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0.08 화내는 사람들은 불쌍하다
  2. 2009.03.17 '죽은 어른의 사회'
  3. 2007.04.30 선진국에서 확인한 도서관의 힘
글 - 칼럼/단상2015. 10. 8. 22:21

화내는 사람들은 불쌍하다

 

 

젊은 시절엔 자주 화를 냈다.

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했다.

헛발질을 해대는 국가는 국가대로, 무질서한 사회는 사회대로, 탐욕스런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화를 돋우는 존재들이었다.

운전대를 잡으면 다른 운전자들 대부분이 불만의 대상이었다.

술에 취한 듯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차도, 잽싸게 추월하는 차도, 속 터지게 느린 차도 모두 화를 돋우는 경우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주변상황 때문에 교통신호를 위반하게 되는 경우도, 약속시간이 지났거나 용변이 급하여 추월해 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초보운전이라 달달 떨면서 운전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임을, 그 시절엔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 자신만이 우월하고 남들은 열등하다'는 '굴원(屈原)식 아집과 착각'*에 빠져 지내는 게 화 잘 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임을, 그리고 화내는 것만큼 인생을 망치는 일도 없음을 나이 들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떤 친구의 개탄처럼, 작게는 늘 적의를 갖고 대하는 직장의 철딱서니 주니어들이나, 묘한 열패감(劣敗感)에 일생 동안 각을 세우고 대들기만 하는 집안의 손아래 등 주변 인물들이 내뿜는 화의 사기(邪氣)도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화를 내는 일은 심장과 대뇌 속에 수백만 마리의 기생충을 기르는 일과 같음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이가 준 선물일 것이다. 

 

오늘 인터넷 신문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보도를 읽었다. 도로 위에서 두 차량 운전자가 다투게 되었단다. 경험으로 추정컨대, 발단은 별일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위주의 협량(狹量)이나 착각 혹은 오해로부터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화가 치민 운전자가 상대 차를 가로 막고 차에서 내려 위협적인 자세로 걸어오자, 상대 운전자가 그를 자신의 차로 치어 중상을 입혔다는 것이 사건의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읽은 네티즌의 댓글 중 두 개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운전 중 상대 운전자의 화를 돋우지 말아야한다. 이 사건의 피해자가 조금의 말조심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가 살인죄로 교도소에 가서 몇 년을 산다 해도, 그것이 피해자에게 도움 되는 일은 아니다. 피해자는 이 사고로 큰 고통을 받았고, 앞으로도 그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 말고 화난 사람 근처에 얼씬거릴 필요도 없다. 잘못하면 그로부터 유탄을 맞을 수 있다.

 

#2 세상 무서운 줄 알고 겸허하게 지금 이나마도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화를 조금이나마 피하는 현명한 처세다. 괜히 일본 사람들이 무조건 친절하고 남 피해 안 주고, 서양 사람들이 처음 보는 상대에게 먼저 인사하고 그러한 문화가 왜 생겼는지 아는가. 험한 세상을 겪어본 데서 나온 자기방어의 처세술이다. 우리는 X도 믿을 게 없는 군상들이 집에서 처자한테처럼 허세가 통하는 줄 알고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군다.

 

참, 현자들의 말이다. 그렇다. 남의 화를 돋울 필요 없다. 그 화가 어디로 가겠는가. 남의 화를 돋우어 싸움이 붙었고, 불같은 화를 참지 못해 달려들다가 상대방의 차에 치여 결국은 하반신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한 것 아닌가. 검찰이 판단했다는 대로 가해자가 살인미수죄로 감옥에 갇힌다 해도, 요즘 우리나라 판사들의 정신으론 불과 몇 년의 선고에 그칠 터. 가해자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고 고소해 할 일인가. 심한 중상으로부터 회복되었다 해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100세 장수시대’에 일평생 불편하게 살아갈 일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손해인가. 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일생을 그르친 것 아닌가. 그래서 스스로 화를 참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읽은 틱낫한 스님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마음 한가득 퍼진다.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말은 아주 신랄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쏟아내는 악담은 듣는 이를 거북하게 만든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가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 한가득 독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면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그의 공격적인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화란 우리 마음속의 일이므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도 우리 마음속의 일이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화내는 상대에게 ‘맞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토록 명확하게 제시한 말이나 글을 틱낫한 스님 이전에 접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분이 부럽고 무섭기도 하다. 백 살을 먹은들 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좀 젊어 보이는 사람이 경로석에 앉아 있다고 욕설을 해대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삭정이 같은 몸에 활활 타오르는 화만 남은 듯했다. 불현듯 그 노인이 불쌍했다. 오죽하면 그 나이에 화를 다 낸단 말인가.

