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02.03 16:06

 

 

지금 한국의 대학들에 만연되고 있는 '반지성적 문화'가 어디 한 두 가지랴?

어느 학교라고 콕 집어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모두 거기서 거기. ‘도낀 개낀’ ‘난형난제’, ‘도토리 키 재기의 대학사회 아니더냐! 한 치 앞서 간들 무어 그리 나을 게 있고, 한 치 뒤쳐졌다고 무어 그리 못할 게 있을까?

 

한 달 전쯤인가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 하나가 찾아와 자못 흥분된 어조로 내게 말했다.

 

하루는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큰 덤프트럭 두 대가 도서관의 책을 그득하게 때려 싣고학교 밖으로 나가더군요. 궁금해서 직원에게 물어본즉 덤덤한 어조로 보존서고에 있는 도서들을 폐기처분하는 중이라고 하데요.”

 

그래. 제정신을 갖고서야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에선들 학자로살아갈 수 있겠느냐? ‘집안이 좁으니 세간들 가운데 때가 묻은 것들을 골라 쓰레기장에 버리듯, 버리는 거겠지!’라고 대답하는 내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그 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의 말. 며칠 전 논문을 쓰다가 급한 책이 있어 학교 도서관을 검색하니 보존서고에 소장되어 있더란다. 그러나 지금 정리 중이라 볼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정리'라는 것이 '폐기물 처리'를 말했고, 미루어 짐작컨대 그 책들은 폐기도서 트럭에 실려 나간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제자를 통해 이웃 학교의 도서관에서 다섯 권이나 되는 그 책(영인 자료 본)을 빌려다가 아예 복사제본까지 해버렸단다. 대학생들은 잘 보지 않아 자리만 차지하는 책이니, 도서관 직원들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만약 그런 (귀한) 책을 폐지로 취급하여버렸다면, 속된 말로 '참 망할 ××들'이라고 그 친구는 크게 흥분했다.

 

#꽤 오래 전이다. 이름뿐이었지만, 도서관의 무슨 위원이라 하여 1년에 한 번 정도 있는 회의에 나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 이제 IT 시대이니, 페이퍼 북은 줄이거나 없애고 e-book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고, 서양의 명문대학들은 미련해서 도서관에 페이퍼 북 채우는 노력을 기울이는 줄 아냐고 역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하기야 엔지니어들이 대학의 수장이나 도서관의 책임자로 군림하는 시대이니, 그들에게 도서관의 의미를 묻는 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일 것이다.

 

#내 연구실에는 출판사 사장들이나 영업사원들이 수시로 들른다아직은 제법 책을 사주기 때문일 것이다. 끙끙 무거운 책 짐을 들고 방문한 그들에게 주로 인문학 도서들을 폐기처분하는’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만행^^을 말해줄 수가 없다. ‘앞으로 경기가 풀리면 출판시장도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입에 발린 위로의 말이나 뱉어낼 뿐, 축 쳐진 그들의 어깨를 받쳐 줄 희망적 언질을 건넬 방도가 없다.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힘들게 만든 책들이 소설책들처럼 잘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처분된다는 말을 그들에게 어찌 해줄 수 있으랴.

 

***

 

