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29. 00:41

 

 


공항에서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에 도착하여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앞마당에 설치된 조각상

 

 


천진외대 국제교류처에 걸린 국제학술회의 보도처 표지판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로비에서 안내하는 학생들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본 천진시가지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보이는 롯데백화점

 

 


천진시가지에서 흔히 보이는 높은 빌딩들

 

 

 

영욕이 퇴적된, 미래 지향의 역사 도시 천진(天津)을 찾아(1)

 

 

 

 

 

3월 초. 천진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있으니 발표를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국제학술회의라 해봐야 중국에서 열리는 만큼 수준이 뻔할 뻔자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천진이 탐났다. 뿐만 아니라 천진에서 학술회의를 마치는 다음 날 열하(熱河)로 이동하는 일정도 들어 있었다. 이미 열하를 다녀온 나로선 흥미가 반감되긴 했으나, 13년의 세월 동안 변했을 열하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으며 연암 박지원의 정신세계를 흠모해 온 게 대부분의 국문학도들일 것이니, 열하는 이번 여행에서 일종의 미끼상품’(?)인 셈이었다. 주최 측이 열하를 끼워 넣은 것도 그 점을 노렸기 때문이리라.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 일당에게 납치된 대원군이 3년 간 감금의 수모를 당한 곳.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강제 조차(租借)로 입은 상처가 도시의 핵심부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발해 만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등등. 천진은 적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곳이라 언제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지금껏 미답(未踏)으로 남겨둔 곳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아편전쟁(1840~1842)이 일어난 곳이었다. 영국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하고, 중일전쟁에서도 패함으로써 완벽하게 주권을 상실하게 된 중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화주의와 동아시아 중세보편주의의 핵심 공간으로 군림해오던 중국이 아차하는 순간에 역사의 진운(進運)을 놓침으로써 국제사회의 동네북으로 전락된 역사적 비운의 생생한 현장이 바로 천진이었다. 그러면서도 열강 침탈의 역사를 근대화의 역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어떤 나라처럼 치욕의 현장을 쓸어버리지 않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대인배(大人輩)의 지혜와 금도를 보여 준 미래 지향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머물게 될 이틀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도시를 일별이라도 해야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서울 출발 전날 냉방병에 걸려 골골하면서도 장도에 오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050분 출발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은 무슨 이유인지 30분 가까이 연발했고,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천진 공항에 도착했다. 도시는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 공항에서 버스에 오른 가이드는 천진이란 말의 유래부터 설명했다. 그 중 천자의 나루터란 설명이 가장 타당한 듯 했다. 즉 명 태조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영락(永樂)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 남경 홍무(洪武)제의 손자이자 태조의 후계자인 주윤문(朱允炆)에 대항하는 싸움을 시작했는데, 그가 떠난 곳이 바로 이곳의 고강(沽江)으로서 즉위에 성공한 다음 자신이 떠난 곳에 천진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발해로 흘러 들어가 양자강과 황하를 만나는 하이강[The Hai River; 海河]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물이 많은 도시였다.

 

 

숙소인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3시가 넘어서야 천진박물관에 들렀다. 하서구(河西區) 은하(銀河) 광장에 있는 천진박물관은 백조가 두 날개를 편 듯한 건축 양식도 일품이었지만, 소장품의 양과 질은 더욱 엄청났다. 50,000의 넓이. 우리 개념으로 15,151평이 넘는 규모에 방대한 중국 전역의 고대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서예, 그림, 청동기, 도자기, 옥 공예품, 인장, 벼루, 상나라 때의 갑골문, 동전, 고문서, 근대의 각종 유물 등 20만 점이 넘는 미술품들과 역사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외형이나 소장품의 규모로는 일개 시립박물관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천진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대단했던 만큼 서구 열강들과의 갈등, 전쟁, 식민화 등의 우여곡절과 그 산물인 조계(租界)에 관련된 각종 유물이나 문서, 인물들이 복잡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박물관은 매우 넓었다. 세계의 유명 박물관을 두루 돌아본 경험에 미루어, 천진박물관을 대강이라도 섭렵하려면 짧게 잡아도 꼬박 이틀은 필요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고작 두어 시간으로 장강대하 같은 중국사의 유물들을 둘러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5시가 땡 치자 복무원들은 가차 없이 우리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위층엔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그러지 않아도 주마간산으로 시작한 박물관 투어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오니 기념물 같은 주변의 고층건물들 사이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천진에서의 귀하디귀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천진박물관 입구

 

 


천진박물관 내부

 

 


천진박물관 소장-부두의 노동자들

 

 


천진박물관 소장 생활사 자료-약방

 

 


천진박물관 소장-상나라 시대의 갑골문

 

