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09.15 23:09

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최금남표해록>>


 

 


최부 선생의 표류 및 귀환 노정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회장) 박사로부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파릇파릇하던 시절, <<금남선생 표해록>>을 읽고 언젠가는 그 길을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흘러간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끔찍한 표해(漂海)의 노정은 뒤로 미루고, 선생의 고향인 남도에서 그 분의 뜨거운 자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93일 토요일. 추석맞이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는 만원이었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는 중이었다. 답사 참가자 12명을 태운 버스가 1차로 선 곳은 광주 광산구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고려 인종 때의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후손인 선생을 비롯하여 최윤덕(崔允德)유희춘(柳希春)나덕헌(羅德憲) 등이 배향되어 있었다.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1927년 건립, 매년 음력 96일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택당(以澤堂) 좌우로 합의문(合義門)과 합인문(合仁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쪽에 낙호재(樂乎齋)와 성지재(誠之齋)가 좌우로 서 있었으며, 몇 계단 위에 무양사(武陽祠)가 높직이 앉아 있었다. 9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원 전체가 단정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무양서원 현판

 

 


무양사

 

 


무양서원 묘정

 

 


측면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거기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나주목 관아(금성관). 아직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목사골 나주의 위용과 분위기는 당시의 모습인 듯 고풍스러웠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이 바로 선생의 탄생지였으나, 시간 상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선생을 배향한 강진의 강덕사(康德祠,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14/군동면 라천리 1044)에서 탐진 최씨 청년 화수회최윤영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창건된 강덕사에는 고려 인종(1122-1146) 때 왕을 호종하여 이자겸의 난을 좌절시키고 나라를 보존시킨 어의 최사전을 주벽으로, 선생과 함께 최표최극충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해남 시내에 입성, 해남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목 정수루(正綏樓)

 

 


나주목 의열각(義烈閣)

 

 


나주목 망화루(望華樓)(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

 

 


나주목 금성관의 내삼문


 

 


나주목 금성관(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

 

 


나주목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쯤 우측 성벽 옆의 각종 송덕비들

 

 


나주목사 행렬행차


 


나주목사 행렬 행차

 

 


나주목 행정 관할도

 

 


조선시대 20목 분포도

 

  


입구에서 보이는 강덕사

 

 


강덕사 대문

 

 


강덕사 묘정비

 

 


강덕서원 뜰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
강덕사의 아름다운 단청

 

 



강덕사 앞면

 

 

 
강덕사와 탐진 최씨 문중에 대하여 설명하는 후손 최윤영 선생(미래상사 대표)

 

 

관광호텔 밖으로 내다보이는 어둘녘의 해남읍

 

 

94.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 답사단은 해남향교를 찾아 전교인 임기주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정위인 문선왕의 위패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나, 바다를 건너 온 공자의 위패를 모신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강화도의 교동향교보다 이곳이 먼저라는 것이 그 분의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해남향교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일 뿐 최초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향교도 해남정씨와 결혼한 뒤 해남에 정착하여 관서재(官書齋)를 열고 후학을 기른 선생의 활동영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외손자 유희춘(柳希春),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등을 해남유학의 핵심으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해남군 지도

 

 


해남향교

 

 


해남향교 대성전

 

 


해남향교 주벽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자리

 

 


해남향교 공자(대성지성 문선왕)의 위패

 

 


해남향교에 모신 기국술성공 자사의 위패

 

 


해남향교의 각종 제기들

 

 


해남향교 진설도

 

 


해남향교 명륜당

 

 


해남향교 장서각

 

 

 

향교를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은 해촌서원(海村書院). 거울 같은 금강골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서원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였다. 선생과 함께 임억령(林億齡), 유희춘,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이 지역의 6현이 배향되어 있었다. 효종 3(1632) 임억령 선생이 처음으로 배향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니, 여섯 분이 배향되기까지 무려 290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도 금남 선생이 으뜸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그 분의 강학비(講學碑)가 우뚝 솟아 있는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해촌서원

 

 


해촌서원

 

 


해촌서원과 금강골 저수지

 

 

 


해촌서원의 최부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의 최부 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을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이 송나라가 해로를 통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닿았다는 관두량(關頭梁). 중국과의 국제적 무역항이자 제주도와의 교역항이었다. 송나라의 사신들도, 상인들도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니, 당시 이곳의 번화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성종 18(1487) 1111일 관두량에 도착해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질펀하게 넓은 바다가 고요하니, 당시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손색이 없었으리라.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그 옛날 배가 닿고 떠나던 포구는 마을과 논으로 바뀌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내륙의 수면 위로는 하얀 전어들이 뛰고 있었다. 관동리 주민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 몇 분이 구전해오는 마을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려 줄 뿐 이곳에 남아있을 선생의 행적을 알아낼 재간은 아예 없었다.