내게 미국 대학들의 가장 감명 깊은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교수도 학생도 실제적인 학구 활동은 그곳에서들 펼치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대학자 노교수를 만난 것도 숲처럼 빽빽한 서가들 사이에서였다. 적어도 내가 찾는 사람들은 늘 연구실 아니면 도서관에 있었다. 그런 도서관들에서 멀쩡한 도서들을 폐기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공간이 충분한 점도 그 이유의 하나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수백 년 그들을 지탱해온 지성적 문화 풍토를 누구도 거역하려 들지 않기 때문으로 보였다. 물론 그들에게도 공간의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대학 도서관들에서는 기프트 센터(gift center)’를 마련하고 서고에서 퇴출되는 책들을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학생들이나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대학 도서관 뿐 아니라 지역의 공공도서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기적으로 폐기 도서들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다시피하고 있었다. 책을 한 보따리씩 들고 나오며 함박웃음 짓는 그들이 부러웠다. 한없이 부러웠다. , 선진국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학문적 변화주기로 볼 때 인문학과 이공학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실용적 도구학과 정신적 학문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학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미 이 땅에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대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형이하적 도구학 전공자들이 패권을 휘두르고, 나라 전체로도 지도적인 학자들이 모조리 사라진 형국이니, 지금의 대학들은 대학이 아니다. 대통령이 대학을 알 리 없고, 교육부 장관은 정권의 입맛에 맞춰 우왕좌왕하다가 정치판으로 복귀하면 그만이며, 교육 관료들은 잠시잠시 그런 장관의 손짓에 맞춰 춤추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나라, ‘해외 유학 동안 열등생으로 지내다가 복귀하여 지배자 행세하는’(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미국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2015, 참조.) ‘지적 사기꾼들’(어떤 인사의 말 인용)이 학문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 정치권과 학계를 부지런히 오가며 곡학아세(曲學阿世)해도 대단한 학자로 대접받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하기야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면, 페이퍼 북 없이도 논문 한 편을 써내는 날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인사가 내 주변에 있으니, 다시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ㅠㅠ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서가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서가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 시립도서관

 

 


스틸워터 시립도서관에서 폐기도서들을 싼 값으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오클라호마주립대학(OSU)의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

 

 


오클라호마주립대학(OSU)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의 서가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1.26 21:09

 

게리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 폰을 켠 게 불찰이었을까.

이메일 함에 레슬리(Lesley) 교수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

‘Very sad news’란 세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게리(Gary Younger)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각주:1]

그의 어머니와 함께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갑자기 캄캄해진 눈앞에서 추억의 필름 한 통이 스륵스륵 돌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의 고속도로들.

주변의 경관들이 단조롭고 광활해서 짜증나던 곳.

풀을 뜯던 목장의 소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새김질에 몰두하던 곳.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열심히 원유를 퍼내던 곳.

그런 한가한 도로에서 웬 교통사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연구원으로 한 학기를 지낸 곳이다.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그를 만났다.

고등학교 교사를 몇 년 지낸 뒤 진학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보였다.

한국 현대사, 그 중에서도 한미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였다.

자주 내 연구실을 찾아와 물었고,

우리는 꽤 긴 시간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문제에 관한 논평을 내곤 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통이었다.

가끔 내가 너를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가당찮은 너스레를 떤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귀국 무렵 그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프로그램에 지원하게 했고,

귀국 후 얼마 만에 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는 열심이었다.

한국말도 열심히 배웠다.

연구기관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도 열심히 수집했다.

내 말대로 몇 년 안에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로 열심이었다.

술자리에선 미국인답지 않게 소주를 잘 마시고 삼겹살도 잘 씹었다.

‘1년 만에 한국사람 다 되었다는 농에 식당 가득 파안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늘나라로 갔다는 그의 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는 꿈을,

이승 아닌 어디서 펼치겠다는 것일까.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 후 과정을 하겠다는 그 계획을 어디 가서 이루겠다는 것일까.

어학능력도, 분석력도, 아시아 역사에 대한 지식도 출중한 그였다.

그래서 앞으로 10. 아니 사실은 10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그였다.

미국의 일본이나 중국 전문가들이 곁다리로 내 뱉는 한국 관련 논평들이 못마땅하여

그가 제대로 된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해온 나였다.

지금 30대 초반이니, 어쩜 40대 초반에는 미국의 실력 있는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여

내 속을 후련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누구 말대로 나 이제 갑니다라는 말도 못한 채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죽음보다 삶의 덧없음, ‘수포로 돌아간 삶의 계획,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가 가꾸어 온 꿈과 삶의 흔적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간 것인가.

