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10.26 15:14

 





 

, 홍범도 장군!

-2017년 홍범도 장군 순국 제 74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 참가기-

 

 

맑은 가을날 오후. ‘여천 홍범도 장군 순국 제74주기 추모 및 학술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강당을 찾았다. 꽤 많은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홍범도기념사업회의 이종찬 이사장이야 원래 유명한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 논문의 토론자로 나선 최영근 선생(알마틔 고려극장 문예부장), 반병률 교수(외국어대), 김보희 박사, 장세윤 박사(동북아 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소장) 등은 오랜 인연들이다. 특히 희곡 날으는 홍범도2013년에 연출한 리 알레그 선생이 모스크바로부터 와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감회가 깊었다.

 

2부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역사기록 소설 홍범도의 역사성(윤상원 전북대 교수), 희곡 홍범도의 역사 수용 및 인물 형상화 양상(조규익), 「「홍범도를 매개로 하는 체제 옹호의 서사(임형모 군산대 겸임교수) 등이었다.

 

1940년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조선극장의 총연출자 겸 희곡작가 태장춘은 친구였던 시인 조기천의 권유로 희곡 홍범도를 쓰게 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극장의 수위장으로 있던 장군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희곡의 소재로 바꾸어 나갔다. 장군은 태장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전부터 만들어 온 많은 메모들을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를 만들었고, 태장춘은 그것을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만든 것이다. 그 일지의 원본이 태장춘 혹은 장군으로부터 사라진 뒤인 1958, 태장춘의 부인 리함덕(고려극장 인민배우)이 베껴 쓴 둥사본 홍범도 일지가 이인섭을 통해 교포 작가 김세일에게 전달되었고, 김세일은 이 기록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홍범도󰡕를 써서 레닌기치에 연재했다. 장군은 태장춘을 만날 때마다 결코 자신을 영웅화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것을 강조했다. 자신보다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출 것도 요구했다. 말하자면 극작가 나름의 창작성을 인정하지 않고, 희곡을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기록물로 만들 것을 요구함으로써 희곡 홍범도는 일종의 서사문학처럼 늘어져 버렸고, 등장인물도 36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발표 중


발표 후 토론


토론이 끝나고

1942년 완성된 홍범도(초연 당시 제목은 의병들)는 같은 해 최길춘의 연출로 드디어 무대에 올려졌다. 원래 태장춘은 홍범도3부작(‘사냥꾼 출신 홍범도의 투쟁을 그려낸 의병들-1/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붉은 빨치산의 지휘자가 되는 것-2/레닌과의 만남 이후 이상적이며 분명한 혁명가 혹은 국제주의자가 되는 것-3’)으로 완성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1943년 별세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홍범도1947년에 이길수의 연출로, 1957년에 채영의 연출로, 1960년에 맹동욱의 연출로 연거푸 무대에 올려졌고, 2013년에는 날으는 홍범도로 개제(改題)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이때의 연출가가 바로 이번에 직접 참여한 이 올레그 선생이었다. 바로 그 분이 발표 시간 내내 청중석에 앉아 계셨다.

 

전체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희곡 홍범도.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을 홍범도 잡기 서사일본군 잡기 서사의 두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의 서사를 형성하는 모티프(motif, 話素)들은 상당히 많았는데, 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를 그려내다 보니 그 모티프들의 짜임이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흠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두 서사들과 각각의 모티프들을 살펴보자.

 

홍범도 잡기 서사

 

*1

-배신모티프: 우진원흥재덕월향 등이 배신과 음모를 통해 홍범도 잡기에 나섬. 우진은 야마도의 끄나풀인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홍범도의 가장 믿음직한 수하로 행세하면서 홍범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일진회 회원인 원흥과 재덕 역시 야마도의 하수인으로 홍범도의 체포에 나섬.

-기만모티프: ‘월향이 일본군 장교를 죽인 자라는 광고를 냄으로써 의병들을 안심시키고 홍범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만계(欺瞞計)를 적절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음.

