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10.09 11:25

 

 

 

 

 

*누군가의 글에서 빌려 온 사진. 매우 감동적이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다시 이곳에 퍼다 붙입니다. *

 

 

70년대 이전 우리 어머니들의 고뇌가 압축되어 있는 광경입니다.

 

아궁이의 불은 가난, 속 썩이는 남편과 자식들, 구박하는 시부모 등으로 늘 가슴 태우던 마음 속의 불을 상징하고요. 매캐한 연기는 신산(辛酸)한 삶을, 그 연기로 인한 눈물은 소리 죽여 우시던 우리 어머니들의 슬픔을 상징하지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지어낸 밥을 자식들의 입에 넣어 주시면서 잠시 시름을 달래곤 하셨지요. 지금 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난'이 이 한 장의 사진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흙과 돌멩이를 뭉치고 다져 만든 부뚜막, 간신히 걸어놓은 가마솥, 축축하게 젖은 검부나무, 울퉁불퉁 흙바닥, 연기 안 빠지는 쪽문, 등 없어 컴컴하고 비좁은 공간...

 

우리 어머니들의 슬펐던 삶은 불과 40년 전에도 우리의 고향에 뚜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를 키우신 어머니들의 눈물, 잊어도 되나요?

 

                                                                 <조규익 페이스북>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8.30 12:01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학자란 누구인가. 넓은 의미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좁은 의미로 대학교나 연구소 등 연구기관에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다. 학문을 연구하거나 다룬 결과는 논문이나 책으로 나오기 마련이니, 교수나 학자는 논문 쓰는 사람, 혹은 논문으로 말하는사람이다. 그래서 학자가 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생각이 기발해도 그것이 논문으로 엮여져 나오지 않으면 그냥 달변가 혹은 재주꾼일 뿐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까지 잘하는 재주꾼을 최고로 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동양 사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경원(敬遠)해 온 역사는 길다. 특히 학자들의 말이 뻔지르르하면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것이 전통사회의 통념이었다. 오죽하면 공자는 말에 있어서 더듬거리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고자 하는 것이 군자(欲訥於言而敏於行/󰡔논어(論語)󰡕 「이인(里仁))’라고 했을까.

 

옛날의 군자는 완성된 도덕을 갖춘 인격자로서 남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 그래서 전통사회의 학자를 겸한 인간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말을 더듬어야 했을까. 자신의 내뱉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지, 누가 보아도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을지 아무도 자신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누군들 자신의 말을 100%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군자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수십 수백 번을 되씹어 보고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막상 말을 내뱉는 순간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내 말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거침없이 나가야 하는 말 줄기를 이 두 가지 물음이 막아서면 더듬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심사숙고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학자의 자세다.

 

그러나 지금은 말() 잘하는 학자들이 너무나 많다. 매스 미디어가 지배하는 이 시대엔 말 잘하는 것이 모든 조건들을 압도한다. 방송에 나와 사자후를 토하는 학자들치고 제대로 된 논문이나 저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들 한다. 언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다져 논문이나 저서로 만들어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면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쳤을 리 없을 터. 당장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그들의 찬탄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할 것이니, 언제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고 강호 현인들의 생각을 참고할 겨를이 있단 말인가. 대중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가들 가운데 의외로 좋은 학자가 드물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학자 노릇을 하기란 어렵다. 선현들이 남긴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뜻을 세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저 앞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그런대로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전술(傳述)할 뿐 짓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정말로 그가 술이부작으로만 일관했을까. 사실은 앎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었을 것이다. 학자는 도덕가를 겸해야 한다는 차원 높은 인식의 노출로 보는 것이 옳다. 공자가 극구 사양한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는 창조자의 타이틀. 외람하다 보았기 때문이리라. 외람하지만 않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공자가 얼마나 창조적인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술이부작속에는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인간을 다잡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 ‘새로운 것을 고안하거나 만들어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한여름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이 서론이 길어졌다.

