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8. 11:28

'박근혜는 바보여~!'

 

 

 

맹자가 양혜왕을 뵙자 왕은 못 가에 서서 홍안[鴻鴈: 큰 고니와 기러기]과 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진 자도 역시 이런 것을 즐거워할까요?” 맹자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진 자가 된 이후라야 이런 것을 좋아하지요.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시에 '처음으로 영유[靈囿: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지은 영대 밑의 동산]를 지으실 때에 이를 헤아려 경영하시니 서민이 몰려와 이를 꾸미어 하루가 못 되어 완성하였네. 급히 서둘지 말라 일렀건만 서민들은 아들이 달려오듯 찾아 왔다네. 왕이 영유에 나와 있으면 사슴은 번쩍번쩍 빛나고 백조는 하얗게 빛났다네. 왕이 이번엔 영소[靈沼: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만든 연못]로 구경 나오자 물고기 가득히 뛰어 놀았네'라 하였습니다.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영대와 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능히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이 백성들의 힘을 빌어 영대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긴 것은 문왕이 그것을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때문이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는 것이 바로 소통의 본질이다. 문왕은 백성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넘겨짚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거나 관념상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왕은 내가 만약 백성이라면 임금에 대하여 어떤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가상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던졌음에 틀림없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바로 백성과 함께 즐기자!’는 것이었고, 그게 바로 요즘 말로 소통이란 것이다.

 

 

50대인 나는 이 땅의 우리 세대가 갖는 시대적 징표들을 형틀처럼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계몽가를 주문처럼 되뇌면서 꿈을 키웠다. ‘농경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를 거쳐 지금 고도 정보화 사회의 말석에까지 이르렀으니, 다른 나라들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발전의 과정을 단 몇십년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해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박정희라는 인물은 가난과 무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선각자였고, ‘북괴는 민족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탄들의 집단이었다. 그런 의식에 바탕을 둔 박근혜의 등장을 보며 질곡의 땅에서 자라난 50대 이상 세대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잡아온 남자들을 생각해 본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얼렁뚱땅 이루어지는 끼리끼리의 담합, 얕은 수로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는 밀실의 야합등등, ‘구린 남자들의 카르텔이 국가 권력의 이면구조였다. ‘정치(政治)라는 좋은 말이 이 땅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야망을 합리화 시키는 미명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 땅의 50대가 그런 남성들 사이에서 혜성같이 등장한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여성인 박근혜는 적어도 그간 권력을 갖고 얼렁뚱땅 장난질을 쳐온 남성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 컸다. ‘아버지 박정희가 갖고 있던 꿈에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했다단순히 50대에 이르러 남성 호르몬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에게 공감을 갖게 된 건 아니란 말이다.

 박근혜가 들고 나온 신뢰와 원칙이란 우리 세대의 소망적 사고를 결집시킨 슬로건이었다. 취임 초기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지지율도 나를 포함한 50대 이상 세대의 굳건한 믿음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믿었다. 적어도 박근혜라면,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우리 정치에 착근(着根)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지혜였다. 꽉 막힌 고집이 아니라 누구도 승복할만한 방법론을 개발해내는 것이 바로 지혜였다. 내 생각이 비록 100% ‘진리여서 그 실현에 대한 100%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해도, 갈래갈래 흩어진 민심의 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방법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 내 생각의 옳음에 대한 확신보다 그 확신에 대한 설득과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야 했다.

 문왕도 처음에는 내 궁전에 멋진 정원과 연못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제왕의 궁전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왕국의 체면으로 보아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왕 자신이 원하는 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왕은 아주 섬세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 일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즉위 당시부터 백성들과 함께 하는 면모를 보여준 그였다. 그 과정을 통해 백성들은 임금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문왕의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 기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문왕이 보여 준 치자의 지혜였다.

 

 

소통이 그렇게 힘 드는 일인가. ‘즐거운 마음으로탁자 위에 차 한 잔 마련해놓고 정치의 파트너들을 불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여당이나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라도 걸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그렇게 터부로 여길 만한 일일까. 사방에 우글거리는 기자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거나 자신의 시책을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도 번거로우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일까. 어찌하여 세상의 평판이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아니한 채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의 인간들만 찾아서 국가 대사를 맡기려 한단 말인가. ‘동네 반장이나 이장을 맡기에도 버거운 인물인지, 한 나라의 정승을 맡을만한 인물인지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어 봐도 알 일인데, 무슨 이유로 한사코 그런 문제적 인간들만 찾아 내 놓아서 정적들의 비웃음을 자초한단 말인가. 