 

어쨌든 스스로 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가 준 축복이다. 그래서 스스로 화를 제어할 수 있는 노인들은 ‘현자’로 불려도 가하다. 물론 이 말에는 그렇지 못한 노인들이 많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리라. 이제라도 화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길 일이다.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의 한 구절 "擧世皆濁我獨淸(거세개탁아독청/온세상이 모두 흐려 있는데 나 홀로 맑고) 衆人皆醉我獨醒(중인개취아독성/뭇 사람들 모두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是以見放(시이견방/이로써 추방을 당했노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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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3. 17. 10:17

‘죽은 어른의 사회’

 

조규익(국문과 교수)

 

얼마 전 한 노인을 만났다. 사회적 지위도 누릴 만큼 누렸고 돈도 많은 분이었다. 그런데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불평이 많았다. 후배들이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했다. 본인은 나이도 학식도 지위도 누구 못지않은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을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노인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판단의 정당성까지 담보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대체로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자격 없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학부 신입생부터 정년을 앞 둔 교수까지 10대에서 60대까지 모여 있는 대학이나 세대 구성이 더 다양한 사회 모두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노인이라 여기는 노인은 없다지만, 젊은이들의 눈에는 ‘에누리 없는 노인들’만 주변에 그득하다. 그 중에는 간혹 공동체 운영의 헤게모니를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도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눈엔 ‘제대로 된 어른’보다 ‘탐욕과 편견에 찌든 노인들’만 보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사회가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것은 그런 노인들이 공동체의 선도역을 자임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보다 들어주기, 현실적인 일에 초연하기, 후배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지갑 열기 등등 자신을 덜거나 버리는 일에 나서야 비로소 노인 아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후배들을 원망하며 그들과 엉겨서 이해다툼이나 벌인다면, 언제까지나 ‘어른’ 아닌 ‘노인’으로 남을 뿐이다.

최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신앙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분이 진정으로 무욕(無慾)의 삶을 살아온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노인들은 이 땅에 명예와 부의 지저분한 껍질만 남기고 떠난다. 아니, 명예와 부의 근처에도 못 가본 채 그것들에 집착한 욕망의 검불들만 날리고 떠나버린다. 소년, 청년, 장년으로 살다가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 채 ‘노인’으로 씁쓸히 세상을 하직하는 게 필부필부들의 삶이다.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어른으로 죽을지 노인으로 죽을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는 ‘죽은 어른의 사회’에 살고 있다.(2009. 3. 16.)

*이 글은 <숭대시보> No. 990, 2009년 3월 16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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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30. 20:02

선진국에서 확인한 도서관의 힘

조 규 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책을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책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사정이 달라졌다.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사를 밥먹듯 하는 요즘 생활에서 처분 대상 영순위가 바로 책이다. 가끔 아파트의 쓰레기장에 수북이 쌓이곤 하는 화려한 장정의 책들을 보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에서도 책을 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이 책을 사지 않아도 탓하는 국민이 없다. 도서관이 무엇 하는 곳이며 왜 중요한지 아는 정치인도 별반 없다. 이른바 출판대국인 이 나라에서 만드는 책들은 학습참고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니 두고두고 읽으며 의미를 반추한다던가 그럴 목적으로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애당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일이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문화의식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책과 도서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나 부러운 그들 대학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꺼내지도 말자. 틈날 때마다 동네의 도서관에 나가서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하곤 했다. 도서관의 주 이용객은 주부와 노인,초·중등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이라 해도 우리 나라처럼 시험공부나 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책들을 마음껏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부대행사로 여는 각종 과외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부들과 노인들이었다. 구부정한 노인들이 책을 한아름 들고와 반납하고 서가를 돌며 새로운 책을 찾는 모습. 주부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책을 읽거나 대출하는 모습은 선진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점심때 만 되면 널찍한 식당을 점령해 수다로 시간을 죽이는 우리네 주부들을 생각하며, 할 일 없이 공원에 나와 먼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우리네 노인들을 생각하며 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부와 노인들이 꼬마들 손을 잡고 동네도서관에 나와 독서삼매에 빠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아마도 우리의 모습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룸살롱, 갈빗집, 다방, 노래방 등이 촘촘히 박힌 수렁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건져내려면 단 한 순간이라도 내면을 가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도시마다 구색으로 하나씩 세워놓은 듯한 도서관이란 으레 학생들이 찾아가 노닥거리거나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후진적 현실을 바꿔야 한다.

과격하고 이기적이며 진지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확바꾸려면' 전국민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도서관을 확충하고 도서관 이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나 독서 열풍은 단기간의 캠페인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이 손자녀들을 이끌고 도서관을 찾아 자신들의 진지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든 채 도서관을 찾는 일이 생활화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經)을 읽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진지해지고 독서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아파트 쓰레기장에 멀쩡한 책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학습참고서 아닌, 제대로 된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살아날 것이고, 우리 나라도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될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날이 바로 우리가 한 차원 높아지는 날이다.

( 출처 : 출판저널 286호, 2000, 9,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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