듯 하셨는데, 못난 제자는 그 뜻을 다 늙은 지금에서야 깨달았으니!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서 내려다보시면서 혀를 차고 계시지나 않을지, 부끄러움으로 모골이 송연하다.

 

<거창가>가 비록 지방 관리들의 적폐(積弊)를 고발한 문학이긴 하나, 그건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일일 뿐이다. 혹시 당시라면 관민 대립으로 읽힐 여지도 있겠으나, 민주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지금에야 적폐 청산과 관민 화합의 서사시로 이해될 바탕이 이미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봉건 시대 관청의 적폐에 대하여 항거한 거창 사람들의 정신이야말로 끊임없이 기리고 널리 선양해야 할 자랑 거리 아니겠는가. 지금도 <거창가>()에 대한 민()의 반발이나 저항으로만 해석하여 보고도 못 본 체 한다면, 그거야 말로 미련한 처사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임술년(1862) 당시 민란이 거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거창 외의 어느 지역에서 <거창가>거창부 폐장 초(居昌府弊狀 抄)」•「취옹정기(取翁政記)」•「사곡서(四哭序)같은 운문과 산문의 장르들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고 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한 경우가 있었단 말인가. 세계 역사를 훑어보아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근거들을 잘 갖추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매년 추수가 끝난 다음 거창가 역사 문화제라도 기획하여 거창의 정신을 전국적 아니 세계적으로 선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왜 그런 머리들을 쓰지 못하는지, 국외자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이 책의 목차와 머리말을 이곳에 옮긴다 

 

차례

1 <거창가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란 무엇인가?

1. <거창가>에 대한 오해의 전말 3

2. 거창가이고, ‘이재가인가? 8

3. <거창가> 내용의 사실성에 대한 근거 14

4. 붕괴된 수취체제와 민중의 신음 16

5. <거창가> 보조 텍스트로서의 취옹정기取翁政記
사곡서四哭序 55

6. 거창에서 찾아본 <거창가>의 흔적 66

7. <거창가>, 미래를 예비한 을들의 서사적 고발문학 90

 

2 텍스트 원문 및 번역문

1. <거창별곡>(조규익본) 원문 97

2. <거창가> 교합 및 현대어 역본 110

3. 거창부폐장 초원문 142

4. 거창부폐장 초역주 147

5. 취옹정기의 원문과 역주 170

6. 사곡서 원문과 역주 174

 

3 <거창가>(조규익본) 영인본 179

 

Summary 229

찾아보기 236

 

머리말

고서의 매력에 빠져 지내던 시절 고서 전문가 이현조 선생의 따뜻한 도움으로 <거창가>를 만났고, 지금부터 만 17년 전인 20001023<거창가>에 관한 첫 저서를 냈다. 탐서의 현장에얻은 사람과 책이 보물이었다. <거창가>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 호박 넝쿨에 참외·수박까지 딸려 온 형국이었다.

이미 <거창가>를 두고 몇 분의 좋은 논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거창가>불완전한 텍스트였다. 그 불완전성은 세 건의 산문들에 압축된 콘텍스트가 해결해 주었다. <거창가>의 마지막 퍼즐은 스스로 풀렸다. 그 시기 거창에서 자행된 탐학의 주체가 부사 이재가在稼로 밝혀지자 상당수의 문제들이 싱겁게 해결된 것이다

