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08.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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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10.0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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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4.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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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2.0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

 

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

 

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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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지민

    오래된 삼성 폰이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 분도 계시군요

    2014.02.02 00:51 [ ADDR : EDIT/ DEL : REPLY ]
  2. 최영민

    림멜 교수님은 아마도 스탈린 시대의 소련역사를 연구하시는 분 같은데요. 키로프가 스탈린의 친구였고, 당시 키로프의 도움이 스탈린에게는 절대적이었지요. 림멜 교수님의 논문을 읽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스탈린이 키로프를 죽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말하자면 그를 '미래의 잠재적인 정적'으로 보았던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죽인 김정은과 '절친 키로프'를 교묘하게 죽인 스탈린, 둘 중에서 누가 더 고약한 인물일까요?

    2014.02.02 06:35 [ ADDR : EDIT/ DEL : REPLY ]
  3. 백규

    최영민 님의 댓글이 아주 인상적이군요. 그렇지요. 사실 스탈린은 열등감이 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루지아인으로서 '대러시아'를 제창했을 정도로 러시안에 대한 민족적 열등감도 컸지요. 그런데 키로프는 스탈린보다 훨씬 잘 생겼고, 달변가로서 스탈린을 위한 대중선동의 선봉에 늘 그가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도와주는 친구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꼈던 것일까요? 아니면 최영민 님의 견해대로 '미래의 잠재적 정적'으로 생각하여 미리 제거한 것일까요? 제 생각엔 아마도 두 가지 가능성이 다 해당된다고 봅니다만. 다른 분들의 견해를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2014.02.02 06:55 [ ADDR : EDIT/ DEL : REPLY ]

알림2013.08.02 16:47

 

 

전공 분야의 우물 깊은 곳에서 만난 새로운 영역들 … “작은 것에도 의미가 있죠”

-박태일·조규익·박정규 교수의 어떤 시도들-

                         

                                                              

                                                                                                                                    윤상민 기자 <교수신문>    

 

 

시 전공자의 지역 문학 연구, 고전문학 전공자의 고려인 한글문학 연구, 신문방송 전공자의 시 전집 편역…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종래의 국문학 연구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도서출판 경진 刊)을 발간한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刊)를 상재한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단재 신채호 시전집』(기별미디어 刊)를 내놓은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그 주인공이다. 자신의 주 전공 분야를 가로질러 새로운 분야에 발을 딛는 이들의 작업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3, 5월에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을 발간한 박태일 교수의 작업은 지역문학총서 시리즈 15, 16권이다. 말하자면 지역문학연구의 일환으로 시작한 셈이다.

 

박 교수는 오랫동안 계속됐던 일국주의 문학연구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로 지역문화연구를 시작했다. 기존의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거나 도태됐던 중견 작가나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우리의 민족문학이라는 큰 전통 속에 남기고 복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던 지역작가 발굴 사실 박 교수의 지역문화 연구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경남·부산 지역을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역문학연구>라는 학술지를 14집까지 낼 만큼 열정적으로 매달렸지만, 학술진흥재단의 변화로 원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중단됐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지역문학회(회장 김동근 전남대)를 창립하면서 그의 연구는 오히려 전국권으로 확대됐다. 제주, 전남, 충청, 인천에서 뜻을 같이 하는 교수들이 뭉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로 <한국지역문학연구> 총서를 2권까지 발간했다.

 

그렇다고 경남, 부산지역의 연구가 미진해진 것은 아니다. 이번에 출간된 15, 16권에 이어 그의 예전 작업들의 결실이 계속해서 총서로 출간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과 그 과정 속에서 뜻을 공유한 이들의 활동은 이렇게 한국지역문화연구의 풍성한 열매로 맺히고 있다.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지역 문학을 연구하면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작품의 상업성이 떨어져서 출판이 매우 어렵다. 입력부터 편집, 교정까지 주변 지인과 제자들과 함께 알음알음 하고 있고, 출판에 따른 모든 부담도 편역자 본인이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HK사업이니 BK사업은 그들의 작업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번에 출간한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무궁화』에 그가 부여하는 의미는 뭘까. 경남 지역의 중요한 작가의 발굴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美文主義의 전통을 가진 한국 시조의 전통과는 다른 사회학적인 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엮어낸 『소년소설육인집』 은 1920년 자생적 계급주의 문학을 몇몇 문학가가 독점했다는 국문학계의 통념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동문학, 지역문학가의 저변을 찾아냄으로써 계급주의 문학에 대한 반성을 시도했다. 올해 출간될 총서 17권은 1950년 이전까지 부산지역에서 나왔던 동인지에 대한 연구다. 잊힌 혹은 뭍힌 매체를 발굴해내기 위해 오늘도 연구실 불을 밝히는 박 교수는 말한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인 1, 2 세대의 한글문학은?

 

해군사관학교, 경남대를 거쳐 현재 숭실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규익 교수. 그는 지난달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펴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고려인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했다.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돼야 한다’는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 오랜 디아스포라의 고됨으로 우리 말과 문학과 역사를 잃은 고려인 2, 3세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그는 이 책에서 풀어놨다.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었다.

 

조 교수는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을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도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피해 이주한 고려인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됐고,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조차도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구소련 해체 후, 각 공화국들이 독립될 때도 ‘새로운 주변인’일 뿐이었다. 꿈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지만, 이곳 역시 그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 조 교수는 3년의 긴 여정 끝에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해냈다.

 

학부에서는 정치외교학을, 대학원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지난 2월 펴낸 『단재 신채호 시전집』도 그의 광범위한 연구 이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청주대 교협회장 당시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다 해직되기도 하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그의 연구 지평은 계속해서 확장돼 가고 있다. 당시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번역 1기생인 그는 박사과정에서 조선왕조시대의 신문을 연구했던 신문방송학자는 지역 언론, 한국신문학사 등의 연구 속에 1999년 신채호를 만났다. 단재가 지은 시가를 새롭게 발굴하고 기존에 발표됐던 국문시, 시조, 한시들을 정리해 『단재 신채호 시집』을 출간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신채호에 푹 빠져있다. 개화기 암울한 민족적 시련기에 활발한 언론활동과 독립운동, 아나키즘 운동에 매진했던 단재는 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그의 주옥같은 시들 역시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뒤켠으로 사라졌다. 박 전 교수는 신체시의 효시로 불리는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11)보다 훨씬 이전에 단재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적지 않은 시가를 발표했으며, 한시나 새로운 형식의 시가를 소개함으로써 전통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이를 변용해 근대적인 시가를 모색해냈음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학문이란 이처럼 전공 분야의 우물을 깊게 파내려가며 만나는 수많은 학문의 뿌리들이 뒤엉켜 더불어 뻗어나가는 굵은 뿌리처럼, 결국 하나의 학문이란 이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다음 저서가 궁금하다. <교수신문 2013. 7. 2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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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소식2013.07.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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