 


천진박물관 소장품-신석기 시대 홍산문화에서 황옥으로 만든 pig-dragon

 

 


천진박물관 소장품-원나라 때 옥날개 용무늬의 두 귀를 가진 병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황남도인이 제작한 익번왕금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물고기와 연꽃 모양을 朱砂로 새긴 벼루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청동으로 만들어진 달라이라마 상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에나멜로 서양인들이 그려진 비연호(鼻烟壺)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바위 모양의 壽山 돌도장
[남산지수(南山之壽: 남산처럼 장수하라)가 새겨져 있음]

 

 


천진박물관 소장품-19세기 초중반 아편을 탐닉하던 중국인들

 

 


천진박물관 소장-9개국 조계 분포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 일본,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천진박물관 소장-북양대신 이홍장과 대화를 나누는
미국 18 대 대통령 그란트(Ulysses Simpson Grant)

 

 


천진박물관 소장-중국의 국부 손문상

 

 


이른 아침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중국인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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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0. 30. 07:46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2일차-대초원[Tall Grass Prairie]에서 멋진 울음 터를 발견하고

 

 

 

 

연암 박지원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요동벌판을 만나자 멋진 울음 터로다. 크게 한 번 울어볼 만 하도다!”라고 소리쳤다. <<열하일기>>의 이른바 호곡장(好哭場)’이 그것.

 

8시에 버스 두 대에 분승한 우리들은 2시간여를 달려 드디어 광활한 초원으로 들어섰다. 작은 키, 중간키, 큰 키의 각종 풀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에 깔려 있고, 저 멀리 검고 흰 소떼가 대지에 주둥이들을 박은 채 풀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간이 관목지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온통 풀밭이었다. 미국인들이 ‘Tall Grass Prairie’[이하 ‘TGP’로 약칭]라고 부르는 자연 초지(草地)였다. 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드문드문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서 있고, 땅 속에서 퍼낸 원유와 가스를 저장하는 탱크들도 보였다. 말하자면 땅 위에는 달디 단 젖과 고기를 만드는 영양 만점의 풀이 그득하고 땅 밑에는 인류문명을 지탱하는 또 다른 젖인 원유가 고여 있으니, 이 나라는 대체 어찌하여 이런 복을 타고 났단 말인가.

 


Tall Grass Prairie Preserve 표지판과 뮤지엄

 


털사 시티와 오세이지 보호구역 및 톨그래스 프레이리가 나온 지도

 

연암은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알고, 칠정(七情) 모두에 울 수 있다는 건 모른다네.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지.울음이란 천지간에 우레와도 같은 것. 지극한 정이 발로되어 나오는 것이 이치에 맞아든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다. 기뻐도 슬퍼도 울 수 있는 것은 연암 뿐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가 대초원울음 터로 생각한 것은 나의 왜소함을 비웃는 듯한 그 광활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허허로운 듯한 외피 속에 그득 담긴 가멸찬 풍요, 그리고 그로부터 느끼는 상대적인 빈곤이 둘째 이유였다. 60 가깝도록 손바닥만한 풀밭에서 소꿉장난하듯 살아온 인생의 눈에 광대한 대초원에서 느끼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바로 내 울음의 근원이었다. 연암도 그랬으리라. ‘들판에서 해가 떠서 들판으로 지는그 요동벌판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가난하고 좁디좁은 조선 땅과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 무리


대초원 저편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흰소와 검정소들


대초원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는 long horn cows

 

***

 

두 대의 버스는 호텔로부터 두 시간 가량 달려 TGP로 들어섰다. 까마득히 넓어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대초원. 안내자로 나선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들으며 초원 사이로 난 트레일을 느릿느릿 달리는 버스의 창을 통해 그 넓이를 마음으로나 가늠할 뿐이었다.

 

오세이지(Osage) 카운티에 속해 있으며, 포허스카(Pawhuska) 다운타운으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한 TGP. 초원 보호구역으로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역사의 현장이자 유물인 셈이다. 원래 텍사스로부터 마니토바(Manitoba)까지 14개 주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도시의 확장과 농지의 전용으로 남아 있는 공간은 원래에 비해 겨우 10% 정도라 한다. 엄청난 크기와 기괴한 표정의 검정 소 바이슨(bison)들이 무리를 지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생태공간이다.