작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가를 새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민백이 나온 지 25, 필자의 저서 󰡔거창가󰡕가 나온 지 16년만의 일이다. 모든 것들이 전광석화처럼 바뀌는 우리 사회에도 만만디는 있는 법인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이전 책의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 거창가란 제목을, 이번엔 ‘<거창가> 제대로 읽기로 바꿨다. <거창가>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제대로보아야 그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창가>에 노래된 갑질들의 내용을 평이하게 설명했고, 이전 책에서 범한 한문 번역과 주석의 오류들을 수정했다. 그 책에 산문들이 너무 복잡·산만하게 배치되어 일반 독자들은 알아보지 못한 흠도 있었다. 그래서 원문과 역주들을 참고하기 편하도록 제2부에 몰아놓았고, 1부에서는 <거창가>를 설명하되 그 산문들을 참고자료로 끌어왔다. 거창부폐장 초를 가사로 풀어 만든 것이 <거창가>이고 문제적 인간들을 풍자한 희문戱文취옹정기사곡서이니, <거창가>의 내용을 설명하려면 이들 산문들을 끌어와야 했다. 현지답사를 통해 거창이 <거창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텍스트임도 확인했다. 아직도 그곳엔 그 시절의 아픔이 살아 있었다. 그걸 이 책에 담게 되어 무척 곰지다.’ 그러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거창가>의 작자 및 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등의 필자 추정 문제는 부득이 다음 책으로 미룬다. 다소 복잡한 이유 때문이다.

 

9년 전 별세하신 김태순 선생님은 생전에 <거창가>거창의 최고 자랑거리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 혜안이 없는 요즘을 아쉬워하며, 그 분의 명복을 다시 빌어드린다. 늘 고서를 통해 가르침을 주시는 인산 박순호선생님, 거창박물관의 구본용 관장님, 거창향토사연구소의 김영석 선생님, 정쌍은 선생님, 이산 선생님, 거창군청 이남열 공보담당관님 등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해온 학고방의 하운근 사장님과, 책을 멋지게 만들어주신 조연순 팀장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에 숭실 근속 30자축의 뜻을 담았다. 건강 속에서 즐겁게 살아온 세월이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고 있다.

 

정유년 가을에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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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7.10.26 15:14

 





 

, 홍범도 장군!

-2017년 홍범도 장군 순국 제 74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 참가기-

 

 

맑은 가을날 오후. ‘여천 홍범도 장군 순국 제74주기 추모 및 학술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강당을 찾았다. 꽤 많은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홍범도기념사업회의 이종찬 이사장이야 원래 유명한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 논문의 토론자로 나선 최영근 선생(알마틔 고려극장 문예부장), 반병률 교수(외국어대), 김보희 박사, 장세윤 박사(동북아 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소장) 등은 오랜 인연들이다. 특히 희곡 날으는 홍범도2013년에 연출한 리 알레그 선생이 모스크바로부터 와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감회가 깊었다.

 

2부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역사기록 소설 홍범도의 역사성(윤상원 전북대 교수), 희곡 홍범도의 역사 수용 및 인물 형상화 양상(조규익), 「「홍범도를 매개로 하는 체제 옹호의 서사(임형모 군산대 겸임교수) 등이었다.

 

1940년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조선극장의 총연출자 겸 희곡작가 태장춘은 친구였던 시인 조기천의 권유로 희곡 홍범도를 쓰게 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극장의 수위장으로 있던 장군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희곡의 소재로 바꾸어 나갔다. 장군은 태장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전부터 만들어 온 많은 메모들을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를 만들었고, 태장춘은 그것을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만든 것이다. 그 일지의 원본이 태장춘 혹은 장군으로부터 사라진 뒤인 1958, 태장춘의 부인 리함덕(고려극장 인민배우)이 베껴 쓴 둥사본 홍범도 일지가 이인섭을 통해 교포 작가 김세일에게 전달되었고, 김세일은 이 기록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홍범도󰡕를 써서 레닌기치에 연재했다. 장군은 태장춘을 만날 때마다 결코 자신을 영웅화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것을 강조했다. 자신보다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출 것도 요구했다. 말하자면 극작가 나름의 창작성을 인정하지 않고, 희곡을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기록물로 만들 것을 요구함으로써 희곡 홍범도는 일종의 서사문학처럼 늘어져 버렸고, 등장인물도 36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발표 중


