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9. 18:31
 

스물일곱의 김정은을 보며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스물일곱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중위 계급에 전임강사로 있던 사관학교에서 전역, 곧바로 대학으로 옮겨 간 것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학과 교수들 가운데 최 연장자는 48세의 수필가 신상철 선생이었다. 그 분은 첫 대면의 자리에서부터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48세가 27세를 바라보는 노파심이었을 거라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살짝 불쾌했다. 30 전후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40이 넘은 학생들도 여럿 되던 당시였다. 학생지도가 교수 업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당시 대학의 시니어 교수로서 새파란 내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래도 당시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이치를 다 꿰고 있다는 듯, 마음속에서는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사회와 선배들에 대한 불만이 늘 부글거렸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시국에 대하여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으며, 사관생도들이나 학생들을 만나서는 도사처럼 인생을 논하곤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고 한심하여 저절로 낯이 붉어질 따름이다. 내가 보낸 치기(稚氣) 만만한 젊음을 다 늙어 철 든 지금 생각할 때마다 괜스레 겸연쩍어지곤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당시의 신상철 선생보다 더 나이 든 지금, 30대 초⋅중반의 신임교수들을 보며 부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세상 이치를 모두 꿰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하는 그들의 언행에 슬그머니 미소가 머금어지곤 한다. 어쩌면 그 옛날의 내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니, 교수로도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상당 기간 내 트레이드마크는 ‘젊음’이었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철없던 시절이었다. 허둥허둥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발을 붙인 현실에 대해서는 ‘무대책’의 ‘어린애’에 불과했다. 대학이나 사회에 대하여 약간의 깨달음이 생긴 지금에서야 불끈거리는 '패기’만으로 흘려보낸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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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김정일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즉위’했다고 난리를 피우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본다면, ‘천둥벌거숭이의 나이’가 바로 스물일곱이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란 말은 참으로 희한하다. 국어사전을 펴 보면 ‘두려운 줄 모르고 철없이 덤벙거리거나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말뜻치고 이보다 더 정확하고 재미있을 수는 없다. 글쎄, 한 고을의 이장을 하려 해도 많은 관록과 나이가 필요할 텐데. 아무리 찌그러져 가는 북한사회라 해도 겉모습은 분명 ‘나라’인데, 괜찮을까. 요즘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며, 새삼 내 ‘스물일곱 시절’을 반추해보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을 거쳐 오면서 그 기세 높던 ‘북조선 사람들’의 기를 송두리째 죽여 놓았으니, 누구라서 찍소리 한 마디라도 내뱉겠는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어찌 능구렁이, 살모사, 고슴도치 들은 없을 것이며,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인들 어찌 없으리. 과연 ‘그 어린 것’이 그 험한 계곡과 능선들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내가 그 때 그래 왔듯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뛰다가, 게도 구럭도 모두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팔자’라고,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북쪽에서 새로 즉위한 ‘어린 왕’을 걱정하는 내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를 고스란히 우리가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게 심히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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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스물일곱 시절엔 너그럽게 훈수해주던 선배들이 있었고, ‘절에 간 새댁’처럼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편했다. 가끔씩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자존심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와해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북쪽의 ‘스물일곱’이 팩 돌아서 어느 순간 ‘핵단추’라도 누른다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야 고작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가 200여명 남짓의 학생들을 상대하던 보잘 것 없는 교수였지만, 그 친구는 무시무시한 ‘대장’ 계급에 북조선 인민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분명 그와 내가 같은 급의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렷다? 그러니 우리 모두 휘발유통 안고 장작불 앞에 앉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김정일은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을까. 그곳이 아무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지만, 스물일곱이 갖는 의미를 모를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아버지의 입장에 서면, 가업을 물려 줄 자식이 오십 줄에 들어서 있은들 마음이 놓일 일은 아니리라. 하물며 삼십도 못 된 자식에게 기울어가는 가산을 맡기고 떠나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 더욱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 상황이 가련하고 딱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 ‘스물일곱의 아프면서도 영광스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내 판단이다. 그동안 바짝 조였던 정신을 좀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유유자적하고 싶었는데, 다 늙은 지금 새삼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슬퍼짐을 금할 수 없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