 


                                           톨그래스 프레이리 구역도       

 

TGP의 관문인 포허스카는 19세기 이래 오세이지 부족의 중심역할을 해온 도시인데, 오세이지 족은 갠자스에 있는 보호구역의 땅을 팔고 포허스카를 둘러싼 땅을 새로 사들였다고 한다. 지나면서 얼핏 보기에 새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이 구역의 오세이지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석유의 발견으로 그들은 농업과 목축으로부터 벗어나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 그룹들 가운데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오세이지 족은 자기들 땅의 광물 채굴권을 갖고 있으며, 특히 석유와 가스는 오세이지 부족원들 뿐 아니라 그들 영역 안에 사는 다른 부족원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수입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TGP 1986년 이래 오클라호마의 웅장한 자연경관과 독특한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해 온 미국의 자연 보호 단체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만들어졌다. The Nature Conservancy의 오클라호마 지부가 총면적 77,000에이커[120평방 마일]에 달하는 12개의 보호구역을 소유하거나 돌보고 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TGP에 들어선 우리는 바이슨 루프(Bison loop)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바이슨 관찰에 나섰다. TGP 본부 사무실보다 4~5마일 앞선 곳에 까마득한 넓이의 면적이 원형의 트레일로 구획되어 있는 곳이 바로 바이슨 루프였다. 풀이 없는 겨울 동안 녀석들이 먹을 건초 덩어리들을 쌓아놓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앞마당에 모여 있던 수십 마리의 바이슨들이 우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곤 길 건너 풀밭으로 슬금슬금 피해가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녀석들은 길을 건너가면서도 우리 쪽을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무어라 투덜대는 게 분명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불만이었을 텐데, 만약 우리가 다급하게 뒤쫓았다면 그 무서운 뿔을 곧추 세우고 덤벼들 것 같은 위기를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저 멀리 초원 한복판으로 몰려간 바이슨들은 길게 1자 대형을 유지하며 지평선으로 접근해갔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가물가물 멀어지다가 그들의 대열이 지평선과 합치되면서 우리는 자리를 떴다.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borrowed from Google.com)


우리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바이슨 무리


바이슨들이 물러난 자리에 남겨진 엄청난 거름

 

한때 개체 수가 3천만 마리를 상회하던 바이슨은 대초원의 왕이었다. 어깨 높이 180cm1톤이 넘는 체중을 자랑하는 웅장한 체격의 바이슨.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 규모로 떼를 지어 초원을 배회하는 바이슨은 결코 식물이나 토양을 황폐화 시키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적당히 먹고 계속 움직여 뜯어먹은 곳의 식물을 다시 복원시키기 때문이다. 1800년대 후반에는 1000 마리도 남지 않아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보호에 힘입어 현재는 약 35만 마리 정도로 불어났다고 한다. 멸종의 위기는 벗어난 셈이고, 15000마리는 미국 내 공공의 땅에서, 나머지는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사유물로 각각 관리되고 있었다. 지금 The Nature Conservancy는 생태 시스템 복원작업의 한 부분으로 보호구역에 바이슨을 재입식해오고 있는데, 우리의 버스들이 바이슨 루프에서 시속 10마일로 서행한 것도 바이슨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안내원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이슨 무리를 좇고 있는 각국의 학자들


인도의 탁월한 농학자 파트로 교수와 함께

 

사실 이 지역에 바이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감에도 야생화들은 화려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기이한 종류의 풀들이 그득했다. 갖가지 새들은 지천으로 날아다니고, 여우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의 개체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TGP 조성 이후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아 수질과 토양이 개선되면서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빚을 최소한으로라도 갚고 있다는 증거였다.

 

***

바이슨과 이별한 우리가 점심식사를 위해 멈춘 곳은 TGP Research Center였다. 그곳에는 우리의 점심 도시락을 싣고 온 트럭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배분된 샌드위치 속의 바비큐가 바이슨 고기인지 묻고 싶었으나, 바이슨들의 표정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오클라호마 음악에 미친 복합문화적 영향[The Multi-Cultural Influences of Oklahoma Music]”이란 제목의 강연 겸 공연을 접하게 되었다. 강사는 Dr. Hugh Foley[Professor of Fine Arts at Rogers State University]였고, 그 아들이 특이한 복장으로 나와 인디언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새로운옛날 음악을 새파란 젊은이로부터 듣는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부자가 음악으로 통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이론으로 설명하면 아들은 타악기로 직접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TGP 리서치 센터 강당에서 공연 중인 휴 폴리 교수의 아들


휴 폴리 교수와 그의 아들

 

분명하진 않으나 노래들의 가락이 우리의 전통음악과 상당히 유사하여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설명하고 들려준 건 Red Dirt Music. 우리말로 번역하면 황토음악쯤 될까? Red Dirt Music은 오클라호마에 흔히 보이는 누런 흙에서 그 이름을 얻은 음악장르라 한다. 원래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가 Red Dirt Music의 중심으로 알려져 왔는데, 텍사스에도 Red Dirt Music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한때는 두 장르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2008년부터 그 차이가 소멸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음악, 특히 원시음악과 Red Dirt Music을 비교한다면,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연 내내 드는 것이었다.