발표 후 토론


토론이 끝나고

1942년 완성된 홍범도(초연 당시 제목은 의병들)는 같은 해 최길춘의 연출로 드디어 무대에 올려졌다. 원래 태장춘은 홍범도3부작(‘사냥꾼 출신 홍범도의 투쟁을 그려낸 의병들-1/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붉은 빨치산의 지휘자가 되는 것-2/레닌과의 만남 이후 이상적이며 분명한 혁명가 혹은 국제주의자가 되는 것-3’)으로 완성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1943년 별세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홍범도1947년에 이길수의 연출로, 1957년에 채영의 연출로, 1960년에 맹동욱의 연출로 연거푸 무대에 올려졌고, 2013년에는 날으는 홍범도로 개제(改題)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이때의 연출가가 바로 이번에 직접 참여한 이 올레그 선생이었다. 바로 그 분이 발표 시간 내내 청중석에 앉아 계셨다.

 

전체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희곡 홍범도.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을 홍범도 잡기 서사일본군 잡기 서사의 두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의 서사를 형성하는 모티프(motif, 話素)들은 상당히 많았는데, 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를 그려내다 보니 그 모티프들의 짜임이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흠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두 서사들과 각각의 모티프들을 살펴보자.

 

홍범도 잡기 서사

 

*1

-배신모티프: 우진원흥재덕월향 등이 배신과 음모를 통해 홍범도 잡기에 나섬. 우진은 야마도의 끄나풀인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홍범도의 가장 믿음직한 수하로 행세하면서 홍범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일진회 회원인 원흥과 재덕 역시 야마도의 하수인으로 홍범도의 체포에 나섬.

-기만모티프: ‘월향이 일본군 장교를 죽인 자라는 광고를 냄으로써 의병들을 안심시키고 홍범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만계(欺瞞計)를 적절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음.

 

*21

-날조모티프: 홍범도 처의 편지를 날조하여 홍범도 귀순 시키기.

*22

-염탐모티프: 재덕원흥중대부관 등이 밀고꾼 조니를 통해 마을의 의병 참여자들을 염탐.

-사냥모티프: 원흥이 의병들을 지칭하는 백두산 포수를 들먹이며 묘한 수단으로 홍범도를 잡겠다고 함.

 

*31

-함정모티프: 우진이 거짓으로 의병들과 홍범도를 궁지에 빠뜨림.

일본군 잡기 서사

 

*21

-복수모티프: 야마도가 첩자로 파견한 월향이 동생인 홍범도 부대의 의병 일남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진실을 듣고 홍범도 부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함.

 

*22

-사냥모티프: 연옥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백두산 포수로서 못된 짐승을 잡는다고 언급함으로써 일본군 잡기 서사의 핵심으로 사냥 모티프 제시.

 

*31

-복수모티프: 월향이 홍범도의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우진의 정체를 홍범도에게 경고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인 원수 일본군과 배신자 우진에게 타격을 입힘.

-기만모티프: 변장한 홍범도가 일본군을 총공격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변장한 채 치강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작전에 성공함.

 

*4

-복수모티프: 일본군을 토벌하고 배신자 우진원흥재덕을 잡아 처형함.

-사냥모티프: 일본군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의병 용준을 구해내면서 훌륭한 포수가 되려면 악한 짐승에게 물려 보아야 한다는 비유의 말을 던짐. 즉 일본군을 잡으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사실이 이 비유의 핵심임.

 

이런 점들로부터 희곡 홍범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할 수 있었다.

 

1. 살아있는 주인공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의 체험을 작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가 실화극 내지 역사극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2. 주인공 홍범도는 민중들 사이에 전설적 영웅으로 자리 잡은 존재였으나, 주인공의 영웅성을 과장하지 말고 주변 인물들의 활약상을 부각시켜 달라는 홍범도의 주문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소화시키고, 작품의 사실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3. ‘홍범도 잡기일본군 잡기라는 상반되는 서사들을 작품의 두 축으로 내세우고, 각각의 범주에 배신기만날조염탐사냥함정복수등의 모티프를 설정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주제를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

4. 실존하던 주인공의 강한 주문에 따라 철저한 사실성의 구현을 지향했으면서도, ‘전설적 영웅이자 호랑이 잡던 백두산 포수라는 홍범도의 이미지를 이야기 전개의 미학적 요소로 드러나지 않게 군데군데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이나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

 

이제 옛날의 홍범도를 역사의 뒤안에 묻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가 새로운 시대의 홍범도를 만들어 무대에 올림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단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2017. 10. 25.)


