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08. 12. 22. 00:37
 

인간의 냄새가 스며든 선취(禪趣)의 서정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의 시와 구도(求道)미학--

                                                                        조규익


1. 버리고 떠남, 그리고 얻음

 버리고 떠나는 것은 불가(佛家)의 상사(常事)다. 버리지 못하면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집착의 뇌옥(牢獄)에 갇혀버리고 만다. 버리거나 떠나지 못하는 것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는 물질’에 미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본원인은 ‘참된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있다.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사유(思惟)하고 수득(修得)하는 것이 선(禪)이라면, 그것은 욕계의 오온(五蘊)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악을 버림으로써 공덕을 쌓게 되는 관문이다.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두고 사려(思慮)하며 욕계의 번뇌를 여의는 것이 바로 사유수(思惟修)다.
 사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한 욕계의 중생들이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번뇌다. 번뇌를 여의어야 해탈의 문에 들어설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번뇌를 벗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해탈의 경지는 탈속과 초월을 대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고해 중생들에게는 어렵고 멀기만 한 경지다. 무조건 ‘해탈하라, 초월하라, 떠나라!’는 외침이야말로 고해 속의 범인들을 좌절시키기 쉬운, 지엄한 명령일 뿐이다. 쉽게 따르기 어려운 그런 명령들이 오히려 범부들을 무명(無明)의 미로로 빠져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삶 속에서 얻어진, 평범하고 일상적인 서정의 문법으로 그런 명령들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많은 범부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난해한 선시(禪詩) 그 자체가 범부들에게는 마음의 짐일 수 있다. 깨닫지도 못할 암호를 바라보며 ‘깨닫지 못함’에서 오는 좌절이나 죄의식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깨달은 자’의 오만일 수 있다. 게문(偈文), 선시(禪詩), 선문답(禪問答)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수행 과정의 오도적(悟道的) 체험을 형상화한 선시는 선종의 법통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더욱 세련되었다. 선시가 오래 전수되는 동안 일반 문인들의 시풍에까지 영향을 주어 선취의 시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며, 우리의 경우 본질적인 선시는 이 글의 대상인 무의자 혜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지은 혜심 이후 원감(圓鑑), 일연(一然), 경한(景閑), 태고(太古), 나옹(懶翁)으로 이어지면서 고려조 선시가 완성되었고, 조선 전기에 이르러 기화(己和)·일선(一禪)·영관(靈觀)·휴정(休靜)·선수(善修)·보우(普雨) 등이 조선 선시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경헌(敬軒)·인오(印悟)·태능(太能)·언기(彦機)·수초(守初)·처능(處能)·수연(秀演)·지안(志安)·해원(海源)·최눌(最訥)·의순(意恂) 등 조선 후기의 선사들에 이르러 조선조 선시의 법통은 완성되었다.
 고도의 상징성과 압축성, 절묘한 비유를 특징으로 하는 선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려는 선불교의 종취와 가장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선시의 그러한 특징은 시의 본질과도 일치한다. 언필칭 ‘시선일여(詩禪一如)’를 내세우는 것도 본질적인 면에서 시와 선의 같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무의자 혜심이야말로 우리나라 선시의 개조(開祖)다. 그 증거가 바로 30권 10책의『선문염송』이다. 무의자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있던 고종 13년(1226년)에 편집한 것이 이 책이다. 무의자는 선문학의 개조이면서도 어느 후학보다 작품의 양과 질에서 두드러진다. 물론 일종의 문자취미라 할 수 있는 선문학의 창작이 선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타당치 않을 수도 있다. 원래 선의 본질은 ‘불립문자(不立文字)’에 있다. 그러나 문자로 정착시키지 않고는 그 지혜를 전달할 길이 없다. 따라서 무의자 스스로 자신의 선적 지혜를 문자로 남긴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 지혜는 전수받고 나면 버려야 할 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의자 스스로도 『선문염송』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가세존과 가섭 이래 대대로 서로 이어 등불이 다하지 않았으며, 서로 은밀하게 당부한 것을 정전(正傳)으로 삼았다. 그 바로 전하고 은밀히 당부한 곳에 말과 뜻을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말이나 뜻으로는 족히 미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가리켜 진술하려는 게 있어도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따름이었다. 호사자들이 억지로 그 자취를 기록하여 책에 실어 지금까지 전하니 그 거친 자취가 실로 족히 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고 말단에 의거하여 근본을 아는 것도 무방하다.

 그러니 그가 선사의 입장이었음에도 깨달음을 문자로 남겨 놓은 것은 바로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이 책이 그의 시집과 함께 중시되는 것은 초창기의 선문학을 보여줄 문헌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 수준 또한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선사(禪師) 무의자 혜심(1178~1234)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속명은 최식(崔寔), 휘(諱)는 혜심이며, 무의자는 그의 호다. 부친 사후 출가하고자 했으나 모친의 강권으로 유학에 입문했고, 모친 사망을 전후하여 그에게 닥쳐온 불연(佛緣)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문하에 나아가 계를 받았다. 스승 지눌에게서 의발을 받고도 굳이 사양한 그였으나, 스승이 입적하고 난 다음에는 수선사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으로부터 대선사의 지위를 받은 그는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56세로 끝내 수선사에서 입적했다. 이규보(李奎報)는 무의자의 비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린 나이부터 문장에 종사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얼마 후 선비의 관문에 뽑혔으니 학문이 정교하지 않은 게 아니고 운명 또한 불우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대과에 올라 유명한 사대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거의 성취할 이름을 버리고 일찍 세속에 물드는 걸 떨치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으니, 그 초연히 세상을 벗어나는 마음을 이에서 가히 징험할 수 있다.

