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3.07.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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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8.23 16:44
조선일보 기사보기


30년대 강제이주 이후 고려극장에서 공연한 한글대본 200여편 발굴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한인들이 고향 땅을 그리며 무대에 올린 우리 고전들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국립 고려극장이 지난 80년간 우리 말로 무대에 올린 연극 대본 200여편과 공연 일정이 공개됐다. 한글로 쓰인 이 연극 대본 가운데는 우리 학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우리 문학·연극사 연구에 획기적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곳이다. 조규익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장은 최근 알마티 고려극장을 방문, 극장 설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 대본들을 정리·발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고려극장은 알마티로 옮겨온 뒤, 한인과 러시아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번역 희곡 등 200여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왔다. 조 소장이 공개한 대본 목록에는 우리 고전과 역사 인물을 각색한 작품들이 가장 많았다. 《토끼전》(1959) 《장한몽》(1935) 《흥부와 놀부》(1946)와 김두칠의 《논개》(1962), 정동혁의 《온달전》(1972) 등이 대표적이다.


▲ 1956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올린 연극〈흥부와 놀부〉. 가운데 담뱃대를 들고선 이가 놀부 역을 맡은 인민배우 리 니꼴라이./최 아리따·김병학 제공

특히 1942년 태장춘(1911~1960)이 쓰고 공연한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자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우상인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홍범도 장군은 만년에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를 지내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다 1943년 세상을 떴다. 스탈린 치하인 1953년 셰익스피어의 고전 《오셀로》를 무대에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고리키의 《사람들》(1940)과 고골리의 《검찰관》(1952)과 함께 이념극으로 보이는 《동쪽의 빨치산》(1934) 《38선 이남》(1950) 《모란봉》(1962) 등도 무대에 올렸다.

고려극장은 한인 극작가·연출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그 가운데 태장춘은 《밭두렁》(1934), 《신 철산》(1935), 《노예들》(1937), 《행복한 사람들》(1938), 《생의 흐름》(1945), 《흥부와 놀부》, 《해방된 땅에서》(1948), 《노예들》(1948) 등 거의 해마다 신작을 발표한 고려극장의 주요 작가였다. 문세준·연선용·김기철·채영·이정림·김해운·이길수·최길춘·한진·최영근 등도 우리 말로 대본을 쓰고 공연한 예술가들이다. 조규익 소장은 "고려극장은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매년 우리 말로 연극 공연을 올려 온 유일한 해외단체"라면서 "이들이 올린 연극 대본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들이나 고려인들의 삶을 다룬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고에 보관 중인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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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8.09 17:18

바스러져 가는 고려인들의 목소리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공연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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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의 외관> 

‘탈식민(脫植民)’이 시대의 핵심적인 코드로 정착된 지금, 새삼 민족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디아스포라(diaspora ; 離散)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아직도 그것은 절실한 문제다. 이산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나 민족정신의 현장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리되어 왔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는 중심부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나 구소련의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물리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신적 방랑 혹은 방향성 상실의 관념적 디아스포라 시대다. 우리에게 탈식민이 요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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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고려극장 중앙무대, 아래는 객석>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가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카자흐스탄에만 10여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 고려인들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 보존의 핵심 기지 역할을 해온 고려극장. 1932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77년 고난의 역사를 장하게 견뎌온 고려극장이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 근현대사 혹은 민족정신사의 ‘노다지’가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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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창고>

고려극장에서는 193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연극이 공연되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놀이’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ㆍ「심청전」ㆍ「홍길동전」ㆍ「흥부전」같은 우리 고전들의 수용을 통해 민족정신을 환기시켜온 고려인들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런 연극을 통해 수시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구소련 시절 ‘대러시아’의 구호 아래 강요된 동화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크게 붕괴되었고, 구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려인의 문화를 위축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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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대본들과 대본 모습>