이종찬 이사장과


행사 후 저녁 자리에서 이종찬 이사장, 반병률 교수 등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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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7.09.30 15:15

  아, 바이칼!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5   

                                                                            조규익   

 


우리의 바이칼 탐사는 리스트비양카에서 시작되었다.


식당에서 바라본 리스트비양카 마을 모습


점심 후 들른 스키장(전망대 리프트 출발점)


전망대 가는 리프트 출발점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지듯.


일행 뒷모습


아, 저 숲!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쁜 꽃들이! 혹시 구절초인가요?


러시아에만 있다는, '이반차이' 만드는 꽃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는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뚜렷한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잠두봉 산악회도 다녀갔군요!

 

 

                                                                                                                        조규익 

    

언제부턴가 바이칼을 만나고 싶었다. 민족의 시원(始源)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호수 물을 쭈욱!’ 소리 나게 들이마심으로써 내 협애(狹隘)한 인식의 천박한 때를 벗겨내고 싶기도 했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발자취를 추체험하는 대장정, 그 한복판에서 바이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떠난 게 오전 10시 남짓. 한 시간 넘게 달려 바이칼의 한 계곡 리스트비양카(Listvyanka)에 도착했다. 호숫가를 따라 5km나 이어진, 크지만 작아 보이는 마을, 자연과 어울리는 목조 주택들이 정겨운 곳이었다. 언덕배기에 붙여 지은 식당에서 감자를 주 재료로 만든 러시아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허나, ‘개똥이 어딘들 없으랴?’ 그곳에서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젊은 중국인 여성과 그 가족을 만났다. 러시아의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음식 값을 내지 않으려 작전을 쓰는 듯한 중국 관광객들을 통해 이제 배 밖으로 삐져나온 중국인들의 간덩이와 몰염치를 그곳에서도 목도했다. ‘러시아에 있긴 하지만 엄청난 바이칼을 친견하고자 온 내겐 시끄럽고 불쾌했으나, 참 볼만한 광경이었다.

 

점심 후 30여분을 달려 국립공원 안의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 행 리프트의 출발지에 도착했다. 겨울에는 스키 객들을 위해, 그 외의 계절에는 바이칼 호 탐승객들을 위해 리프트는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수의 진면목이 비록 일부분이지만 드러났다.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가벼워 차라리 입을 닫을 수밖에! 굳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숭엄미라고나 할까.


전망대에서 호수를 담는 사람들


바다같은 호수가 꿈처럼 펼쳐져 있었다!


김병학 선생이 자신의 감동을 표현했다.


한반도 평화문화제를 지낸다고 했다. 기원의 대상은?


바이칼의 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


호숫가에도 이꽃은 만발해 있었다!


바이칼에서만 산다는 민물고기 오물(omul). 담백한 맛이었다.


구워낸 오물을 안주 삼아 일행과 보드카 한 잔을. 블라디미르 김 선생과 정막래 선생.


호수 물에 흥분한 사람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부랴트 자치공화국의 사이에 위치한, 세계 최고(最高/最古)의 바다 같은 호수. 2,500만 년은 누가 헤아린 역사이며, 최고 수심 1,621m는 누가 헤아린 깊이란 말인가.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2,000m 급의 산들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나 호수의 물을 가두고 있단 말인가. 360여개의 강이 흘러 들어오지만, 출구는 앙가라 강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일까. 저토록 깨끗한 물은 세계 담수(淡水)1/5에 달하는 양이라고 한다.