 이규보가 재치 있게 요약한 그의 삶을 보면, 그가 세상살이의 요리(要理) 또한 제법 터득한 상태로 불도에 입문했음을 알 수 있다. 불도수행에의 의지가 더욱 강렬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속의 경험이 불도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에 대한 미련을 끊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가 불도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점에 있다.
 세속에서 유도(儒道)를 닦다가 불도에 입문했고, 세속의 부름을 거부하며 선의 세계에 노닐다가 입적한 그였기에 고승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선문학에는 사람의 냄새, 세상의 냄새가 어려 있다. 그러나 사람과 세속의 냄새는 그것을 떠나 초월하라는 가르침을 극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도구적 의미가 있다. 추한 세속의 냄새가 아니라,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서정의 향기를 그의 선시에서는 맡을 수 있는 것이다.
 
2. 집착과 공허, 그리고 채움과 비움

 세간의 사물과 애욕에 고착되어 떠나지 못하는 것이 집착이다. 범부는 명문(名聞), 이양(利養), 자생(資生)의 도구에 집착하여 안신(安身)하는데 힘쓴다는 것이「보리심론(菩提心論」의 말씀이다. 명예욕, 현실적인 이익, 먹고 사는 문제 등에 사로잡혀 제 한 몸 편안히 하는데 힘쓰는 존재가 범부들. 그들로 하여금 세속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러나 집착으로부터 한 걸음만 벗어나 보면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집착의 대상이 그림자이었음과, 욕심을 채우려다 채우지 못하고 결국 깨친 다음에야 비우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법(佛法)에
뜻을 두고 사모하와,
찬 재 같은 마음으로
좌선을 배우나니.

공명(功名)이란
하나의 깨어질 시루이고,
사업이란
목적을 달성하면 덧없는 것.

부귀도
그저 그렇고,
빈궁도
또한 그런 것.

내 장차
고향마을 버리고,
소나무 아래에서
편안히 잠이나 자려네.
       <유영봉 역>


 <출가할 때 집을 하직하며 지은 시>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불법을 그리워 해 좌선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 첫연의 내용이고, 출가하여 산 속에서 수도하고자 한다는 것이 마지막 연의 내용이다. 2연과 3연은 첫 연과 마지막 연의 근거로 제시된, 이 시의 주지(主旨)라 할 수 있다.
 공명과 사업, 부귀와 빈궁은 세속의 일들이다. 무의자는 공명을 ‘깨어질 시루’로, 사업을 ‘목적을 달성하면 덧없어지는 것’으로 각각 보았다. 부귀와 빈궁도 모두 그러하다고 했다. 세상사 어느 것이나 다 허무하고 가치 없다는, 진리의 깨달음이다. 대부분의 범부들은 공명과 사업에 목을 맨다. 빈궁을 벗어나 부귀해지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집착할수록 그 뒤에 찾아오는 공허는 더욱더 커지는 법. 세속의 일은 채울수록 더 채워야 하고, 집착할수록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집착을 벗어버릴수록, 욕심을 비워낼수록 내면은 더 넓어지고 여유로워진다.
 무의자는 고향마을을 ‘버린다’고 했다. 고향은 세속적인 것들의 출발이다. ‘금의환향(錦衣還鄕)’ 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게 하고, 욕심을 내게 한다. 세상 사람들이 범부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부귀와 공명은 최고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부귀로는 곳간을 채울 수 있고, 공명으로는 허세를 채울 수 있다. 부귀와 공명을 집착할 경우 잘 되면 곳간과 허세를 얼마간 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채우려는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 채우고 채우다가 삶을 마치고, 그렇게 삶을 마치면서도 헛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범부들이다. 그런 점에서 무의자의 출가는 ‘떠남과 비움’을 상징한다. 떠남과 비움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가벼운 몸으로 소나무 아래서 즐기는 낮잠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이었으리라. 
 

미혹의 바람이 깨달음의 바다를 동요하니
깨달음의 바다에 부질없이 물거품만 이네.
부질없는 물거품처럼 삼유(三有)에 붙어 있는 것
삼유에 잠시 멈추어 머물러 있을 뿐이네.
바람 고요하니 물결도 절로 고요하고
물거품 사라지니 그 생긴 까닭도 없어지네.
담담히 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보건대 물결만이 아득히 흘러가네.
               <이상미 역>


<현담에게 보이며(示玄湛)>라는 게송이다. 내용의 핵심은 ‘미혹의 바람(迷風)’, ‘깨달음의 바다(覺海)’에 있다. 미혹의 바람은 세속적 영화에 대한 집착이다. 세속적 영화는 부귀의 소유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소유에 대한 집착이 ‘미혹의 바람’인 것이다. 미혹의 바람이 거세면 ‘깨달음의 바다’를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미혹의 바다에 흔들릴 정도의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의 수준이 보잘 것 없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깨달음의 바다에 미혹의 바람이 일으켜 쳐 올리는 물거품은 덧없는 순간의 것이다.
 짧디 짧은 인간의 삶[삼유 : 태어나는 순간, 나서 죽기 전까지의 일생, 죽는 순간]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집착의 물거품이다. 욕망을 여의면 미혹의 바람도 스러지고 깨달음의 바다는 저절로 고요함을 얻게 되는 법. 그런 순간에 도달하면 소유의 집착을 초래한 원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으니, 그 집착이 지배하는 찰나야말로 공(空)이요 허(虛)일 뿐이다. 미혹의 찰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범부의 시공(時空)이고, 깨달음의 영원은 욕망을 비우고 비워 냄으로써 이루어지는 진공(眞空)의 세계다. 그러니 집착이 공허로 바뀌고, 채움이 비움으로 바뀌는 일이야말로 무의자가 추구한 수행의 보람일 것이다.