이제 고려 말을 구사하는 몇몇 고려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만한 한 가닥 정신적인 끈마저 놓게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려인들은 ‘아무데도 쓸 일이 없는’ 고려 말을 용케도 유지해왔다. 그런 고려 말을 재료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연극도 상연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려 말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형국으로 변했다. 고려말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도 없고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객도 없는 현실에서 고려말 연극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끈을 찾아낼 수 있는가. 77년간 이어온 고려극장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이다. 연선용, 태장춘, 채영, 김기철 등 당시의 뛰어난 극작 및 연출가로부터 최영근, 송 라브렌지 등 현재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고려인 연극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대본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200건이 훨씬 넘는 대본들에는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절규했던 ‘고려인들의 함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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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공연 포스터>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활자나 소리 아닌 연극을 매체로 선택했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일제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굴의 정신이다. 그걸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도 적은 돈이나마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고려극장의 보물을 건지기 위한 최소 비용조차 추렴하지 못한다면, 우린 문화국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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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7.14 09:36

7월 13일, 알마티에서 처음으로 맞는 월요일이자 고려극장 가는 날. 새색시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영근 문예부장의 차를 타고 공항 가는 길로 나가다가 시가지 외곽에서 빠졌다. 상처투성이의 길을 숨차게 돌고 돌자 아담한 단층의 고려극장이 나타났다. 그동안 걸어온 80년 영욕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장부 이 류보위 극장장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극장장의 방에서 간결하게 의전 절차(?)가 끝난 뒤 나와 최영근 부장이 찾은 자료실. 그곳엔 먼지와 시간에 절고 절은 대본들이 쌓여 있었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필체로 쓰인 대본들이 눈물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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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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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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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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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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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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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

10여 만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구소련 중앙아시아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 이후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고려극장은 그 중심이었다.

 일제 통치 하의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 지사들과 고려인들이 우리 문화와 민족 전통을 유지⋅보존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기관이 바로 1932년에 설립된 고려극장이다. “1932년 이후 극장이 걸어온 운명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려극장-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99)는 전 극장장 김 겐나지의 말에서도 암시되는 것처럼 고려극장의 문화적ㆍ역사적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근 발행된 『고려극장의 역사』에도 고려극장의 의미나 사명은 다음과 같이 천명되어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하게 된 고려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자랑할 만한 전문적인 문화 발원지로 변모했다. 고려극장의 무대에서 카자흐, 서양, 러시아 극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75년 기간 극장은 수많은 유명한 배우들을 배출했고, 오늘날도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 고려인 문화 발전을 위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 <149쪽>

 

창립 이후 고려인ㆍ카자크스탄인들을 비롯한 수백 만 명의 관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수백 편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고려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한인 극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200여 편의 연극을 통해 고려인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희곡들이 단순히 예술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들은 아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심청전」⋅「홍길동」⋅「흥부전」 등 우리의 고전 등 넓은 내용적 편폭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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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상연된 연극대본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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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연극대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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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여있는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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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를 정리 중인 최영근 문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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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포스터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희곡작품들이 정리되지도 못한 채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는 현지에서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라도 그 자료들의 정리⋅연구⋅출판(보급)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이 지역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민족주의’ 성향과 그에 따른 고려인 문화의 위축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나설 필요가 있다.

내가 불원천리 이곳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여행의 중심이자 종착역이다. 먼지투성이의 자료들, 기나긴 연륜 속에서 누렇게 바래고 바스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내게 최영근 부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이 분들은 그동안 왜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았까.”라는 힐난을 내 표정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장춘, 연성용, 김기철, 채영, 맹동욱, 최영근 등 쟁쟁한 고려인 문사들의 손때가 묻은 대본들. 그것들은 역사의 굽이굽이 고난을 극복해온 ‘고려인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나는 과연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단장시켜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인가.

