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03.14 14:45

최근 광주의 찻집에서

 

 

 

 

친구를 보내며

 

 

                                                                                                               백규

 

 

다정하던 친구 김성원이 이승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 온 다음 날부터

그는 급격히 혼돈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12일 새벽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각

너무나 짧은 발인식을 마치고

그는 뜨거운 불의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 저승으로,

나는 현실의 원리가 작동하는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눈을 감기 나흘 전

병원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했고

나 역시 그가 몹시 궁금했다.

서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우리는 힘주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밝은 웃음이 모처럼 그의 얼굴에 번졌다.

언젠가 그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지금껏 나는 인천 방향으론 소변도 보지 않았노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겪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듬뿍 실려 있었다.

그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동안 나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음을

병상 머리맡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폰을 집어 들더니

어느 부분엔가 저장해 놓은 사진 한 장을 찾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순간 내게 보여주려고 잘 갈무리해 두었겠지만,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결국 사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릴 적 동생을 안고 있는 사진이라는데,

무뎌진 손끝과 흐려진 정신으론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엉망이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려는속 깊은 마음씀이었으리라.

 

그 뿐 아니다.

모든 면에서 참 사려 깊은 그였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친구들 일이라면 빠진 적 없었고,

함께 어울리기 좋아한 그였다.

자신이 정한 원칙은 한 치도 어김없이 지키려 했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하다 보니,

그들 역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늘 넉넉한 웃음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삶과 이승에 대한 애정이 유독 도타운 친구였다.

그래서인가.

이렇게나 빨리 홀로 먼 길 나선 그가 안쓰러울 뿐이다.

붙잡는 이승의 손길을 지긋이 뿌리친 채,

그는 떠났다.

삭막한 세상을 함께 할 친구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이 상실감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절망으로 연결된다면,

그 때문에 나 또한 세상을 뜨게 되리라.

허무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리라.

 

오늘

햇살은 이리도 좋은데,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길가에 주막 한 채라도 있거든

병마 탓에 그동안 끊었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사 마시며

얼큰 취한 목소리로 <희망가> 한 자락이라도 불러 보시게나,

사랑하는 친구여!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2018. 3. 14.

 

 성원을  보내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8.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2.29 18:55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야금야금 육신을 갉아먹는 병마(病魔)

끝내 어머니는 아픔을 호소할 기력마저 상실하셨습니다. 

한동안 의연히 싸워오신 어머니도

언젠가부터 병마의 서슬에 풀이 꺾이신 듯.  

잦아드는 어머니를 뵈며 저는

병마의 무자비함에 대한 한탄이나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난 뒤에야

편안해지신 어머니의 표정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병마와의 투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육신의 굴레!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극적인 종말이 죽음인 것을,

어머니 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계셨음을,

나 혼자만 몰랐던 것일까요.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저는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신 게 아니라

정말로 '뭣 같은 고통'을 뛰어넘고 싶어 하셨을 뿐이라는 사실을.

 

넝마 같은 육신을 벗기 위해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가

바로 고통과의 투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아닌가요. 

찌질한 증오들, 숱한 이해타산들, 다양한 꼼수들을

일거에 무력화 시키는 전설의 마검(魔劒)이 바로 죽음 아닌가요.

모든 것들이 걸어가야 할 공도(公道)가 바로 죽음인 것을...

 

***

 

어머니(文姬)19281217() 충청남도 원북면 방갈리 학암포에서 외조부(문채문)와 외조모(창녕 조씨) 사이의 5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외조모는 역병(疫病)에 신음하던 동네 사람들을 구완하시다가 이른 연세에 돌아가셨고, 그 일로 어머니는 10대 초반 소학교를 중도에 폐하고 가사를 돌보게 되셨습니다. 열여섯 나던 해 10여리 떨어진 이웃 마을의 창녕 조씨 집안으로 출가, 모진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적지 않은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슬하에 41녀를 두셨습니다. 손끝으로 땅을 파셨고, 흘리는 피땀으로 그 땅을 걸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기상하여 다시 새벽 가까운 시각에 몸을 누이시는 고행을 통해 한 뼘 두 뼘 땅을 늘리셨고, 그 사이사이 적지 않은 자식들을 낳아 건사하셨습니다.

 

세상 이치에 밝으시고 지혜로우시어 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약하고 눈물 많은 남편과 어린 자녀들 때문이었을까요? 시종일관 곧은 아내이자 엄한 어머니이셨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강하셨고, 자식들의 어리석음이나 주변 사람들의 불의를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로 하여금 일생 화툿장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담배를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하시는 등 어머니의 엄한 훈육이 몇 수레의 황금보다 얼마나 더 보배로운 유산이었는지, 지금 비로소 깨닫습니다.

 

명망 있는 의사로 키워 놓으신 막내아들의 보살핌 속에 만년을 보내시고, 그의 따스한 손길 아래 눈을 감으신 어머니먼저 가신 아버지 곁으로 따라가셨으니, 이제부턴 젊은 시절의 추상같으시던원칙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으시고, 두 분이서 오순도순 옛 이야기 나누시며 명계(冥界)의 청복(淸福)을 마음껏 누리소서.

 

 

 

2016. 2. 25. 030.

