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25. 15:54

정치와 예술의 금도(襟度)

-표창원 의원께-

 

 


                          에두아르 마네-올랭피아- 1863년

 

 

 

의정활동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신지요?

 

국회의원이 되시기 전, 경찰대 교수이자 프로파일러로서 늘 주요 사건이 터질 때마다 큰 방송들의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시어 조언을 하시던 의원님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저렇게 탁월한 전문가들 10명만 있다면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 라는 비원(悲願)아닌 비원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조만간 좀 더 큰일을 하는 직책으로 발탁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짐작하던 차, 아니나 다를까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 빠르게 나서서 의원님을 영입했지요. 제 취향이 아닌 정당으로 영입되어 가시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서운함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정당 특히 야당의 격이 약간은 높아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수족이 모두 잘린 지금은 참 묘한 시점입니다. 판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집권당으로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 할 만큼 절망과 수치 속에 숨죽이고 있는 반면, ‘다음 대통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확실한 승리의 아지랑이에 휩싸여 있는 쪽이 더불어민주당이지요. 여당이나 대통령의 입장에서야 입이 천 개라 한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기라성 같은 율사들을 쓰러져 있는 대통령 앞에 대항마로 포진시켜 놓았지만, 무슨 수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아내어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아시지요? 천하장사인 초나라의 항우(項羽)와 필부출신의 한나라 유방(劉邦)이 쟁패하던 상황이었지요. 항우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날. 날랜 장수 범증(范增)마저 떠나고 동쪽으로 밀려가던 중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초나라 노래. 한신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지요. 그 상황에 절망한 항우는 결국 오강(烏江)으로 뛰어들어 자결하고 말았다는 옛 이야기 말입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등에 업은 야당의 공격에 지리멸렬해 있는 여당이 바로 운명의 날을 향해 가는 항우 군의 모습이라 할까요?

 

상승과 하강이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상황을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하강의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하고, 그 반대로 하강하다가 상승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다반사(茶飯事)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극적인 사변(事變)이나 외적인 충격이 있지 않고서야 바야흐로 방향을 잡은 국면이나 추세가 시간을 앞당겨 바뀌긴 어렵지요. 음양(陰陽)이 교차하는 것은 세상사의 이법이고,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영웅호걸이라 해도 그런 음양의 추세를 갑자기 뒤집기는 불가능한 게 우주의 이법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당의 잠룡군(潛龍群)에서 차기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겁니다. 말하자면, 야당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희색(喜色)을 억누르며 표정관리하기 어렵고, 혹시나 이 흐름이 바뀔세라 시간의 더딤을 한탄하고 있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때를 기다려온 야당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지요? 이런 꽃놀이 판에서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는 것은 요즘 똘똘한 초등생들도 아는 행동수칙 아닌가요? 이제 열매를 손에 쥐었다고 방심한 것일까요? 열매를 딴 뒤에 벌어질 논공행상을 대비한 것일까요?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런 공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조급한 영웅심이 발휘된 것일까요?

 

국회 건물 안에서 펼친 대통령 나체화 전시회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하며 참으로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 이틀 연속 혀만 차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평생 문학을 공부하며 예술 쪽도 곁눈질을 해왔습니다만, 그걸 만들어놓고 예술의 자유, 창작의 자유운운하시는 모습을 보며, ‘소가 웃다가 코뚜레 부러지는 일이 바로 여기서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예술이 대중의 미학을 선도한다고는 하나, 저같이 우매한 민중에게 그것도 예술임을 강변하려 한다면, 솔직히 번지수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걸 국회로 끌고 와서 난장을 벌인 장본인이 좋아하던 표 의원님이었다니!

 

우리 현대사의 고비를 목격하고 느끼며 나이를 먹어 온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으로서,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심한 내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치 풍자와 예술을 가장한 폭력행위까지 국회의사당에서 스스럼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제까지 제가 공부해온 미학의 상식과 바탕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풍자나 은유가 필요하거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권력의 폭압으로 민중이 할 말을 하지 못할 때뿐입니다.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대통령을 욕하는 지금, ‘풍자예술을 통해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다는 건지요?