 

 

 


관두량 포구와 이를 설명하는 신춘호 박사

 

 


포구의 한켠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관두량 방조제 안쪽의 내륙 수로

 

 


관동리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함께

 

 

관두량을 떠나 백포리의 윤두서 고택과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을 들러 무안 지역으로 이동,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이른바 늘어지 마을의 양지바른 산록이었다. 선생 부부는 부모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굽이도는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명당의 음택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선생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한참을 달려 나주군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 있다는 선생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심조심 마을길을 달려 막다른 곳에 도착, 촌가의 담장 옆을 통해 올라가니 생가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 관리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주의 한촌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인근 무안에 묻힌 선생. 그 분의 일생은 당시 중세 조선의 정치적 격랑을 거슬러 가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림파 문인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선생의 무덤과 생가 터는 차로 달려 30여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의 거리, 아니 시종일관 생사가 교차하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과연 선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녹우당의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녹우당 현판

 

 


고산 윤선도 선생 사당

 

 


금남 선생 묘소가 있는 '늘어지 마을' 표석

 

 


금남 선생 부자묘 입구

 



금남 선생 사적비

 

 


금남 선생 묘소

 

 


금남 선생 묘소에서

 

 


늘어지 마을의 아주머니들

 

 


금남 선생 생가터 비석

 

 


금남 선생 생가터 앞에 열린 감

 

 

***

 

금남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초창기 조선조의 사림파는 유교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결국 훈구파를 누르고 노론을 형성하여 망할 때까지 조선조를 끌고 나간 사림파. 서슬 퍼런 선비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나간 인물들이었다. 제주에서 부친의 부음을 받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표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선생. 북경에 호송되어 황제에게 사은하게 되었을 때도 친상을 당한 자식으로서의 예가 아님을 내세우며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강요에 의해 잠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귀환 후에도 왕명으로 8일 만에 표해록을 작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 다음 즉시 내려가 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왕명으로 중국에서 목격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1년 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선생은 4년 동안이나 복을 입게 된 것이다. 탈상 후 선생을 아끼던 성종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표류한 뒤 중국에서 많은 시문을 지은 것, 비록 왕명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즉시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여러 날 서울에 머물면서 표류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애통함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대들었으니... 당시의 젊은 신료들 또한 선생과 같은 류의 무서운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일찍 하세하고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무오사화의 와중에 점필재의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6년 뒤 갑자사화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끔찍한 참형을 받고 효수까지 당했다. 51세의 창창한 나이로, 파란 많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남도의 이곳저곳에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선생의 자취는 인간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교과서였다. 조만간 제주-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행적을 다시 밟아볼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가 마냥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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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5.02.03 14:08

한국문예연구소 2015년도 상반기 전국학술발표대회 안내

 

 

 

 

 

안녕하신지요?

을미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는 작년 여러 권의 학술총서들을 발간했고, 논문집 <<한국문학과 예술>>이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로 승격되었으며, 연구소의 과제[용비어천가와 악무 <봉래의>의 복원과 문화코드 탐색]2014년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지원사업 '인문사회 우수성과'로 선발돼 표창을 받은바 있습니다.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힘써 주시고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17세기 연행록을 중심으로 2015년도 상반기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갖고자 합니다. 많이들 참석하시어 경청해 주시고, 고견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추운 겨울,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문예연구소 드림

 

 

학술대회 안내

 

일시 : 201526일 금요일 오후 1~오후 530

장소 : 숭실대학교 벤처관 311

주최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사회 : 허명숙(숭실대)

 

13:10~13:50 17세기 사행록의 연구현황과 전망

발표 : 정영문(숭실대)

토론 : 박성순(동국대)

 

13:50~14:30 17세기 초 사행록 서술의 양상

발표 : 김지현(한중연)

