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3. 17. 20:07

 

 


OSU in Stillwater 캠퍼스 조감도

 

 

 


OSU의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Boone Pickens Stadium)

 

 

 

 


OSU의 전신인 Oklahoma A&M 건물.
현재는 OSU의 Honors College로 쓰이고 있음[아래 사진 참조].

 

 

 

 


OSU의 Honors College로 쓰이고 있는 Oklahoma A&M  건물.

 

 

 

 


OSU의 상징 마크

 

 

 

 


Oklahoma A&M의 문장(紋章)

 

 

 

 


OSU의 문장

 

 

 

 


OSU의 마스코트인 '피스톨 페테(Pistol Pete)

 

 

 

 


피스톨 페테의 모델인 프랭크 이튼(Frank Eaton)

 

 

 

 


1928~1950년까지 Oklahoma A&M의 총장을 지낸 베네트(Henry G.Bennett) 박사 동상.
베네트 총장은 이 대학 발전의 초석을 놓았음.

 

 

 

 


OSU의 중심에 서 있는 중앙도서관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의 설경

 

 

 

 


OSU의 '선진 기술 연구 센터[Advanced Technology Research Center/ATRC]

 

 

 

 


OSU 캠퍼스의 한 건물

 

 

 

 


스튜던트 유니언(Student Union)에서 내려다 본 OSU의 가든

 

 

 

 


OSU의 중심에 서 있는 중앙도서관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의 여름 경치

 

 

 

 


백규 연구실이 들어 있던 사우스 머레이홀(South Murray Hall)의 복도

 

 

 

 


OSU의 중심을 관통하는 몬로 거리[Monroe Street]

 

 

 

 


학부와 대학원생들에게 특강 중인 백규

 

 

 

 


 OSU의 예술과학대학[College of Arts and Science]
대닐로위츠( Bret Danilowicz)학장과 상면(학장실에서)

 

 

 

 


백규 연구실을 방문한, OSU의 탁월한 한인 교육학 교수 조윤정 박사

 

 

 

 


OSU 인근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역사학과의 에멀리[Graham, Emily] 교수와  함께

 

 

 

 


OSU 역사학과의 반짝이는 두 학생 마켄지(Mackenzie)와 루크(Luke Mccamon)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미국 내에서의 연구기관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정했다고 하자, 한국 풀브라이트의 심재옥 단장은 참 잘한 결정이라고 나를 추어주었다. 미국 내에서 그 학교만큼 친절하고 협조적인 기관도 드물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오클라호마 주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 대해서 눈곱만큼의 사전 정보나 지식도 없었던 나로서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도착 후 뙤약볕 내려 쪼이는 캠퍼스를 걸어보니, 소떼 노니는 초원인 듯 한없이 넓었다. 방문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교정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모두 친절해서 마음이 놓였다. 따가운 햇살만 아니라면 시차로 인해 무거워진 눈꺼풀을 닫은 채 마냥 걷고 싶은 공간이었다. 듬성듬성 세워놓은 갖가지 양식의 건축물들도 고풍스럽고 따스해 보였다. 사우스 머레이홀(South Murray Hall)과 스튜던트 유니온(Student Union) 사이에 있는 쎄타 폰드(Theta Pond). 그 안에서 살아가며 이방인이 나타나도 무서워하지 않고 꽉꽉거리며 다가오는 기러기와 오리들도 정겨웠다.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 친절한 인간,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잘 어울려 친근미를 자아내는 OSU에서 꿈같은 한동안을 지내게 된 것이었다.

 

OSU는 이른바 랜드 그랜트(land-grant), 선 그랜트(sun-grant)’ 대학이었다. ‘랜드 그랜트 대학이란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한 토지에 세운 대학을 뜻하는 말이다. ‘랜드 그랜트 대학에 대한 지원은 1862년에 제정된 모릴법[Morrill Acts] 대학에 대한 연방 토지 허여법(許與法)’에 근거한다. 연방이 각 주에서 선출된 상하원 의원 1명당 3만 에이커의 나라 땅을 무상으로 주고, 그 토지 수익의 90%를 농학이나 공학 관련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 주립대학의 발전 기금이나 유지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모릴법이다. 1890년과 1907년에는 기존의 모릴법에 의해 지원을 받는 모든 대학들에 의회가 직접 보조금을 교부하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선 그랜트 대학이란 지속 가능하고 환경 친화적인 생태 기반의 대안 에너지를 연구 개발하는 대학을 뜻한다. ‘선 그랜트 계획의 지역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다섯 개의 미국 대학들이 모여 선 그랜트 연합이 결성되었고, 그 연합은 교통부, 에너지부, 농업부 등을 파트너로 삼아 연구교육 활동을 펼친다.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비롯, 코넬 대학교(Cornell Univ), 오레곤 주립대학교(Oregon St. Univ.), 사우스 다코타 대학교(South Dakotat Univ.), 녹스빌 테네시 대학교(Univ. of Tennessee at Knoxville) 등 다섯 대학들은 각각 선 그랜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관들이다.