시내에 이르러선
내 발을 씻고
산을 보면서는
내 눈 맑게 한다오.

한가하게 영욕을
꿈꾸지 않으니,
이밖에 다시
구할 것이 없어라.
 <유영봉 역>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서 어부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빨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을 세상의 추이에 맞추겠다는 뜻일 것이다. 이에 비해 ‘시내에 이르러서는 내 발을 씻고, 산을 보면서는 내 눈 맑게 한다’는 무의자의 생각이야말로 세상을 떠난 곳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부사>의 모티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한가하게 영욕을 꿈꾸지 않는’ 무의자이기 때문에, 이 시 속의 시내와 산은 세상 밖의 사물이요 공간이다. 말하자면 세속적인 영욕이나 소유로부터 떠나 ‘텅 빈’ 무욕의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가득 채우려던 집착과 욕심의 곳간을 비워냄으로써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궁극의 깨달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3. 깨달음과 자유로움, 그리고 사물 이미지

 무의자의 입장에서 어렵지 않게 성취할 수 있었던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물리치고 세상을 떠난 것은 그것들이 집착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자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상당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로 나선 것이다. 운수 즉 ‘행운유수(行雲流水)’란 흐르는 구름이나 물처럼 걸림 없이 다니면서 불성을 추구하는 선림(禪林)을 일컫는다.


 스님을 전송하며

출가하면
모름지기 자재(自在)해야 하거늘
몇 번이나
조사관(祖師關)을 깨쳤는가?

호젓하게
세상 밖을 노닐면서,
고결한 마음으로
속세를 비웃누나.

한 조각 구름에
몸뚱어리 쾌활하고,
구름 걷힌 달님에
마음은 맑고도 한가로워.

바루 하나에다
떨어진 한 벌 승복으로,
수없이 많은 산을
새처럼 날아 넘네.
  <유영봉 역>


 중의 입장에서 중을 말한 시다. 그 중이 무의자 자신은 아니로되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인 거울이긴 했을 것이다. 첫 연은 중의 도력(道力/道歷)에 대한 의문이다. ‘출가’는 세속을 떠나는 일이다. 세속을 떠나면 반드시 자재(自在)해야 한다고 했다. ‘자재’란 속박이나 걸림 없이 마음대로인 상태를 말한다. 무엇엔가 속박되거나 걸림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적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몇 번이나 ‘관(關)’을 깨쳤느냐고 묻는다. 수행의 정도나 진정성에 대한 깨우침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이 그 중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관은 조사관(祖師關) 혹은 선관(禪關)이다. 조사는 불법을 창시한 석가모니, 조사관은 그 조사의 위(位)에 들어가는 관문이다. 선관은 선법의 관문이니,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참선의 본의라면, 의미상 선관이나 조사관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말하자면 첫 연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말한 셈이다.
 나머지 연들은 출가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무상(無上)의 즐거움이나 무욕의 가벼움을 노래한 부분이다. 방외(方外) 즉 세상 밖에 노닐면서 ‘고결한 마음으로 속세를 비웃는다’고 했다. 이것 또한 그 중에 대한 꾸지람이나 깨우침의 말이면서 스스로에 대한 그것들이기도 하다. 속세가 아무리 부정적인 공간이라 해도 진정 깨달은 자라면 그곳을 비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의자의 상대는 어쩌면 법력(法歷)이 일천한 스님이었지도 모른다. 1연과 2연의 수행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경지를 3연과 4연에서는 노래했다. 즉 세속적인 영욕으로부터의 초연함과 걸림 없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지를 보여주기 위해 도입한 이미지가 구름, 달, 새 등이다. 하늘에 둥둥 떠가는 구름은 흐르는 물과 함께 ‘걸림 없는 자유’와 무상(無常)의 이미지로 쓰여 온 소재이며, 달은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불교 이념을 구현하는 이미지로 도입되었다. 더욱이 ‘구름 걷힌 달님’은 무명(無明)을 벗어난 지혜의 빛을 상징한다. 그것은 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맑고도 한가로운’ 마음이다.
 새는 자유를 표상하는 이미지다. 높은 산을 자유자재로 날아 넘을 수 있기 때문에 새는 ‘걸림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새가 가볍고 걸림 없는 것은 현실적인 욕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는 똬리를 틀고 앉아 한 곳에 집착하는 존재도, 욕망에 눈이 뒤집혀 한사코 쪼아대기만 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무의자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이곳저곳을 막힘없이 날아다니는 새에 ‘바루 하나에다 떨어진 한 벌 승복’으로 운수처럼 이곳저곳 막힘없이 떠도는 스님을 스스럼 없이 비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에서 길 떠나는 스님을 바라보며 느낀 점을 표현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불도에 입문하여 진리를 찾아 나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이상이나 의지를 표출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선명(善鳴)인 송강 정철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지어 부른 바 있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 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운수처럼 흘러가는 중이라면, 어떤 물음에도 대꾸할 턱이 없다. 그 중은 어쩌면 묵언(默言) 수행 중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다 해도 부질없이 말을 나눌 필요까진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의 묵언은 초탈과 자유를 내포한다. 가는 곳을 물어보는 말에 막대로 흰 구름을 가리킨 행위는 부처와 가섭 사이에 오고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을 건넨 속인이 그 뜻을 알 리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속인이 막대 끝을 보았는지 막대가 가리키는 흰 구름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출세간의 중으로서는 그 나름의 의사 전달은 했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로 보아 송강 정철의 이 노래와 부합하는 무의자의 시는 또 있다.