저 숲속의 늠름한 나무들은 못 된다 해도

하다못해 길 가의 못난 띠 풀로라도

하다못해 보이지 않는 메아리로라도

모습을 바꾸어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잠시 고갤 숙여 내려다보면 보일 것이고

잠시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들릴 것 아닌가.

그렇게도 열심히 꿈을 보듬어가며 살아온 인생인데...

 

게리여,

부디 이 땅의 하찮은 꿈 따윈 접어두고

그곳에 맞는 새 꿈을 가꾸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라!

머지않아 찾아갈 그대의 동료들을 위해

그대만의 멋진 영역을 잘 가꾸어 놓으시라!

 

 

2016. 1. 26.

 

게리 영거의 부음을 듣고

 


숭실대 교정에서

 

 


올림픽 공원에서

 

 


백규 연구실에서 게리와 세바스티안

 

 


백규 연구실에서

 

 


숭실대 교정에서

 

 


학교 앞 식당에서

 

 


선무치료학 전문가 이선옥 박사 및 이 박사의 지인들과 함께

 

  1. *레슬리 교수로부터 온 이메일의 번역문과 원문// 조박사님께 얼마 전부터 박사님께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 급한 일이 생겨 연락드리네요. 오늘 아침 일찍 게리 영거와 그의 모친이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끔찍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어요.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저는 우리 학과에서 지금까지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명랑했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자신의 공부에 관하여 열심히 말했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가 한국 역사의 뛰어난 학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며, 그래서 전 학과가 모두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서도 그에 관하여 똑같은 느낌을 갖고 계시리라 믿어요. 특히 박사님과 그가 한국에서 얼마동안 함께 계시기도 했잖아요? 그는 박사님이 OSU를 방문해주신 점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했어요. 글쎄요. 유감스럽게도 제가 나쁜 소식을 전한 사람이 되었네요. 저는 박사님께 저의 위로를 보냅니다. 게리의 죽음이 박사님께도 굉장한 상실이겠지요. 레슬리 림멜 드림 Dear Dr. Cho, I've been meaning to write to you for some time, but now there is something else that is rather urgent. Earlier today I learned the horrible news that Gary Younger and his mother were killed in a car accident on their way to Stillwater from Houston. I don't know any details, and I am heartbroken about the loss of one of the best students we have ever had in our department. He was always so cheerful and eager to work and to talk about his work; we were all certain that he was going to be an outstanding historian of Korea. He was also so kind and generous to others, and the whole department is in mourning. I am sure that you felt the same way about him, especially as you and he spent time together in South Korea. He so appreciated your visit to OSU. Well, I am sorry to be the bringer of bad news. I send you my condolences; this must be a great loss to you, too. Sincerely, Lesley Rimmel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알림2014.11.0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08.26 10:53

 


부머 호수 조성 기념비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부머의 서정

 

 

 

 


늦가을과 초겨울의 어름에서

 

 

 

 


부머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부머의 나무들은 물에서도 뿌리를 내리는구나

 

 

 

 

 

 

부머(Boomer)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잠시 머물다 떠나온 스틸워터는 말 그대로 낙원 같은 곳이었다. 앞의 글 어디에선가 스틸워터의 어원을 밝힌 바 있지만, 말 그대로 고요한 물그 자체였다. 맑은 공기, 녹색 풀과 나무, 알록달록한 꽃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들, 기분 좋은 촉감으로 끊임없이 스쳐가는 바람,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차량 대수에 비해 아주 넓은 도로, 나지막하고 예쁜 집들... 집의 출입문을 닫으면 심심산골의 절간이요, 문을 열고나서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확대판이었다.

 

특히 우리를 매료시킨 두 가지가 이곳에 있었다. 첫째는 숙소를 나와 도보로 500m만 걸어가면 5km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cross country course)가 있는데, OSU가 소유한 공인 경기장이자 주민들의 산책코스였다. 울창한 숲과 목초지, 목장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 낭만의 오솔길이었다. 둘째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부머 호수. 스틸워터의 북쪽 면을 접한 아름다운 호수였다. 여러 나라에서 호수들을 구경했지만, 스위스 베른의 시가지에 거울같이 고여 있던 호수를 제외하곤 아직 부머 만한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인공 호수였다!