 

*21

-날조모티프: 홍범도 처의 편지를 날조하여 홍범도 귀순 시키기.

*22

-염탐모티프: 재덕원흥중대부관 등이 밀고꾼 조니를 통해 마을의 의병 참여자들을 염탐.

-사냥모티프: 원흥이 의병들을 지칭하는 백두산 포수를 들먹이며 묘한 수단으로 홍범도를 잡겠다고 함.

 

*31

-함정모티프: 우진이 거짓으로 의병들과 홍범도를 궁지에 빠뜨림.

일본군 잡기 서사

 

*21

-복수모티프: 야마도가 첩자로 파견한 월향이 동생인 홍범도 부대의 의병 일남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진실을 듣고 홍범도 부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함.

 

*22

-사냥모티프: 연옥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백두산 포수로서 못된 짐승을 잡는다고 언급함으로써 일본군 잡기 서사의 핵심으로 사냥 모티프 제시.

 

*31

-복수모티프: 월향이 홍범도의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우진의 정체를 홍범도에게 경고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인 원수 일본군과 배신자 우진에게 타격을 입힘.

-기만모티프: 변장한 홍범도가 일본군을 총공격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변장한 채 치강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작전에 성공함.

 

*4

-복수모티프: 일본군을 토벌하고 배신자 우진원흥재덕을 잡아 처형함.

-사냥모티프: 일본군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의병 용준을 구해내면서 훌륭한 포수가 되려면 악한 짐승에게 물려 보아야 한다는 비유의 말을 던짐. 즉 일본군을 잡으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사실이 이 비유의 핵심임.

 

이런 점들로부터 희곡 홍범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할 수 있었다.

 

1. 살아있는 주인공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의 체험을 작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가 실화극 내지 역사극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2. 주인공 홍범도는 민중들 사이에 전설적 영웅으로 자리 잡은 존재였으나, 주인공의 영웅성을 과장하지 말고 주변 인물들의 활약상을 부각시켜 달라는 홍범도의 주문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소화시키고, 작품의 사실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3. ‘홍범도 잡기일본군 잡기라는 상반되는 서사들을 작품의 두 축으로 내세우고, 각각의 범주에 배신기만날조염탐사냥함정복수등의 모티프를 설정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주제를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

4. 실존하던 주인공의 강한 주문에 따라 철저한 사실성의 구현을 지향했으면서도, ‘전설적 영웅이자 호랑이 잡던 백두산 포수라는 홍범도의 이미지를 이야기 전개의 미학적 요소로 드러나지 않게 군데군데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이나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

 

이제 옛날의 홍범도를 역사의 뒤안에 묻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가 새로운 시대의 홍범도를 만들어 무대에 올림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단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2017. 10. 25.)


이종찬 이사장과


행사 후 저녁 자리에서 이종찬 이사장, 반병률 교수 등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환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8.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3.28 17:48

 


백규서옥을 방문한 아리안 군

 

 


백규서옥을 방문한 유리 군

 

 

언어구사의 천재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몇 년 전 고려인들을 찾기 위해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간 적이 있다.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과 자작나무 가로수 길이 인상적이었다. 벨라루스는 1922년 소련에 편입되어 1991년까지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존속하다가,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 국가 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창설을 주도한 나라다. 당연히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였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를테면 다수의 민족국가들 속에 파묻힌 육지 속의 섬과 같은 나라였다.

민스크 도착 다음 날 벨라루스 국립대학 한국어과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학생들을 통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혈통과 말이었다.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국어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영어를 썼는데, 소통의 정도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얼굴 모습들은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이었으나, 피부 한 꺼풀만 벗기면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났다. 다음 날부터 학과에서 소개해준 두 명의 학생들이 민스크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한 사람은 아리안(Aryan), 또 한 사람은 유리 킴(Yuri Kim)이었다.