그림자를 마주하고

 
 못 가에
 홀로이 앉았다가,
 못 아래서
 우연히 중 하나를 만난다.

 묵묵히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나니,
 그대 말 걸어도
 대답하지 않을 걸 나는 안다네.
                 <유영봉 역>

 
무의자 시에 그려지거나 감도는 것은 참선의 분위기다. 운수처럼 말없이 떠도는 중에게서 조용한 웃음으로 표출되는 ‘웅변’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것이 실제 중의 웃음이라기보다는 무의자 스스로 슬며시 드러내는 법열(法悅)의 웃음이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소요곡(逍遙谷)

 대붕(大鵬)의 바람치는 날개는
 몇 만 리를 난다지만,
 굴뚝새의 숲속 둥지는
 나뭇가지 한 가지로 족하다네.

 길고 짧음 비록 다르나
 모두가 자적(自適)하노니,
 닳아빠진 지팡이와 헤진 장삼은
 응당 서로 어울리리.
      <유영봉 역>


 이 시에서 대붕과 굴뚝새를 대조시킨 것은 『장자』「소요유」편에서 붕새와 비둘기[鳩] 혹은 메추라기를 대조시킨 데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안분(安分)하고 자적(自適)하려는 시인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설정이기도 하다. 대붕이 비록 걸림 없는 기개와 초월적 위력을 지닌 존재이긴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세속의 부귀영화를 거머쥔 영웅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양자가 규모나 배포에서 큰 차이를 보이면서도 모두 자적한다는 점이다.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편안히 즐기는 것이 자적이다. 굴뚝새에게 숲속의 나무둥지 하나면 충분하듯 자신은 닳아빠진 지팡이 하나와 헤진 장삼 한 벌이면 자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붕과 굴뚝새의 이미지를 이용, 세속의 부귀영화에 대한 탐착을 끊고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 의지는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 부귀영화의 헛됨을 깨닫고 스스로의 분수에 맞추어 자적하는 삶을 추구한 무의자의 인생관이 이 작품에는 진하게 배어있다.


 한가위에 달을 보다가

밝은 구슬, 흰 구슬이
인간 세상 있다면,
세도가가 빼앗고 권력가가 다투어
한가롭게 버려두질 않으리라.

물에 비친 저 달 만약
세상의 보배가 되었다면,
어찌 궁벽한 산골까지
비추도록 두었겠나?
  <유영봉 역>

 
달은 원융무애한 불교정신을 상징하는 사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달을 보는 세속의 관점과 산중의 관점을 대비시켜 읊고 있지만, 달에 대한 묘사가 주된  목적은 아닐 것이다. 세도가와 권력가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움켜 쥔 사람들로서 끝없는 탐욕에 집착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무의자 자신을 포함하여 출세간의 수도자들은 세간의 영욕에 대한 집착을 단진(斷盡)한 채 산중에 숨어 지내는 자들이다. 이 작품에는 ‘세간 : 산중’, ‘탐욕 : 무욕’의 상반되는 요소들이 대립되어 있는데, 그런 발상 자체가 세간 영욕의 헛됨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한 무의자는 떠나온 세속에 미련을 갖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다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때마침 떠오른 달을 사이에 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궁벽한 산골’과 세속을 대비시켰다. 그 대비를 통해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과 출세간의 긍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자 한 것이나 아닐까.


4. 사람냄새 스며든 서정적 조화

 무의자의 시에서는 노선사(老禪師)의 죽비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을 채근하는 무거운 말투도 들려오지 않는다. 작은 시내가 돌돌돌 소리 내며 흐르듯, 하얀 뭉게구름이 뉘엿뉘엿 흘러가듯 솜털처럼 부드러운 음성만이 귓전을 간질여줄 뿐이다. 무의자가 시 말고도「죽존자전(竹尊者傳)」과 「빙도자전(氷道者傳)」 등 가전 작품을 남긴 것도 그의 그런 시풍과 무관치 않다.
 가전은 사물을 의인화 시켜 전기(傳記)의 형태로 서술한 문학인만큼 우언적(寓言的)이고 가공적(架空的)인 특질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강하고 단단한 직설보다는 부드럽게 에둘러 풍자하려는 작의가 짙은 문학 형태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들에는 선적인 관조를 바탕으로 조용한 깨달음이 형상화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만큼 그의 서정은 따스하고 인간적이다.

  
  봄을 아쉬워하며

 봄이 장차 저무는 걸
 남 몰래 슬피 여겨,
 조그만 꽃밭에서
 시 한 수를 읊노라.

