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9. 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31. 01:18

최근 정부와 한나라당은 고위당정협의를 통해 내년부터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모처럼 듣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나 우려되는 점도 적지 않다.

우선 논의의 과정이나 결정 자체가 너무 즉흥적이어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할 교육부서나 일선학교들이 과연 당장 내년부터 국사교육을 시킬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동안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이유로 국사를 선택으로 돌렸으며, 그에 따라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국사를 홀대하는 데 대하여 뜻 있는 국민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여 왔음에도 정책 당국의 국사에 대한 생각은 단호했다. 그런 마당에 갑작스레 필수로 전환하겠다고 하니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대다수 국민들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교원임용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한다거나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겠다는 방안도 나온 모양이니, 국사에 대한 대우가 '굶어 죽어가던 흥부네 안방에 황금을 쏟아 부은' 격이다. 그런데 우리 학계나 교육당국 혹은 일선학교에 지금 당장 국사교육을 시킬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은 무엇보다 심각하다.

과거 시행해 왔던 국사교육을 상기해보면 왜 우리가 앞으로 부활할 국사교육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는지 분명해진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같은 잘못된 바탕 위에서 역사적 사건들의 암기만을 강요함으로써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암기 위주의 국사교육에 환멸만을 느끼게 되었다거나 역사에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교훈을 얻기보다는 자기비하의 모멸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시련과 극복'은 세계 모든 민족들의 역사에 공통된 주제다. 그러나 우리만큼 그 정도가 심한 민족이나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지금도 동북아의 한ㆍ중ㆍ일 3국은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꽤 오래 전부터 역사를 날조하고 날조된 역사를 그대로 교육시켜 왔으며, 중국도 역사 날조에 동참하고 있음은 최근에 불거진 '동북공정'의 실태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일본과 중국은 역사의 무기화를 통해 이 지역의 패권을 쥐어보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나마 국사를 선택으로 돌리거나 아예 폐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온 것이다. 그들이 역사를 날조한다고 우리까지 그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역사를 무기화 하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응전략 정도는 세워두었어야 한다.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의 칼날을 드러냈을 때 우리의 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고, 일본이 오랫동안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 도발을 해올 때도 시원한 논리로 대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뜻 있는 재야 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실증사학의 울타리나 식민사관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학계는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고등학생들에게 제왕의 이름, 연대 혹은 사건의 개요나 외우게 하는 것은 국사 교육이 아니다. 역사교사는 국사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역사가의 명쾌하고 공정하며 미래지향적인 해석을 가르쳐야 한다. 영광의 역사는 그것대로 불운의 역사는 그것대로 정당한 사관에 입각한 해석적 의미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제대로 된 국사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카(E.H.Carr)가 말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면, 제대로 된 국사교육을 통해서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나라가 망해도 정신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나철의 말은 역사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금언이다.

나라 사이의 벽을 허무는 글로벌 시대일수록 국사나 민족사를 교육시켜야 하는 것은 '드넓은 벌판에 홀로 설만한 줏대' 즉 자아 정체성이 긴요하기 때문이다. 자아 정체성은 조상들이 헤쳐 나온 역경의 체험을 들려주고 극복의 지혜를 잘 다듬어 가르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국사교육이 졸속으로 재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왕 국사교육을 재개하려면 제대로 준비한 다음에 하는 게 옳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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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8. 15. 23:42
역사, 이젠 제대로 가르치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에서 만나는 해외동포 3~4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말을 모르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니 그들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할 수가 없다.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고국의 말과 역사조차 모르는 처지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동포 아닌 제3국인’ 혹은 그들과 공존하는 ‘타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민지와 고국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계인’으로 머물러 온 그들이 이제는 그런 중간자적 인식마저 상실하고 대책 없는 미아(迷兒)로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해외의 동포들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우려스럽게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없는 기성세대나 나라를 경영한다는 지도층이 무사려(無思慮)하게 지향해온 ‘세계화’의 비극적 소산이다. 든든한 경제나 국방만이 세계의 복판에서 한 나라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은 아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한갓 ‘경제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영어에만 몰입하게 하고 역사나 민족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들은 스스로 ‘세계시민’의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람직한 세계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독도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이유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제 땅마저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억지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하여 가르쳐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동북공정’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역사의 날조에 동참했다. ‘날조된 역사’를 당당하게 교육시키는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경우 미래는 그 방향으로 되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날조된 역사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헛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마저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직무유기이니 그것 또한 죄악이다.