 

사실 예술에 대한 해석이나 미학에 대한 논의도 보편적 상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현 대통령의 얼굴과 150여년 전 마네의 작품을 합성하여 만든 작품 아닌 작품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그 자체가 풍자예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단순한 분풀이 이상의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의원님의 판단착오로 가능했던 그런 행사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손해이고 누구에게 이득인지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이 매우 저급하고, 행동거지 또한 너무 경망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점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멋진 지식인이자 유능한 전문가로 알아 왔던 의원님이 그 동네에 들어간 이후 그렇게 표변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의원님을 거울로 삼아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우리 스스로 다짐할 수만 있다면, 이번의 사건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중언부언(重言復言)한 제 말씀이 부디 의원님께 불쾌감을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8. 7. 22:04

중국에 가려는 여섯 명의 야당 초선의원들에게

 

 

 

시경소아(小雅)편의 상체(常棣)라는 시가 있다.

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兄弟䦧于牆   형제가 담장 안에서는 싸우지만

外禦其侮      밖으로는 (힘을 합하여)남의 업신여김을 막는다네

每有良朋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烝也無戎      돕는 바가 없도다

 

지금 이 시를 읽는 마음이 곤혹스럽다. 어쩜 이렇게 우리나라의 형편을 잘 꼬집었을까.

우리는 같은 편임에도 늘 싸워왔다. 오히려 강한 외국에 붙어 제 민족을 못살게 굴어온 예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역사상 우리가 저질러온 편싸움(당파싸움)을 거론해 왔고, 당파싸움으로 기울어지는 나라(한국역사교육연구회, 한국가우스)라는 책도 이왕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까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싸드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정부가 싸드 배치 계획을 발표하고 나서 지역주민들은 반발하고 있으며, 이때다 싶은 일부 인사들이 주민들을 부추기며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급기야 누구의 표현대로 철없는야당의 초선의원 여섯 명이 중국에 가겠다고 나섰다. 이미 중국은 싸드라는 것을 빌미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북한의 핵을 막아 달라 간청해왔건만, 그간 손 놓고 있었거나 암암리에 방조하고 있다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마저 뺏으려 드는 중국이다. 동맹체제의 바탕 위에 배치하고자 하는 싸드는 한미 양국의 합치된 현실분석의 소산이다.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미국에는 한 마디 못하면서 대한민국에는 완력으로 나오는 중국의 행태를 전형적인 깡패행위로 보는 입장은 이미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덩치는 말할 수 없이 크되, 대의(大義)나 명분(名分)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지금 모습이 개탄스럽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그 글의 핵심이었다.

 

북한이 핵을 만들어 날이면 날마다 위협을 가하고 있는 이상 비록 완전치 못하지만 싸드라도 배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 같은 장삼이사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싸드를 안고 살아가게 될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

는 것은 혹 그럴 수 있다 해도,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한 야당들이나 일부 시민단체,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안도 없이 나서서 무조건 정부를 성토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편싸움의 반복이거나,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여적(與敵) 혹은 이적(利敵)’ 행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언필칭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주문을 남발하지만, 그간 우리가 해온 일이 외교 아닌경우가 있었던가. 그간 벌여온 외교로 되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우리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소한의 방패라도 마련해야 곧 날아올 깡패의 주먹을 일부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 방비마저 하지 말라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여 나라를 내주거나 처참한 파괴를 감수하라는 말과 같으니, 과연 그들을 우리 편으로 볼 수 있겠는가.

 

대안도 없이 이런 기회를 정권쟁탈의 호기로 잡아, 무모한 공격이나 가하고 있는 거라면, 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하긴 마찬가지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최소한 나라를 구하는 문제에서만큼은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이 옳다. 성주를 찾아가 격앙된 주민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고, 공산당의 명령 하에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에 찾아가 싸드 배치를 반대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은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란 말인가. 중국이 언제 우리를 도와 북한을 꿇어앉힌 적이 있으며, 앞으로 그렇게 할 거라는 조짐이라도 내 비친 적이 있는 나라인가.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은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품에 넣어 중화제국을 재현하겠다는 포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를 품에 넣으면 일본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고,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면 미국도 힘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을 계산에 넣고 있다는 점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미 대미(對美) 병참기지로 굳어진 북한과, 경제로 옭아놓은 남한까지 집어 삼키면, 중국은 G2 중의 하나가 아니라 곧바로 G1에 등극하여 이 지역을 쥐고 흔들며 타고난 '깡패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

 