토론 : 김동석(성균관대)

14:30~15:10 17세기 초 사행록에 나타난 조선 지식인의 대외인식

- 정두원의 [조천기지도]를 중심으로

발표 : 서지원(숭실대)

토론 : 신춘호(방송통신대학 TV)

 

15:10~15:20 중간휴식

 

15:20~16:00 17세기 명청교체와 대중국사행의 변화

발표 : 김경록(전쟁기념관)

토론 : 황민호(숭실대)

 

16:00~16:40 17세기 초 사행록에 나타난 중화질서의 혼란양상

발표 : 윤세형(서일대)

토론 : 양훈식(숭실대)

 

16:40~16:20 휴식 및 회의장 정리

 

16:20~17:30 종합토론

좌장 : 조규익(숭실대)

 

오시는 길

 

지하철 : 7호선 숭실대학교 입구(살피재)3번 출구

용산역 택시 : 15

버스 : 신용산역 이동(4분 소요) 후에 501, 506, 750A, 750B, 751 승차, 26

노들 역 택시 : 8

버스 : 노들역에서 501, 752, 5517, 751, 501 승차,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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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9.01.01 09:11
새해 인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먼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깃드시길 빕니다. 우리는 지난 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희망 대신 불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작게 보면 퇴보 같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진보나 발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좀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시련, 혹은 신의 섭리(攝理) 쯤으로 해석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의 자만과 과욕을 다스려 좀 더 겸허해지라는 절대자의 깊으신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힘만 합친다면 그런 어려움들은 곧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난 해 저는 나름대로 동분서주, 바쁘게 지냈습니다. 강의와 연구는 교수의 일상이니 그렇다 치고, 한국문예연구소를 어떻게 하면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부심하며 지낸 한 해였습니다. 연구소 이름으로 두 건의 국제학술대회를 가졌고, 3건의 국내 학술대회를 열었으며, 두 권의 학술지와 4건의 학술총서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학술총서 1, 2, 3이 나란히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으로부터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동북아역사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고창오씨종친회, 한국어문회 등으로부터 2억에 가까운 수주액(受注額)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심양항공대학과 저희 연구소가 ‘중한문화연구소와 한국어교육원’을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와 협정서를 교환한 것은 대외 활동의 중요한 개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편의 논문과 평론을 발표했고, 정영문 박사, 신춘호 선생 등과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13권을 펴냈습니다. 학술목적으로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을 다녀오면서 그간 넓히지 못한 안목의 협소함을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의 1년은 ‘깨달음과 얻음’으로 집약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얻음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일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올 한 해 제 개인적인 연구 활동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연구소의 위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진력할 생각입니다. 2건의 국제학술대회와 2~3건의 국내학술대회, 4~5차례의 집담, 2차례의 학술지 발간, 4~5건의 학술총서 발간, 2~3억의 수주액 등은 새해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치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소의 신념이란 무엇일까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갈 길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 우직하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된다는 믿음만이 캄캄한 밤길을 가는 우리의 유일한 등대가 아닐까요?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함께 했던 암소 누렁이와의 추억을 1년 내내 화두(話頭)로 틀고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도 고개 넘어 들판 건너 장에 가는 마음으로 저와 함께 먼 길을 떠나보십시다. 장에서 가서 볼 일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가는 길에 길동무가 될 수는 있겠지요.
부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2008년 새해 첫날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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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8.05.29 19:3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출간 기념

국 제 학 술 대 회

모시는 말씀

통합과 상호 소통의 시대,
한·중·일이 솥발처럼 버텨온 동북아에서
갈등의 역사, 대립의 패러다임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상생(相生)과 화해(和諧)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구축하는 일,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제, 그 지혜를
연행사와 통신사 사행록에서
찾고자 합니다.