 

1890년에 세워졌고, 2012년 기준으로 23,459명의 학생들과 1,857명의 직원을 포함한 OSU는 스틸워터 캠퍼스만 해도 1,489 에이커[6.03]에 이를 만큼 넓다. 캠퍼스 안 어디에서나 피스톨을 찬 카우보이[피스톨 페테(Pistol Pete)]의 사진과 마스코트를 볼 수 있었으며, 풋볼을 비롯한 각종 경기 중에도 피스톨 페테의 분장을 한 사람이 그라운드에 나타나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함께 풋볼을 관람한 제이슨으로부터 피스톨 페테의 연원을 들을 수 있었다피스톨 페테는 OSU, 뉴멕시코 주립대학, 와이오밍 대학교가 함께 사용하는 운동경기의 마스코트였다. 피스톨 페테는 프랭크 이튼(Frank Eaton)을 닮은 전통적인 카우보이의 의상과 모자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의 형상이 OSU 카우보이 팀의 마스코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3부터였다. OSU가 원래 ‘Oklahoma A&M 대학[Oklahoma Territorial Agricultural and Mechanical College]’으로 출발할 때 당시 이 대학의 스포츠 팀은 ‘Agriculturists, Aggies, Farmers’ 등으로 불렸고, 사실 그다지 인기는 없었지만 공식명칭은 ‘Tigers’였다. 그러다가 1923년 경 Oklahoma A&M은 스틸워터의 양떼 행진[Sheep Parade]’을 인도하던 프랭크 이튼(Frank Eaton)을 새로운 마스코트의 모델로 삼아 기존의 호랑이 마스코트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23년부터 프랭크 이튼은 Oklahoma A&M의 마스코트로 계속 쓰였으나, 1958년에 이르러서야 OSU는 이것을 공식적인 상징으로 인정했다 한다.

 

1860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나 캔자스로 이주한 프랭크 이튼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자경단원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 소속의 잔당 6명에 의해 맥주 집에서 저격당한 것이었다. 그 후 아버지 친구의 충고에 따라 열심히 권총사격 연습을 하여 결국 원수를 갚았고, 그 후로부터 그의 영웅적 행적은 전설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피스톨 페테의 모습이 가장 강렬하게 등장하는 이벤트는 스포츠 경기들과, 홈커밍[OSU’s Homecoming Celebration]을 포함한 각종 축제들이었다. 9월부터 시작되는 1학기 초부터 기숙사별로 학생들이 단결하여 홈커밍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래터너티(fraternity)와 소라러티(sorority) 즉 남녀 사생(舍生)들이 기숙사별로 모여 아이디어를 내고 기숙사 안팎을 치장하는 등 화려한 축제를 통해 그들의 단결심을 고취하고, 그런 유대관계는 졸업 후에도 끈끈하게 지속되는 것 같았다. 이러한 홈커밍데이의 전통과 함께 OSU는 놀랄만한 스포츠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점에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시즌 중 거의 매 주말은 게임 데이(game day)’였고, 하루 전부터 재학생동문주민들이 경기장에 총출동하다시피 함으로써 평소에 조용하던 시가지는 아연 활기를 띠곤 했다.

 

게임데이는 실질적으로 스틸워터의 도시축제인 셈이었다. 7만 명을 수용하는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Boone Pickens Stadium)’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고, 응원의 함성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으며, 캠퍼스 안의 잔디밭과 도로변의 공터는 외지에서 온 관객과 응원단의 텐트촌으로 바뀌곤 했다. 거대한 RV(Recreational Vehicle)들과 관객들의 승용차가 시내 공용 주차장들을 점령하고, 주차장으로부터 경기장까지는 무료 셔틀버스들이 수시로 왕래했다. 이처럼 풋볼, 농구, 여자 축구, 야구, 레슬링, 테니스, 크로스컨트리 등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들이 캠퍼스 안에서 활발한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OSU 스포츠의 대단한 모습은 대외적인 경기력 뿐 아니라 일반 학생들을 위한 생활스포츠에서도 두드러진다. 51개의 국내 선수권 챔피언십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이었다많은 챔피언십 보유 순위에서 OSU는 미국 대학 경기 연맹[NCAA: 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의 최상위 그룹인 1그룹[Division 1]351개 대학들 중 4위에 속하고, 아이오와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웨스트 버지니아 주를 포괄하는 12 경기 협의회[Big 12 Conference]’ 소속의 10개 대학들 중에서는 1위에 속한다. 

 

그 뿐 아니라 캠퍼스 한 쪽에 서 있는 국립 레슬링 명예의 전당 박물관[National Wrestling Hall of Fame and Museum]’은 미국 전역에서 배출된 역대 레슬링 선수들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링컨도 루즈벨트도 슈워츠코프도 레슬링 선수출신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명예의 전당은 단순히 힘깨나 쓰는 장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잊히는 한국과 달리 오래도록 명예가 드높여지고 보존되는 미국의 힘과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OSU 스포츠의 장점이 스타플레이어들의 엘리트 스포츠 종목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들의 건강관리와 유지를 위해 세운 종합 스포츠관인 콜빈 센터와 세레티안 웰니스 센터,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 잔디 축구장, 테니스장 등이 캠퍼스 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포츠 공간들은 대중 스포츠의 현장이었다. 구성원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시설들은 대학이 엘리트 스포츠 아닌 대중 스포츠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다.

 