  ***

천산의 만년설 위로 해가 지니 종이 썩는 냄새에 찌든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다 해도 최영근 부장과 이 스타니슬라브 시인을 마주하고 한 잔 할 시간마저 없을 소냐? 자, 누군가의 성공을 축하하고, 무언가를 위하여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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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야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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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산천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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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의 천산, 그 만년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06.06 14:06

* 이 글은 <<불교문예>> 37호(2007년 여름호, 2007/ 6/1)에 실려 있습니다.


위대한 모정의 승리
  --<도천수관음가> 새로 읽기--


                                                                         조규익

하나. 부성보다 강한 모성, 그 전통

입시를 서너 달이나 앞 둔 무렵의 사찰. 손 모아 부처님께 절 올리며 자녀의 고득점과 미래의 행복을 비는 어머니들로 북적인다. 한 사람의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조건 없는 사랑이 꽃 피어나는 현장이다.
병원 입원실. 선천적인 불구로 태어난 어린 아들 곁에서 밤을 지새우는 모정이 TV 화면 가득 쏟아진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힘에 겨워 보이는 젊은 엄마의 처량하지만 강한 모습만 의연하다. 기약 없는 세월을 좁디좁은 입원실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임에도 여윈 얼굴에는 담담한 여유마저 흐른다. 아버지라고 어찌 자식 사랑이 없을까. 다만 그 절절함에서 모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부성이다. 우리는 고려의 속악 <사모곡(思母曲)>을 통해 그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 님이시여!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이 노래 화자의 의도는 아니리라. 다만 양자 간의 차이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은 그 간절함 때문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사랑을 화자는 노래한다. 어쩌면 이 노래는 지은이의 특이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거나 듣는 누구라도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 속의 그런 체험이 노래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미와 낫에 비유한 품새가 범상치 않은 것도 그런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래서 짧지만 절창이고, 당시 인정의 기미(機微)를 잘 드러낸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되는 모티프를 지닌 노래가 <목주(木州)>다. <<고려사 악지>>의 삼국 속악에 실려 있으므로 원래 민간에서 만들어져 불리던 노래일 것이다. 배경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목주에 살고 있던 효녀가 아버지와 후모(後母)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아버지는 후모가 그녀를 헐뜯는 말만 듣고 그녀를 쫓아냈다. 쫓겨나 떠돌다가 한 노파에게 구제되었고, 그녀는  노파의 아들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심히 가난한 친정 부모를 모셔다가 극진히 봉양했으나, 부모는 그래도 기뻐하지 않자 그녀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후모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處事)가 서정화 될 경우 <사모곡> 같은 노래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주>가 <사모곡>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본능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일 만큼 절절하다. <목주>나 <사모곡>이 나왔을 삼국시대에 우리는 절절한 모성애가 흘러넘치는 또 하나의 노래를 만난다.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가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芬皇寺) 천수대비(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에 실려 전해지는 노래다.

둘. 지혜와 광명을 희구하는 모정

신라 경덕왕 대(재위 742~765)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希明)의 아들이 생후 다섯 살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가 아들을 안고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걸려 있는 천수대비의 화상 앞에 가서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다시 시력이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사뢰는 말씀을 두노라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에서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어
  두 눈 감은 나라
  ‘하나를 주소서!’ 하고 매달리나이다.
  아아, 나를 알아주실진대
  어디에 쓰실 자비인고