 

그런데, 부머(Boomer)’일까. 오클라호마 사람들은 이주해 온 시기에 따라 수너(Sooners)’부머(Boomers)’로 불린다.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1889인디언 세출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지금 오클라호마 지역인 ‘(인디언들에게)할당되지 않은 땅들[Unassigned Lands]’을 (백인)정착민들에게 개방하려 했는데, 대통령의 서명 직전 그 지역들에 들어가고자 시도한 미합중국 남부 정착민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부머들이었고, 그들보다 10년 정도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수너들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인디언들과 함께 그 두 종류의 백인들이 오클라호마 주민을 형성한 것이었다.

스틸워터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고 부머 레이크라 호칭한 것은 그들이 아끼는 이 지역의 보물에 자신들의 역사성을 새겨 놓으려는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스틸워터 사람들은 부머 호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호숫가를 걷거나 달리고 자전거 페달도 열심히 밟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 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물 위를 새까맣게 덮은 새떼를 관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OSU의 아름다운 연못 쎄타 폰드(Theta Pond)에는 캐나다 기러기들(Canadian Geese)과 오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캐나다 기러기는 철새인데, 쎄타폰드의 녀석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낙원 같은 그곳을 떠날 생각들을 아예 접어버린 듯 했다. 오후쯤엔 가끔씩 휘익 날아올라 대열을 유지한 채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그러나 다음날 쎄타폰드에 나가보면 그 녀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전히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부머 호수에 가보고 나서야 우리는 녀석들이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게 되었다. 쎄타폰드에서 보던 녀석들을 부머 호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머 호수는 녀석들의 임시 고향 혹은 새로운 정착지인 셈이었다. 유럽의 백인들이 밀고 들어와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정착했듯이. 그곳에는 호수 인근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캐나다 기러기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몸집도 크고 생김새도 화려한데, 퍼런 색 똥은 문제였다. 아무데나 갈겨대는 까닭에 포장도로는 퍼렇게 도색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각자의 영역에 나가 먹이활동을 한 다음, 저녁 무렵이면 부머 호수로 돌아와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고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1925년에 완공된 부머 호수는 지역 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기도 하고 시민들에게 오락과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표면적 251 에이커[307,224 ], 유역면적 8,954 에이커[10,959,696 ], 호숫가의 길이 8.6 마일[13.76 km], 평균 수심 9.7 피트[2.96 m]로 꽤 큰 규모였다. 부머 호수에 살고 있는 주된 어종은 큰 입 배스[largemouth bass]로서 현재 우리나라 내수면에서 토종물고기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몹쓸 존재들이다. 이외에도 얼룩메기, 넓적머리 메기, 크래피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

 

물론 흐르는 물도 좋고,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처럼 잔잔하여 마음까지 비춰볼 만한 호수는 더 좋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새들을 바라보는 노인들, 땅으로 올라온 오리와 기러기들을 아장거리며 쫓아다니는 아가들, 수면에 비친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나그네 백규, 희한하게 생긴 탈 것에 몸을 누인 채 호숫가를 질주하는 장애인 남성, 열심히 달리면서 살을 빼고 있는 젊은 여성들... 모두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부머 호수에 안겨 있는 모습. 스틸워터가 낙원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날 부머 호수에서

 

 

 


시린 물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즐기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들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캐나다 기러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일군의 캐나다 기러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08.19 23:36

 

 


판카 시티 입구의 'Pioneer Woman 상[1930년 Bryant Baker 작/청동 상]'앞에서

 

 

 


판카 시티 입구의 멋진 집들

 

 

 


판카 시티 'Pioneer Woman Museum' 입간판

 

 

 


'Pioneer Woman Museum' 의 소장품[인디언 의상 및 소품들]

 

 

 