 

#1 아리안의 할머니는 이란인으로서 현재 테헤란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미처 묻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 모습으로 보아 할아버지가 아리안족인 듯 했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는 이란과 인도계의 혼혈일 것이고, 그 혼혈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리안이었다. 내 관심은 그가 지닌 외국어 능력이었다. 그는 이란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에 이미 능통해 있었고, 막 일본어에 손을 대고 있었음은 물론 중국어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자도 제법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로부터 젖을 받아먹듯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를 마더 텅(mother tongue)으로 받았고, 할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이란어를 받았으며, 중학교~대학에 이르는 학교 교육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를 익힌 것이었다. 대개 마더텅으로 두, 세 개의 언어를 습득한 경우, 마음만 먹으면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그들로부터 알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한국에 와서 모 대학의 어학코스를 최우등으로 마치고 돌아가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대학원을 이수하면서 어학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2 내가 벨라루스에 머무는 동안 내게 친절을 베푼 또 하나의 벨라루스 청년이 유리였다. 워낙 한국어에 출중하여 당시 학부생의 신분임에도 한국어 강사로 활약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긴 했으나, 할아버지 자신이 고려 말을 버린 지 오랜 상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서로 왕래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자마자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 내력이 궁금하여 가계를 캐물었다. 할아버지는 고려인이고 할머니는 타타르인으로서 카자흐스탄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벨라루스인 여자와 결혼하여 유리를 낳은 것이었다. 화학 전공자였던 외할아버지와 프랑스어 음운론 교수였던 외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편집 기자였고, 아버지는 가구 및 건축 디자이너였다. 그러니 그가 태어나자마자부터 접했을 언어적 다양성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를, 아버지로부터 카자흐스탄어와 러시아어 및 벨라루스어를, 그리고 간혹 아버지로부터 단 몇 단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려어의 냄새 정도는 맡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3개 국어를 마더텅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그 후 자라는 과정에서 다민족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학교교육을 통해 여러 외국어들을 덤으로 배우게 된 것이었다.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불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일생을 노력해야 겨우 영어 하나를 외국어로 구사하게 되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이었다. 참으로 부러운 그들이었다. 간혹 외국에 나가면서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흔히 만난다. 그러면서 외국어에 관한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뒤처진 사람들이 또 있을까?’라는 한탄을 매번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말은 혼임을 깨닫는다. 혼은 물려받는 것일 뿐 흉내를 내거나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3 최근 나에게 이쁜손녀가 하나 생겼다. 이제 돌을 갓 지난 녀석을 보며 나는 언어 학습의 과정과 실상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녀석이 말을 배워가는 과정과 방법이 참으로 신기하다. 제 어미가 젖병을 물리는 동안 녀석의 눈길 멈추는 곳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엄마의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입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었다. 녀석은 무얼 보고 듣는 것일까. ‘자 이제 다 먹었네? 그럼 일어나 트림을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엄마 입술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는 듯 했다. 말하자면 녀석은 엄마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 반응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묘했다. 그러다가 엄마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한 단어, 두 단어, 세 단어...녀석이 흉내 내는 엄마 말의 분량은 주간 단위로 늘어나는 것이었다.[나는 사실 짧으면 한 주, 길면 두 주 정도에 한 번씩 녀석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사실은 매일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세 음절짜리 단어들을 흉내 내어 구사하기 시작했고, 문장 단위의 말을 내뱉으려 할 땐 , 하고 소리치며 손짓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 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제 부모와 우리를 흉내 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따라쟁이라는 애칭으로 놀리기도 하는데, 바로 그 점에 언어 학습의 요체가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이래 말이란 그렇게 전승되어 온 것이다. 젖을 먹을 때 엄마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마더 텅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다중언어 구사자(multilingual speaker)’라면, 말에 따라 순위는 생기겠지만, 그 언어들이 그대로 아기에게 전수되지 않겠는가. 바이링궐(bilingual), 트라이링궐(trilingual) 등 흔한 다중언어 구사 엄마들이야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자재로 여러 언어들을 갖고 아기와 소통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엄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다중언어 구사자가 될 소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실상을 보자.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민족이란 말을 자랑처럼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말을 쓰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소통 또한 더 잘 되겠지.’라는 우리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세계화의 시대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말을 쓰는동족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으르렁거리는 곳이 바로 한반도다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좌파와 우파 간에 툭하면 같은 말을 무기로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이 나라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데, 대체 단일어를 쓰는 단일민족이 무슨 자랑거리란 말인가.