 

점심 겸 공연이 끝난 뒤 랜취 하우스와 뮤지엄, 초원 사잇길 등을 거쳐 들른 곳이 오세이지 박물관[Osage Tribal Museum]이었다. 도착하니 그들은 이미 우리를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연사는 Kathryn Red Corn.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으로서 오세이지 족 출신의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오세이지 족의 역사와 TGP에 대한 부족의 흥미'를 주제로 30분 이상 차분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나는 현재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는 어떻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앞으로 얼마나 부족의 정체성[tribal identity]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나 ‘Government 차원에서 다른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것, 각종 민속행사 등을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등 매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을 뿐, 그런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Dr. Cheryl Matherly와 함께


Tall Grass Prairie 뮤지엄 앞에서

 

미국 최초의 인디언 부족 박물관인 오세이지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의 전통에 따라 생활해왔거나 현대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오세이지의 역사, 전통, 관습 등에 정통한 사람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원들의 역사를 기념하거나 그것들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1년 내내 많은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의 대표란 사람이 전통복장으로 행사장에 앉아 있었지만, 흡사 쇼윈도에 앉아 있는 마네킹처럼 생기 없이 인디언 부족의 미래를 대변하는 듯 했다.

 


오세이지 박물관(The Osage Tribal Museum)


오세이지 박물관에서 만난 공주(2013년 선발), 부족대표, 여성명사


오세이지 박물관 안에 붙은 그림


오세이지 박물관 벽을 채운 오세이지족 인물들


오세이지 족이 분배 받은 땅(지적도) 


오세이지 족의 대표와 함께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 Kathryn Red Corn과 함께


TGP에서 석유를 채굴하던 옛날의 채굴기(오세이지 박물관 뜰)

 


오세이지 부족 사무소 앞에 세워진 기념 표지판

 

***

 

시간의 단층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역사의 뒤안길을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주파한 셈이었다. 대초원에도, 바이슨의 눈빛에도, 인디언들의 마음에도 그들 과거의 기억들은 화석화 된 채 촘촘히 박혀 있는 듯 했다. 지혜로운 후세의 누가 있어 정을 들고 그 화석들을 캘 날이 있으리라. 종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할 유전자가 그 화석들 속에서 검출되고, 종국엔 이 땅에서 사라진 영광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초원과 인디언들이 내게 주는 무언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사라지겠지만, 내일을 위한 씨앗 정도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오늘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강하게 느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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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훈식

    우리의 전통음악과 그들의 황토음악(?)에서 어떤 의미있는 결과가 도출될지 궁금합니다.

    그네들의 소도 질펀하게 거름을 배출하는 건 일반인 것 같습니다.^^

    2013.11.07 22:2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전문가들이 현장에 있었더라면 분명 공통되는 뭔가를 찾아냈을 겁니다. 당시 만난 인도 학자들은 인디언의 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디다만, 나는 우리에게 있다고 말했지요. 그들의 생활도구를 보아도 그렇고, 피부색이나 무뚝뚝한 표정 등도 그렇고, 음악에서 느껴지는 미학적 공통성도 그렇지요. 전문적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감'일 뿐이지만. 여하튼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2013.11.14 01:01 [ ADDR : EDIT/ DEL : REPLY ]

카테고리 없음2008. 5. 2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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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출간 기념

국 제 학 술 대 회

모시는 말씀

통합과 상호 소통의 시대,
한·중·일이 솥발처럼 버텨온 동북아에서
갈등의 역사, 대립의 패러다임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상생(相生)과 화해(和諧)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구축하는 일,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제, 그 지혜를
연행사와 통신사 사행록에서
찾고자 합니다.

부디 오셔서
격의 없는 담론의 장을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2008. 5.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드림

1. 주제 : 조선조 사행록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세계관
2. 일시 : 2008년 6월 13일(금), 10:00~18:00
3. 장소 : 숭실대 한경직 기념관 김덕윤 예배실
4. 주최 : 한국문예연구소
5.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09:30~10:00

제1부 개회식 사회   정영문(한국문예연구소 총무팀장)

인 사   조규익(한국문예연구소 소장) 10:00~10:05
축 사   이효계(숭실대학교 총장) 10:05~10:15


제2부 사회   곽원석(한국문예연구소 연구기획팀장)



1. 조선조 사행록 텍스트의 본질 (10:15~10:55)

발표   조규익(한국/숭실대 교수)
토론   김준옥(한국/전남대 교수)