'Pioneer Woman Museum' 소장품[피리 부는 인디언 추장]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의 소장품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 의 소장품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의 소장품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판카 부족과 가까이 지내던 인디언 부족들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Park' 표지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Ponca)인디언들

 

 

 

작년 가을 무렵. 스틸워터에 정착한 지 한 달 반이 지나자 거주지 주변의 것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판카 시티(Ponca City)’가 있다는 말을 들어오다가 캐나다에서 날아 온 큰 아이와 함께 답사에 나섰다. 원래 우리는 폰카로 발음했지만, ‘판카혹은 팡카로 발음하는 이곳 사람들을 따라 판카로 바꾸었다. 집을 나서서 177번 하이웨이에 접어든 후 정북 방향 직선으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울창한 나무숲에 숨듯이 들어선 집들은 모두 고급스러워 대체 어디에 판카 인디언들이 있다는 건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아칸사 강(Arkansas River)이 감돌아 흐르고 호수[Lake Ponca]가 고여 있어 풍광도 이고, 인구 또한 많지 않은지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판카 족은 수어족[Siouan-language group] 가운데 데기한 어[Dhegihan language]를 사용하는 사람들인데, 캔자스 주 오세이지 카운티의 오세이지 족네브라스카의 오마하 사람들오클라호마와 네브라스카의 판카 사람들이 사용하던 수어가 바로 데기한 어다. 미 연방정부가 인정한 두 종의 판카 족이 있는데, 네브라스카의 판카 족과 오클라호마의 판카 인디언들이 그들이다. 후자가 바로 우리가 만나러 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한 부족으로서 원래 오하이오 강 계곡에 살다가 사냥터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었다. ‘Ponca’는 칸사(Kansa), 오세이지(Osage), 쿼포(Quapaws) 사이의 한 클랜 명칭으로서 어원상 살인자[Cut Throat]’란 무시무시한 뜻을 갖고 있다 했다. 

 

이 부족 역시 여타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한 희생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판카 족의 역사는 꽤 길어서 구비전승에 따르면, 컬럼버스가 미 대륙으로 오기 전에 미시시피의 동쪽 지역으로부터 이주했다고 한다. 뉴욕 주에 살던 이로쿼이(Iroquois) 족의 침략을 받아 북쪽에 있던 전통 거주지역을 버리고 오하이오 강 지역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후 거기서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인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1701년 지도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서양 상인들과의 교섭을 지속해 오다가 중간에 천연두가 창궐하여 800여 명 되던 인구가 200으로 줄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다시 700으로 회복되었다 한다. 평원에 사는 대부분의 다른 인디언들과 달리 이들은 옥수수와 채소들을 재배했고, 바이슨 사냥을 하며 살았다.

1817년의 평화조약을 필두로 1865년까지 판카 족은 미국정부와 여러 차례 조약들을 맺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주권과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특히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미국의 실수로 자신들의 땅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를 맞게 되자 이들은 미국 정부의 방침에 대항하여 집단 거주지로 이주하지 않는 방법을 쓰게 된다. 미 의회가 1876년 강제로 북쪽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을 현재 오클라호마의 집단 거주지로 옮기기로 결정했음에도 새 보호구역이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거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강제로 옮겨야 했고, 새 땅에서 판카 족은 말라리아와 더운 날씨, 식량 부족 등으로 고생하다가 첫해에만 25%의 부족원들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다.

 