부디 오셔서
격의 없는 담론의 장을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2008. 5.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드림

1. 주제 : 조선조 사행록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세계관
2. 일시 : 2008년 6월 13일(금), 10:00~18:00
3. 장소 : 숭실대 한경직 기념관 김덕윤 예배실
4. 주최 : 한국문예연구소
5.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09:30~10:00

제1부 개회식 사회   정영문(한국문예연구소 총무팀장)

인 사   조규익(한국문예연구소 소장) 10:00~10:05
축 사   이효계(숭실대학교 총장) 10:05~10:15


제2부 사회   곽원석(한국문예연구소 연구기획팀장)



1. 조선조 사행록 텍스트의 본질 (10:15~10:55)

발표   조규익(한국/숭실대 교수)
토론   김준옥(한국/전남대 교수)

2. 조선조 시기 대명 사대정책의 사상적 내인(內因)에 대한 고찰 (10:55~11:35)
발표   이 암(중국/북경 중앙민족대학 교수)
토론   임기중(한국/동국대 명예교수)


3. 조선조 후기 북학파문인들의 연행과 한중문인들의 정신적 교유 (11:35~12:15)
발표   김병민(중국/연변대 총장)
토론   박현규(한국/순천향대 교수)



점 심 식 사(12:15~13:15)


4. 열린 텍스트로서의 연행록과 역사적 지향성 (13:15~13:55)
발표   김문식(한국/단국대 교수)
토론   하정식(한국/숭실대 교수)

5. 외교적 관점에서 본 조선통신사, 그 기록의 허와 실 (13:55~14:35)
발표   손승철(한국/강원대 교수)
토론   박찬기(한국/목포대 교수)

6. 記錄文學としての朝鮮通信使 使行錄の東アジア的普遍性 (14:35~15:15)
발표 나카오 히로시(仲尾宏)(일본/
교토 조형예술대 객원교수)
토론   한태문(한국/부산대 교수)
통역   이시준(한국/숭실대 교수)

휴 식(15:15~15:30)

7. 18세기말 동서 지성의 해외체험, 성찰의 방향과 그 의미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대한 비교문학적 접근- (15:30~16:10)
발표   이혜순(한국/이화여대 명예교수)
토론   안삼환(한국/서울대 교수)

8. 연행사 및 통신사 노정 기록사진 감상 (16:10~17:10)
신춘호(방송대학TV 촬영감독/한 중연행노정답사
연구회 대표)




토론 (17:10~18:10)
좌장   소재영(숭실대 명예교수)

만찬(18:30~)





관련기사--------------------------------------------

<조선시대 외교사절, 시대정신을 말하다>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출간기념 국제학술대회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조선시대의 외교사절인 통신사들이 가졌던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논의하기 위해 한.중.일 석학들이 만난다.

한국문예연구소가 주최하고 동북아연구재단이 후원하는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출간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오는 13일 숭실대에서 열린다.

학술대회 주제는 '조선조 사행록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세계관'.

먼저 조선조 사행록 텍스트의 본질에 대해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인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발표하고, 이에 대한 토론자로는 김준옥 전남대 교수가 나선다.

또 중국 중앙민족대학의 이암 교수는 '조선조 시기 대명 사대정책의 사상적 내인(內因)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외교적 관점에서 본 조선통신사와 그들이 남긴 기록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강원대의 손승철 교수와 박찬기 교수가 집중 논의한다.

일본의 나카오 히로시 교토조형예술대 객원교수는 '조선통신사 사행록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주제로 논의를 진행한다.

사절을 따라 당시 청나라의 수도 연경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과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를 둘러본 독일의 괴테를 비교 분석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발표와 토론 주제는 '18세기 말 동서 지성의 해외체험, 성찰의 방향과 그 의미'.

조규익 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이 동북아에서 엮어온 갈등의 패러다임은 청산돼야 한다"며 "외교사절인 연행사와 통신사의 기록에서 이 같은 갈등 극복 방법을 찾고자 한다"고 학술대회 취지를 설명했다.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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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8.02.04 20:37
안녕하십니까?
금번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에서는 조선조 후기 궁중 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을 담론하는 학술발표와 공연(춘앵전)의 자리를 아래와 같이 마련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고려와 조선왕조는 음악, 춤, 노래가 어우러진 종합무대예술을 향유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재입니다. 부디 오셔서 정재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 제 : 조선조 후기 궁중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
때 : 2008. 2. 13.(수), 오전 10시~오후 5시
곳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실