18901225일 오클라호마 의회가 모릴법에 의거하여 개교한 오클라호마 지역 A&M 대학은 개교 이래, 많은 변화와 발전들을 거쳐 1957515일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으로 변신했고, 스틸워터를 그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스틸워터 이외에 ‘OSU-오크멀기 기술연구소[OSU-Institute of Technology in Okmulgee]’(1946), ‘OSU-오클라호마 시티[OSU-Oklahoma City]’(1961), ‘OSU-털사[OSU-Tulsa]’(1984), ‘OSU-건강연구소, 털사[OSU-the Center for Health Sciences-Tulsa]’(1988) 등의 분교들을 거느리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이 지역의 대표 대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스틸워터의 OSU 캠퍼스는 농업과학과 자연자원 대학[College Science and Natural Resource(CASNR)/농업경제학(Agricultural Economics), 농업경영학(Agribusiness) 16개 전공]’, ‘예술과학대학[College of Arts and Science(CAS)/영어(English), 역사(History) 24개 학과]’, ‘교육대학[College of Education(COE)/초등교육(Elementary Education), 직업기술교육(Career and Technical Education) 29개 프로그램]’, ‘공학건축기술대학[College of Engineering, Architecture, and Technology(CEAT)/소방안전기술(Fire Protection and Safety Technology), 산업공학과 경영학부(School of Industrial Engineering and Management) 13개 학부]’, ‘인문대학[College of Human Sciences(HS)/디자인학과(Department of Design), 호텔 식당경영학부(School of Hotel and Restaurant Administration) 4개 학과]’, ‘스피어스 경영학부[Spears School of Business/금융학과(Department of Finance), 마케팅학과(Department of Marketing) 7개 학과]’ 6개 대학 200여 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틸워터의 전체면적은 73.3였고, 그 중 다운타운의 면적은 이 채 안 되는 듯 했으며, 6.03에 달하는 OSU는 다운타운으로 감싸인 방사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미국 내 대학들 가운데 OSU의 서열이 어떠하든, 동부나 서부의 전통적인 명문대학들과 비교하여 그 수준이 어떠하든, 스틸워터를 비롯한 오클라호마 주민들은 정말로 OSU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점이 이채롭고 감동적이었다. 서울과 지방 대학들 간의 서열을 따지고, 같은 지역 안에서도 대학 간의 서열을 따지며, 같은 대학 내에서도 학과 간의 서열을 따지며 차별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OSU는 오클라호마를 대표하는, ‘우리 대학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 속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늘어서 있는, 나지막하고 고풍스런 건물들이 OSU 캠퍼스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가끔 체육관으로 몰려가 ‘Go Pokes!’를 목청껏 외치며 OSU Cowboys들을 응원하는 세계의 수재들이 그 공간에 열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OSU에 머물며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과, 그로부터 나오는 미국의 힘을 실감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에 막 도착하여 뙤약볕 아래 캠퍼스를 돌아보는 백규와 멜라니

 

 

 

 


OSU 갤러거 아이바 경기장[Gallagher Iba Arena] 앞에 서 있는 'OSU Spirit Rider'

 

 

 

 


풋볼 경기 중 OSU가 한 점을 얻자 말을 탄 카우걸과 응원단이 경기장에 나온 모습
[Boone Pickens Stadium]

 

 

 

 


풋볼 경기를 관람하는 제이슨(Jason Culp)과 백규

 

 

 

 


풋볼 경기장에서 OSU를 응원하는 학생 응원단

 

 

 

 


풋볼 경기에서 OSU가 선취점을 올리자 기뻐 뛰쳐나온 응원단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에서 힘차게 출발하는 선수들

 

 

 

 


OSU에서 운영하는 캠퍼스 내의 호텔 Atherton

 

 

 

 


홈커밍 행사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만들어 전시하는 홍보판

 

 

 

 


홈커밍 행사에 전시할 기숙사 장식물들을 합동으로 제작하고 있는 여학생들[sororities]

 

 

 

 


기숙사생들 스스로 한 학기 동안 기획하여 제작한 장식물을 기숙사 전면에 부착한 모습.
많은 일반인들이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캠퍼스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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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U 캠퍼스 내의 아파트[101 윌리엄스]

 

 

 

 


OSU 아파트를 관리하는 사무실 건물[Famil Resource Center/FRC]

 

 

 

 


대학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OSU 대학 경찰서 순찰차량들

 

 

 

 


겨울을 맞은 OSU 쎄타폰드(Theta Pond)

 

 

 

 


학생들이 언제나 찾아 체력을 단련하는 콜빈 레크리에이션 센타(Colvin Recreation Center)

 

 

 

 


학생들의 체력과 건강 증진을 위해 건립된 '세레티안 웰니스 센터' 입간판

 

 

 

 


갤러거 아이바 아레나에서 갖는 후기 졸업식의 한 부분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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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2. 23. 14:15

 

 

 

                         6개월간 몸을 담고 있던 South Murray 홀

 

 

 



                              OSU Student Union

 

 

 



                                        머레이 홀 1층에 있던 연구실 팻말

 

 

 



                                       연구실 내부

 

 

 

 

스틸워터를 떠나며

 

 

 

 

예정 체류기간 6개월을 모두 써버리고, 오늘 드디어 스틸워터를 떠난다. 그동안의 추억에 쩐 짐들이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득하건만 마음은 대체로 허하다. 그 옛날 유목민들이 이랬을까. 천막을 대충 걷어 말 등에 올려 메우고 정처 없이 또 다른 풀밭을 따라 길을 떠나던 그들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인 내가 노마드라니? 스스로의 몸에서 노마드의 애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리라. 풀이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떠나는 아침이면 그 옛날의 유목민들은 무수히 되뇌었을 것이다. 삶터 앞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천막 주변에서 재잘거리던 작은 새들을, 가끔씩 찾아와 기웃거리던 사슴이나 토끼들을, 환하게 미소 짓던 꽃들을, 귓가에 스쳐가던 바람결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천 년의 세월을 격()한 노마드의 서정이 이 순간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4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출발 예정.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 미련이 남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둘러 볼 곳들이 남아있어 스틸워터 출발 날짜를 며칠 당기기로 한 것이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Creek)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동쪽의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

 

스틸워터를 떠나는 이 순간의 기분은 9년 전 중남부 유럽의 20개 나라들을 자동차로 돈 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던 그 기분과 동일하다. 사실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면서도 타고 난 낙천성과 조심성 하나로 무사히 그 길을 주파(走破)해낸 것처럼, 달력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체류해온 오클라호마 주와 스틸워터 역시 까맣게 모르던 공간들이면서도 그다지 숨차 하지 않고 골인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중남부 미국인들의 보수성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일반적 성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에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들의 보수성이란 자기표현의 미숙함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선 그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길과의 만남, 이상적인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아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야 할 단 하나의 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 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소떼를 몰고 재입사(再入社)하기로 한다.