 

2,000m 이상의 연봉들로 둘러싸인, 면적 31,722, 길이 620km, 24~79km, 해안선 2,100km 최고 수심 1,642m의 바이칼. 바이칼에서의 우리 민족의 원류를 상상하는 것은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다는 인구 40여 만에 달하는 부랴트 족의 샤머니즘과 우리의 그것이 적잖이 겹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매어놓았는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엔 형형색색의 끄나풀들이 칭칭 둘러 매여 있었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무당굿의 흔적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몽의 탄생지가 이 근처였다는 설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우리 민족의 발원처가 여기 아니겠느냐는 의문은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뀌어갔다.

 

유람선이 호수 복판으로 다가갈수록 시원의 생명이 풍기는 비린내가 나의 내면으로 차올랐다. 주변의 참한 봉우리들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곳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오물(omul)'은 두껍게 이랑지는 코발트블루를 차고 올라왔다. 조용한 호수의 표면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것도 그 속에 생명들이 깃들어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념에 젖어 말을 잊어버리고, 호수를 둘러 싼 병풍산들은 흡사 물 한 방울이라도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촘촘히도 어깨들을 겯고 있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수면을 훑으며 땀에 쩐 여행객들을 위로하고, 저 건너 산 위로 석양은 엷어지고 있었다. 눈 깜짝 사이에 낯선 다음 행선지로 나그네들을 몰아대는 바이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하늘, 구름, 호수


일행들과 함께


물에 비친 산 언덕


물에 비친 산,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인가들


산, 그리고 물


호수에서 앙가라강이 갈라져 나가는 곳, 그 언저리를 안개가 살짝 둘렀네요! 


고기잡이 배일까요?


호수에서 뒷산을 배경으로...


그 배가 또 오는군요.


호수를 나와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숲에서 티피를 만났다.


사냥꾼들의 티피


여러 채의 티피들이 자작나무 숲에...


돈 받고 말을 태워주는 곳도 있었다.


식당 앞의 즉석 노점상. 주로 차 종류, 열매 종류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노점상으로 나선 이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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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7.09.09 16:08

       이르쿠츠크의 꿈, 러시아의 꿈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4

 

 

                                                                                                            조규익

 


우리는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앙가라강과 이르쿠츠크 시가 개념도


아름다운 이르쿠츠크


앙가라강



이르쿠츠크 강


사진 찍으러 강가에 나온 한 쌍

 

725() 아침 무렵 단잠을 깬 우리는 하바로프스크 역에 잠시 내려 고려인협회장을 비롯 인사차 나온 여러 명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조선 볼셰비키 여성 혁명가인 김 알렉산드라, 19184월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임정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등이 활약한 역사적 공간이자 극동 최대의 도시가 바로 하바로프스크였다. 횡단열차를 탈 경우 모스크바로부터는 약 8,500km 지점으로, 7시간의 시차가 생기는 곳이다. 시의 중심부분은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이 합류하는 부분의 우안(右岸)에 있었고, 철도역사 뒤로 부요한 시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듯 했다. 원래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위한 거점이었으나, 1918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헤어진 뒤 다시 열차에 올랐다. 그로부터 또 한밤을 새워 만주횡단철도(TMR: Trans-Manchurian Railway)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연결되는 카림스카야를 지나 울란우데를 만났다. 그 지역부터 환바이칼 코스가 전개되는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의 밀림이 만화경처럼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울란우데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구간 최고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코스이자 몽골 횡단철도 분기점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달려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톡 출발 사흘째인 27() 오후 4시경. 72시간 만에 드디어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참 아름다운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였다. 앙가라(Angara) 강과 이르쿠츠크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여 그 풍광이 기가 막혔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들을 비롯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전통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것들은 예수공현 성당(Epiphany Cathedral), 즈나멘스키 수도원과 보고야블렌스키 성당(The Znamensky Monastery and the Bogoyavlensky Cathedral). 전자는 1718년 건축을 시작하여 1746년 완성된 성당이었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게 봉헌된 후자 즈나멘스키는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수도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이르쿠츠크 최대의 종교적 기념비이자 시베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1689년 건립되었고,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1693년에 건립되었으니, 300여년이 넘은 건축물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막 완공한 듯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수공현 성당


