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5. 22. 22:13

 

2021. 5. 20. 오후 2. ‘월곡고려인문화관의 감격스런 개관식이 열렸습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주택가 한 복판에 숨듯이 자리한 문화관의 개관식에 다녀왔습니다. 광산구청에 소속된 문화관은 김병학 관장이 25년 간 중앙아시아에 체류하면서 모은, 고려인 관련 역사문화자료들을 모태로 이루어진 공간입니다. 냉전 종식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포함한 해외 한인들은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밀려들고 있지만, 정부는 물론 우리의 지식사회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김병학 관장 같은 선각자가 없었다면, 이곳에서도 이런 쾌거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서 들은 바에 의하면, 광산구에는 현재 6000~7000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인들 뿐 아니라 10여개 종족이 넘는 소수민족 출신들도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이니, 이 작은 지역은 다양한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잠시 동안 거리를 걷다보면, 여러 나라의 글자들로 이루어진 간판들이 예사롭지 않고 식당이나 까페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면면 또한 낯설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단순히 고려인들 뿐 아니라 그들 나라의 원주민들도 고려인들과 함께 들어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김병학 관장. 만나던 첫날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고, 교유를 지속해온 15년 간 그 생각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저는 고전문학을 연구강의해 오던 중 중국 조선족의 문학과 재미한인문학을 만났고, 그 연장선에서 구소련 고려인들의 존재와 문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지답사의 필요에 의해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찾게 되었고, 그 초입에서 만난 인사가 바로 김병학 관장입니다. 2007년 그를 만난 뒤로 우리는 지금까지 15년간 담담한 관계로 우정을 나누어 오는 사이입니다. 그의 자산은 겸손과 집념입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지극히 겸손하고 소박합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먹으면 그만 두지 않는 투지와 집념이 누구 못지않게 강합니다. 사실 중앙아시아처럼 한국 사람이 마음 붙이고 살기에 척박한 지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년을 그곳에서 지내왔습니다. 웬만하면 중간에 그만 두고 뛰쳐나올 수도 있었으련만, 왜 그는 투사처럼 그 긴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을까요?

 

1992년 민간한글학교 교사로 카자흐스탄에 처음 들어갔고, 1995-1996, 2000-2003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재소 고려인 한글신문 <고려일보>의 기자로 일했으며, 알마틔 국립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소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냉전체제가 흔들리던 1980년대 말부터 구소련 고려인 동포들 사이에서 잃[]어버린 모국어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그에 부응하여 광주와 전남 지역의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에 각각 두 개씩의 민간한글학교를 세웠는데, 그것들이 그에게 중앙아시아 체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우리나라 바깥에서 우리의 전통과 언어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민간한글학교 교사에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 관장의 중앙아시아 생활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첫발을 내디딘 곳은 카자흐스탄의 우쉬또베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은 1937년 강제이주 때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짐짝처럼 실려와 부려진 곳이었습니다. 첫 도착자들의 공동묘지가 아직도 처절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곳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고려인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들을 얻어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김 관장은 고려인의 역사와 슬픔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첫 관심사는 고려인들의 언어나 문화였으나, 점차 강제이주를 중심으로 고려인들이 당한 역사적 시련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곳에서 고려인과 공존하고 있는 많은 인종들의 삶 또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문화종교가 다른 민족들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면서 김 관장은 새로운 삶의 양식과 공존의 원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는 고려인들의 언어문화역사를 탐구해오는 한편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시인과 작가로 활동영역을 넓혔고, 러시아 말로 쓰인 시나 산문들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기억나는 것들만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병학 지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문예총서 3, 인터북스, 2009.

아바이, 김병학 역, <<황금천막에서 부르는 노래>>, 인터북스, 2010.

이 스따니슬라브, 김병학 역,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문예총서 5, 인터북스, 2010.

김병학 엮음, <<한진전집>>,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수고 문예총서 12, 인터북스, 2011.

조규익김병학,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 글누림, 2013.

김병학 편, <<김해운 희곡집>>,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학술자료총서 4, 학고방. 2017.

김경천, 김병학유가이 콘스탄틴 공역, <<경천아일록 읽기-김경천 장군의 전설적 민족해방 투쟁론(한글판러시아어판 합본>>,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학술자료총서 5, 학고방 | 2019.