내 본업은 교수다. 교수는 당연히 학자이고, 학자가 대부분 교수인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래서 교수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겸하는 존재다.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은사들은 늘 좋은 논문 많이 쓰라고 말씀하셨고, 당신들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상당 기간 대가들의 곁을 배회하며 논문 쓰는 일의 중요함을 마음에 새겨온 나다. 언제나 되어야 저 분들처럼 멋진 논문들을 맘껏 써서 후학들을 위해 지남(指南)할 것인가. 뜻은 높되 손과 아이디어가 따라주지 않아, 일종의 비원이 마음속에 똬리처럼 들어앉게 된 내 '학자로서의 한평생'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일곱 여덟에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못했다. 초년 시절 내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진짜로 쓰지 않고 못 배기는 테마나 문제의식 혹은 가설 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나날이 꽤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공부가 설어서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처방을 얻지 못한 채 이날까지 삽질을 하며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밤늦도록 연구실에서 고민하며 책장을 넘기고, 휴일을 잊은 적도 적지 않았지만, 내 곳간은 늘 적막하다. 지금도 물색 모르는 고향 친구들은 교수는 그저 놀고먹으며 땡하는 직업 아니야?’ 라고들 놀리기 일쑤다. 수시로 전해오는 친구들의 번개 자리에 불참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적막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끙끙대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눈총을 줄 때마다 빙그레 웃음으로나 화답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한가로워진다.

 

여섯 평 연구실에서의 삼십여 성상(星霜)! 엊그제 존경하는 소재영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게 늘 사표(師表)가 되어주신 학자의 표본. 문득 생각해보니 그 분이 지금의 내 나이셨을 때 나는 40을 바라보는 애송이였다. 당시 그 분은 참으로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나도 저 연세,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이만큼은 어느덧 그 고개에 올라서고 말았다. 논문 쓰는 일도, 강의도, 세상사도 모두 달관의 경지에서 유유자적 해결하시던 내 나이 때의 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의 나는 어찌 그 경지를 상상도 못한단 말인가. 늘 뇌리를 훑고 지나는 아이디어나 가설을 잡아 매어놓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손에 잡히는 결론은 늘 텅 빈 괄호( )’ 뿐이다!

 

누가 있어 무엇이 중헌디?’라고 물으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논문들을 써 보았지만, 결론이 하나같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그간 줄창 헛공부만 해왔다는 말이다. ‘교수니까 논문을 쓴다는 구조화된 아비투스(habitus) 속에서 가치 있게 살아야 했던 삶을 내 스스로 몰각(沒却)해온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교단생활을 쓸쓸하게 마무리하지 않으려는습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논문의 화두(話頭)를 꼭 틀어쥐고 의자를 당겨 앉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인문학이 밥을 해결해주지 않는 시대에 (고맙게도) 우리를 찾아준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처량한가.

한 주에 단 하루, 육체의 괴로움을 통해 내 실존을 아프게 자각하는 에코팜의 은혜로운 시간이라도 없었다면, 허물어져가는 내 자존심의 성벽을 무슨 용기로 대면할 수 있을까.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와 함께 귀를 찢는 노() 선승(禪僧)의 할()이 텅 빈 내 마음을 울린 뒤 메아리가 되어 여섯 평 연구실을 휘감다가 사라지곤 한다. 깨달음은 내게 미래의 시간을 부여할 것인가. 갈가리 찢긴 논문들을 주섬주섬 이어 붙이면 천사의 날개옷으로 부활할 것인가. 그 옷 걸치고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졸우(拙愚)-우공 이일권 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7.27 10:51

에코팜(Eco Farm) 이야기

 

 

 

멀리서 바라 본 에코팜

 

 

 

12일 잡초와의 승산 없는 전투를 건성건성 마무리하고 도망치듯 상경, 일요일 아침 학교 연구실의 고요함에 피곤한 몸을 맡긴다. 지난 금요일 밤까지 쓰던 논문 파일을 꺼내 놓고 침 발라가며끊어진 생각의 실마리를 이어보려 애쓴다. 그러나 나오는 문장들은 잡초 줄기 꼬이듯 지리멸렬이다. 안락의자에 윗몸을 비스듬히 맡기고 눈을 감아 보지만, 피로는 옷을 적시는 물처럼 번지기만 한다. 비몽사몽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충격에 간헐적으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떠 보긴 하나, 눈꺼풀은 천근만근 늘어지고 생각의 끝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해가 설핏해질 무렵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삶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고 힘주어 다짐한다. 다음 주에도 똑 같은 사이클이 반복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책상 앞에서 책과 씨름하는 생활은 일요일 혹은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초저녁까지 만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기다리는 녀석들을 보러 에코팜에 가야 하는 토요일 새벽 무렵의 요동치는 생체 리듬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기다리는 건 9할이 잡초이고 1할 정도가 작물, 그러나 그 모두가 생명이니 어쩌랴. 그것들이 지난주에 비해 몇 뼘이나 자랐을까 몹시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것을! 지난 번 심어 놓은 고구마 순은 뿌리를 내렸을 것이며, 서리태는 싹을 틔웠을까. 그 사이사이에 모습을 보이던 잡초들은 또 어떤 기세로 고구마와 서리태를 괴롭히고 있을까. 큰 희망을 품고 씨를 뿌려 넝쿨까지 조성해 놓은 더덕 밭은 이미 우악스런 잡초들에 휘감긴 채 더덕 산으로 변신한 지 오래다. 가끔 그 속에 들어가 더덕들의 안부를 확인하지만, 이름도 모를 잡초들만 그득하다. 이 잡초들이야말로 그 땅이 원래 산이었음을 증거하는 존재들 아닌가. 참으로 끔찍하고 존경스런 생명력이다.