 

 

 

 


산책로의 한 부분

 

 

 

 


가끔 산책하던 부머 호수의 오리들

 

 

 

 


부머 호수의 서정

 

 

 

 


아파트 뒤켠 풀밭에서 식사하고 있는 기러기들[Canadian Goose]

 

 

 

 

 
아파트 주차장까지 진출한 기러기들

 

 

 

 


산책로의 전선을 점령한 새들

 

 

 

 


산책로에서

 

 

 

 


산책로에서

 

 

 

 


눈 내린 산책로의 한 부분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산책로에서 만난 다람쥐

 

 

 

 


추운 날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새

 

 

 

 


OSU 스포츠의 대명사 풋볼 팀 광고사진

 

 

 

 


'2013년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중 몇몇과 함께

 

 

 

 


스틸워터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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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여러 가지 고생되는 부분은 좀 있었겠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또 한단계의 성숙을 이루어낸 것으로 느껴지는구먼.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지만 성공적으로 건강하게 연구활동을 종료한 점 진심으로 축하하네.
    서울에서 보세나.

    2014.02.24 08:2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고맙네. 6개월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흘러갔네. 이번에야 미국의 속살을 본 것 같아 기분은 좋네. 보려고 하는 것만큼만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했네. 그들을 넘기가 쉽지 않지만, 넘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깨달았네. 격려해줘서 거듭 고맙네. 서울에서 보세.

    2014.02.24 09:39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4. 2. 4. 12:03

 

 

 

 

 


OSU의 중앙도서관

 

 

 


OSU 중앙도서관의 서고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부럽기만 한 미국의 도서관들

 

 

 

 

15년 전 미국의 유명대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도서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대학의 질을 좌우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당시의 내 의식수준으로 그들의 도서관 시스템은 환상 그 자체였다. 도서관에 신청만 하면 미국 전역, 아니 유럽의 대학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까지 입수해 빌려주는 그들의 제도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연구와 공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대학에 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자료들이 거의 모두 디지털화 된 지금의 상황이 도서관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 자료를 신청하면 세계 전역의 디지털 자료까지 일일이 찾아내어 이메일로 서비스해주는 환상적인 체험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대학들은 장서 숫자의 확충이나 새 건물들의 건립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학평가의 주요 항목 가운데 장서량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 대학 도서관들과 자료를 교환하기는커녕 국내 대학도서관들 사이에서도 자료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좋은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큰 대학들이 그 제도에 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학의 도서관들만 훌륭한 건 아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 지역에는 공공도서관들이 있고, 질 좋고 풍부한 장서를 자랑한다. 수시로 독서 관련 이벤트를 여는 등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센터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뿐인가. 도서관마다 새로운 도서들이 수시로 들어오니 오래 된 책들이나 복권(複卷)들은 퇴출시키는데, 그걸 주민 상대로 공짜에 가까운 가격[수십 센트에서 1불 혹은 2]으로 판매하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연다. 많은 사람들이 흡사 선물 받아 기쁘다는 표정으로 좋은 책들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경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퇴근 무렵 직장인들이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반납한 뒤 새로운 책들을 빌려가는 모습, 마트 가는 길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빌려가는 아주머니들, 손자손녀들과 손을 잡고 도서관에 들러 독서삼매에 빠져 드는 할아버지할머니들, 도서관에 비치된 고급 서적들을 꺼내 놓고 읽어가며 과제물 작성하기에 바쁜 고등학생들, 설치해 놓은 컴퓨터들을 통해 각종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고 출력하는 데 몰두하는 일반인들... 대학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알 수 있고, 지역의 공공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지론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카네기(Andrew Carnegie)20세기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스코틀랜드 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쓴 인물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도서관을 짓는 일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그 가운데 1,689개는 미국에, 660개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125개는 캐나다에, 나머지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세르비아피지 등에 각각 세워졌다. 1919년 미국 전역에 3,500개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카네기가 지어준 것이라니,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가.

 

돈과 권력을 자손들에게 넘겨 줄 욕심으로 독직(瀆職)의 죄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세습하기 위해 애쓰는 이 나라의 재벌들이 우리의 현주소다. 그들이 어렸을 적에 카네기의 전기를 단 한 페이지만 읽어 봤어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을 텐데. 단돈 한 푼 책이나 도서관에 기증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참 돈 쓸 줄 모르는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던 때는 우리 사회에 책이 몹시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은커녕 읽을 만한 낱권의 책조차 없었다. 서울의 어떤 독지가가 기증했다는 수십 권의 동화책들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늘 자물쇠가 채워진 채 교무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렇게 60년대~70년대의 학창시절 내내 지적인 궁핍의 상황은 지속되었다.

 

정치적문화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던 80년대. 책의 생산량과 국민들의 독서량이 막 늘어나려는 찰나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고, 컬러 TV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책을 잡는 대신 한층 야해진 영화, TV 드라마, 프로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도서관이래야 잡동사니들을 다 합쳐서 100만권을 소장하는 대학들이 거의 없었고, 공공도서관 없는 지역들도 수두룩했다. 도서관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도서관이란 한낱 독서실’, 그것도 시험 때나 잠시 찾아가는 공부방이란 것이 우리 학창 시절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니 독서열풍은커녕 책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에 대한 기본 상식을 지닌 국민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화끈한 성품대로 시절은 순식간에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정신 나간 교육부 인사들이 이젠 종이 책을 없애고 아이들 교과서도 이북[e-book]’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종이 책을 아날로그 시대의 뒤쳐진 산물, ‘이북디지털 시대 발전의 산물로 동일시하는 인사들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짜로 주어지는[아니, 사실은 아주 비싼 값으로 주어지는] 단말기를 손에 넣자마자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기에 바빠 그것을 교과서로 쓰는 시간은 하루에 단 몇 분, 길어봐야 한 두 시간에 불과했다. 그게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나마 개꼬리만 하던독서시간은 아예 사라져 버려, 다시 독서 시대의 영광을 되돌리기엔 불가능해졌다. 독서의 습관을 처음부터 가져 보지 못한 기성세대와, 디지털에 사로잡힌 신세대가 어우러진 이 나라의 현실이 걱정이다.

