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4. 12:03

 

 

 

 

 


OSU의 중앙도서관

 

 

 


OSU 중앙도서관의 서고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부럽기만 한 미국의 도서관들

 

 

 

 

15년 전 미국의 유명대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도서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대학의 질을 좌우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당시의 내 의식수준으로 그들의 도서관 시스템은 환상 그 자체였다. 도서관에 신청만 하면 미국 전역, 아니 유럽의 대학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까지 입수해 빌려주는 그들의 제도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연구와 공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대학에 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자료들이 거의 모두 디지털화 된 지금의 상황이 도서관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 자료를 신청하면 세계 전역의 디지털 자료까지 일일이 찾아내어 이메일로 서비스해주는 환상적인 체험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대학들은 장서 숫자의 확충이나 새 건물들의 건립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학평가의 주요 항목 가운데 장서량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 대학 도서관들과 자료를 교환하기는커녕 국내 대학도서관들 사이에서도 자료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좋은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큰 대학들이 그 제도에 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학의 도서관들만 훌륭한 건 아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 지역에는 공공도서관들이 있고, 질 좋고 풍부한 장서를 자랑한다. 수시로 독서 관련 이벤트를 여는 등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센터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뿐인가. 도서관마다 새로운 도서들이 수시로 들어오니 오래 된 책들이나 복권(複卷)들은 퇴출시키는데, 그걸 주민 상대로 공짜에 가까운 가격[수십 센트에서 1불 혹은 2]으로 판매하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연다. 많은 사람들이 흡사 선물 받아 기쁘다는 표정으로 좋은 책들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경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퇴근 무렵 직장인들이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반납한 뒤 새로운 책들을 빌려가는 모습, 마트 가는 길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빌려가는 아주머니들, 손자손녀들과 손을 잡고 도서관에 들러 독서삼매에 빠져 드는 할아버지할머니들, 도서관에 비치된 고급 서적들을 꺼내 놓고 읽어가며 과제물 작성하기에 바쁜 고등학생들, 설치해 놓은 컴퓨터들을 통해 각종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고 출력하는 데 몰두하는 일반인들... 대학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알 수 있고, 지역의 공공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지론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카네기(Andrew Carnegie)20세기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스코틀랜드 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쓴 인물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도서관을 짓는 일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그 가운데 1,689개는 미국에, 660개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125개는 캐나다에, 나머지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세르비아피지 등에 각각 세워졌다. 1919년 미국 전역에 3,500개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카네기가 지어준 것이라니,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가.

 

돈과 권력을 자손들에게 넘겨 줄 욕심으로 독직(瀆職)의 죄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세습하기 위해 애쓰는 이 나라의 재벌들이 우리의 현주소다. 그들이 어렸을 적에 카네기의 전기를 단 한 페이지만 읽어 봤어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을 텐데. 단돈 한 푼 책이나 도서관에 기증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참 돈 쓸 줄 모르는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던 때는 우리 사회에 책이 몹시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은커녕 읽을 만한 낱권의 책조차 없었다. 서울의 어떤 독지가가 기증했다는 수십 권의 동화책들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늘 자물쇠가 채워진 채 교무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렇게 60년대~70년대의 학창시절 내내 지적인 궁핍의 상황은 지속되었다.

 

정치적문화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던 80년대. 책의 생산량과 국민들의 독서량이 막 늘어나려는 찰나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고, 컬러 TV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책을 잡는 대신 한층 야해진 영화, TV 드라마, 프로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도서관이래야 잡동사니들을 다 합쳐서 100만권을 소장하는 대학들이 거의 없었고, 공공도서관 없는 지역들도 수두룩했다. 도서관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도서관이란 한낱 독서실’, 그것도 시험 때나 잠시 찾아가는 공부방이란 것이 우리 학창 시절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니 독서열풍은커녕 책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에 대한 기본 상식을 지닌 국민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화끈한 성품대로 시절은 순식간에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정신 나간 교육부 인사들이 이젠 종이 책을 없애고 아이들 교과서도 이북[e-book]’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종이 책을 아날로그 시대의 뒤쳐진 산물, ‘이북디지털 시대 발전의 산물로 동일시하는 인사들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짜로 주어지는[아니, 사실은 아주 비싼 값으로 주어지는] 단말기를 손에 넣자마자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기에 바빠 그것을 교과서로 쓰는 시간은 하루에 단 몇 분, 길어봐야 한 두 시간에 불과했다. 그게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나마 개꼬리만 하던독서시간은 아예 사라져 버려, 다시 독서 시대의 영광을 되돌리기엔 불가능해졌다. 독서의 습관을 처음부터 가져 보지 못한 기성세대와, 디지털에 사로잡힌 신세대가 어우러진 이 나라의 현실이 걱정이다.

 

지금 우리가 국민소득 2만 불을 가까스로 넘겼다고는 하나, 국민의식이 변하지 않고는 3~4만불 대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어렵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국민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고, 지금 같은 교육열만으로 세계와 경쟁할만한 인재를 길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올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은 기본적으로 독서를 통한 자발적 공부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두뇌의 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교육에 큰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부정적 풍조를 고쳐야 나라가 산다. 그러기 위한 지름길이 바로 독서운동이다. 어머니나 주부들이 하루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어보라. 아버지들이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와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어보라. 휴일에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좋은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사주고, 책 읽은 아이들에게 칭찬이라도 건네 보라. 그 순간 아이들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은 책을 멀리하면서 아이들보고만 공부하라, 책을 읽어라!’고 야단치는 것처럼 모순적인 행동은 없을 것이다. 부모들부터 바뀌면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이 책과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사교육비로 큰 돈 쓸 필요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700개 정도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네마다 한 개씩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방과 후 학생들의 학습이나 독서, 어른들의 여가활용도 동네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 예산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재벌들이나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이 도서관 운동에 헌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카네기가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도서관을 지어준 것도 도서관에 국가의 장래가 걸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왜 읽어야 되는지, 도서관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국민이나 국가는 결코 흥할 수 없다. ‘책 읽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고, 도서관이 우리 삶의 희망 공간임을 이제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서가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서관 서고에 있는 책[겹치는 책이나 퇴출시키는 책]을
'몇 센트~1, 2 불' 정도의 싼 값으로 판매하는 행사장