정책의 같고 다름이나 장단점을 놓고 나라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사실 치열한 논쟁과 다툼을 통해 최선의 길을 찾는 게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나 깡패가 문 앞에 서서 협박을 하는 지금. 서로 패거리의 소리(小利)를 탐하여 싸워야 옳은가. 작은 몽둥이라도 함께 만들어 밀려와 있는 적을 상대해야 될 것 아닌가. 형제끼리 담장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밖에서 우리를 업신여길 때, 최소한 그들의 편을 들어 동족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뜻을 합해 바깥의 적과 싸워, 우선 내 집을 지키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국회의원이란 막중한 자리를 차고앉은 여섯 명의 초선들이 당장 내일 중국으로 달려간다는데, 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과연 강한 외국에 빌붙어 우리 조상들이 저질러온 수치스런 패싸움의 과거를 반복할지, 아니면 밤중에라도 자신들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 볼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8. 16:33

우리 시대 교수들의 자화상

 

 

 

#아침에 조교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교수들에게 지급한 노트북 컴퓨터의 사진을 찍어내라는 학교 본부의 공문이 내려왔단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지급받아 써온 세월이 오래지만, 사용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건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 어쩌면 학교에서 지급받은 컴퓨터마저 사적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교수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 해 모처럼 국가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그 사이에 바뀐 규정들 때문일까. 연구비를 집행하기가 아주 까다로워졌고, 그에 따라 기분 또한 묘해졌다. 예컨대, 연구과제 관련 도서를 구입하려면 연구비 카드로 결제해야 하고, 영수증과 거래 명세서는 물론 책의 표지까지 일일이 복사하여 제출해야 한다. 사지 않았으면서도 샀다고 돈을 요구하는 교수들이 있는 걸까. 영수증만으로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병아리 교수 시절. 갓 부임했을 때 인상 좋게 나를 환대해주던 이공계의 호남형 시니어 교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연구비를 수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난 1년 뒤 검찰에 불려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연구비 횡령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시 병아리 인문학 교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1년쯤 뒤 형사처벌과 교수직 파면의 소식이 들려왔고, 또 그로부터 얼마쯤 뒤 작고 소식이 들려왔다. 교수들이 구름 위의 존재들이 아님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선배 교수들에게서 비로소 갖가지 사람냄새들을 맡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연구비에 관련된 교수들의 추문이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군 복무 중인 아들을 연구원으로 허위 등록하고 수천만 원을 용돈으로 지급한 일, 연구원의 인건비를 빼돌려 수억 원을 동생의 통장으로 입금해 편취한 일, 학생 십여 명을 허위 연구원으로 등록하고 수억 원을 빼돌린 일, 연구원들에게 입금되는 수당 중 상당액을 자신의 통장으로 돌려받아 생활비로 쓰다가 들통 난 일, 빼돌린 수억 원의 연구비로 주식 투자를 하다가 발각된 일, 연구비로 집에서 피자를 시켜 먹거나 해외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샀다가 들통 난 일 ...그 수법과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남의 논저를 표절하거나 부정하게 중복 게재하여 연구윤리를 위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려다가 청문회의 그물망에 걸려들기도 했다. 매스컴의 매서운 추적을 따돌리지 못하고 그런 비리가 발각되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 뿐 아니라, 남의 책에 이름만 바꾸어 다시 출판하는 이른바 표지갈이에 참여한 파렴치 교수들 수백 명이 최근 법망에 걸려들기도 했다.

 

#“2015년 굵직한 현안마다 교수들이 안 보였다/부정·비리·불공정평가에도 침묵이대론 안 된다.()내년에도 올해처럼 교수들이 무기력에 빠져 월급봉투만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교수신문>(20151228)의 아픈 지적이다. 교수 집단의 나태와 패배의식을 이처럼 매섭게 꼬집은 글을 근래 목격한 적이 없다. 그나마 교수들에 대한 애정이 눈꼽만큼이라도 남아 있기에 <교수신문>은 이런 고언을 실었을 것이다 

 

***

 

사실, 검찰에 소환되거나 매스컴의 추궁에 답해야 하는 교수들 모두 관행을 방패막이로 들고 나선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회개만으로도 벅찰 텐데, 이른바 물귀신 작전으로 남까지 옭아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물 타기 해보려는 것일까.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선후배, 동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모는, 또 한 번의 파렴치를 자행하는 뻔뻔함을 보라. 물론 교수도 인간, 무엇보다 생활인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속계(俗界)의 범부(凡夫)들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데려다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쓰고자 한 꺼풀 벗겨보곤 진동하는 구린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접하면서, ‘내가 참 그동안 좋은 시절을 보냈구나!’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갖게 된다.