 

 

불효자 백규 울면서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9.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8.29 21:28

 


한국을 떠나기 전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

 

 


한여름날의 백규서옥에서 게리(Gary Younger), 백규, 세바스티안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의 지도교수 키이스 하워드(Keith Howard) 교수와 함께

 

 


한 겨울의 숭실 교정에서 세바스티안과 키이스 교수

 

 


 한국의 전통악기들과 탈들이 진열된 키이스 교수 자택 거실 모습

 

 


키이스 교수의 한국음악 관련 디지털 자료들

 

 

 

며칠 전 일본의 교토에서 세바스티안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국내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다가 해외로밍으로 연결되자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 것. ‘연수기간이 끝나 831일 런던으로 돌아가는데,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약속으로 간신히 잡아놓은 2712시 정각에 독일 술 한 병을 든 그가 찾아왔다. 그간 머물렀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돌아가 짐 싸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점심 식사의 여유가 없다는 그를 잡아놓고, 겨우 30여 분 간 석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198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의 약관이었다. 함부르크 출생의 독일인. 이른 나이임에도 많은 학교들과 많은 나라들을 거쳐 온 점이 놀라웠다. 1997~2006년까지 미션계 김나지움에서 공부했고, 그 사이의 1(2003~2004) 동안은 교환학생으로 남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2007~2012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음악학[혹은 과학음악학: systematic musicology]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Excellent grade)’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 기간 중 터키 이스탄불의 빌기대학교(Bilgi University)에서 1년간(2008~2009), 서울대학교에서 1년간(2010~2011) 교환학생으로 머물기도 했다. 2012~2013년에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013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민족음악학의 권위자 키이스 교수(Dr. Keith Howard)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인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시조에 관한 현장연구를 수행하다가 이번에 체류기간 만료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철이 들면서 파라과이터키한국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수재였다. 그 과정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영어스페인어터키어프랑스어라틴어 등을 유창하거나 능숙하게 구사했고, 한국어 실력 또한 어떤 외국인들보다 월등했다. 기필코 최단기간인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겠노라는 그의 결심이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그동안의 해외 편력으로부터 길러진 용기의 소산이리라.

 

그는 우리의 시조에 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쓰려고 하는 박사논문 또한 시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조의 음악적 본질이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관하여 한국의 누구보다도 폭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전통가곡이나 시조의 명창들을 만나 창법과 이론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얻게 된 개인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인 키이스 교수 역시 우리 음악에 관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전문가였다. 사실 세바스티안이 오래 전부터 나를 알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정년을 한 케빈 오록(Kevin O’Rouke) 교수는 탁월한 감성으로 한국문학을 꾸준히 서양에 소개해 왔는데, 키이스 교수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빈 오록 교수가 13년 전 펴낸 자신의 저서 The Book of Korean Shijo(Harvard-Ewha Series o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의 첫머리에 내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키이스 교수도 나를 알게 되었고, 다시 그가 세바스티안에게 이 책을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함으로써 세바스티안 또한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한국 오는 기회에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케빈 오록 교수의 시조 관련 저서

 

 


케빈 오록 교수 저서의 서론 부분

 

 

***

 

최근 나는 일본에서 호주 출신의 토키타 박사(Dr. Alison Tokita)로부터 일본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내용도 중요했지만, 일본음악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영어권 전문가로서의 토키타 박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의미가 각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토키타 박사 같은 자발적 외국 학자들 아니면 누가 세계에 일본음악이나 문화를 선전하고 유포시킬 것인가. 서양인이 영어로 외국의 수요자들을 상대로 한국음악이나 문화를 강의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세바스티안을 보며 무릎을 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한국어도 발전할 것이고, 한국음악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질 것이니, 그는 우리에게 일본의 토키타 박사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다.

 

민족문화를 세계에 선양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을 수억원씩 주며 불러다가 1회성 돈 잔치나 벌이는 우리나라 문화 담당부서는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세바스티안 같은 외국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음악과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한다면큰 돈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민족음악학 전공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음악과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어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앞당기도록 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꽉 막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외국인에게 귀한 교수자리를 안겨주며, 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느냐고. 그런 류의 답답한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나 예술은 비좁은 이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인들이 배우고 익히며 재창조재생산을 해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암담하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의 전통문화이나 예술을 외면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전통음악이나 문화의 외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바스티안 같은 젊은 인재를 한국 전통음악과 문화의 전문가로 키운다면, 우리 전통음악과 문화의 세계화는 그 시점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시들게 할 수는 없다. 문호를 개방하고 보편적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때 우리 문화는 세계인들의 공유물이 되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보배로운 인재다.

 

 


문현 선생의 노래 발표회가 끝나고. 국립국악원에서

 

 


선무 치료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에서의 파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8.05 17:01

 


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

 

 

 

또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라고 말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입장에서야 어찌 한 끗에 불과했으랴?

 

유쾌함보다는 불쾌함이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더 많은 세월이었으리라.
지지고 볶으며 짜오던
한 자락 삶을
베틀 째 팽개치고
이리도 홀홀히 떠나는 게
인생인 것을.

 

“90 평생이 한 나절의 꿈같았노라!”고
깨달음의 말씀을 남기시며 돌아가신
어느 어른의 마지막 순간을
지금 막 떠올려본다.

 

한 발 한 발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야 하리.
모질게 움켜 쥔
영욕의 짐 보따리들
하나하나 떨구며
상쾌한 맘으로 가야 하리.

 

하직인사도 없이
떠난 그 분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니...

 

 

2015. 8. 5.

백규, 한 잔 술로 그 분의 명복을 빌며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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