 잎사귀에 바람 부니
 놀란 듯 푸르름이 날리고,
 꽃잎에 비 내리니
 나풀대며 붉은 빛이 떨어진다.

 나비란 놈은
 붉은 꽃술 물고 가고,
 꾀꼬리란 놈은
 푸른 버들눈을 맞아 온다.

 향긋하니 보드랍고
 따스한 봄날 일,
 새순들은 솔잎과 댓잎처럼
 차고도 담박한 모습일세.
       <유영봉 역>

 
도력 높은 선사의 작품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면서도 잔잔한 서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세속의 영욕에 매여 사는 필부필부들 가운데 누군들 가는 봄을 아쉬워하지 않겠는가. 짧고 덧없는 인생이 지는 봄꽃과 함께 늙어간다고 생각하면 슬프지 않은 선남선녀가 없으리라. 그래서 무의자도 봄이 저물어 가는 걸 보며 ‘남몰래 슬피’ 여긴 것이다. 그 남 모르는 슬픔을 시로 엮어 놓은 것이다. 2, 3, 4연에는 관찰의 세밀함과 탁월함이 드러나 있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어울리는 색깔의 조화 또한 현란하고, 시인의 감정이 이입(移入)된 나비와 꾀꼬리, 새순과 솔잎, 댓잎 등 미세한 묘사는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선사임을 내세워 선취(禪趣)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고, 덧없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근엄함을 내비치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 사람들 모두 가질만한 잔잔한 서정을 꾸밈없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선가(禪家)의 정맥인 지눌의 사상을 조술(祖述)했을 뿐 아니라, 위로는 왕으로부터 갓 출가하는 자들까지 가까이에서 법문을 듣고 싶어 했던 고승이 바로 무의자였다. 당시까지 이어지고 있던 불교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개혁하려 했던 점도 무의자가 지니고 있던 지도적 비전의 한 측면이었다. 그런 무의자에게서 계곡을 쩌렁쩌렁 울려대는 사자후(獅子吼) 대신 도란도란 들려주는 이웃집 아저씨의 다정한 말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후학들이 만나게 된 행운이다. 그의 시작품들 속에 사람냄새가 스며있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8. 9. 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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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화상 혜근의 가송집 가운데 완주가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찰나와 영원의 경계, 그 깨달음의 미학

-나옹화상의 시가와 구원의 메시지-

 

조규익

 

 

Ⅰ.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어찌 할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자신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로서 자신을 개인적 주체로 발견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이처럼 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긴 하나, 남과 구별되는 개별자로서의 ‘나’는 분명 유일한 존재다. 말하자면 ‘본래의 자기’, 즉 실존적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보는 관점도 이런 입장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세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란 무엇인가. 바로 생로병사의 짐이다. 태어나고 죽는 일, 그 가운데 죽음은 인간이 전존재를 투사하여 알아내고자 해도 결코 만만하게 해답이 손에 잡히지 않는 문제다. 태어나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한 인간의 일생이라 한다면, 죽음은 액면 그대로 종말이다. 존재의 무화(無化)가 죽음이기 때문에, 실존의 범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형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죽음 이후의 단계에 대한 무지 등은 인간을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감으로 몰아넣는다.

허무감을 포함한 그 절망감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종교를 만난다. 그러나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여 인간의 실존적 고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괴로움은 신앙의 강도(强度)에 단순히 반비례할 뿐이고,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어느 정도 실존적 고뇌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종교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 구원의 정도는 깨달음의 진정성이나 강도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럴 경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실존적 공간인 현실로부터 존재의 사라짐이 우주적 차원에서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니라는 점, 존재의 사라짐이 종말이긴 하지만 어쩌면 액면 그대로의 종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등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적 깨달음이다. 물론 그 깨달음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인간은 고독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스펜서(Herbert Spencer)의 말처럼 인간이 종교에 상정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투쟁의 대상은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종교 속에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의 하찮음’을 깨우치는 일 그 자체일 것이다. 말하자면 실존적 고뇌로부터의 초탈만이 깨달음의 대전제일 수 있다. 존재의 육신을 굴러다니는 돌이나 나무 조각 등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비로소 그 깨달음은 인간 실존으로 하여금 현실적 얽매임에서 초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범부들은 실존적 고뇌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탁월한 근기의 존재들만이 실존적 고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맞서 싸운다고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자만이 어떤 형태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깨달음이란 실존적 고뇌에 대한 처절한 투쟁과 성찰의 결과다.

『아함경』의 65(『관찰경(觀察經)』)는 ‘관찰’의 중요성을 설한 내용이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는데,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므로 느낌을 즐겨 하고 집착한다고 했다. 집착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앓음, 죽음과 걱정, 슬픔과 번민, 괴로움 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실존적 고뇌들이다. 비구가 선정에 들어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참다운 관찰’이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실존적 고뇌에 대한 참다운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 속의 대중을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을 통해 노래를 통해 대중을 구제하려 애쓴 나옹화상(懶翁和尙)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불교계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Ⅱ. 나옹,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깨닫다

 

나옹화상의 깨달음 역시 실존적 고뇌로부터 출발했다. 채 피어나지도 않은 21살에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출가를 결행한 그였다. 사고(四苦)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출가를 결행한 싯다르타와 같은 행적을 보여준 것이다. 출가하여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로부터 게를 받고 여러 사찰을 순력하며 정진하다가 결국 원나라에 들어간 나옹화상은 지공화상(指空和尙)·평산처림(平山處林)·천암원장(千巖元長)·요당화상(了堂和尙)·박암화상(泊菴和尙) 등을 차례로 만나 도의 경지를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스승은 지공화상과 평산처림이었는데, 훗날 회암사에 지공의 유골과 사리를 모신 것도 그 인연 때문이었다.