 

지금 우리가 국민소득 2만 불을 가까스로 넘겼다고는 하나, 국민의식이 변하지 않고는 3~4만불 대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어렵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국민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고, 지금 같은 교육열만으로 세계와 경쟁할만한 인재를 길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올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은 기본적으로 독서를 통한 자발적 공부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두뇌의 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교육에 큰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부정적 풍조를 고쳐야 나라가 산다. 그러기 위한 지름길이 바로 독서운동이다. 어머니나 주부들이 하루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어보라. 아버지들이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와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어보라. 휴일에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좋은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사주고, 책 읽은 아이들에게 칭찬이라도 건네 보라. 그 순간 아이들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은 책을 멀리하면서 아이들보고만 공부하라, 책을 읽어라!’고 야단치는 것처럼 모순적인 행동은 없을 것이다. 부모들부터 바뀌면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이 책과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사교육비로 큰 돈 쓸 필요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700개 정도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네마다 한 개씩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방과 후 학생들의 학습이나 독서, 어른들의 여가활용도 동네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 예산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재벌들이나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이 도서관 운동에 헌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카네기가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도서관을 지어준 것도 도서관에 국가의 장래가 걸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왜 읽어야 되는지, 도서관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국민이나 국가는 결코 흥할 수 없다. ‘책 읽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고, 도서관이 우리 삶의 희망 공간임을 이제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서가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서관 서고에 있는 책[겹치는 책이나 퇴출시키는 책]을
'몇 센트~1, 2 불' 정도의 싼 값으로 판매하는 행사장

 

                                                                               @@@@@

 

                                  ***이 글은 태안도서관에서 발간하는 <<천자만홍>> 14호에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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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다시 맑은 물을 순환시키기 위해서 혼탁해진 물이 밁아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방법은?
    똑같은 생각과 방법으로는 지속적인 시행착오가 반복될 듯.
    혼탁한 물이라도 당장 필요하다고 아우성치며 혼란이 가중될까?

    2014.02.05 10:47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지금의 젊은 부모들이 정신 차려야 하는데, 쉽지 않으리라 보네. 우리 역시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 없으니 말일세. 정말로 세대를 초월한 선각자들이 나서서 의식개혁 운동이라도 대대적으로 벌이지 않고는, 이미 한참 잘못된 우리의 관행들을 바꿀 수는 없겠지. 그저 모두 벼랑으로 달리니 함께 섞여 달리다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수순을 밟게 되지나 않나 두려워지는 요즈음일세. 무엇이 시급한 일인지,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

    2014.02.05 13:49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2. 28. 10:40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엄청난 공동체였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곳곳에 잠재된 역사와 문화의 실체, 그리고 진하게 감지되는 그들의 민족적 의지가 놀라웠다. 그동안 인디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내 편견이나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클라호마 주 서북쪽과 동쪽을 여행하면서 체로키와 오세이지 인디언들의 실체를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곳 중남부에서 만나는 치카샤 인디언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주 전체 153개의 카운티 중 13[그래드(Grad)/맥클레인(McClain)/가빈(Garvin)/폰타탁(Pontotoc)/스티븐스(Stephens)/카터(Carter)/머레이(Murray)/쟌스톤(Johnston)/제퍼슨(Jefferson)/러브(Love)/마샬(Marshall)/브라이언(Bryan)/코울(Coal)]로 구성되어 총인구 318,658명, 면적 2,3456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치카샤 네이션이었다.

 

 


치카샤 네이션의 현재 영역[표시 부분은 카운티 이름들]

 


테네시 주에 있던 치카샤 영역

 


오클라호마 주에서 치카샤가 차지하는 부분들과 카운티 이름들

 


치카샤 네이션 영역도

 

177번 하이웨이를 타고 내려가던 중 아이오와 인디언 네이션을 만났고,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 쯤 뒤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폰타탁 카운티의 에이다(Ada) 시티에 도착했다. 원래는 스틸워터에서 직접 설퍼(Sulphur)로 달려가려 했으나, 네이션 본부 건물이 있는 에이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현재 네이션 본부 건물들만 남아 있고, 그들의 실제 역사나 문화는 컬츄럴 센터가 있는 설퍼와 지난 날 이들의 수도였던 티쇼밍고(Tishomingo)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에이다(Ada) 시티에 있는 치카사 네이션 건물의 일부

 


번성한 에이다 시티의 다운타운[현재 도로공사중]

 


에이다 시티 치카샤 네이션 앞뜰에 있는 전사[Warrior]상

 

에이다로부터 30분쯤 걸려 설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치카샤 문화센터[Chickasaw Cultural Center]를 찾았고, 거기서 치카샤 족의 지식인 여성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를 만났다. 마침 관람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녀와 독대하여 치카샤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설퍼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에 들른 티쇼밍고(Tishomingo)치카샤 의회 박물관[Chickasaw Capitol Museum]’에서도 역시 지성적인 풍모의 여성 큐레이터 플로라 핑크(Flora Fink)로부터 다양한 콜렉션들에 얽힌 정치적인류학적 설명을 들었다. 두 여성 모두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문화적으로 생동감 넘치며 활기에 찬 주민들로 이루어진 것이 치카샤 네이션임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치카샤 문화센터와 의회박물관 모두 치카샤가 이 땅에서 한 때 살다가 사라진 민족이 아니라,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임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치카샤의 여성 지식인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설퍼(Sulphur)시티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세련된 모습