2. 조선조 시기 대명 사대정책의 사상적 내인(內因)에 대한 고찰 (10:55~11:35)
발표   이 암(중국/북경 중앙민족대학 교수)
토론   임기중(한국/동국대 명예교수)


3. 조선조 후기 북학파문인들의 연행과 한중문인들의 정신적 교유 (11:35~12:15)
발표   김병민(중국/연변대 총장)
토론   박현규(한국/순천향대 교수)



점 심 식 사(12:15~13:15)


4. 열린 텍스트로서의 연행록과 역사적 지향성 (13:15~13:55)
발표   김문식(한국/단국대 교수)
토론   하정식(한국/숭실대 교수)

5. 외교적 관점에서 본 조선통신사, 그 기록의 허와 실 (13:55~14:35)
발표   손승철(한국/강원대 교수)
토론   박찬기(한국/목포대 교수)

6. 記錄文學としての朝鮮通信使 使行錄の東アジア的普遍性 (14:35~15:15)
발표 나카오 히로시(仲尾宏)(일본/
교토 조형예술대 객원교수)
토론   한태문(한국/부산대 교수)
통역   이시준(한국/숭실대 교수)

휴 식(15:15~15:30)

7. 18세기말 동서 지성의 해외체험, 성찰의 방향과 그 의미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대한 비교문학적 접근- (15:30~16:10)
발표   이혜순(한국/이화여대 명예교수)
토론   안삼환(한국/서울대 교수)

8. 연행사 및 통신사 노정 기록사진 감상 (16:10~17:10)
신춘호(방송대학TV 촬영감독/한 중연행노정답사
연구회 대표)




토론 (17:10~18:10)
좌장   소재영(숭실대 명예교수)

만찬(18:30~)





관련기사--------------------------------------------

<조선시대 외교사절, 시대정신을 말하다>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출간기념 국제학술대회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조선시대의 외교사절인 통신사들이 가졌던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논의하기 위해 한.중.일 석학들이 만난다.

한국문예연구소가 주최하고 동북아연구재단이 후원하는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출간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오는 13일 숭실대에서 열린다.

학술대회 주제는 '조선조 사행록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세계관'.

먼저 조선조 사행록 텍스트의 본질에 대해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인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발표하고, 이에 대한 토론자로는 김준옥 전남대 교수가 나선다.

또 중국 중앙민족대학의 이암 교수는 '조선조 시기 대명 사대정책의 사상적 내인(內因)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외교적 관점에서 본 조선통신사와 그들이 남긴 기록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강원대의 손승철 교수와 박찬기 교수가 집중 논의한다.

일본의 나카오 히로시 교토조형예술대 객원교수는 '조선통신사 사행록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주제로 논의를 진행한다.

사절을 따라 당시 청나라의 수도 연경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과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를 둘러본 독일의 괴테를 비교 분석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발표와 토론 주제는 '18세기 말 동서 지성의 해외체험, 성찰의 방향과 그 의미'.

조규익 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이 동북아에서 엮어온 갈등의 패러다임은 청산돼야 한다"며 "외교사절인 연행사와 통신사의 기록에서 이 같은 갈등 극복 방법을 찾고자 한다"고 학술대회 취지를 설명했다.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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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8. 3. 7. 20:03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 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
    -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54세의 ‘타각’, 연행 길에 오르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들과 머리 터지도록 싸우거나, 전야에 숨어 학문에 매진하거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포기한 채 후자를 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쟁쟁한 노론 가문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이었던 노가재 김창업이 벼슬길을 버리고 세상일을 멀리한 것은 아버지 김수항이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학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이 벼슬길로부터의 유혹을 막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가 숙원이던 연행 길에 나선 것도, 방대하면서도 치밀한『연행일기』를 남긴 것도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는 원래부터 중국의 산천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1712년 그의 형인 창집이 ‘사은 겸 삼절연공’ 사행의 정사로 떠나게 되었고, 결국 노가재는 ‘타각’의 자격으로 연행 길에 나설 수 있었다.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타각이란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는 직책이었다. 그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망 있는 노론 사대부가의 노가재가 맡을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조롱과 비난이 일시에 일어났고 친구들은 흔히 만류했다’는 노가재의 술회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가재에게 연행 길은 ‘새로운 것’을 찾는 길이었고, 자기 가문이 오래도록 빠져 지내던 이념의 허와 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지 직책이 무슨 상관이랴!’는 것이 노가재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146일 간 북경을 다녀오면서 방대한『연행일기』와 137수의 기행 시 모음인 『연행훈지록』을 남긴 것도 중국 기행에 대한 절절한 욕구의 소산이었으리라. 19세기 중엽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와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도 연행록을 남긴 선배들 가운데 노가재와 함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 노가재의 연행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후대 연행사들에게 교과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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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재의 증조부는 서인 청서파의 영수이자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 김상헌이고, 부친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다. 가계로만 본다면 노가재는 청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던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이 한으로 맺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냉철하리만큼 객관적인 태도로 중원의 문물을 대하고 관찰한 그였다.