기록에는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기도하게 했다’고 했으나, 다섯 살 된 아이가 이 노래를 지었을 리는 없다. 실제로는 희명 자신이 지은 노래를 그로 하여금 따라 부르게 했을 것이다.
서사 부분인 1~4행은 자비로운 천수관음을 향한 기구(祈求)의 언사이고, 5~8행은 본사로서 그 기구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결사인 9~10행은 마무리 부분으로서 눈 먼 아들의 눈을 뜨도록 만든 천수관음의 자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천수관음 즉 관세음보살은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여 중생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소망과 아픔을 보살펴 준다는 믿음을 받고 있는 존재다. 그만큼 중생들과 가장 친근하여 염불에는 반드시 부처와 함께 칭명되기도 한다.
천수관음은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과 함께 대표적인 7가지 관음이며, 1천개의 팔에 달린 각각의 손바닥에 눈을 가졌다고 여겨져 온다.
여기서 ‘천’을 단순한 숫자 개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주만방 즉 넓고 커서 한계가 없는 공간을 나타내며, 관음보살의 보살핌이 끝없이 펼쳐나감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도처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일을 관음보살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중생 희명이 이런 관음보살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희구한 것은 아니다. 두 눈을 잃은 자신의 아들에게 눈을 하나만 달라는 소청이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정이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존재가 관음보살이었다. 더구나 관음보살은 눈을 천 개나 갖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노래인가. ‘당신이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 그 가운데 하나만 덜어서 우리 아이에게 주면, 우리 아이는 광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진술이야말로 무엇보다 진솔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이의 순진성과 노래의 소박함이 만나 이루는 진실함은 결국 관음보살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천수다라니계청(千手陀羅尼啓請)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대원만(廣大圓滿) 무애대비심(無碍大悲心)     대다라니(大陀羅尼) 계청(啓請)
2.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3. 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자재보살님과 같이 중생 보살핌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막히는 데가 없이 자비심을 크게 하는 대다라니 열기를 청한다는 것이 1이다. 2는 관세음보살님이 천 개의 팔로 자비로운 원력을 널리 보급·보호·수지하게 하듯, 천 개의 팔로 중생들의 가정과 사회를 장엄하게 해달라는 뜻이며, 3은 관세음보살의 천 개 눈으로 세상을 두루 비추어 보듯이, 어두운 중생들도 마음을 항상 두루 비추어 보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눈은 무엇일까. 외계의 빛을 내면으로 투과시키는, 마음의 창(窓)이다. 동시에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감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눈을 되찾는 것은 광명을 찾음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사회적 권력이나 사랑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소설 <심청전>을 보자. 심봉사의 딸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감은 눈을 뜨게 한다. 자신의 몸을 팔아 공양미 삼백 석을 구했고, 자신의 몸을 희생시킴으로써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을 되찾아 드렸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에서 심청이는 눈을 ‘일월(日月)’이라 했다. 말하자면 광명이라는 것이다. 효성으로 아버지에게 광명을 드린 <심청전>은 지극한 사랑으로 자식의 눈을 뜨게 한 <도천수관음가>의 경우와 대조되지만, 그 정신이나 눈이 갖는 의미는 정확히 일치한다.
시력을 잃은 아들. 그를 바라보는 모정의 안타까움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들이 비록 눈이 없다 해도 그를 먹여 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늙어 죽고 나면 그 아들은 험한 세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을 터. 그래서 모정은 크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불완전한 사람이 홀로 살아가긴 어렵다. 그 가운데 눈은 가장 중요하다.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바로 지혜요 광명이다. 어머니인 희명의 이름이 심상치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희명(希明)’이란 광명을 희구한다는 뜻이다. 이때의 광명은 진리를 비추어 주는 지혜의 빛이다.
지혜란 깨달음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러니 ‘희명’은 자연인이기보다 모든 불도들의 소망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관념적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희명이란 존재를 부조(浮彫)할 때 당대인들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어머니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그 표본 역할을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천수관음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천수관음은 그 아들에게 시력을 주었고, 그 덕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일연의 찬(讚)은 다음과 같다.

竹馬葱笙戱陌塵     대말과 파피리로, 티끌 거리 노니더니.
一朝雙碧失瞳人     하루아침 파란 두 눈, 동자를 잃었도다.
不因大士迴慈眼     대사의 자비 입어, 눈을 찾지 못했다면.
虛度楊花幾社春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으리.
                                           (이가원 역)