 


건축미가 돋보이는 치카샤 컬츄럴 센터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세련된 모습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전시물[독수리 깃털로 만든 추장의 옷]

 


치카샤 컬츄럴 센터에서 만난 큐레이터 Deloris Jefferson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생활사 자료들[치카샤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음]

 


치카샤 컬츄럴 센터 뒷편에 마련된 주거지 모형 위에서 멜라니

 


치카샤 컬츄럴 센터 안뜰에 세운 가족상

 


티쇼밍고 시티의 치카샤 네이션 의사당 건물

 


치카샤 의사당 건물 앞에 세워진 전사 티쇼밍고 상

 

분명치는 않으나 치카샤 족은 원래 촉토(Choctaw) 족과 함께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북미 쪽으로 이주했다 한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근처에 살고 있었으며, 일부는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사바나(Savannah) 타운에도 살고 있었다.

치카샤 족이 미시시피, 앨라배마, 테네시, 켄터키 등지의 사냥터들을 비롯한 큰 땅을 점유하고 있던 때는 다른 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시절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탐험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결국 과도한 요구를 하던 탐험대를 공격하여 패주시킴으로써 치카샤가 남동부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평판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백인 이주자들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치카샤 족의 땅이 서부 팽창을 위한 주요 타깃으로 부상되었고, 루이지애나 매입지에 있던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미국정부가 차지하면서 치카샤 족과 다른 동부 부족들을 서부로 이주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832년 이주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치카샤 족은 미국 정부에 굴복했고, 그 조약은 1834년에 다시 협상될 수밖에 없었다새 인디언 구역 안의 미시시피 서쪽에 살만한 땅이 찾아질 때까지 정부의 이주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조약 속의 주요 조항들 가운데 하나 때문이었다. 

 

 


1890년대의 치카샤 영역도

 

적절한 땅을 찾을 수 없었던 현실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촉토 족과의 동거였다. 다시 말하여 치카샤 족은 새로운 인디언 구역 내 촉토 땅의 한 부분을 빌려 이주할 것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1937년의 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잃고 촉토 족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사실 그들에겐 가장 큰 문제였다. 촉토 족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이 촉토 네이션의 소수자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투쟁을 기울인 결과 드디어 1837년 촉토 족으로부터 완전한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기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1855년의 새로운 조약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네이션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이런 시대가 190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인디언 구역이 오클라호마 구역과 통합되면서 이 지역은 오클라호마 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치카샤 네이션이 종말을 고함에 따라 모든 치카샤 인들은 결국 미국인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치카샤 의회 박물관 간판




치카샤 의회 박물관 입구

 

1907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치카샤의 혈통이나 연고를 계승한 비공식적 기구들 몇 개만 있었을 뿐, 치카샤 네이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1856년의 치카샤 헌법에서 치카샤 인들은 부족의 추장이나 족장을 갖던 수준으로부터 선출된 거버너(Governor)’를 갖는 수준으로의 문명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정부에 대한 치카샤 인들의 권리나 땅 문제에 대한 협상 등 거버너가 수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미국의 대통령이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가 치카샤 네이션에게는 사실상 죽은 기간(Limbo Period)’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인디언 운동가들이 거국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인디언들의 권리가 새삼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덕에 치카샤 족도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83년 치카샤 네이션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 운동은 절정에 올랐으며, 결국 네이션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대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치카샤 족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먼저 이주한 촉토 족과 5년 간 힘든 협상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1836년 땅을 사들이기로 합의한 뒤, 우선 53만 달러에 촉토의 서쪽 땅 대부분을 매입하여 1837년 상당수의 치카샤 인들을 이주시켰다는 점,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눈물의 여정[Trails of Tears]에서 500명 이상이 이질이나 천연두로 죽어나간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국 현재의 땅에 안착하여 보금자리를 꾸린 점 등은 치카샤 족을 범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전체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춘 데다가 티쇼밍고(Tishomingo)나 잔스턴(Douglas H. Johnston)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 덕에 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합중국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 티쇼밍고(Tishomingo)의 모습 

 


초대 거버너 Douglas H. Johnston과 그의 집무실

모든 인디언 네이션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가 찾은 치카샤 네이션은 가족과 민족 공동체, 역사 유산 등이 보존되고 확산되어온, 문화적 발효의 공간이었다. 국가가 부족의 독점적 운영권을 보장한 카지노들이 상당수의 인디언 부족들에서는 부족원들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수입을 무의미하게 탕진하는 대신 2세 교육이나 산업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미래의 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들의 2세들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투자의 좋은 사례임을 티쇼밍고 치카샤 뱅크 뮤지엄의 큐레이터는 적극 강조했다.

 

 


The Bank of the Chickasaw Nation 건물[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뮤지엄 안의 각종 옛 서적 및 장부들

 


뮤지엄 안의 캐쉬어 창구

 


뮤지엄에 소장된 당시 은행의 금고

 


뮤지엄의 큐레이터와 함께

 

티쇼밍고에서 30분 거리의 Chickasaw White House에서 읽어낸 그들의 정신도 그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1895년 오클라호마 밀번(Milburn)에 세워진 이 집은 1898년부터 1971[이 해에 이 건물은 국가 등록 사적지로 지정되었음]까지 치카샤의 거버너 잔스턴(Douglas H. Johnston)과 그 후예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거버너가 살던 집을 ‘White House’로 불렀을까. 백인 중심으로 꾸려가던 미합중국에 결코 꿇리지 않겠는다는 치카샤 나름의 민족적 자존심이 그런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미국을 이끌고 나가는 백인들이 워싱턴에 ‘White House’를 갖고 있듯이 자신들도 이곳 오클라호마의 밀번에 자신들만의 ‘White House’를 갖고 있노라는 자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치카샤 인들 모두 그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Chickasaw White House