1877년 인디언 구역의 쿼포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 판카 족은 아칸사와 솔트 폭 강에 접한 자신들의 땅으로 이주했으며, 동친혈연(同親血緣) 주민들은 티피(tipi) 마을을 구성했고, 혼혈 주민들은 치카스키아 강 언저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판카 지도부가 미 정부에 맞서는 동안 미국 정부는 커티스 법(Curtis Act)으로 부족의 정부를 해체하고 타 부족들과의 동화를 강요하면서 1891년과 1892년의 도스 법(Dawes Act) 아래 개개 구성원들에게 보호구역의 땅을 나누어 주었고, 분양 후 남은 땅은 인디언 아닌 사람들에게 팔 수 있도록 했다. 오클라호마 주가 성립된 후 나머지 판카 땅들은 풀려서 101개의 목장의 주인들에게 팔렸고, 판카 주민들은 이곳에 고용되기도 했다. 1911년 판카 족의 땅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수익을 얻었으나, 정유공장들이 아칸사 강에 폐유를 방류함으로써 환경에 재앙을 입기도 했다. 1950년에는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에 의거, 판카 족은 새 정부를 만들었고, 같은 해 920일에는 부족 헌법을 만들기도 했다. 판카 족 행정의 중심은 오클라호마 주의 화이트 이글(White Eagle)에 있으며, 현재 판카 족 인구는 4,200명에 달한다.

 

현재의 판카 족이 안정을 찾기까지 미국 정부와의 투쟁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라는 인물이었다. 사실 판카 족을 찾아 온 우리도 그의 행적과 모습이 궁금했다. 여느 인디언 추장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역시 강제이주에 격렬히 저항했다. 심지어 그의 큰 아들이 죽을 때 그는 부족의 조상 땅에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할 정도였고, 실제로 그는 보호구역에서 판카 족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다가 체포되어 포트 오마하에 구금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허락 없이 보호구역을 이탈했다는 이유였다. 그의 체포와 구금에 많은 사람들이 법정 투쟁으로 그를 도왔고, 뛰어난 두 명의 변호사가 무료로 소송을 대리해 주기도 했다. 1879년 네브라스카의 오마하에서 열린 재판에서 미 연방 지방법원은 사상 최초로 미국 인디언들도 미합중국 법 안의 사람들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스탠딩 베어가 보여준 불굴의 저항 덕분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권한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과연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스탠딩 베어의 모습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미합중국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목숨을 걸고 항거함으로써 자신의 부족은 물론 여타 인디언들이 보편적인 생존권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한 점에서 그는 인디언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서서 주변을 압도하는 그의 거대한 동상을 바라보며 특정 부족이나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지도자의 온당한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백인들과 여타 부족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는 그 공간에서 스탠딩 베어의 정신 덕에 판카 족은 인디언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오세이지 족에 대한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물건 명칭-'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물건 명칭-'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문장과 뜻-'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부족 서사시-'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톤카와 부족의 문장-'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오세이지 네이션의 문장-'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족에 대한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스탠딩 베어에 대한 전자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Waynoka에서 일박을 한 체로키 인

 

 

 

 


웨이노카 숙소 앞의 소박한 식당-Cherokee Station

 

 

 

Cherokee Station의 저녁식탁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07.26 22:05

 


오클라호마주 무어(Moore) 시 초입의 조형물과 자동차들

 

 

 

 

에프 엠(FM)대로 살면, 망할까?

 

 

 

미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차를 구입하여 몰기 시작했다.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는 십 몇 년 전에 지내던 LA보다 도로가 훨씬 한산하고 넓었다. 미국에서는 교차로에 진입하기 직전에 반드시 정지한 다음 어느 방향이든 먼저 와 서 있는 차가 진입하도록 양보해야 한다. 비록 사방에 차 한 대 없어도 반드시 정지하여 두리번거리며 확인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정해진 법규였다. 저 멀리 차도로 사람이 걸어가면 무조건 서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의 원칙이었다. 신호등을 지키는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 법규를 철저히 지키는 미국인들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초기에는 가끔 착각하여 한국에서의 운전 습관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런 미국의 운전 관습이 몸에 배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이처럼 내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감동을 받았던 건 미국인들의 이른바 리걸리즘(legalism)’이었다. ‘고집스런 법칙 존중주의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간혹 답답하기도 했으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최고의 장점이었다.