 

눈만 뜨면,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시집 온 새댁들을 무시하고 구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몰라서 말이 안 통하니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우리말을 모르는 것을 차이 아닌 차별의 근거로 내세우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더 고약한 것은 우리말을 모르는 백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우리말을 모르는 유색인들은 매몰차게 무시하려 드는 일이다바로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못난 식민주의 근성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면 우리가 먼저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필리핀어를 배우면 안 되나? 우리 자식들에게 시집와서 손자 손녀들을 낳아주는 베트남 필리핀 며느리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그러니 외국인 며느리들은 구박의 대상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보배들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낳아 이중언어 구사자로 키워줄 훌륭한 어머니요 선생님들 아닌가. 아이를 낳아 젖 먹여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말과 베트남 말을 '마더 텅'으로 동시에 전해준다면, 나중에 그들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우수한 국제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 나라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린 그들을 소중하게 대접해야 한다. 그들이 당장 우리말을 못하고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의 말을 배워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잡아두고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들이 우리보다 좀 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우리말에 서툴다는 이유 때문일 텐데, 그들 역시 우리에겐 소중한 보배들이다. 우리가 마다하는 궂은 일들을 달게 맡아하는 그들. 생각하기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못 말릴 정도로 무지하고 거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다. 인종의 전시장인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나가서는 입도 뻥긋 못하면서, 좁디좁은 내 땅에만 들어오면 안방 호랑이 노릇을 잘도 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성이 바로 언어능력 콤플렉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런 판단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 있으면 말씀들 좀 해 보소서!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유리 김,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밥을 받아먹는 YB

 

 


엄마를 흉내내는 YB

 

 

YB and her Mom walking on the road by the Han River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06.14 16:55

 


이명재 교수

 

 


최미정 박사

 

 


김낙현 박사

 

 


전영선 박사


 


이한창 교수

 

 

 

한국문예연구소 2014년도 전반기 학술발표대회를 마치고

 

 

 

 

학술발표회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예산 확보나 발표자 및 토론자 섭외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어렵고 신경 쓰이는 일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도외시다. 적지 않은 돈과 신경을 써서 잔치를 벌여 놓고도 손님이 없어 텅 빈 좌석을 망연히 바라만 보아야 하는 주최 측으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 발표논문을 작성해온 발표자들에게 인사가 아닌 것 같아 좌불안석이다. 물론 발표자들이라고 그런 현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학술발표회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당사자들이자 그런 참상에 대하여 ‘동병상련(同病相憐)’하는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주인의 입장에서 겪어야 하는 미안함과 민망함은 말로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내 또래의 학자들이 만나면, 이제 ‘학술발표대회는 더 이상 열지 말아야 할까보다’라는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다. 후학들이 더 이상 자신의 선생 혹은 몇몇 선배들을 제외한 남의 논문과 책을 읽거나 인용하려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남의 학술발표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기를 바라는 일이야말로 과람(過濫)한 기대라 할 것이다.

 

***

 

“해외 한인문학의 현주소”라는 타이틀 아래 그 분야의 고수들을 모신 덕이었을까. 그럭저럭 학술발표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정년 이후 지금까지 현대문학의 비평과 해외 한인 문학의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명재 교수[중앙대]가 ‘유럽지역의 한인 한글문단’을, 10여년을 미국에 살면서 직접 한인 시인들을 만나면서 연구를 해온 최미정 박사[성서대]가 ‘재미 한인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현장을 바탕으로 하는 예리한 분석력을 구사하는 김낙현 박사[중앙대]가 ‘구소련 고려인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북한문학의 탁월한 전문가 전영선 박사[건국대]가 ‘북한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관록과 끈기의 노학자 이한창 교수[전북대]가 ‘재일 한인문학의 연구현황과 과제’를 각각 발표했고, 유선모 교수[경기대], 강진구 박사[중앙대], 김성수 박사[성균관대], 허명숙 박사[숭실대]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토론도 이어졌다.