 

 

물론 항간의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고, 줏대 없이 그에 따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세평(世評)을 무시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더 크기 마련이니, 양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게 바로 지혜다. 그걸 잘 하면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줏대 없는 허수아비대책 없는 독불장군이 되는 것이다. 좋은 정승 감들을 찾아내고도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버리고 마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이며, 세상에 좋은 정승 감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혹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까봐 발탁조차 하지 못하는 소심함과 속 좁은 욕망의 소유자를 누가 지도자로 섬길 것인가.

 

 

만족의구불안실망절망으로 초심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이 땅의 50대들은 만사 제쳐두고 투표장에 달려가 한 표를 행사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 마음의 변화는 현실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기준은 경험이다. 이 땅의 50대들은 공허한 이론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의 투사들이 아니라, 맵짠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판의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온 집단이다.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가까스로 찾아낸 대안이 바로 현 대통령이다. 힘들여 찾아냈다고 자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대안에 대하여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는 판정을 내리는 순간, 그 대안 또한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힐 수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오늘 만난 동향 친구의 박근혜는 바보여~!’라는 평가를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인사들만 모른다면, 이 문제야말로 조만간 민족사의 비극이나 수치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걱정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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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

 

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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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7. 21:23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백규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종걸’이란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그년’으로 지칭했다 하여 언론매체들이 떠들썩하다. 네티즌 가운데 몇 사람이 표현의 지나침을 지적하자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강변했다니, 더욱 기가 찰 일이다. 30년 가까이 국어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로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문제적 인간인가?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김용민이란 사람이 막말파동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리에서 쫓겨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당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면 바야흐로 이제 정치의 계절은 시작된 것 같다. 5년 전 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의 험한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언어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바로가기] 그러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지금,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이나 씁쓸하게 떠올릴 뿐이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요즈음 사람들이 ‘없으면 단 한 시도 못 산다’는 SNS 즉 ‘사회적(사교적) 연결망 서비스’에서 찾게 된다. 긴 문장 대신 짧은 문장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그런 서비스이다. 어떤 사실을 목도하거나 말을 들었을 때, 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잠시잠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멩이 던지듯 뱉어내는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다.

 

참 가관인 것은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서울시장도, 정당의 대표나 국회의원도, 상당수 대학교수들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쏘아대고 만다. 그 말은 즉각 팔로워(follower)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또 자신들의 팔로워들에게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간다.

 

일단 트윗 혹은 리트윗된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도 주워 담을 수 없거늘 하물며 수십만 수백만에게 전달된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는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진위에 관계없이 여론이란 허울을 쓰고 나라를 흔들어 놓기 일쑤다.

 

                          ***

 

박원순 서울시장도, 서울법대 조국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씨와 공지영 씨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SNS 애용자들이다. 엄청난 팔로워들을 거느린 그들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이들의 한 마디 말이 갖는 의미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대중들이 쉽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들을 가볍게 SNS로 던져댈 일은 아니다. 그래서 SNS에 의존하는 요즈음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 문화인들이 그렇게 천박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번 되 뇌이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들은 아예 생략해 버린다. 일단 던져놓고, 나중에 잘못이 드러날 경우 수정하면 된다는 배짱들일 것이다. 그래서 늘 강호에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한 혼란 때문에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닌가. SNS를 애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흡사 ‘고자질하는 애들’ 같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일단 자신이 곰곰 생각하며 해결하거나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고 본다.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심산일까.

 

팔로워들 가운데는 얼마나 단세포적이며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 많은가. 이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일들을 ‘아가들’에게 고자질하여 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SNS에 의존하는 현대의 정치를 ‘고자질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종걸이란 국회의원도 아마 그 SNS의 마력에 빠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후보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자회견을 하든 칼럼을 쓰든, 아니면 만나서 항의를 하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년’이란 상말 호칭을 사용하여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뿌려댄단 말인가. 그러고도 스스로가 국회의원임을 내세울 수 있는가? 국회의원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

 

“구설자(口舌者)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滅身之斧)라[입과 혀는 화가 들어오는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상인지어(傷人之語)는 환시자상(還是自傷)이니 함혈분인(含血噴人)이면 선오기구(先汚其口)니라[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니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등의 말들은 모두 옛날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몹쓸 시대로 변했다 한들, 환갑 진갑 다 지냈거나 그에 가까운 어른들이 옛날 열 살 남짓되던 아이들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정치인들이여! 부탁하노니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당분간 제발 그 입들에 자물쇠 좀 채워주기 바란다.

 

<2012. 8.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6. 10. 16:43

아무리 정치판이 난장판이라지만...