희명의 아들을 여염의 평범한 ‘장난꾸러기 아이’로 본 것이 일연의 관점이다. 일연은 죽마를 타고 파피리 불며 제 또래 아이들과 장난치다가 눈을 다친 꼬마와 눈높이를 함께 하고자 한 것이다.
대사 즉 관음보살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자신의 아찔한 심정을 토로했다. ‘버들 꽃 피는 봄’이란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기 혹은 황금기다.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기 보다는 인생의 행복을 구가하는 청춘기에 눈은 더 긴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는 공간이야말로 범인(凡人)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일연은 그런 범인들의 시각으로 희명과 그 아들에게 일어난 이적(異蹟)을 보고자 했다. ‘광명혜안(光明慧眼)을 구비(具備)코자 하는 불도(佛徒)들의 심적(心的) 자세(姿勢)를 집약표현(集約表現)한 어사(語辭)’라는 일부 선학들의 주장도 일견 타당하겠지만, 세속에서 만나는 지극한 모정이 이루어낸 기적으로 보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런 점에서 <도천수관음가>는 지극한 모정의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셋. 시인의 눈으로 본 <도천수관음가>


도천수관음가

                  박윤기
우리가 한 송이 꽃이었을 때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은
바람이었네.

아직 꽃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눈이 먼 채
不感의 하늘 속으로
잃어버린 點字를 찾고 있었지.

덫에 치인 꿈은
가위 눌린 채로 시위잠을 자고
젖줄 끊긴 살 속으로
뜨거운 嗚咽의 소리는 파고 들었네.

어느 빈 뜨락에도
아침을 몰고오는
소망의 작은 새떼는 날아오지 않고
우리들의 良識은
쉬임없이 강물에 자맥질하는
悔恨이었네.

층층이 내려서는
의식의 깊은 壁에
채찍의 겨울은 또 다른 장막을 둘러치고
바람은 무거운 囹圄마다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窓을
흔들며 있네.

은성했던 꿈의 부스러기가
부서져 내리는 길은 길마다
낮게 낮게 埋沒되고
우울의 계단을 빠져 나올 때
다시 어둠으로 차는 굴레.
모든 思念은 기실
풀었다가 다시 짜는 페넬로페의 織造였네.

돌아다 보면
그곳엔 오랜 묵시의 江이 흐르고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기폭처럼 바람에 찢겨 나가고 있었지.

三界에 가득히
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앉고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청댓잎 푸른 가지를 비집고
피어오르는 아침은.
海潮音에 실려오는
비취 빛 청아한 아침 노래는.
오랜 冬眠의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외출을 서두르고
회색의 겨울은
부활의 눈을 뜬다.