순서
1부 : 개회사 및 인사, 축사

2부 : 발표
1. 조선조 후기 정재의 예악 실현 양상--이종숙(한양대)/토론 김영희(성균관대)
2. 조선조 후기 정재의 음악미학--임미선(전북대)/토론 권도희(서울대)
3. 조선조 후기 정재창사와 선계 이미지--조규익(숭실대/토론 강명혜(강원대)
4. 조선조 후기 정재의 무적 구조변화와 수용--손선숙(단국대)/토론 유미희(경인교대)
5. 조선조 후기 정재와 민속무용의 상호교섭 양상--박은영(한예종)/토론 이미영(국민대)

3부 : 정재 공연 및 출판기념
1. 춘앵전 공연--최서윤(성균관대, 석전 이수자)
2.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출판기념

문의처 : 820-0830, 820-0326, 820-0846

2008. 2. 4.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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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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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7.06.03 09:09
천하의 큼을 보고 나를 깨닫는 연행 길에 나서며
      -연행 길 사진전, 그 철학과 의미-              


                                                                 조규익(숭실대 교수)

한양에서 북경까지 넉 달 넘어 걸리던 왕복 6천리 길. 삼사(三使)와 군관, 시종 등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여행 길이었다. 교통편이 없으니 숙소며 식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한둔’이라 불리던 ‘한뎃잠’을 자야했으며, 윗사람들이라고 따뜻한 방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을 에는 만주벌의 밤 추위에  가끔씩 맹수들이 출몰하기도 하던 험지의 고행 길이었다. 먹는 것 역시 변변치 않았고, 목욕을 한다거나 때에 따라 입성을 갈아입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사치였다. 병들어 아파도 몸 보전하고 누울 자리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병이 나으면 행운이고, 죽는 일 또한 허다했다. 시신을 떠메고 가거나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중도에 그냥 묻고 가야 했다. 끔찍한 고행 길이었으나, 지엄한 왕명이니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사직과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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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행차가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에 이른다. 조·명, 조·청 간 외교적 현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제나 문화 교류도 그런 행차들에 숨겨진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다. 극동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던 작은 나라 조선이 세상을 보려면 중국이란 창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큼과 세상의 넓음을 서책을 통해서나 알 뿐이던 당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고행 길인 줄 알면서도 이런 저런 연줄을 통해 사행에 참여하려 했다. 말로만 듣던 ‘대국’의 선진문물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지식인들을 설레게 했다. 특히 중화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들의 사는 모습이 무엇보다 궁금했을 것이다. ‘한 번 몸을 일으켜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겠노라’던 홍대용의 포부는 연행에 나서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들을 연행에 나서게 한  보다 직접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중화주의와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조선조 교조적 성리학자들의 당면과제였다. ‘오랑캐 청국’의 존재는 그들에게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오랑캐가 차지한 중원을 보고자 한 당대 지식인들의 깊은 속내엔 자존심을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맞바꾸어야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가고자 했다. 뻔한 일이긴 했으나 가보지도 않고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담함을 뼈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기술해나간 것이 연행록들이다. 번화한 도회와 풍족한 물화를 보면서 ‘고인 물’ 같던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에도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문하던 이들에게 중국의 모습은 해답 그 자체였다.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그른 점은 그른 점대로 중국은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해나갈 모델이었다. 시시콜콜 적어놓은 견문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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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한양을 출발하여 수많은 산과 물, 촌락과 도회들을 지나 연경에 도달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고 같다지만, 인정과 풍속이 현격한 이국의 그것들이 어찌 우리와 같을 수 있었으랴. 그래서 연행 떠난 지식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기와 감동을 바탕으로, 오랑캐들도 소중화의 조선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중국의 산하와 문물이야말로 수백 년 간 배워온 성경현전(聖經賢傳)보다 그들에겐 더 큰 스승이었다. 조선조 지식사회에 북학(北學)의 기조가 정착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행 덕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에 태어난 카메듀서 신춘호 선생. 그는 지난 수년간 동호인들을 인솔하고 스스로 연행사가 되어 그 길을 되짚어 훑었다. 연도(沿途)의 풍물들을 모두 기록한 그 옛날의 연행사들처럼 그도 렌즈 속에 그 모든 것들을 잡아넣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국내와 중국의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담기에 바쁜 그다. 사실성과 예술미가 조화를 이룬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라. 이미지들의 배경엔 수 백 년 전 연행사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의 모습만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곳의 모습을 찍는 순간,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의 분위기까지 포착해 내고 있지 않은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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