 

***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일리걸리즘(illegalism)’이 관습화된 나라다. ‘고집스런 범칙주의(犯則主義)’  혹은일상적 범칙주의’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어기는 맛에 법을 만든다는 말이 상식처럼 되어 있고, ‘예외 없는 법 없다는 속담을 진리처럼 숭상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차를 몰고 거리에 나가보라. 아무리 차량 대수에 비해 길이 좁아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틈만 나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에 사람이 지나가면 전속력으로 가속페달을 밟아 그 앞을 !’하고 가로질러 내빼는 건 일상적인 모습이다. 직진차선에 차가 밀린다 싶으면 그 옆으로 빠져 나가는 우회차선을 쌩 달려 앞쪽으로 간 다음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운전자들을 조롱하듯 끼어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총기 소지가 미국처럼 자유로워진다면, 아마도 사망자의 90% 이상은 도로에서 생겨날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내비게이터 덕분이긴 하지만, 감시카메라의 위치를 귀신같이 알아낸 뒤 그 사이사이에선 엄청난 과속도 일삼는다. 당국에서는 구간 단속이라는 지혜까지 내놓았지만, 요즘은 머리 좋은 운전자들 때문에 그것도 무력화 된지 오래다.

이런 일리걸리즘이 교통에만 국한되는 문제일까. 많은 돈을 벌면서 세금 한 푼 안 내고, 건장한 체구로 태어났으면서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고, 집 지을 수 없는 땅에 호화주택을 짓고, 선박의 구조를 변경하면서까지 화물을 과적하고...주워섬기자면 끝이 없다.

 

***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국가 대개조에 나서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도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있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지하철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운전자, 정비사 등이 간단하지만 중요한 수칙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충대충 해!’라거나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겄어?’라는 무심함과 대범함의 천국이 우리나라다. 집을 지을 때도 넣으라는 철근을 다 넣지 않고, 시멘트의 품질규격이나 분량을 지키지도 않는다. 업자들이 찔러주는 돈 봉투에 감독하는 놈들은 슬쩍 눈을 감아주곤 한다. 식당 하면서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 원칙을 지키면 멍청이다. 앞 손님이 먹다 남긴 음식을 다른 손님에게 다시 제공하는 것은 애교. 식재료가 쉽게 상한다고 농약을 치는 인간들이 그들먹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남이야 먹고 죽든 말든, 차를 타고 가다가 바퀴가 빠져 죽든 말든, 곤히 잠자다가 집이 무너져 죽든 말든, 북괴군들이 쳐들어 올 때 포탄이 발사되지 않아 귀한 우리 장병들이 죽든 말든, 열차가 부딪쳐 수십 명의 귀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내 주머니에 돈만 들어오면 장땡인 나라다.

 

***

 

Field Manual, 에프엠이란 야전 수칙이다. 야전에서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군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절체절명의 원칙이 바로 에프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에프엠 대로 살면망한다. 미련하고 답답하다고 욕을 먹는다. ‘바쁜 세상 대충 살지. 뭔 일 났다고 원칙 지킨다나? 아니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다고 저렇게 규정을 지키며 답답하게 군디야?’ 온갖 욕이 쏟아진다. 그러니 에프엠을 지키려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반칙의 대열로 끼어든다. '망할 놈'의 관습이요, 분위기다. 법을 지키는 사람이 욕먹는 사회를 생각해 봤는가툭하면 범칙자들에게 욕을 퍼붓기 좋아하는 우리들. 스스로의 행동들을 한 번 돌아보자. 하루 중 에프엠대로 법규대로 살아가는 순간이 몇 %나 되는지 살펴보자. 사건이 터지면 정부나 대통령만 욕한다. 자신들은 에프엠대로 법규대로 살아 왔는데,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자가 무능하고 사악하여 사고가 났다는 투다. 온통 범법자들로 이루어진 이 땅의 야당 인사들은 한 술 더 뜨면서 대중을 선동하려까지 든다. 한심하다 못해 슬프도록 재미있는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미 만들어진 에프엠만 제대로 지켜도 국가 대 개조는 당장 이루어진다!!!

 

 

 


뒤집어진 채 점점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네이버 사진]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