 

이제 막 개관된 월곡고려인문화관은 우리 동포가 해외로 나가 보존해오던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자료의 형태로 갖고 돌아와, 이 땅의 우리에게 보여주는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지역의 동포들을 포함한 해외 동포 문학관으로 확대될 단초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월곡고려인문화관과 김병학 관장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21. 5. 20.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Posted by kicho
알림2012. 4. 16. 18:17

 

 

한국문예연구소 논문집 <<한국문학과 예술>>(9집) 출간!!!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반년간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9집을 출간했다. 이번 호에는 “1990년대 이후 패러다임과 문학지형의 변화”라는 주제 하에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소설적 형상화」(이경재), 「1990년대 이후 한국 연극의 변화」(백로라), 「윤대녕 소설의 노스탤지어 미학 : <<은어낚시통신>>을 중심으로」(백지혜), 「멜랑콜리 시학」(류신), 「현대시에서의 그로테스크」(이해운), 「이미지에서 서사로, 악몽에서 일상으로-편혜영 소설의 변화와 2010년대 소설의 향방-」(서영인) 등 6편의 특집논문과 1편의 일반논문[「조선조 文宣王樂章 연구」/조규익]을 실었고, 「중국 석학이 바라 본 지난날의 우리 모습-<<해동삼유록>>(위욱승 지음)을 읽고-」(소재영), 「난해한 선천역학의 닫힌 문 열기-<<소강절의 선천역학(고회민 저/곽신환 옮김)>>을 읽고-」(조희영), 「한 식민지 엘리트 군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경천아일록>>(김경천 지음/김병학 옮김)을 읽고-」(김기철), 「발로 쓰는 학문태도의 정수-<<동아시아 문화 교류론>>(소재영 지음)을 읽고-」(김태준), 「사행록 텍스트 다양하게 곱씹어보기-<<조선시대 사행록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정영문 지음)를 읽고-」(한태문) 등 5편의 서평과 자료 및 자료해제[「가사로 풀어낸 조선왕조의 이면사-박순호 본 <한양가(1)> 소개-」]를 실었다. 지금까지 <<한국문학과 예술>>에는 국내외 석학들에 의해 작성된 해당분야의 주목할 만한 논문들과 서평들, 해제들이 실림으로써 한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다.

 

 

Posted by kicho
알림2012. 3. 25. 08:54

<경천아일록> 번역 및 정리 후기


책 <경천아일록>을 정리한 김병학입니다. 저는 1992년에 카자흐스탄에 들어와 민간한글학교 교사, 알마틔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재소고려인 신문 고려일보 기자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소고려인과 관련된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천아일록>을 정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도,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사에 학문적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0년 봄에 김경천 장군의 후손이 사는 카자흐스탄 까라간다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김장군의 막내딸 김지희 할머니와 김장군의 외손자 김 예브게니씨로부터 일록의 정리를 부탁받았고 그 이후 최 아리따 역사연구가(이 책에 추천의 말을 쓴 분)로부터도 거듭거듭 강력한 정리요청을 받았습니다.

시급히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1년 반을 거절하다가 결국 2011년 가을에 정리 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제 능력이 받쳐주지 않아 엄청난 공력을 들여야 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그렇게 작년 가을과 겨울에 집중 작업을 벌여 가까스로 <경천아일록>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천 장군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가슴 벅차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김경천 장군이나 연해주 한인독립운동사를 깊이 있게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육신은 힘들었지만 참으로 충만한 가을과 겨울을 보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다른 책들도 많이 그러하겠지만) 부족하거나 미비한 부분들이 있고 앞으로 더 채워 넣어져야 할 곳들이 생겨나리라 생각합니다. 김경천 장군을 연구하시는 여러 선후배 연구자분들께서 이 작은 결과물을 딛고 올라서서 훨씬 크고 훌륭한 결실을 맺어주실 거라 믿습니다.

김경천 장군과 관련된 저의 작업은 일단 이것으로 끝난 듯합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저는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사나 김경천 장군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지식을 축적해오지도 않았고 탐구에 오랜 시간을 바쳐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며 또 무리하게 더 진행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일은 누구도 모르는 지라 혹 새로운 여건이 생겨 다시 이와 관련된 일에 매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내리는 판단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이 책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28페이지 러시아어로 된 <추천의 말>에 두어 군데 오자가 보이는데 수정하여 전문을 첨부합니다.

김병학

***

Вступительное слово

В книге 《Увлечение национальным духом》 писателя Ли Герона

из Киргизии я прочитала цитату взятую им из древней летописи

корейского народа 《САМ ГУК САГИ》: 《Для того чтобы достойно

завершить историю одного дома и передать ее десяткам тысяч

поколений, чтобы она могла светить подобно солнцу и звездам,

для этого поистине нужны все три великих совершенства. Имеется

в виду талант, ученость и проникновение, из которых первое

означало способность к историческому познанию, второе-обширные

знания и начитанность, а третье-умение отличить правое от неправого,

истину от лжи.》

Все перечисленные совершенства есть у писателя и поэта Ким Бен

Хака. Он не только завершит историю одного дома Ким Ген Чена,

полководца на белом коне, который возглавил разгром и изгнание

японских самураев с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в России в 1922году, Ким

Бен Хак поможет мне построить еще и историю корейцев Дального

Востока России, депортированных в 1937г. в Казахстан. То есть,

писатель и поэт Ким Бен Хак поможет мне основать в Республике

Корея историко-этнографический музей корейцев России и Казахстана

имени Ким Ген Чена.

