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08.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5.07.03 11:59

 

 

 

 

 

 

 

 

지난 몇 년 간 악장문학과 해외 한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틈틈이 북한에서 나온 문학사들을 읽어 왔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그에 관한 제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고전시가들을 중심으로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북한사람들 특히 학자들의 생각이 너무나 경직되어 가뭄에 실개천 마르듯문학작품의 분석이나 해석에서는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만으로 무궁무진한 문학작품의 이면적 의미를 퍼 올리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 사유(思惟)의 정형성은 침대에 키를 맞추어 발을 잘라내던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몇 종 되지도 않지만, 그들의 문학사를 다 읽고 더 많은 글을 쓰다가는 수많은 동어반복(同語反覆)’의 함정에 빠질지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에, 당분간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제 사유의 또 다른 틀이 생성되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들 문학사의 이면적 의미들이 보일 때쯤 다시 쟁기를 들고 나설 생각입니다.

 

여기에 이 책의 머리말을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머리말

 

남북한은 말과 글자, 그리고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이 땅의 단일민족은 역사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단과 이질화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역사 또한 양분되고 말았다. 민족에게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하나이되, 그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남북한 역사 이질화의 근원은 이념이다. 처음에 통치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주체사상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역사의 이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북한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의 잣대는 그런 것들이 없던 시기의 옛 문학이나 지금의 창작문학에 가리지 않고 적용되었다. 옛 문학에 대해서는 해석의 도구로, 지금의 문학에 대해서는 창작과 비평의 원리로! ‘김일성의 교시’, ‘김정일의 지적과 함께 제시된 것이 강령으로서의 사회주의 미학 혹은 주체미학이었다. 문학작품이든 문학사이든 획일화의 감옥에 가둬버린 것이다.

 

우리 고전시가를 통해 그 실상의 일부나마 확인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이 글이고, 일부 학자들이 고창해 온 통일문학사의 서술이 허구라는 점도 이 공부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북한의 문학사()를 이 땅의 다수 문학사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주면 될 일이지, 다양성을 추구해온 남한의 문학사들까지 굳이 주체미학의 형틀에 묶인 북한식 문학사로 획일화시킬 필요야 있겠는가.

 

문학사에도 시대의 소임이 주어진다. 시대정신이나 미학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문학사라는 뜻이다. 각자 자기 시대의 목소리로 해석한 문학사를 읽으려 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문학사 아카이브에는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남한의 문학사들과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의 문학사()가 그들먹하게 들어차겠지만, ‘문학사 서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그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책을 멋지게 만들어주신 보고사 김흥국 사장님과 편집부 이순민 선생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패기 넘치는 교수로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에 입성한 큰 아이(경현)와 현대건설에서 훌륭한 기업인의 꿈을 키우고 있는 작은 아이(원정)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건넨다.

 

을미년 한여름

백규서옥 주인

조규익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01.09 18:31
 

스물일곱의 김정은을 보며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스물일곱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중위 계급에 전임강사로 있던 사관학교에서 전역, 곧바로 대학으로 옮겨 간 것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학과 교수들 가운데 최 연장자는 48세의 수필가 신상철 선생이었다. 그 분은 첫 대면의 자리에서부터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48세가 27세를 바라보는 노파심이었을 거라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살짝 불쾌했다. 30 전후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40이 넘은 학생들도 여럿 되던 당시였다. 학생지도가 교수 업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당시 대학의 시니어 교수로서 새파란 내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래도 당시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이치를 다 꿰고 있다는 듯, 마음속에서는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사회와 선배들에 대한 불만이 늘 부글거렸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시국에 대하여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으며, 사관생도들이나 학생들을 만나서는 도사처럼 인생을 논하곤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고 한심하여 저절로 낯이 붉어질 따름이다. 내가 보낸 치기(稚氣) 만만한 젊음을 다 늙어 철 든 지금 생각할 때마다 괜스레 겸연쩍어지곤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당시의 신상철 선생보다 더 나이 든 지금, 30대 초⋅중반의 신임교수들을 보며 부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세상 이치를 모두 꿰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하는 그들의 언행에 슬그머니 미소가 머금어지곤 한다. 어쩌면 그 옛날의 내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니, 교수로도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상당 기간 내 트레이드마크는 ‘젊음’이었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철없던 시절이었다. 허둥허둥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발을 붙인 현실에 대해서는 ‘무대책’의 ‘어린애’에 불과했다. 대학이나 사회에 대하여 약간의 깨달음이 생긴 지금에서야 불끈거리는 '패기’만으로 흘려보낸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