 

                                                                               @@@@@

 

                                  ***이 글은 태안도서관에서 발간하는 <<천자만홍>> 14호에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10. 26. 15:16

황주홍 강진 군수님의 매서운 회초리
*이 글은 <조선일보> 2008년 10월 20일자에 실린 기고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경구'라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백규-


[기고]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먹고 마시는 모임에 시간 탕진
이런 풍토에서 노벨상 나올까
황주홍 전남 강진군수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다. 이틀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니 그럴 만하다. 물리학상은 3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화학상은 일본과 미국의 학자들이 휩쓸었다. 그 바람에 우리 한반도도 떠들썩했다. 내용은 좀 달라서, 왜 우리는 일본처럼 될 수 없느냐는 주제로 요란했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과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일본인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면 연구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휩쓰는 거다. 그뿐이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연구하고 공부한다. 한국 성인 1인당 독서량이 192개국 중 166위라는 UN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들은 이 부족분을 인맥과 로비와 '배째라'라는 저돌성으로 충당하며 사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끼리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들기다. 공식적으론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접대하고 접대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문제는, 다른 선진국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퇴근해서 집으로 직행하는 한국인 드물고, 퇴근해서 1차 2차로 직행하는 선진국 사람 드물다. 발렌타인 한번 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한국인 반면, 발렌타인 한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일본이고 미국이다. 그 차이에서 승부가 크게 갈린다.

낮 시간에 일하는 것은 한국이나 선진국이나 별 차이 없다. 결정적 승부처는 오후 6시 이후의 '자유시간'에서다. 긴긴 자유시간을 우리는 과거를 위해, 편법을 위해 소비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마치 낮 시간의 연장처럼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생활은 밋밋하고 심심하고 외롭다. 재외동포들은 한국을 '즐거운 지옥'이라 한다. 야간생활이 어쩌면 이리도 위태위태 박진감 있고 육감적인지 힘들지만 재밌어 죽겠다는 거다. 노벨상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장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 단언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한국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다. 공부하지 않고 공부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로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6시 이후가 '선진화'되지 않는 한 노벨상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노벨상뿐이랴. 한국과 한국인이 6시 이후의 긴 시간을 이렇듯 철저히 과거 찾기, 인연 만들기에 사용하는 한 조국에 더 큰 희망은 솔직히 어렵다. 한국의 선진국 반열 진입은 6시 이후의 과거몰입적, 인맥제일주의적 행태의 변경 없인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이 인식이 일본의 노벨상 독식에 따른 우리들의 요란한 반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30. 20:02

선진국에서 확인한 도서관의 힘

조 규 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책을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책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사정이 달라졌다.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사를 밥먹듯 하는 요즘 생활에서 처분 대상 영순위가 바로 책이다. 가끔 아파트의 쓰레기장에 수북이 쌓이곤 하는 화려한 장정의 책들을 보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에서도 책을 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이 책을 사지 않아도 탓하는 국민이 없다. 도서관이 무엇 하는 곳이며 왜 중요한지 아는 정치인도 별반 없다. 이른바 출판대국인 이 나라에서 만드는 책들은 학습참고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니 두고두고 읽으며 의미를 반추한다던가 그럴 목적으로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애당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일이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문화의식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책과 도서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나 부러운 그들 대학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꺼내지도 말자. 틈날 때마다 동네의 도서관에 나가서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하곤 했다. 도서관의 주 이용객은 주부와 노인,초·중등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이라 해도 우리 나라처럼 시험공부나 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책들을 마음껏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부대행사로 여는 각종 과외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부들과 노인들이었다. 구부정한 노인들이 책을 한아름 들고와 반납하고 서가를 돌며 새로운 책을 찾는 모습. 주부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책을 읽거나 대출하는 모습은 선진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점심때 만 되면 널찍한 식당을 점령해 수다로 시간을 죽이는 우리네 주부들을 생각하며, 할 일 없이 공원에 나와 먼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우리네 노인들을 생각하며 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부와 노인들이 꼬마들 손을 잡고 동네도서관에 나와 독서삼매에 빠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아마도 우리의 모습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룸살롱, 갈빗집, 다방, 노래방 등이 촘촘히 박힌 수렁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건져내려면 단 한 순간이라도 내면을 가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도시마다 구색으로 하나씩 세워놓은 듯한 도서관이란 으레 학생들이 찾아가 노닥거리거나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후진적 현실을 바꿔야 한다.

과격하고 이기적이며 진지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확바꾸려면' 전국민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도서관을 확충하고 도서관 이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나 독서 열풍은 단기간의 캠페인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이 손자녀들을 이끌고 도서관을 찾아 자신들의 진지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든 채 도서관을 찾는 일이 생활화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經)을 읽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진지해지고 독서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아파트 쓰레기장에 멀쩡한 책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학습참고서 아닌, 제대로 된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살아날 것이고, 우리 나라도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될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날이 바로 우리가 한 차원 높아지는 날이다.

( 출처 : 출판저널 286호, 2000, 9, 5 )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