 

 

 

에코팜의 무지개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영빈

 

 

 

수박을 심는 조손(祖孫)

 

 

 

***

 

일생을 흙 속에 사신 부모님. 나는 순혈 농부의 아들이다. 1년 농사를 지어 이듬 해 땅 몇 평 늘이고, ‘장리(長利)’로 곳간을 계속 확충해 나오신 분들. 이른바 자수성가(自手成家)’의 표본이셨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황토 빛 시골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대처에 나가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하늘이 도운 것일까. 부모님의 멋진 단안 덕에 간신히 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결코 고향엔, 흙에 묻혀 살아야 하는 고향엔 돌아가지 않으리!’ 노래 부르며 이 나이까지 타향을 전전해 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스스로의 나이를 인식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꿈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루지 못한 당신들의 꿈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기 시작한 지 올해로 20. ‘그 분들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으셨다면, 과연 그 흙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게 가능하셨을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간간이 나를 엄습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농사일을 일생 지속하려 하셨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미래를 계획할 만한 꿈 한 조각이라도 갖고 계셨을 것 아닌가. 과연 그게 무엇이었을까.

20년 가까이 내가 굴려온 화두(話頭)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 분들이 갖고 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냥 던져진존재임을 인정하며, 운명에 순응하신 분들일까. 그 분들만 생각하면 조여드는 죄의식으로 안절부절 못하던 형극(荊棘)의 세월을 최근까지 살아온 나였다. 나이가 들면서 다라운 욕망들이 서서히 빠져 나가고, 부모님의 삶이 던져 준 화두를 풀어내겠다는 새로운 의욕이 그 빠져나간 옛 욕망의 자리를 되 메우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게 거금 20년이다. 그 문제를 풀 만한 최적의 공간을 찾아 헤맨 20년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곳이 바로 지금의 에코팜이다.

 

 

정안밤

 

 

 

정안밤의 미소

 

 

 

에코팜의 잡초생태연구소^^

 

 

 

에코팜의 서리태 밭

 

 

***

 

뽑히지 않는 바래기 풀을 억지로 휘어잡아 뽑고 그물처럼 촘촘하게 땅을 덮은 띠 풀을 쥐엄쥐엄 뜯어내며, 호미와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시던 부모님 얼굴의 주름과 그 골들 사이로 줄줄 흐르던 땀을 생각한다. 부드러운 양토(良土)의 풀을 뽑으며 쓰다가 미루어 둔 논문들이나 걱정하고 그런대로 제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들의 미래나 상상하는 나와 달리, 돌투성이 박토(薄土)에 힘들여 호미 날을 꽂으시며 공부한답시고 객지에서 떠도는 아이들의 끼니 걱정에 허리 끊어지는 고통도 잠시잠시 잊으셨을 부모님을 떠올린다.

입으로는 에코팜의 멋진 풍수를 자랑하고, 어린 시절 부모님의 노동을 통해 눈으로 익힌 어설픈 농사지식이나 떠벌이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손바닥 크기의 땅뙈기, 자칫 한 해 농사를 망치면 보충할 길이 막막했던 그 분들이었다. 말없는 땅을 상대로 표출하시던 결기(決氣)를 그 누군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에코팜의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러는 나를 게을러 빠져서 옥토를 풀밭으로 만든 놈이 별 핑계를 다 댄다고 비웃으리라. 하루 밤 자고 나면 산판처럼 우거져 있는 잡초를 보면서도 놈들을 처치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산이면 어떠랴. 잡초와 곡물, 반반씩이라도 건지면 될 것 아닌가. 잡초 하나 없이 반질반질 고른 땅에 온갖 곡물들을 보암직하게 길러내는 시골 어른들의 눈에 한량의 놀이쯤으로 비쳐져도 어쩔 수 없다. 잡초가 우거져 잡초생태연구소란 자조적(自嘲的) 언사를 농하고 있긴 하나, 그 옛날 부모님이 꿈을 키우시던 곳과 비슷한 공간을 내가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가. 풀을 뽑지 못해 멀쩡한 옥토를 산판으로 만들었다 해도, 무언가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는 이 공간이 그 얼마나 좋은가. 오죽하면 잡초 밭에 에코팜(Eco Farm: Ecological Farm)’의 명패를 붙여놓고 자랑스레 홍보하겠는가?^^