화이의 차별적 세계관을 바꾸어가다

노가재는 십삼산의 찰원에서 장기모(張奇謨)라는 호인(胡人)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은 달자(㺚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東夷)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 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이요 달자는 하류인인데, 어찌 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하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 된다.”고 했다.

노가재는 내심 청국 사람들을 지목하여 ‘달자’라고 한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몽고로 오인하여 답변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음에 노가재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연행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청국을 이적으로 보던 관점은 약간씩 변해 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변화는 생겨날 수 있었다. 연경에서 중국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객관화 시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몸집이 장대하며 모양이 우뚝한 자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둘러보니 본래 스스로 작은데다 또 먼 길의 풍진에 시달린 뒤라 세 사신을 빼고는 모두가 다 꾀죄죄하고 착용한 의관도 또한 흔히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빈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사모가 눈까지 내려와 보기에 사람 같지 않으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이 말은 당시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겠으나, 사실 노가재의 의식 변화를 전제해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점은 황궁 묘사에서도 확인된다. 태화전 앞 12향로에 침향을 태우던 관례를 없앤 데 대하여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나 황궁에 대하여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처다웠다” 는 등의 언급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함으로써 노가재의 의식변화는 빨라졌다. 예컨대 젊은 학자 이원영(李元英)과의 교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런 관계를 통해 양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문화의식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물화의 풍부함이나 찬란함, 건축·의복·음식·기명 등과 각종 제도의 훌륭함, 도서편찬 같은 문화 사업들의 놀라움 등 그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노가재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그는 천산의 영안사(永安寺)에서 불승 숭혜(崇慧)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불교와의 만남이었고,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평등의식과의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사람에게 안팎은 있지만 불성은 한가집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숭혜의 말은 노가재로 하여금 그간 굳게 지녀오던 차별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천사의 중 운생(雲生)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온전히 도력(道力)에 힘입어 영경(靈境)을 두루 밟았으니 구제받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는 술회에서도 나타난다. 수행하던 젊은 승려 낭연(朗然)에게 준 시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함께 용천사에서 잤으니/응당 전생의 인연 있음 알겠네”도 그런 깨달음의 기쁨을 드러낸다. 그런 깨달음의 실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참된 도리 그 자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연행을 통해서 노가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문물을 만났다. 달자들은 물론 시정인(市井人)들, 벼슬아치, 학자, 예술인 등 다양했다. 옥전현에 묵을 때는 선비 하나가 춘화도를 팔기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대목엔 춘화도에 미련과 흥미를 보이는 서장관의 모습도 나타나고, “유학을 공부하는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라고 핀잔하는 노가재의 기개도 나타난다. 산해관을 지나면서는 반군 이자성에게 성문을 열어준 오삼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노가재 자신의 사평(史評)을 개진했는데, 논리가 당당하고 정연하다. 오삼계가 어차피 깨질 산해관을 포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임시변통의 의리’는 지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명나라의 왕실을 세우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렸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다가 끝내 패망했으니, 그는 이름을 망치고 절의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구동성으로 오삼계의 모든 행적을 비판하는 역사서들에 대한 노가재의 반론은 조선 선비의 균형 잡힌 혜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출하다.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46일, 총 거리는 6천 28리인데, 연경에서 출입하거나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6백 75리이며, 시문(詩文) 402편을 얻었다고 노가재 스스로 『연행일기』의 말미에서 밝혔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으며, 책의 말미에 돌아다닌 거리와 얻은 시문을 특별히 들어 놓았을까. 중국에 가기 전 노가재는 중국에 관한 서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중국은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랑캐도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 증조부가 청나라에 적극 대항하던 김상헌이었고, 부친 역시 청국을 이적시하던 노론의 영수였다. 노가재는 분명 그런 가문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본령이니, 노가재는 그 본령에 충실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가재 스스로 변화의 기미를 준비하던 17세기 조선 지식사회의 대표로 자리매김 될 만한 단서가 바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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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7. 9. 17. 17:57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 틈을 벗어나고자 한
 홍대용의 연행길 육천리-『을병연행록』


                                           조규익(숭실대 교수)