8연의 매우 긴 이 시에서 시인은 향가 <도천수관음가>를 구체화하고 내면화 시켰다. 향가 <도천수관음가> 및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문은 ‘암흑→광명’, ‘무명(無明)→지혜’로 전환되는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다. 박윤기의 <도천수관음가>도 그런 의미구조를 충실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
1연은 전체의 서사(序詞)로서, ‘꽃’과 ‘바람’으로 환유되는 ‘나(우리)’와 ‘세계’ 즉 우주적 보편상을 노래했다. 2연부터 6연까지는 실명과 암흑, 미망(迷妄)과 불행이 나열된다. ‘덫에 치인 꿈’, ‘젖줄 끊긴 살’, ‘뜨거운 오열’, ‘날아오지 않는 소망의 작은 새떼’, ‘회한’, ‘의식의 깊은 벽’, ‘채찍의 겨울’, ‘무거운 영어(囹圄)’,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창’, ‘꿈의 부스러기’, ‘우울의 계단’ 등 어둡고 칙칙한 운명적 상황을 구체화 시키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비로소 신의 힘이 ‘묵시’되는 부분이 바로 7연의 ‘묵시의 강’이다. 물론 아직도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기폭처럼 바람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아프게 보여주는 곳이 그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7연은 단절이 깊어진 성(聖)과 속(俗)의 두 영역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한 기적이 역사적 사건으로 구체화 되려는 단초를 마련해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8연에서 시적 의미는 행복으로 전환된다. ‘삼계에 가득히/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 앉’게 되고. ‘비취빛 청아한 아침 노래’도 해조음에 실려 오게 되는 것이다.
‘오랜 동면의 잠에서 깨어난’ 일은 이미 암흑에서 광명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회색의 겨울’이 ‘부활의 눈’을 뜬 것은 희명의 아들이 시력을 회복하듯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과 등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인 박윤기는 <도천수관음가>에서 ‘개안(開眼)’의 멋진 서사(敍事)를 길어 올려 서정의 틀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 내용 가운데 향가 <도천수관음가>에서 필자가 읽어낸 ‘모정’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모정 역시 시의 내면이나 바탕에 잠재할 수 있는 정서의 큰 갈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넷. 갈수록 그리워지는 모정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이 바깥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그 많은 천수관음의 손과 눈 밑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보살의 힘이나 부처의 힘으로 찬양되던 불교왕국 신라. ‘한기리의 희명 모자’는 그 시절의 ‘힘없는’ 중생을 대표하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오고 가던 정, 특히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은 무엇보다 강했다. 귀족계급도 아닌 시골 사람 희명이 모정이라는 단순 소박한 무기로 관음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그건 감동의 힘이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 가운데는 ‘향가’를 숭상하는 자가 많았고, 천지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노래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말했을 것이다. 희명의 염원을 실은 <도천수관음가>가 천수관음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천수관음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염원에 힘입어 눈을 뜬 어린 아들은 과연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 속에는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
신달자의 <사모곡>과 가수 태진아의 <사모곡>을 통해 <도천수관음가>에 담긴 모정의 실체를 찾아보기로 하자.


사모곡

          신달자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사모곡

                            태진아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두 노래 모두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말하고 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신에게 매달리듯 전자의 화자에게 어머니는 매달리는 존재다. ‘자다가 겪는 신열’은 ‘길에서 겪는 미열’보다 고통의 면에서 심각하다. 그럴 때 화자는 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부른다고 했다.
‘엄마 손은 약손’임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아프고 괴로울 때 떠올리게 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자식의 아픔에 눈물을 닦고 탄식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안타깝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아프다고 해라/아프다고 해라’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벤다고 슬퍼한다. 자식의 아픔과 어려움을 자신이 떠안으려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결련에서 밝힌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3→4연으로 갈수록 모정에 대한 느낌의 강도는 고조된다. ‘불러요→닦으시나요→뚫어요→베어요’ 등 각 연의 결미(結尾) 동사들은 정서적 고양의 극적인 단서들이다. 아픈 자식을 근심스레 바라보며 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뒤늦은 깨달음을 절절하게 노래한 경우다. 신달자의 <사모곡>에 그려진 모성애야말로 <도천수관음가>의 모성애 바로 그것이다.
태진아의 <사모곡>에는 ‘흙에 살던, 가난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진 가난을 참아내며 땅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다. 그토록 어렵게 살면서도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던’ 분이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던 모정을 ‘눈물로’ 그리워하는 노래다. 따라서 태진아가 부른 <사모곡>의 모정 역시 <도천수관음가>의 모정 그 자체다. 
<도천수관음가>는 천수관음의 영험함을 드러내어 신라사회에 관음사상의 뿌리를 굳히려는 목적으로 만든 노래로만 볼 수는 없다. ‘한기리의 여자 희명’이나 ‘다섯 살에 눈 먼 그의 아들’이 실존했던 인물들일 수 있고, 분황사에 가서 갑작스런 눈병을 고친 사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실존인물들과 사실을 통해 부처나 관음의 영험함을 선양하려는 의도 역시 분명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시와 배경산문에서 모정을 읽어내려는 것은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모정은 샛별처럼 빛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천수관음가> 이래 시대마다 모정은 위대한 힘을 발휘했고, 여성이 사회적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모정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삶과 생각을 휘어잡고 있다.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천수대비를 감동시킴으로써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식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려고 한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으로부터 변화(혹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