북에서 김정일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즉위’했다고 난리를 피우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본다면, ‘천둥벌거숭이의 나이’가 바로 스물일곱이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란 말은 참으로 희한하다. 국어사전을 펴 보면 ‘두려운 줄 모르고 철없이 덤벙거리거나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말뜻치고 이보다 더 정확하고 재미있을 수는 없다. 글쎄, 한 고을의 이장을 하려 해도 많은 관록과 나이가 필요할 텐데. 아무리 찌그러져 가는 북한사회라 해도 겉모습은 분명 ‘나라’인데, 괜찮을까. 요즘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며, 새삼 내 ‘스물일곱 시절’을 반추해보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을 거쳐 오면서 그 기세 높던 ‘북조선 사람들’의 기를 송두리째 죽여 놓았으니, 누구라서 찍소리 한 마디라도 내뱉겠는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어찌 능구렁이, 살모사, 고슴도치 들은 없을 것이며,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인들 어찌 없으리. 과연 ‘그 어린 것’이 그 험한 계곡과 능선들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내가 그 때 그래 왔듯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뛰다가, 게도 구럭도 모두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팔자’라고,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북쪽에서 새로 즉위한 ‘어린 왕’을 걱정하는 내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를 고스란히 우리가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게 심히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

그래도 내 스물일곱 시절엔 너그럽게 훈수해주던 선배들이 있었고, ‘절에 간 새댁’처럼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편했다. 가끔씩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자존심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와해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북쪽의 ‘스물일곱’이 팩 돌아서 어느 순간 ‘핵단추’라도 누른다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야 고작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가 200여명 남짓의 학생들을 상대하던 보잘 것 없는 교수였지만, 그 친구는 무시무시한 ‘대장’ 계급에 북조선 인민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분명 그와 내가 같은 급의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렷다? 그러니 우리 모두 휘발유통 안고 장작불 앞에 앉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김정일은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을까. 그곳이 아무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지만, 스물일곱이 갖는 의미를 모를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아버지의 입장에 서면, 가업을 물려 줄 자식이 오십 줄에 들어서 있은들 마음이 놓일 일은 아니리라. 하물며 삼십도 못 된 자식에게 기울어가는 가산을 맡기고 떠나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 더욱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 상황이 가련하고 딱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 ‘스물일곱의 아프면서도 영광스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내 판단이다. 그동안 바짝 조였던 정신을 좀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유유자적하고 싶었는데, 다 늙은 지금 새삼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슬퍼짐을 금할 수 없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01.03 08:10

2011년=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


                                                                                                    조규익
                                                                        
 지난해의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만큼 최근 들어 우리의 현실을 각성시켜 준 사건들도 없었다. 북한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그간의 도발들이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안보 현실의 추상화'에 기여했다면, 이번 사건들은 우리에게 '안보 현실의 문제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공허한 '짝사랑'에 불과했는가를 만천하에 드러낸 동시에 반사적으로 우리의 체제나 대비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사건들이다.


 그런데 두 사건의 바탕에는 간단치 않은 국제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과 미국은 서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했고, 이어 우리 군은 포격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정례적 사격훈련을 재개했다. 이 훈련을 트집 잡아 북한은 보복타격의 협박을 공언했고, 연평도 포격사건의 책임소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던 중국과 소련이 들고 나서서 사격훈련을 저지하려 했다. 심지어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한 국가가 자기 영토 안에서 실시하는 정례적 훈련'까지 포기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이사국들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북한 편을 들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의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적 역학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또 한 가지 공교로운 일은 한국과 미국의 공조로 연평도 포격사건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응급대비를 하는 와중에, 미뤄두었던 '한미 FTA'의 원안이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타결된 점이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한미 FTA'를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되도록 한 지렛대로 작용했음은 뻔한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남한에 의한 통일국가가 출범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껄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북한을 어떻게든 떠받쳐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들 나라의 최고 전략이다. 더욱이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 대화의 재개에 합의할 것으로 관측되고, 그간의 강성 기조를 바꾸어 6자회담의 수용을 암시한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언급을 미루어 본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주판알 튀기기가 이미 본격 가동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그것대로 그들에게는 기회이고, 단순한 분쟁으로 끝난다 해도 한국에 고통을 주면서 통일한국의 출범을 막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이익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적인 바보 역할을 하는 것이 남북한의 권력집단이고, 희생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이다. 자국 내 이권을 담보로 식량이나 물자를 구걸하러 뻔질나게 중국을 찾는 김정일 집단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이익 확보에 바쁜 미국이나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남한 또한 떳떳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의 안이했던 자세를 고쳐 안보 분야의 '주적 개념'을 손 보고, 북한 주민들을 회유하는 방향으로 통일정책을 수정한다 해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구조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이 불시에 붕괴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흡수통일 또한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입장에서야 분단구조의 고착화를 원할 텐데, 그 구조가 지속되는 한 안보 불안은 상존할 것이다. 이런 쉽지 않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 모두 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김정일 사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탈북자들을 관리하는 현행 체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정비하여 통일 이후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주어야 한다. 주변 열강들의 이해에 휘둘리는 것이 남북한의 현재 모습이다. 남북통일의 대전제는 민족의 자존심이다. 2011년을 남북한이 함께 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는 것은 남북한이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지속되어 온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04.11 09:00