 


화이트 하우스의 거실

 


화이트 하우스의 식당


화이트 하우스 주인의 서재

 


화이트 하우스 안내원과 함께 한 멜라니

 

***

우리는 밀번으로부터 한 시간 가량 달려 촉토 땅의 듀랭(Durant)이란 도시에 들어갔다. 우리의 관심은 이곳에 있는 삼강 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과 와쉬타 포트(Washita Fort)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치카샤와 촉토의 겹치는 문화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도심의 작은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치카샤 명칭 표기[Chickasaw/Chickasha]' 및 그 발음에 관한 문제

치카샤 컬츄럴 센터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의 설명에 따르면, 치카샤 인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Chickasha'로 적고 '치카샤'로 발음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공적인 문서들 대부분에는 'Chickasaw'로 적혀 있으며, '치카사' 혹은 '치카소'로 발음한다. 그러나 치카샤 인들은 미국식 보다는 자기들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나는 'Chickasaw'라는 미국의 공식 표기를 존중하되, 치카샤 인들의 생각도 존중하여 실제 발음은 '치카샤'로 하고자 한다. 

 

**치카샤 실[Seal, 문장(紋章)]에 대한 설명 

원 안에 있는 치카샤 전사의 모습은 치카샤 인디언들이 예로부터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임을 상징하고, 그가 들고 있는 두 개의 화살은 치카샤 부족사회의 두 분파를 의미한다. 그 전사는 동쪽에 있는 고향을 버리고 서쪽의 촉토 사람들의 땅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추장 티쇼밍고다. 티쇼밍고는 치카샤 인들이 추앙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티쇼밍고는 그의 부족원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트레일 도중인 1838년에 죽었다. 치카샤 인들은 그들만의 네이션을 만들기 위해 1856년 촉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네이션을 만들어 그 수도를 티쇼밍고 시티로 명명했으며, 문장(紋章)으로 그의 용기를 선양했다. 1867816, 새 치카샤 네이션의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문장은 치카샤 네이션이 호클라호마 주에 편입, 해산될 때까지 모든 공식 서류들에 빠짐없이 첨부되어 왔다.

 

 


치카샤 네이션 문장[紋章, seal]

 


Chickasaw Council Museum에서 컬렉션들을 일일이 설명해 준 큐레이터 Flora Fink

 

 


다운타운의 치카샤 음식점에서 Flora Fink와 함께 한 점심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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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2. 9. 01:09

 

 

도올 선생과 홍준표 지사를 보며

-신문기사를 읽고-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했다는 책[사진은 중앙일보 2013. 12. 7.]

 

 

10 몇 년 전의 일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까이에 모시고 있던 선배 교수 한 분이 평론가 모씨에게 증정한 책이 경매 물건으로 나온 것이었다. “○○○ 교수님께, △△△ 삼가 드림이란 헌사가 대문짝만한 사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었다. 저자가 유명인사에게 증정한 책일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이 경매업계의 상식이다.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은 그런 관습을 이용한 것일 테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실망으로 일그러지실 선배 교수의 표정이 떠올라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잽싸게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내가 찜했고, 결국 그 책은 지금도 내 서재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인터넷 경매에 참여하는 경우 언제나 혹시 그런 헌사가 붙은 책이 없는가를 먼저 보게 된 것도 그 일을 경험한 뒤부터다.

 

 

어제 인터넷을 열었다가 우연히 중앙일보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읽어본즉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한 책이 고서방에 나왔고, 누군가 그것을 구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책을 구입했으면 조용히 가지고 있을 것이지, 만천하에 공개한 그가 일단은 서운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헌사까지 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공개되었으니, 분명 도올 선생은 발분(發憤)했을 것이고, 홍 지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기사 말미에 홍 지사는 국회의원 등 공직들을 그만 둘 때 사무실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해명을 했지만,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인터넷이 하도 발달하여 카메라에 찍히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미국 오클라호마의 오지에 틀어박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조국에 있는 친구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밝혀진 증거물 앞에서 무슨 둔사(遁辭)’가 필요할까.

 

 