평산으로부터 임제선(臨濟禪)을 심수(心受)한 그가 주력한 것은 간화선(看話禪)이었다. 즉 옛 선사들의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참선법이 바로 그것이다. 임제종은 조계(曹溪)의 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 등을 거쳐 임제 의현(義玄)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선풍은 임제종풍이었는데, 태고화상 보우(普愚)와 나옹 이후에 그것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나옹은 무엇을 깨달았으며, 대중들에게 무엇을 깨우치고자 했을까. 무엇보다 그가 갖고 있던 의문의 핵심은 ‘나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실존적 고뇌를 느꼈을 것이고, 인간의 본질적인 면에 대한 탐구의 욕망 또한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 시문은 깨치기 전의 나옹이 지은 게송이다.

 

선불장(選佛場) 안에 앉아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김달진 역>

 

나옹이 스승 요연을 하직하고 여러 절들을 배회하다가 회암사에 와서 대중들에게 내렸다는 게송이 바로 이것이다. 출가한 후 보고 듣고 참구한 그것이 출가하기 이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선방에 앉아 참되게 관찰한 결과 그 모든 것들이 나이며 내가 곧 내 주인이라는 사실 등을 강조한 내용이다. 나옹은 이 게송을 내린 뒤 4년을 부지런히 수도하다가 홀연히 도를 깨쳤고, 그 길로 중국에 가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 더 높은 도를 구했다.

그는 원나라에서 각처를 떠돌다가 스승 지공을 만났으며, 그에게서 임제선을 받았다. 그 스승에게 올린 깨달음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과 대지는 눈앞의 꽃이요

삼라만상도 또한 그러하도다

자성(自性)은 원래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티끌마다 세계마다가 다 법왕신(法王身)이네

<김달진 역>

 

비로소 그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객관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본래 주관적 의식 즉 자성으로 관조하니 온갖 삼라만상이 청정한 법신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강조되던 ‘나’는 대상을 만나면서 대상에 내재된 본래의 면목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넘어서면서 깨닫기 이전과 깨달은 이후의 경지가 비로소 합일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 지공에게 올린 다음의 게송에 나타난다.

 

모르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면 티끌마다 바로 온몸이네

모름과 깨침을 모두 다 쳐부쉈나니

닭은 아침마다 오경(五更)을 향해 우네

<김달진 역>

 

미(迷)와 오(悟)의 다름과 양자의 통합을 노래함으로써 ‘깨닫지 못함’ 뿐 아니라 ‘깨달음’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노래의 내용적 핵심이다. 깨달으면 온 세상만물에 자아의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이 그대로 현출(現出)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깨우치지 못함’과 ‘깨우침’은 분리된 채 모순의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자는 ‘쳐부숨’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뜻이 3행에 나타나 있고, 그러한 통합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아침마다 오경을 향해 우는’ 일이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며, 피-아의 구분이 허물어진 합일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에 이어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고 대답한 지공의 말은 피-아의 구분을 허문 경지, 아니 오히려 ‘피-아의 구분을 허문’ 일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를 노래한 것이나 아닐까.

그 뒤에도 나옹은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도력을 높이는데 진력함으로써 우리나라 선맥의 큰 봉우리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성도(成道)에만 주력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 널린 불쌍한 중생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옹화상은 두 번의 깨달음을 얻은 셈인데, 진여자성(眞如自性)의 깨달음이 그 첫 번째이고, 자성의 깨달음을 얻지 못해 고뇌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그 두 번째 것이다.

 

Ⅲ. 고해의 중생들을 노래로 인도하다

 

작자 문제로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를 보이긴 하나, 나옹은 <서왕가>·<낙도가>·<승원가>·<참선곡> 등 네 편의 가사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수도자의 신앙고백이자 무명에 갇혀있는 고해 중생들을 권면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선지식(善知識)의 호소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나옹은 방황과 수행, 참선을 통해 진여자성을 깨달았다. 그런데『법화문구4』에서는 ‘보리(菩提)의 도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을 선지식’이라 했다. 보리를 추구하는 대중들에게 부처 말씀의 진리를 설하여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나옹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근기가 높은 대상만이 터득할 수 있는 선문답보다 일상적인 말 문학으로서의 가사가 대중의 근기에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 나옹이었다. 그것은 고해 중생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였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깊이 병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들이 수시로 침입하고, 안으로는 원나라 지배하의 권문세족들이 종교와 결탁하여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신흥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여 불교 이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현실도 위기의식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계의 선봉에 선 지도자 나옹은 사면초가에 빠진 불쌍한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불교계에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자족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기적이고 소승적인 구도행각의 전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대중을 먼저 구제하는 것이 귀하다고 믿고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완성시킨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옹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도를 닦아 서방정토로 가자’고 권면했다. 그 권유의 말이 가사형태로 결구되어 <서왕가>가 된 것이다. 내용 상 이 노래는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①‘나도 이럴망정~죽은 후에 속절없다’, ②‘저근 덧 생각하야~삼계바다 건네리라’, ③‘염불중생 실어두고~지옥은 갓갑도쇠’, ④‘이 보시소 어로신네~어느 날에 그칠손고’, ⑤‘저근 덧 생각하야~염불소래 요요하외’, ⑥‘어와 슬프다~나무아미타불’ 등이 그것이다.