               연행 길, 고행 길

1765년(영조 41년) 동지사행의 서장관 홍억을 따라나선 그의 조카 담헌 홍대용. 자제군관의 자격이었다. 실학을 발흥시킨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당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대표 박지원과 교제가 깊었다. 그러나 화이관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지배하던 그 시절. 명분과 현실은 크게 괴리되어 있었다. 담헌 스스로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도 그 괴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이러한 괴리감을 청산하고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연행'의 기회를 고대하다가 드디어 그 기회를 잡았던 것. 거기서 나온 것이 "을병연행록"이다.
 그가 두 달 걸려 도착한 연경까지는 편도 3천리, 왕복 6천리의 장도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 여행길'. 교통편이 마땅치 않으니 숙박시설인들 변변할 리 없었다. 윗사람들이라고 으레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목욕은커녕 제때 옷을 갈아입는 일마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만큼 행차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군말을 보탤 수 없었다. 지엄한 왕명으로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적 연결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 담당했다. 조선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에 정례적인 사행단을 파견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 왕의 죽음에도 사행단을 보냈으며, 왕위를 물려줄 때도 선왕을 추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은 수시로 파견되던  임시 사행단이었다. 정사·부사·서장관 각 1인, 대통관 3인(수역 당상관 1인·상통사 2인), 호공관(護貢官) 혹은 압물관(押物官) 24인 등 30명 내외가 공식 인원이었으나, 의원·서자관·화원 및 기타 수행원과 노자(奴子)들을 합하면 총인원 기백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그렇게 다녀 온 사행이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 경제와 문화의 교류도 사행단이 수행하던 실질적 사명의 큰 부분이었다.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깨달음
                  
 "여름 버러지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이르지 못하고, 오곡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논치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끌어와 담헌은 조선의 답답한 선비들을 비웃고 '길 떠나는'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또 "간밤에 꿈을 꾸니/요야(遼野)를 날아 건너/산해관 잠긴 문을/한 손으로 밀치도다"라고 도도한 패기를 자신의 노래에 표현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평소 역관을 만날 때마다 한어를 부지런히 익혀둘 만큼 연행의 기회를 노리며 준비를 철저히 해온 그였다. 그 덕분으로 연경에 가서도 웬만한 대화는 한어로 통할 수 있었다. 오직 간정동의 세 벗(엄성·육비·반정균)과 나눈 대화들만은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정확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연행 길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했으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정동 세 벗과의 만남, 서양문물과의 만남이었다. 담헌은 연경에 도착한지 두어 달 째인 1766년 1월 7일·8일·9일·13일·19일과 2월 2일에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사제 유송령·포우관 등과 만났다. 그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비로소 서양세계와 우리의 같고 다름을 깨닫고 개안을 하게 되었다. 정월 7일 천주당에 사람을 보내 유송령·포우관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9일에서야 결국 두 사람을 만난다. 천주화상을 보며 그 화격(畵格)이나 천주교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오르간의 구조와 음계를 자세히 관찰한 다음 즉석에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일에도 천주당을 찾은 담헌은 그들과 장시간 만나 종교와 교리, 역서(曆書), 혼천의, 관상대, 망원경, 흑점(黑點), 안경 등 과학과 문물에 관한 문답을 교환했고, 2월 2일에는 자명종, 서양과 중국의 문자 언어 및 방위(方位) 등에 관한 문답도 나누었다. 처음으로 접한 천주화상을 담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편 벽 위에 당중하여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의상이오,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색과 근심하는 기색이라. 이것이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있는 모양이오,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소상(塑像)인 줄만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 깨달았으나, 안정(眼睛)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오.

 처음 보는 예수상에 놀랐던 것일까, 묘사의 세밀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사실 담헌은 그림 뿐 아니라 거문고를 능숙하게 탈 정도로 악기를 좋아했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 보는 오르간으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연주해보이기도 했고, 악기를 접할 때마다 구조와 연주법을 묻거나 조선의 악기와 비교하기도 했으며,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어 반정균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거문고 연주로 연경의 역관 서종맹의 탄성을 자아낸 담헌. 그는 악기상 유씨의 <평사낙안> 연주를 악사들로 하여금 익히게 한 다음 밤마다 그들을 불러 그것을 배웠다. 그처럼 그는 악기 연주의 매니아이기도 했다.