 

 

 

에코팜의 상추

 

 

 

에코팜의 도마도

 

 

 

제멋대로 자란 에코팜의 오이

 

 

 

에코팜의 첫 수확

 

 

 

에코팜의 고구마 꽃

 

 

 

***

 

나처럼 농사를 모르는 사람도 농사를 잘 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겁나게 질긴 저 잡초들처럼 생생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볼 것이다. 그 한복판에서 풀과 함께 아웅다웅 꿈을 가꾸셨을 내 부모의 작은 유택(幽宅)과 소박한 돌비 하나 세워 보리라그 돌비에 새길 문구는 이미 내 마음에 새겨져 있으니,

 

잡초같이 질긴 고집과 꿈을 자식에게 물려주신 두 분, 여기 잠들다라고.

 

 

 

 

에코팜의 밤. 빛으로 대화하는 달과 가로등

 

 

 

 

                       에코팜의 위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7.0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5.23 19:52

하회 별신굿 탈놀이 다섯째 마당의 파계승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초가들

 

하회마을 초가들 사이의 골목길

 

하회마을에서 만난 장독들

 

병산서원에서 숭실국문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집행부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임채훈 교수, 엄경희 교수, 소신애 교수 등과

 

 

학술답사 후기

-학술답사인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내 학창 시절 은사 한 분은 늘 논문은 발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논문을 발로 써라? 처음엔 그 말씀이 몹시 낯설었다. 당시 엉망진창인 번역을 발 번역이라 부르던 나였지만, ‘발 논문이란 조어(造語)의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들고 공부가 좀 익어지면서 깨달았다. 자료를 찾아 발로 뛰는학자가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팔도 어디든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의 소장 자()를 찾아다니는 일이 연구 작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꽤 된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논문들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큰 실수 없이 어쭙잖은 글들이나마 엮어 낼 수 있는 건 전적으로 그 때 익힌 현장 중시의 습관 덕분이리라.

 

국어국문학의 현장은 우리 전통사회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그런 공간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어느 마을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만 가도 생생한 자료제공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이 방언이었고, 힘들거나 즐거울 때 질러내는 소리들이 민요였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아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둔 이야기들은 좀 많았나. 그런 걸 찾으러 틈나는 대로 방방곡곡 누비고 다니며 국어국문학도들은 자긍심을 지닐 수 있었다. 사라지는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글자로 잡아놓고 분석하여,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민족문화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이제, 세월은 마구 변하여 외견상 전통사회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국어국문학도들의 임무나 사명을 고도로 세련시켜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변화는 잔존(殘存)을 전제로 하는 개념일 뿐 사라짐이 아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찾는 일을 포기할 순 없다. 변화의 근거들이야 하다못해 DNA에라도 남아있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집요함은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최종병기. 문학이나 언어의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사람들을 만나 보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을 키워 낸 자연과 문화적역사적 잔존물들을 현장에서느껴보지 못한다면, 강의실에서 펼쳐지는 담론들의 공허함을 무슨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오.

 

우리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관광여행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답사지역이 우리의 또 다른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그곳 인물들의 문학을 찾고, 무형 문화재의 뿌리를 가늠하며, 숨은 역사를 캐는 일은 이 시대의 국어국문학도에게 부여된 사명이자 특권이다. 2018년도 숭실 국문인들이 그 사명과 특권을 오롯이 수행하고 누릴 수 있도록 지역선정-계획 수립-사전답사-자료집 준비등으로 학생회장 김태호를 비롯한 집행부원들이 진한 땀을 흘렸다. 그 덕에 멋진 자료집이 나왔고, 모두 참여하여 현장 공부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 우리 모두 귀한 공부여행에 적극 동참하여 하나라도 더 얻어오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

 