①은 서사요, ⑥은 결사이며, ②~⑤는 본사다. ①은 죽음에 의해 허무해지는 인간 존재의 유한한 본질을 제시한 부분이다. 그러한 인생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감행한 출가수행의 큰 뜻을 밝힌 것이 ②이며, 세속적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밝힌 것이 ③이다. ④에서는 염불공덕의 위대함을, ⑤에서는 염불공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각각 노래했으며, 염불을 적극 권유한 것이 마지막 부분이다.

사실 <서왕가>는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구도에 나선 나옹 자신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옹은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인생의 무상을 절감했다.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내용이 바로 서사인 ①이다.

 

나도 이럴망정 세상에 인자(人子)러니

무상을 생각하니 다 거즛 것이로세

부모의 끼친 얼굴 죽은 후에 속절없다

 

나옹의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선관서령(善官署令)의 벼슬을 지낸 서구(瑞具)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벼슬이 현직은 아니었으나 세속적인 삶에 그다지 각박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절친하던 친구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부모가 남겨 준 자신의 얼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적 법칙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의 주된 내용이다.

  <회암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 소재. 1328년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여 조선 초기까지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음.>

출가 후 나옹은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수도에 전념하다가 1344년 양주의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지공을 만나 4년간 법을 배웠으며, 휴휴암(休休庵)에서 정진했고, 다시 자선사의 처림을 찾아 도를 닦았다. 그 후 육왕사에서 고목영(枯木榮)을 만나 불법을 논한 다음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그 즈음 원나라 순제는 그를 연경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임명하고 금란가사를 보내주었다.

광제선사의 주지를 내놓은 그는 다시 지공을 찾았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공민왕의 종용으로 신광사에 거주했고, 승과의 시관이 된 후 1361년부터 각지를 순력한 뒤 출가 후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왕사로 봉해진 뒤 송광사에 거주하다가 다시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절을 중수했으며, 문수회(文殊會)를 통해 법명을 내외에 크게 떨쳤다.

대충 살펴본 그의 구도 행은 아무나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종횡무진이었다. 특히 원나라에서 만난 지공과 처림은 그로 하여금 수행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임제선을 전수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계의 선맥을 형성한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도를 위한 그의 방황이나 순력은 <서왕가>의 둘째 부분에 그대로 나타난다.

 

적은 덧 생각하야 세사를 후리치고

부모께 하직하고 단표자 일납의로

청려장을 빗기 들고 명산을 차자들어

선지식을 친견하야 이 마음을 밝히리라

천경만론을 낫낫치 추심하야 육적을 잡으리라

허공마를 빗기 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 들어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육근문두에 자취 없는 도적은

나며 들며 하는 중에 번뇌심을 베쳐놓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리라

 

‘선지식을 친견하여 마음을 밝히는 일’,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 등이 이 부분 내용의 골자이자 화자의 핵심적 의도다. 세속적 욕망에 비례하여 인생의 무상감도 늘어나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우선 그 욕망을 단진(斷盡)하고자 했다. 그러나 욕망의 단진이 말처럼 쉽지 않았으므로, 그 지혜를 찾아 많은 시간과 공력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옹이 선지식을 친견하고자 우리나라와 원나라의 많은 사찰들을 순력했고, 법력이 높은 고승들을 찾아다닌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의 목표, 즉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은 수행자들 모두가 염원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삼계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심이 극성을 부리는 욕계(欲界)와 욕심이 없어진 색계(色界)를 건너 영적인 정신세계인 무색계(無色界)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나옹이 많은 선지식들을 만나며 경험한 깨달음의 순간들이야말로 ‘삼계바다’를 건너가는 순간들의 현현(顯現)이었던 것이다.

선지식들로부터 법을 배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진여자성을 회복해야겠다는 결단을 중생들에게 말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나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오욕칠정이나 세속적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가에 대하여 다시 역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 내용이 바로 <서왕가>의 세 번 째 부분에 나온다. 염불도 하지 않은 채 애욕에 잠겨 세월을 허송하고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생각지도 못한 채 항하사같이 무수한 공덕을 내어 쓰지 못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나옹은 ‘서왕’ 즉 극락세계가 멀어지고 지옥이 가깝다고 일갈한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중생들을 꾸짖은 다음 염불공덕이 얼마나 크며, 그로 인해 도달하게 될 극락세계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서왕가>의 네 번 째와 다섯 번째 부분에 나오는 것이 곧 그 내용이다.