 

***

 

현재 7백만의 한인들이 해외에 나가 있다. 남북한 합친 인구를 7천만으로 잡을 때 10%가 넘는 인구요, 남한 인구 5천만의 14%에 해당하는 인구다. 그렇게 많은 한인들이 해외에서 문학을 창작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해나갈 것이다. 문제는 ‘한글문학’의 지속성이다. 해외 한인 3세만 되면 언어나 정서의 면에서 완전히 현지인으로 바뀌게 되는데, 우리말이나 글을 잃어버린(잊어버린) 상태에서 더 이상 우리 문학이 산출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해외 한인 한글문학의 ‘내일’은 어둡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를 본 견해였다. <<고려문학>>처럼 문학저널을 우리나라에서 발간함으로써 국내와 현지의 문인들을 결부시켜 현지인 문학을 유지하려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시들어가는 현지인 문학을 잠시 부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와 관련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극작가 한진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 문단[*고려인 문단: 인용자 주]은 풍전등화의 처지이다. 우리말[*고려말, 즉 한국말: 인용자 주]로 쓴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도 거진 없다싶이 하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니 재쏘고려인문학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조차 거북한 일이다. 우리말을 부흥시키기 전에는 우리 문학을 부흥시킬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상식일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재쏘동포들 사이에서는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성이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젊은이들 속에서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말은 적어도 어머니의 젖과 함께 몸과 넋에 배인 말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는 그 어머니들도 우리말을 모른다. 이렇게 자꾸 캐여보면 암담하기만 하다.(…)한글문학의 전공시기를 메울 문학은 제 생각에는 아마 로씨야어로 쓴 우리 고려인 작가들의 문학일 것이다. 다행히 지금 우리 문단에는 로씨야말로 글을 쓰는 재간 있고 전망이 있는 신예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오라지 않아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쏘련에서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또 조국 본토에서도 우리말로 쓰지 않은 작품이 조선-한국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론쟁이 많이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립장에서 볼 때 아직은 우리 고려인 작가들이 고려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은 범민족문학권에 포괄하는 것이 선책이라고 생각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진공시기가 짧고 하루 빨리 우리말 문학이 부흥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말이 3, 40년 전에 한진이 진단한 ‘고려인 문단’의 현실이고 보면, 지금 고려인 문단이나 그와 유사한 수준의 다른 지역 한인들의 문단은 거의 완벽하게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왕성하게 이민을 떠나는 미국의 경우라면, 한인문학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새로 태어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영어로, 한인 1, 2세들은 한국어로 문학창작을 지속함으로써 ‘미국 내 한국문학의 맥’은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의 말대로 러시아어로 창작하는 고려인들에 의해 ‘고려인 문학의 맥’은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대로 ‘러시아문학’일 뿐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해외 한인들의 자손을 우리나라에 데려와 우리 말 교육을 시키는 방안도 있겠지만, 그 역시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일 터. 해외 한인공동체가 건실하게 성장하고, 그런 공동체들을 바탕으로 한국어와 현지어가 함께 구사되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어와 현지어를 사용하는 세대들이 공존하거나, 이중어를 사용하는 후속 세대들이 늘어날 때 ‘한국어문학’과 ‘현지어문학’의 병행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의 국력도 해외 한인들의 정치ㆍ경제적 지위나 민족의식도 다 함께 높아져야 그런 일이 가능해질 것은 당연하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해외 한인문학의 연구’는 ‘해외 한인문학 지속의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학술토론의 주된 논점이었다.

 

 

 

 

 
                                                        유선모 교수

 

 



                                                       강진구 박사

                                              



                                            사회를 보는 윤세형 선생

 

 



                                             토론 마무리 멘트-조규익

 

Posted by kicho
알림2013.08.0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3.07.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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