 

대학이 망해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밥벌이를 못하는 젊은이들이 그득그득 쌓이면서 국민들이 대학을 불신하게 되었고, 밥벌이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이나 교수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밥벌이도 못하는 대학이나 학문, 그리고 교수가 과연 필요한가.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제 앞가림이라도 하게 만들려면 대학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 대학을 둘러싼 세상 사람들의 의심과 질타가 이제 정점에 이른 듯하다.

 

그 불신의 핵심적 대상이 인문학인데, 그러나 인문학만 도려낸다고 대학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이공학이나 경영학이 도려낸 인문학의 빈 자리까지 차지한다고 옛 대학의 영화가 회복될까. 사실 국민들이 대학 무용론을 깨달아가면서 등록금의 액수에 대한 저항이 높아져왔고, 설사 등록금이 더 낮아진다 해도 앞으로 대학은 텅텅 비어버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당 학문 분야의 교수들은 스스로 변하기보다 혹시 지금까지 지탱해 온 밥그릇이 날아갈까 봐 전전긍긍한다고 정부의 교육당국자나 대학 본부는 이들에게 눈총을 쏘아댄다. 사정이 나은 분야의 교수들은 궁한 분야의 교수들을 우습게 여기고, 코너에 몰린 교수들은 잘 나가는 분야의 교수들을 경계한다. 그래서 지금 대학은 불신과 반목이 만연한 연옥이고, ‘큰 학자 하나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소시민이나 양산하는 공작소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질타하는 것이리라. 제대로 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없도록 세팅된 지금 대학의 시스템과 의식 아래 큰 학자가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일 것이다.

 

생활인 혹은 소시민! 참 좋은 말이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착하게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 바로 생활인 아닌가. 공적인 돈을 주머니의 용돈처럼 꺼내 쓰려는 교수들, <교수신문>의 질타처럼 할말을 하지 못하고 월급봉투만 바라보는 요즘의 교수들이 존재하는 한, 21세기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대부분의 착한 생활인들보다 몇 단계 아래쪽에 위치한 못난이들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6. 4. 15:16

   대한민국의 재앙

-어떤 국회의원의 말본새를 보며-

 

 

“구설(口舌)은 재앙과 근심의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경구(警句)다. 평원의 필부라 할지라도 잘못 뱉은 말 한 마디가 몸을 망치거든, 하물며 책임 있는 야당의 원내대표야 오죽하겠는가. 저 혼자 망하는 거야 제 업보이니 그럴 수 있다 해도, 공당(公黨)의 책임 있는 자가 막말을 해댐으로써 국가의 일을 그르치고 국격(國格)을 떨어뜨리는 일은 간단히 보아 넘기기 어렵다.

 

언론들의 보도에 의하면, 며칠 전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대통령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다 한다. 사람들이 그 말의 몰상식함을 비난하자, 그게 ‘아름다운 말’이라고 둘러댔다. 오랜 기간 국어 선생으로 살아오고 있지만, ‘호들갑 떨다’는 말이 ‘아름다운 말’이라거나 ‘윗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억지를 난생 처음 접하면서,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다가 ‘공갈하지 말라’는 투의 ‘막말 아닌 막말’로 징계를 내린 공당에서, 명색이 대표가 그보다 몇 배나 심한 막말을 뱉어냈는데도 못 들은 척 하고 있는 그 당 인사들의 수준은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하다. 징계를 받은 그 말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경우는 2년 정도 당직을 정지시켜야 할 수준의 막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막말은 이번뿐 아니다. 둔감한 내가 기억하기에도, 이미 그는 대통령을 ‘그년’으로 호칭한 전과가 있다. 그 때도 그는 그 말을 ‘그녀는’의 줄임말이라고 강변한 바 있다. 미련한 것인지, 교활한 것인지, 참으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인사다. 누구든 같은 대상에 대하여 연거푸 막말을 뱉어대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분노나 반감이 가득 차 있다는 증거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분노조절장애’는 말 그대로 억누르지 못한 마음속의 분노가 반사회적 범죄로 표출되는 경우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 원내대표의 경우는 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가 조절되거나 막말로 표출된, 일종의 ‘분노조절장애’의 결과일 것이다. 그가 막말대신 칼을 들었다면 인명을 살상하는 사고로 드러났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보는 인사들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사례다.