성당내부


성당 내부


즈나멘스키 수도원


시청 앞 영혼의 불꽃

 

러시아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 동 시베리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바이칼 호 서쪽 65km 지점에 위치하여 차분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여름 휴양지였다. 앙가라강을 통해 흘러드는 바이칼호수의 깨끗한 물이 한낮의 햇살에 반사되어 도시 전체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65만 명이 모여 사는 곳. 바이칼 호수 관광의 기점으로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곳이 1920년 한인공산당이, 1921년 고려공산당이 창립된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버스는 칼 마르크스 거리를 지나 벨릐 돔 부근의 앙가라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칼 마르크스 거리는 앙가라강변에서 도심 북쪽까지 연결된 중심대로로서, 길을 따라 박물관과 극장, 대학교 등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의 관심은 우뚝한 동상으로 남아 있는 알렉상드로 3세와 현재는 이르쿠츠크 국립대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는 벨릐 돔. 알렉상드로 3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나, 정작 그 아들 니콜라이 2세에 이르러 제정러시아는 종말을 고했으니, 위대한 황제가 이룬 역사(役事)와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그 철도 덕에 개발의 시대가 개막됨으로써 버려졌던 시베리아에 온기가 돌았는데, 그럼에도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 동상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리로서는 몸서리쳐지는 조선공산당 선언식이 있던 벨릐 돔이었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까지 와서 자신들의 정치적 결사체의 선언을 한 것은 이곳이 바로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의 핵심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그 이유가 있었다. 식민 치하의 조국에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의식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바이칼로 떠나기 전 찾은 곳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 박물관.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적 지주 세르게이 발콘스키(Sergey Volkonsky) 공작의 집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182512월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시도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이니, 데카브리스트란 ‘12월 당원을 뜻한다. 182512,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살리기 위해 짜르 체제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청년 장교들 100여명이 봉기했으나, 실패한 혁명이었다.

6백여명이 체포되고 121명이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주모자 5명은 교수형, 116명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그 가운데 31명은 종신유배, 85명은 장기유배였다. 형이 끝난 뒤 이들의 상당수가 이르쿠츠크에 정착한 것이다. 실패로 끝난 혁명이었지만, 친 유럽적인 이들의 삶이 이르쿠츠크에 자유로운 유럽문화를 이식하고, 농노제의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시 등 민주주의의 기풍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는 등 이 사건의 반향은 매우 컸다. 이들 모두 귀족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시대에 저항한 혁명가들이었고, 그 정신을 대표한 사람이 바로 발콘스키 공작이었다. 발콘스키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20년 유형의 판결을 받아 1826년부터 네르친스크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1835년부터 1851년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1847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고, 1851년 형기 만료와 함께 떠났으며, 이 집은 1985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방들에는 피아노, 침대, 의자, 식탁 등 당시의 삶을 보여주는 생활 집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사진도 잘 정돈되어 있어,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푸쉬킨의 시 낭송 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피아노에서는 무도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비록 뜻은 꺾였으나, 출중했던 이상주의자 데카브리스트들이 시국을 담론하면서 잔을 기울이던 기개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비록 볼셰비키 혁명으로 마무리되어 오늘날의 우리를 괴롭히는 비극의 단초가 되긴 했으나, 러시아 청년장교들의 꿈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보편 이상으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갑지만 시원한 동시베리아의 이르쿠츠쿠에서 자유혼을 크게 호흡한 우리는 다음 여정 바이칼호로 내쳐 달렸다.<계속>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1985년 박물관 개장날 몰려든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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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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