              간정동에서 만난 세 벗, 그리고 천고의 우정

 『을병연행록』 권 6에서 권 9까지 26일간은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를 만난 간정동 이야기다. 이 부분은 전체 기록의 삼분지일을 넘을 만큼 양으로나 내용으로나 중국 체험의 핵심이다. 간정동을 처음 방문했을 때 왕어양의 『감구집(感舊集)』에 실린 김상헌의 시가 화제로 올랐으며, 2차 방문 때는 허난설헌의 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담헌은 도학과 절의로 저명한 김상헌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 했고, 시율에 비해 덕행이 미치지 못함을 들어 난설헌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간정동을 방문했을 때, 담헌은 육비·평중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오늘의 모꼬지가 천고의 기특한 연분'이라 말하며 기뻐했다. 국경을 넘는, 지극한 우정이었다. 『담헌서』 외집의 <항전척독(杭傳尺牘)>은 연행에서 돌아온 담헌이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33통이 실려 있는 글이다. 육비에게 주는 편지 4통, 엄성에게 주는 편지 3통, 반정균에게 주는 편지 5통, 손유의에게 주는 편지 4통 등이 그 중심이다. 이들 중 담헌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엄성이었다.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7통이나 될 정도였다. 엄성이 죽은 뒤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엔 감동적인 우정이 흘러넘친다.

 철교(엄성의 호 ; 인용자 주)의 무덤에 풀이 이미 두 달을 묵었구료. 매양 깊었던 우정을 생각하면 벽을 돌며 기가 꺾이고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 초상을 꼭 한 번 보고 싶건만 부쳐 주기가 쉽지 않겠지요.

 엄성은 담헌의 초상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정작 담헌은 그의 초상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 엄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토록 그들은 우정으로 맺어진 큰 선비들이었다. 담헌이 보기에 단순히 '오랑캐 나라의 시시한 선비'들은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조선의 선비들이 얕잡아 봄직한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담헌은 연행 길에 나서면서 "대개 사람이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자는 그 가슴에 호준한 뜻이 적음이요,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는 그 도량에 원대한 계교가 없음이라"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는 중국에 가서 이런 선비들과 교제하고 좀 더 큰 문제들을 담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헌은 당시 조선의 꽉 막힌 선비들을 비판하고 매도했다. 담헌 자신 연행을 통해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들' 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을 소중화로 부르긴 하지만, 100리 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며 땅덩어리가 좁고 좁아 중국의 한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가운데 도사리고 앉아 부릅뜬 눈으로 소소한 영리를 추구하고 악착한 언론을 구사하니 그들이 가련하다고 했다.
 오랑캐가 웅거하여 중국의 문물이 비록 변했다 하나 사람만은 고금이 없으니,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며 저들의 규모와 기상을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포부를 지닌 담헌이었기에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교우관계의 모범적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반년 동안의 연행길이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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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7. 7. 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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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같은 일을 하기란 쉽지 않고, 같은 일을 해도 멋진 성과물을 내기란 더더욱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수밀, 강민경 양 박사는 참으로 부러운 동반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뛰어난 감수성과 객관적 분석력을 갖추고 있어 무슨 글을 써도 맛깔스러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 두 사람. 학계를 위해 조만간 크게 쓰일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에 박수밀 박사는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을, 강민경 박사는 <<조선 중기 유선문학과 환상의 전통>>을 각각 펴냈습니다. 전자는 우리 역사상 '변화의 세기'이자 '문화의 시대'였던 18세기의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열린 지식인들'의 생각을 읽어낸 글입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당대 지신인들의 자세와 방법을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지적 사유'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의 공부를 토대로 보자면 그들은 세계를 객관화시켜 바라볼 줄 알았다. 그들은 세계의 틀에 갇힌 인간이 되지 않고 세계를 대상화시켜 세계와 마주 대했다. 세계 속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세계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존재! 그리하여 그들은 사물 하나하나를 '다시금'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상식과 통념을 의심하고 미루어 따져보는 '회의와 유추'의 정신이야말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원동력이라 본다"

고 했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 지성사에서 이 시기만큼 큰 변화를 이루어낸 시기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변화의 핵심만 잡아낸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도 환히 보이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후자는 저자가 '중세 지식인들의 미니 홈피'라고 단정한 유선문학을 분석적으로 바라 본 글입니다. 꿈과 현실의 거리 혹은 양태야말로 그 때나 지금이나 글 쓰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닐까요?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때의 지금을 살았던 인간들의 꿈꾸기가 궁금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환상을 그 때의 지식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실현했을까를 들여다보려 하였다. 이 책은 꿈꾸기 문학인 유선시가 당대 지식인들의 삶과 내면에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밝혀본 것이다. 지식인들의 초월세계에 대한 꿈꾸기 방식을 엿보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고 했습니다.  어쩌면 저자는 문학을 통해 꿈꾸기를 시도한 당대 지식인들과 함께 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과 현실적 인간의 욕망을 정치하게 분석한 글입니다.

이 분들의 글을 자신있게 추천하오니, 많이들 읽으시고 공감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수밀,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태학사, 2007, 13000원
       
  *강민경, <<조선 중기 유선문학과 환상의 전통>>, 한국학술정보(주), 2007, 15000원


          2007. 6. 6.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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