우리의 편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지금’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역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몰각(沒覺)은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역사 철학자 E.H.카아는 역설했다. 과거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현대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으며,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주변의 타민족, 타 국가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적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독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인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신세대를 국제 미아로 만들고 있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적 현실이다. 경제와 군사, 문화면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이 이 시점에 왜 ‘역사의 날조’와 ‘날조된 역사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멀지만 확실한’ 길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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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5. 6. 15:19

       갈수록 새로워지는 역사의 의미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조규익(숭실대 교수)

문고본으로 출간된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학부 3학년 때였다. 길현모 선생 번역의 ‘가볍지만 무거운’ 책이었다. 두세 번 곱씹어가며 읽으라던 선배의 권유로 열심히 밑줄 그으며 읽은 덕분이었을까. 어수룩한 후배들에게 역사나 역사철학, 아니 현실에 관한 ‘그럴 듯한’ 언설들을 제법 풀어놓을 수 있었다. 역사를 떠나 존립하기 어려운 우리의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탈근대의 담론을 지향하는 최근의 역사서들까지 두루 섭렵해왔으나, 이 책이 내 마음에 심어준 생각의 그루터기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었다.  
최근 나는 당시 그 선배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국문학사’를 수강하는 학부 3학년생들에게 이 책을 ‘반 강제로’ 읽혔다. 그런데 아이들의 눈이 ‘번쩍’ 빛나는 듯 했다. 지적 충격이었으리라. 카아의 생각을 수용하는 그들의 논리는 서툴지만 풋풋했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의 말 가운데 ‘그른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비 지식인들의 마음에 지적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책의 힘이 30년 세월에도 변함없다면, 이제 그 책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도 되리라. 더구나 우리의 과거가 ‘드라마’란 그릇에 담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우리 또한 그것을 ‘역사’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요즈음 아닌가. 어린 시절 열심히들 외워온 ‘태정태세문단세’. 그걸 두고 ‘역사를 배웠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이다. 옳건 그르건 학창시절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본 적도 없는 ‘역사의 해석’을 TV 드라마에서 비로소 접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혹시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잘못 알아 왔거나 그릇 배워온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못한, 학문적 불모지의 백성들임이 분명하다.
‘역사는 과학이며, 진보한다’는 대전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언술들의 집합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 중시한다. 다시 말하면 사건들의 맥락이나 갈피들마다 숨어있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들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래서 카아는 역사가의 태도야말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역사적 사건들의 지위(地位) 또한 해석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논리적 바탕으로 삼은 것도 사건들의 해석을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고자 한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이런 근거 위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멋진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들이 ‘역사적 사실들’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해석과 평가가 필요하며, 그 상호작용인 ‘대화’야말로 역사 기술의 대상들을 무한한 가능태로 격상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비전이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통찰에 의해 빛을 받을 때에만 쓰이는 것이 ‘위대한 역사’라는 관점도 이런 전제를 통해 얻어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한 시대를 만든 위인(偉人)은 어떤 존재인가. 한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다음 시대에 그것을 전해주며 그것을 완성하는 인간상, 즉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존재를 카아는 위인이라 했다. 이처럼 카아는 역사의 과정에서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개인을 중시했다. 그가 시대를 만들고 이끌어간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보통사람들은 그런 위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위인은 자기 시대보다 너무 앞서 가기 때문에 뒷시대에 가서야 겨우 인정받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부단한 대화’라는 그의 핵심명제를 부연한 내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역사가란 단순한 분석가, 해석가에 그쳐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과거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란 언제나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판단을 내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추상적인 도덕개념 속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져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자 산물이란 것이다. 이런 역사나 역사철학 혹은 역사 서술에 관한 본질적 견해를 바탕으로 카아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는 역사가의 방법적 모색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도해왔다. 인과(因果)의 문제, 진보의 문제, 이성의 확대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모색하는 문제 등이 인류에 대한 역사 혹은 역사가의 임무라고 본 것이다. 비록 현재를 잣대로 삼긴 하지만, 단순히 과거 사실들의 해석이나 평가에만 머물 수는 없고, 미래에 대한 지평을 확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사가의 책무라는 것이 행간에 숨어있는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허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거나 해석하여 보여줌으로써 대중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가의 통찰이나 시선이 결여되기 마련인 이른바 ‘팩션(faction)’이란 새로운 장르가 범람함에 따라, 일반인들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몽이나 대조영은 분명 과거 한 때 이 땅에서 활약한 위인들이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무대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지만, 그 사건들이 과연 역사가의 책임 있는 비전으로 해석 또는 재현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지금 동북공정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역사왜곡으로 심기가 불편한 우리가 재확인해야 할 역사철학의 금과옥조를 카아의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소개

E. H. 카아

1892년 영국 런던 출생의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졸업 후 1916년∼1936년까지 20여 년 간 외무성 관리로 공직생활에 몸을 담았다. 특히 1919년에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36∼1947년까지 웨일즈대학(University of Wales)의 국제정치학 교수로 있으면서 '타임(The Times)'지 논설위원을 겸했고,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장, 옥스퍼드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55년 이후 모교인 트리니티 칼리지로 돌아가 1982년 타계할 때까지 고급연구원으로 지내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외교관이나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쌓은 현장경험은 역사와 정치에 관한 그의 시각(視角)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혹은 이론과 실제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적 균형을 잡고자 노력했으며, 이런 성향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과거와 미래의 대화, 사실과 해석의 상호작용 등 그의 역사인식 역시 그러한 현장경험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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