그간 고서에 관심을 갖고 종종 온라인, 오프라인 경매에 참여해왔다. 심심치 않게 확인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생전에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아도 세상을 뜬 뒤 그 책들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레기 취급하여 고물상에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오프라인 경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떤 학자의 책을 여러 권 입수한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책들이 경매시장에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책 주인 죽은 뒤 두 달 만에 그의 소장서적들 모두가 시중에 깔렸다는 대답이었다. 무식한 자식 놈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간 저서들을 몇 권 내놓은 입장으로 고서 경매에 참여하면서 혹시 내 책을 경매장에서 만날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최근 들면서 내 책도 경매 사이트에 뜨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출판사에서 재고도서를 고서점에 돌렸을 수도 있겠으나, 독자들이나 학생들이 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리라. 그 책들이 그저 내가 누구에겐가 정성스럽게 헌사를 써서증정한 것들만 아니길 기원할 뿐, 이제 그런 것들을 거둬들일 방법도 의지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얼마 전의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다른 학과의 모 교수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꺼내 본 즉 그 몇 년 전 그에게 증정한 내 책이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연구실을 정리하려는데 몇 년 전에 받은 당신의 책이 나왔다. 보관할 여력도 없고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되돌려 드린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일단은 야속했지만, 곰곰 생각하니 고맙고 솔직한 말이었다. 만약 자신의 전공과 무관하다하여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것이 어느 경로로 중고서점에 들어갔다면,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경매장에 나왔다가 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와 대판 싸웠거나 심하면 원수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는 내 분신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내게 돌림으로써, 일어날 수도 있었던 참화(?)를 미연에 막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일시적인 서운함으로 더 큰 비극을 막은 셈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실, 이사하다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책이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책 짐을 반기지 않는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너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획일화 되면서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사철만 되면 아파트 쓰레기장이 버려진 책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책을 내도 전공자 이외에는 무턱대고 증정하지 않는다. 책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먼저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권 증정해도 되겠냐고. 대부분은 기꺼이 받겠다고 대답하지만, 과연 마음속도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무턱대고 증정했다가 뒷날 고서 경매장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책을 건넨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도올 선생이 보기에 홍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괜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사상의 결정체인 동경대전을 해석한 자신의 책을 건넨 것 아닐까. 백성들 편에서 정치를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이었든 자발적인 행동이었든 홍 지사는 그 책을 버렸다. 그가 아마 한 줄이라도 읽어봤다면 그 책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인물들 가운데 책을 가까이 한다거나 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선거철에 매문가들을 동원, 자신의 일생을 미끈하게 윤색하여 선거용 책자를 내는 인사들은 여의도에 깔려 있지만, 제대로 책을 접하거나 쓰는 인사들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안다. 사실 그런 인사들에게 힘 들여 쓴 저서를 증정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홍 지사를 정치권에서 그 중 나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 왔고, 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믿음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번 일은 아마도 그의 말대로 측근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도올 선생께서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라. 그리고 그 가가대소에 난해한 주석을 달지 마시라. 홍 지사께서도 더 이상 둔사를 내 놓지 마시고, 화끈한 전화 한 통화로 도올 선생의 마음을 풀어 주시라. “우리 자갈치에서 만나 산성막걸리로 회포 한 번 풉시데이!”하고 말이다.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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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개인적으로 안하무인 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는 홍준표와 조교수가 미국 땅에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다보니,
    문득
    "溫古而知新"과 "Thr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on this continent."란 글귀가 생각나는구먼.

    2013.12.09 14:33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재미있는 생각을 했군. 홍준표 지사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그런데 그나마 그 정도의 배짱과 고집을 갖고 있는 정치인도 드물 것 같군. 일부에서는 그걸 소신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가끔 고집과 소신이 혼동되기도 해. 진주의료원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나 그렇게 덤벼들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더군. 하도 험한 시대라서 제 목소리 내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이번 일은 아무래도 홍지사의 입장이 궁하게 되었어. 그래도 아마 멋지게 돌파하리라 보네. 가끔 들어와서 좋은 말 남겨주기 바라네. 추위에 건강 조심하게.

    2013.12.09 21:15 [ ADDR : EDIT/ DEL : REPLY ]
  3. 가가

    도올 선생이 나꼼수에 출연했을 때 "여기 홍준표도 왔었다던데, 그래서 오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었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동경대전 선물한 건 옛날 일이고, 그 이후 홍준표의 행태를 보면서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이번 소식을 접하고서도 도올 선생은 가가대소는커녕 냉소조차도 짓지 않았을 겁니다.

    2013.12.09 23:39 [ ADDR : EDIT/ DEL : REPLY ]
  4. 백규

    어디 '흠 없는 인간'이 있겠어요? 그나마 사람들로부터 '그만 하면 괜찮다'고 평가받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요. 두 분 모두 우리 사회의 '있을 자리에 있는 분들'이라는 게 제 생각인데요. 사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도올 선생도 홍 지사도 완벽한 인품을 갖춘 분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한 두 가지라도 남보다 앞서 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셨다면, 그건 그 분들의 행운이고 복이지요. 가가 님은 도올 선생이 홍 지사에 대하여 '냉소조차 짓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셨는데, 만약 그렇다면 도올 선생의 인품이야말로 이백(李白)이 말한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빙그레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다]'의 경지와는 아주 동떨어진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 생각엔 그렇지 않으리라 봅니다. 가가 님의 말씀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책 한 권'을 두고 만인이 구경하는 링 위에서 맞붙게 된 두 분의 '체급'이나 파이팅의 진행상황, 혹은 그 결과를 잠시 지켜 보기로 하지요.

    2013.12.10 00:33 [ ADDR : EDIT/ DEL : REPLY ]
  5. 나그네

    자신의 책이 경매장에 나올까 두려워 하시는 백규 선생님! 부럽군요. 경매장에라도 나오면 영광 아닌가요? 저는 언젠가 제 책이 그냥 쓰레기장에 버려졌다가 인부들의 손에 의해 '파지'로 분류되는 현장을 목격한 인물이올시다. 그 참담함이란! 우리 어릴 적에야 책 한 권 손에 넣으면 종이가 필 정도로 읽고 또 읽고 하지 않았던가요? 못 되게 변해버린 세상이나 탓해야 할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3.12.12 01:29 [ ADDR : EDIT/ DEL : REPLY ]
  6. 백규

    나그네 님의 말씀이 맞네요. 저 모르는 사이에 쓰레기장에 버려지거나 한겨울 군밤 종이로, 호떡 싸개로, 그도 아니면 궁한 화장실의 뒷처리 용도로 쓰여 왔거나 쓰이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겠지요. 그런 비참한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채 경매장에 나와 '되 팔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참 저도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 온 존재임에 틀림 없지요?^^ 물론 그렇게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거기에 만족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이 '짐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으니, 그냥 썩이는 것보다는 화장실의 뒷처리 용으로라도 쓰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좀 더 겸허하게 살라는 뜻의 좋은 지적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2013.12.13 05:17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2. 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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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J

    어째 가이드들이 개량한복같은 옷을 입고 있대요 ㅋㅋㅋ 체로키 글자 정말 신기하게 생겼네요

    2013.12.02 20:5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