 

백년 탐물은 하루아침 티끌이오

삼일 하온 염불은 백천만겁에 다함없는 보배로세

어와 이 보배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 장금이리라

건곤이 넓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일월이 밝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삼세제불은 이 마음을 아르시고

육도중생은 이 마음을 저버릴새

삼계윤회를 어느 날에 그칠손가

화장바다 건네저어 극락세계 들어가니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둘렀으니

구경하기 더욱 조해

구품연대에 염불소리 자자 있고

청학백학과 앵무공작과

금봉청봉은 하나니 염불일세

청풍이 건듯부니 염불소리 요요하외

 

‘하루살이 같은’ 인생 백년에 재물을 탐해 보아야 하루아침의 티끌만도 못하지만, 염불은 사흘 동안만 해도 백천만겁의 세월에 없어지지 않는 보배라고 했다. 또한 그 보배는 천겁을 지나도 낡지 않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과 같다는 것이 화자의 확신이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염불을 하면 극락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삼세의 모든 부처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으나 육도의 중생들은 이 진리를 저버리니 안타깝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찾아가야 할 극락이란 어떤 곳인가.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두른 곳, 아홉 종의 연꽃 대좌에 염불소리가 자자히 들리는 곳, 푸른 학·흰 학·앵무·공작새·금빛 봉황새·푸른 빛 봉황새가 염불 하는 곳이다. 불어오는 맑은 바람 속에 염불소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곳이 극락이니, 세속의 욕망에 잠긴 중생들이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왕생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종결 부분에서 화자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염불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면서 노래의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노래는 나옹 스스로 경험한 구도와 깨달음의 과정을 바탕으로 들어놓은 신앙고백이자 대중 교화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Ⅳ. 욕망의 짐을 벗고 가볍게 떠나라 하다

 

청산은 나더러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더러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의 시문집인『나옹집』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시의 작자를 사람들은 나옹화상이라 한다. 누구는 당나라 시인 한산(寒山)의 작품이라 하기도 하고, 아예 작자 미상의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청산송>이라 명명하고 싶은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정서는 ‘무욕의 가벼움’이다. 그런 점에서 작자를 나옹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옹만이 가식에서 떠나 이런 노래를 지을 수 있으리라 보았을 것이다. 아니, 나옹이라면 종당엔 이런 노래를 지었어야 한다고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몇 가수들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패러프레이즈하여 대중가요로 부른 것이나 아닐까.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하덕규가 짓고 가수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도 나옹의 <청산송>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희은의 맑고 구성진 음색과 한계령의 초초함이 어울려 탈속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 노래가 현대판 <청산송>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한계령 넘는 길>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어깨를 떠미네

 

물론 양자 모두 나옹의 시에 비해 부질없이 길어진 느낌의 노래들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애욕과 물욕에 찌든 현대인들의 고뇌를 훨훨 날려줄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점도 사실이다. 애당초 간결·담백했던 나옹의 서정이 700여년 세월의 강을 건너며 매우 복잡해진 사람들의 내면을 담아내느라 이토록 장황해졌으리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고, 많은 선지식들을 찾아 문제해결에 몰두한 나옹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무욕의 가벼움’이었다. 그는 그것을 당대의 중생들 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사자후(獅子吼) 아닌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도 미움도 모두 벗어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는 것.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야 극락세계가 어찌 멀리 있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7. 14:16
 

참회의 글


                                                    조규익


불교경전에 ‘개구즉착(開口卽錯)’ 또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오묘함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되씹어 보아야 하는 경구이지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면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격이거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르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의 선사(禪師)들이 흔히들 써온 이 말은 진리를 깨닫는데 말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큰 화를 낸 제가 정작 큰 일을 만나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 일'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지요? 그 당시 제 가시 돋친 말의 대상이 되었던 분에게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침 저는 ‘개구즉착’이란 성어에 빗대어 제 그러한 실수를 참회하고자 합니다.

***

 2년쯤 전인가요? 저는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김 아무개 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그 글을 아래쪽에 첨부합니다)  당시 논문발표와 관련하여 그 분이 저질렀다고 보도된 일들이나 그에 관한 그 분의 해명이 너무나 궁하고 불쾌했던 저로서는 ‘욱’하는 성미를 참을 수 없었고, 급기야 글 한 쪽을 써서 일간지에 실었던 것이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통쾌해 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분이 당시 인기 없던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함께 학문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외람된 사명감(?)에 저지른 일이었지요.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장관에 임명된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의 ‘추한 모습’을 목격하며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행위에 비하면, 그 시절 그 분의 잘못이야말로 참으로 ‘애교스러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저를 몹시도 괴롭히는 요즈음입니다. 그 분의 잘못에 대하여 그런 글을 썼다면, 지금 문제된 분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글을 써야 형평이 맞는 것일까요?

***

제자의 글을 표절하고, 한 논문을 십여 곳에 중복 게재했으며, 십여 년 가까이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발표하지 못했다면, 학자로서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지요? 그것뿐인가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부동산 등에 투기해온 그들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수들은 긴 방학을 즐길 수 있어서, 학문 하는 여가에 전국을 누비며 땅 투기에 전념할 수 있었노라고 ‘당당하게’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가 잘 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부동산 투기라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고뇌하는 제 주변의 교수들은 그럼 어떤 사람들일까요? 왜 새 정부에는 그런 사람들 뿐인가요? 이토록 그들에겐 ‘이런 사람도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단 한 사람’의 표본적 인물도 없는 걸까요?

***

새 정부에 참여하신 문제 교수님들! 당장 거기서 내려오세요. 거긴 여러분께 분에 넘치는 자리입니다. 제가 강요할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투기로 벌어들인 부동산을 처분하여 제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라도 내놓으시는 게 어떨지요? 그런 다음 그간 소홀히 했던 학문 연구에 매진하세요. 그렇게 하는 길만이 그나마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제 실수를 참회하노니, 강호 제현께서는 부디 제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2008. 2. 27.


 백규 드림



*첨부(조선일보 2006년 7월 28일 오피니언 칼럼)


교육부총리, 안 되겠소

                                                         

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