위 글은 2018학년도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답사 자료집에 실은 나의 인사말이다. 나는 교수 초년병 시절부터 몇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술답사에 참여하여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동안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학술답사의 양상도 많이 바뀌어 이젠 일반인들의 여행과 구분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역과 방문 대상이 역사나 전통문화로 한정되고 강의실 교육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나 국문과의 학술답사는 일반인들의 관광여행과 구분될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적과 테마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만큼 일반인들의 관광여행도 많이 세련되었다. 오히려 문화답사 동호인들끼리의 여행일 경우 대학의 학술답사보다 더 전문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일반인들의 안목이나 교양 수준은 많이 높아진 반면, 대학 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대중화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앞 시대엔 전문인들이나 예비전문인들이 주로 수행하던 학술답사가 이젠 교양의 심화나 지적인 욕구의 충족을 지향하는 일반인들의 문화관광 여행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학 내에서 학술답사는 국어국문학과의 고유활동으로 굳어지다시피 했다. 그 분야의 교수 로 30년 넘게 재직해오면서 깨달은 시대의 변화는 매우 크고 의미심장하다. 인터넷의 무한한 확장, 기계화를 통한 전통사회의 변화, 교통통신의 발달을 통한 전국의 1일 생활권화 등으로 현장 조사나 학습의 중요도가 많이 저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와 전통의 맥이 살아있는 현장을 둘러 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나는 일이다.

 

올해는 안동지역을 답사 대상으로 잡았다. 첫날(517)은 하회마을에 도착,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함께 관람한 뒤 하회마을의 정취를 음미하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들렀으며, 풍산읍에 있는 안동 펜션 & 게스트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은 분과에 따라 고전문학학회와 민속문화학회는 가송리 농암종택(聾巖宗宅)을 방문한 뒤 한국국학진흥원 및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 현대문학회는 권정생 동화마을과 이육사문학관 및 농암종택에 각각 들렀으며, 언어학회는 가구1리 마을회관에서 방언을 채록하고 영호루와 안동 문화의 거리를 답사했다. 셋째 날에는 전원이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러 서원문화를 체험한 뒤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

 

방대한 이 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받아들이기에 23일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에서 작지만 어떤 변화의 조짐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물론 학생들 각자의 내면적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감수(感受)한 것들은 달랐으리라. 어쨌든 늘 복잡한 도심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함께 한국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는 안동에 찾아가 선비문화를 체득한 것은 이들의 삶에 큰 정신적 자산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나는 답사 기간 내내 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지역의 사림문화(士林文化)를 제대로 볼 것을 학생들에게 주문했다. 농암종택 안 쪽에 위치한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입교당(立敎堂)에 학생들을 앉히고 농암 선생의 풍류와 자연 친화의 삶을 강의했고, 도산서원의 전교당(典敎堂)에서는 퇴계 선생의 시가와 도학적 세계관을 강의했다. 병산서원, 도산서원, 농암종택, 소수서원 모두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심성 수양의 공간이었음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분들이 추구한 도()자연 속에서 읽어낸 불변의 길이라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늘이 천성으로 부여한 생태의식이 바로 도학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주어진 세상의 삶을 마치고 뛰어난 생태 공간인 안동의 땅에 스며든 위대한 스승들. 일찍이 퇴계 선생은 <도산십이곡>의 제9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뵈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 할꼬

 

그렇다. 신재(愼齋), 농암(聾巖), 퇴계(退溪) 등 우리 스승들의 걸어가신 길을 뒤쫓아 가면 잘못 될 일 없을 터인즉, 이제라도 따라가 보자. 학생들을 지도하겠노라 나선 길이었으나, 나 스스로 배움만 가득 안고 온 23일의 학술답사였다.

 

농암종택에 들어서며

 

농암종택 안쪽의 넓고 안온한 풍경

 

농암종택의 분강서원

 

분강서원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

 

멀리서 잡은 농암종택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박실에서 구미 일선리로 이건한 삼가정의 현판

 

퇴계 선생에게 내린 교지

 

도산서원의 안온한 모습

 

도산서원 전교당 앞에서

 

도산서원 전교당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며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순흥의 죽계루 앞에서

 

근재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 현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학술답사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3.31 17:00

 

그간 북한에 대하여 어렴풋하나마 갖고 있던 내 나름의 감(感)을 논리화시킬 만한 지식도 정보도 없어 애만 태워오던 중이었다.  오늘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설명을 접했다. 현 집권세력이 '몽상가들임'은 상식처럼 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이처럼 명쾌하게 짚어준 논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문가를 비로소 만난 기쁨,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30/2018033001775.html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