Да благословит всех нас Господь!

1. Внучка отца Ивана (Иоанна) поселка Синан чон гор. Владивостока,

который подарил полководцу Ким Ген Чену из своего табуна белого

коня.

2. Лауреат международной корейской премии в области

документальной культуры, в номинации фото. Сеул, 2004г.

А. В. Цой

Posted by kicho
알림2012. 3. 2. 13:59

  <이번에 발간된 책 <<경천아일록>> 표지>

  <김경천 장군의 아버지 김정우. 그는 35살의 늦은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다.(1900-1908년)>

  <1921년 3월 연해주 공산당 지역중앙위원회 고려인 부서의 제안으로 아무르 주 크라스노야르 마을에서 개최된 연해주 빨치산 활동가들의 제1회 모임. 여기에서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을 통합하여 연해주 인민혁명군 소속으로 합병시키자는 결의가 나왔다.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경천. 당시 김경천은 만주에서 연해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별다른 전투를 치르기 전이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 또 공산당원이 아닌 탓에 맨 끝줄에 서있다. 하지만 이듬해 여름에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가 그를 뽀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정도로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을 떨쳤다.둘째 줄 왼쪽부터 첫 번째는 창의회에서 활약한 안희재(1885-1943), 두 번째는 나중에 선봉신문 농업부장을 역임한 황동훈(1903-1938), 세 번째는 연해주 한인독립운동 지도자 이동휘(1873-1935), 네 번째는 한인 지도자로서 소비에트 당국에 한인의 권리를 적극 주장했던 한명세, 여섯 번째는 1930년대 뽀시예트 구역 당서기장을 역임한 김 아파나시, 셋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1924년 니시 고려사범학교, 1931년 해삼고려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이듬해 조선극장 창립에도 관여하는 등 한인 문화교육부문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만금, 넷째 줄 왼쪽(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는 중국과 한국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채 그리고리(1891-1926), 맨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는 제76 고려인 포병부대 정치교육장교를 역임한 김광택(1898-1957)이다.


  <간첩죄로 체포된 김경천 장군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유형소에 들어와 머리를 깎이기 전(1939년)>

  <간첩죄로 체포된 김경천 장군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유형소에 들어와 머리를 깎인 후(1939년)>

  <1918-1922년 연해주 한인빨치산 군인들의 복장. 김경천 부대의 부대원들도 이와 똑같은 복장을 착용하고 전투를 치렀다>.

     <김경천 장군의 자식들. 앞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맏딸 지리, 셋째딸 지란, 막내딸 지희, 맏아들 수범>



연해주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의 일기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 출간!!!

연해주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의 일기 <<경천아일록>>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1권으로 출간되었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 장군의 본명은 김현충(金顯忠)⋅김광서(金光瑞)이며, 후에 신팔균⋅지청천과 함께 별명으로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김응천(金應天) 등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김 장군의 아버지인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 일본 육사를 제 23기로 졸업하고 도쿄에서 기병 장교로 근무하다가 1919년 기미 독립 선언 직후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김경천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 총사령관으로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으며, 그해 말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1922년 이후 블라디보스톡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하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 하에서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39년 재차 체포되어 두 차례 복역했다.

이 일기의 번역 및 정리자 김병학 선생은 이 책 출간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제시했다.
 첫째, <<경천아일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이후 전투에 참가한 군 지휘관이 현장에서 쓴 유일한 일기다. 현대적 의미의 최고급 군사전문가 중 한 사람인 김 장군의 지략과 용맹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어, 동서양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둘째,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친일유산의 청산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김 장군의 행적이야말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셋째, 이 일기가 국내 역사학자들의 단편적인 논문에만 인용되고 말기에는 그의 삶 자체가 너무나 눈물겹고 장대하고 아름답다.
 넷째,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김 장군의 후손과 뜻 있는 고려인들이 이 일기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일기를 러시아어로 읽으려면 먼저 번역이 가능한 현대 한국어로 정리되어야 한다. 국한문에 드문드문 알아보기 어려운 문체로 기록된 <경천아일록>이 한국에 알려진지도 벌써 다섯 해가 넘었는데, 그 분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의 독립운동사가 보완되고, 더욱 새로워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강호제현의 일독을 고대한다.


                        2012. 3.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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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