 

                                                                                                                                                          백규

 

 인터넷을 뒤지다가 참으로 보지 말았어야 할 꼴을 보게 되었다. 여당의 이른바 잘 나가는 세 사내[김문수-이재오-정몽준]가 담합하여 대권후보 경선을 보이콧하겠다는 것. 그동안 이들을 그런대로 괜찮게 보아오던 터인지라, 바쁘다고 그냥 모른 체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껏 50남짓 살아오면서 별의별 인간들을 다 보아 왔지만, 참 ‘해도 너무하는 인간들’을 드디어 목격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다 큰 세 사내들’이 ‘어영차 달려들어 패대기치려는’ 대상인 박근혜의 지지자도 아니고, 그 아니면 대통령 감 없다고 생각하는 답답이도 아니다. 또한 현실정치에 별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저 상식선에서 이건 아니다 싶어 한 마디 하려는 것뿐이다.

 

 흔히 속 좁은 인간들을 두고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한다. 그러나 밴댕이를 함부로 욕하지들 마시라. 세상에 오뉴월 밴댕이처럼 달착지근하고 구시월 밴댕이 젓갈처럼 깊은 맛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귀하신 밴댕이를 이런 인간들에게 갖다 댈 수는 없다. 밴댕이에 대한 모욕을 서해안 촌놈 출신인 나는 참을 수 없다. 세 살 먹은 애기들도 아니고 이들이 지금 그렇게 한가한 투정을 부릴 때인가. 다 망해버린 당을 맡기며 살려 놓아달라고 박근혜 치맛자락 부여잡고 애걸복걸하던 것이 바로 몇 달 전이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악수를 하다가 손이 부어 붕대를 감고 다니며, 열이 오른 몸으로 한반도를 누비며 당을 살려 낸 그녀였다. 그런 보도를 접하며 그녀가 보기 드문 여장부라고 생각한 것이 모두의 느낌이었다. 술주정뱅이 도박꾼 아버지가 거덜 낸 집안에서 홀어머니가 동분서주하며 올망졸망 새끼들을 건사할 오두막 하나 겨우 장만해 놓은 꼴 아닌가. 밖에서 겉돌며 가끔 욕설이나 한 마디씩 내 던지던 큰 자식들이 다 늦게 들어와 그걸 차지하겠다는 꼴이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잘은 모르지만, 경선 규칙이란 것이 이미 2007년에도 적용되었다니, 박근혜가 비대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꼼수로 개정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걸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물고 늘어진다면, 이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흔히 ‘못난 놈들’이 쪽박을 깨는 법이다. 어려울 땐 ‘닥치고 단결하여’ 도와야 한다. 지금 ‘벌건 바닷물’이 삼킬 듯 파도치는 난바다 위의 쪽배 형국이다. 함께 도와 안전한 곳으로 배를 저어가는 게 도리다. 그런 도리를 도외시하고 서로 사공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아우성치는 꼴이란! 설사 그런 사람들이 나타난다 해도 먼저 나서서 이들을 설득하며 함께 이길 묘책을 궁리하는 게 이 세 사람의 의무다. 그간 살아온 과정이나 관록으로 미루어 그들은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힘들여 안전한 육지로 저어가려는 쪽배를 한사코 파도 속에 뒤집어 넣지 못해 안달인 그들이다.

 

 설사 지금의 경선 규칙으로 승산이 없다고 치자. 그래도 눈 질끈 감고 함께 가야 한다. 이들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금도(襟度)이자 의무다. 단어를 따지고 문장을 따지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할수록 자신들의 근수(斤數)만 떨어지는 것을 정말로 모른다면, 그간 우리는 이들로부터 되게 사기를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눈 질끈 감고 그나마 승산이 있는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일단 정권을 잡은 다음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설사 규칙이 불리하다해도 당을 위해 참여하여 멋진 모습으로 져주는 것. 쉽진 않겠지만, 그것만이 이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티켓이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는 왜군과 일전을 겨루던 충무공에게만 해당되는 진리는 아니다. 세 사람이 진짜로 살려면 우선 자신을 죽일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든 꼼수를 부려서라도 ‘여자 하나’ 이겨보겠다는 것이 사나이의 기개는 아니다. 자신을 죽여서 공동체를 살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자고로 ‘남자 노릇 하기 어렵다’고들 하는 것이다.

 

  부디 세 분에게 고하노니, 자잘한 꼼수나 자잘한 논리들을 이 순간부터 싹 버리고, 군말 없이 경선에 참여하시라. 그리고 그 싸움판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당신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살려 보시라! <2012. 6. 10.>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