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
                 
                                                       
                                                                                                                        조규익

유럽여행 중 들른 하이델베르크. 그곳 대학가에서 낙서와 관련하여 기가 막히는 장면을 만났다. 그곳 학생감옥의 벽은 수감되어 있던 학생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예술이었고, 멋진 관광거리였으며, 소중히 관리되고 있는 그곳의 재산이기도 했다. 휘갈겨 쓴 낙서들과 제멋대로의 그림들에는 학생들의 패기와 울분, 낭만과 치기(稚氣)가 듬뿍 배어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몹시 부끄러운 체험이었다. 낙서예술의 원판에서 한글 낙서들을 다수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본글자도 중국글자도 영어도 없었다. 오직 한글만이 당당하게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한 층 위로 올라가자 벽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Please do not write on the wall
▪Bitte nicht auf die wände schreiben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굴지(屈指)의 경제 대국이 되더니 드디어 우리의 글자까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도다. 저것 보라! 저들이 드디어 우리 한글의 우수성까지 깨닫게 되었구나. 비록 ‘낙서’를 ‘낚서’로 잘못 쓰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그 경고문 앞에서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었다. 그 경고문 속엔 그렇게 많이들 다녀간다는 일본인들의 글자도, 직전에 이곳을 휩쓸 듯이 떼거지로 빠져나간 중국인들의 글자도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이니 독일어 경고문이야 당연하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 경고문이 붙은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독일어와 영어를 빼곤 한국어만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이나 한국어가 이곳 독일에서 제 2의 세계 공용어로 격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유독 한국인들만 툭하면 그곳에 낙서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당국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못 말리는 낙서벽(落書癖). 제대로 된 기록들은 남기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어딜 가나 그릴 데 못 그릴 데 가리지 않고 괴발개발 낙서들을 휘갈겨댄다. 당당하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말이다. 그래 그곳에 왔다 간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더냐? 제 이름 곁에 애인 이름까지 써놓곤 큼지막하게 하트를 그려놓은 녀석까지 있었다. 성당이나 교회의 벽에도, 성벽에도 우리의 한글은 멋진 자태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낙서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심지어 가만히 있는 산 위의 바윗돌까지 쫓아다니며 낙서를 하는 민족 아닌가. 금강산 관광이 본격화 되면서 직접 가서 보거나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의 낙서벽은 북쪽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말이다. 경치 좋은 산 위의 거대한 바위에 무슨 놈의 낙서들은 그리도 많이 휘갈겨 대는지, 통탄스러울 정도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만세!’ 매일 방송이나 신문들을 통해서 밥 먹듯, 아니 숨 쉬듯 뱉어내는 문구들 아닌가. 구역질나도록 유치찬란(幼稚燦爛)한 어구들을 고결(高潔)한 자연 속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파놓을 건 무언가. 금강산의 그 아름다운 바위에 새긴 낙서들. 그것 역시 못 말리는 ‘낙서벽의 소산’ 아니고 무엇이랴.


글자나 글은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써서는 안 될 곳에 쓰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한 문구라 해도 그건 낙서에 불과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함부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승지의 바위에 새겨진 시구들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러나 그건 그 경치에 합당한 문구,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문구들이다. 쓰는 사람 자신의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매한 후손들이 이 경치를 보고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그것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경애하는 민족의 태양’ 운운하는 유치찬란한 수준의 낙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기가 만들었거나 자기에 관한 기록들을 모조리 파기해 왔다.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통령의 통치기록은 한 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정작 그런 것들은 파기하면서 각처에 개발 새발 남겨둔 친필 휘호들은 자랑스레 남겨두려 한다. 그럴 경우 그것들 역시 낙서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사실은 나도 기록을 좋아한다. 어딜 가도 항상 ‘기록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허무함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나 여행의 감동은 하루 이틀 만에 슬금슬금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삶의 피곤함이나 여행 중의 괴로움, 혹은 험한 기억들만 괴물처럼 남는다. 나는 그게 싫어서 꼬박꼬박 적어두곤 한다.

도망치는 일상의 기억이나 여행의 추억들을 붙잡아매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사진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사진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잠시의 여행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길고 복잡한 여행에서 단편적인 정지화면(停止畵面)만으로 추억을 되살릴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한사코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사코 기록하려는 일 또한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척도를 갖고 있다. 모든 행위들 역시 그로부터 나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내가 휘갈겨 대는 책이나 논문, 단상들 모두가 한갓 낙서벽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나그네길이라면, 그 여행 중에 지니고 다니며 유념해야할 하나의 화두(話頭)가 있다. 쓰고 싶을 때마다 반드시 떠올려야 할 경구(警句)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낙서인가 아닌가?’  

2007. 2. 2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