 

나라의 공인으로서 국회의원은 과연 어떤 덕목들을 갖추어야 할까.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것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신중한 언행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신사도’라 할 수 있다. 국가의 법을 만들고 심의하며 통과시키는 국회의원이라면 행동거지나 언사가 최고로 엄정하고 규범적이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툭하면 칼을 빼들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골목깡패’일 수 없기에, 분노가 턱밑까지 치밀어 올라도 그가 내뱉는 말은 절제되고 정제된 모범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나라의 국회의원이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을 ‘년, 놈’으로 호칭하며, ‘호들갑 떨지 말라’는 막말로 비하한단 말인가.

 

훌륭한 조상으로부터 망나니 같은 후손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반대로 별 볼 일 없는 조상들로부터 훌륭한 후손들이 나올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잘못된 경우로 인해 훌륭한 쪽이 본의 아닌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가문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행동거지, 말본새 하나라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혹시 내 행동 때문에 훌륭하신 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욕을 먹게 되지나 않을지, 훌륭한 내 아들이나 손자가 욕을 먹게 되지나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원의 필부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훌륭한 할아버지를 둔’ 국회의원이야 오죽하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2. 31. 13:26

               

轍鮒之急

飽食煖衣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는 보도가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것. 즉 거짓으로 윗사람과 주변사람들을 농락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일에 대하여 딱히 반론을 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 달 초 같은 신문으로부터 올해를 대표할만한 사자성어 두 건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당시 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한 해의 영상을 뒤로 빠르게 돌려보았습니다. ‘지록위마’가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건 너무 싱거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우리네가 ‘지록위마’의 거짓과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있었던가요. 특히 지도층의 가식과 위선, 혹은 ‘갑질’의 행태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 본 적이 있었나요. 지금까지, 아니 지금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지록위마’의 상황을 그러려니 여기며 살아가는 게 속 편한 것이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팔자가 아닌가요. ‘지록위마’가 새삼 올해만의 사자성어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부지급(轍鮒之急)’과 ‘포식난의(飽食煖衣)’ 등 두 가지 성어를 추천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적실하게 나타낸 말이라고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자국) 속의 붕어’ 즉 ‘생존을 위해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할 뿐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물은 먼 훗날에나 필요하다’는 것이 ‘철부지급’의 뜻이고, ‘생활고로 죽어가는 서민들을 살려내는 것이 시급한데,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만 바라보고 있다’는 현실 비판이 그 말의 속뜻입니다. 당장 한 줌의 곡식이 없어 죽어가는 서민들을 바라보며 ‘100년 대계(大計)’를 고창(高唱)하던 그 시절의 위정자들을 장자(莊子)는 한심하게 바라보며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은 비극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당장 이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대체 무얼 쳐다보고 있는 걸까요.

 

‘포식난의’는 <<맹자>> ‘등문공 상편’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서 가르침이 없다면 짐승에 가까워진다[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는 맹자의 일갈(一喝)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가르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이 말의 의미는 온전해지는 것이지요. 국회의원 김현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기내(機內) 패악사건 등 올해 일어난 이른바 ‘갑질 사건’들의 근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은 필수적이라 본 것입니다. 이들은 권력이나 부를 거머쥐고 ‘포식난의’를 즐기는 대표적 부류입니다. 그런데 ‘포식난의’를 즐기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맹자의 말처럼 결국 ‘짐승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지식교육’ 아닌 ‘인간교육’을 말하는데, 그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가정교육’입니다. 1차적으로 김현의 부모나 조현아의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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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철부지급’과 ‘포식난의’를 올해 이 땅에서 근근이 살아온 서민들의 곤경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사자성어로 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새해에는 정말로 정치인들이나 부자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한 모금의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서민들의 급박한 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요즘 종북주의자들로 매도되는 일부 인사들이 그 ‘종북’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철부지급’ 중에서도 최고로 급박한 처지에 놓인 북한 주민들의 삶을 먼저 걱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고, 이 땅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붙어 다니는 ‘무책임’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도 어려운 서민들이 겪고 있는 ‘철부지급’의 상황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엔 서민들이 진정으로 ‘포식난의’를 즐기는 원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