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25. 09:01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백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그간 언론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 들어온 사건이라서 내용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스토리의 전개나 분위기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기득권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조계의 비리가 영화 속 사건의 핵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의 발단 부분에 관심이 컸다. 감독이 좀 더 심사숙고했다면, 대학이나 교수들의 집단 심리를 스토리 전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봉직하던 S대학 입학시험으로 출제된 수학문항이 원천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김명호 교수. 그 지점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학자와 교육자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문제 하나’였지만,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이었다. 동시에 해당 전공의 교수로서는 학문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 순간 관련 당사자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을까. 김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바로잡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실제 일어난 사건처럼 ‘공동체의 대외 이미지 실추’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얼렁뚱땅 넘어 가면서 김 교수를 핍박하는 게 옳았을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진실의 공개나 규명이 공동체의 이익과 과연 상치되는 것인가?’ 등의 두 문제로 압축된다. 결정적 키는 바로 ‘정의’에 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양심 혹은 양식에 달린 문제, 즉 정의와 집단이익 혹은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역력히 보여주는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문제의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할 경우 S대학은 물론 학과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니 일단 덮고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공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교 당국의 그런 판단과 회유에 넘어 간 교수들이 김 교수를 압박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교당국의 회유에 넘어갔든 스스로의 판단이었든, 결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심대하게 손상시킨 일종의 ‘만행(蠻行)’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동료를 비난하며 학교당국의 종용에 따르는 순간 교수들의 내면에서 작동되던 양식이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순간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이 정의(正義)와 도덕적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물음들 가운데 하나[‘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굶주린 선원들’이었으며, 김 교수는 과연 ‘약한 소년’이었는가? 물론 교수들은 학교당국에 의해 채용된 ‘피고용인들’이다.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 바 있지만, ‘교수의 재임용은 학원의 고유권한’이라는 사립학교법에 의한다면, 교수들이야말로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면 ‘밥이 필요하고, 권력의 우산이 필요한’ ‘굶주린 선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켕기기야 했겠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약한 소년’을 잡아먹고도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허울이 양심과 정의의 화살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도덕의 문제가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이 사건에 관련된 교수들이 도덕이나 정의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공준(公準)을 저버린 점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음은 영화를 보며 무의식중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의 공감에서 입증된다. 교수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간 대학 당국의 행위 또한 말할 것도 없이 독재시대에나 통했을 시대착오적 만행일 뿐이다. 일이 불거진 시점에 과감하게 문제를 공개하고 사과했다면, 역으로 그들의 판단이나 행위는 정의와 도덕의 빛나는 기치(旗幟)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늦었고, 아마도 한동안 S대학당국과 그 학과 교수들은 성난 대중으로부터 난타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드높은 꽹과리 소리와 함께 권력에 당하기만 해온 민중의 ‘한풀이’가 이제 시작되려는 지금부터 앞으로 상당기간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 역시 ‘굶주린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교수들 가운데 누가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살짝 보여준 ‘불편한 진실’이다.<2012. 1. 24>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칼럼/단상2011. 2. 13. 12:34

‘말씀의 힘’

 

‘작년에 왔던 각설이’ 올해 또 왔다고 낙산 비치호텔 앞 소나무는 꿍얼거릴 것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낙산 비치호텔의 신앙수양회. 기독교 대학에 20년 넘게 봉직하며 매년 겨울 한 차례 ‘성령’의 폭포수에 몸을 담그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때 뿐이었다. 솔잎 사이로 맑은 바람 빠져 지나듯, 의미 없는 만남의 반복이었다. 습관처럼 차려지는 행사장에 돌덩어리처럼 앉아 있다 빠져 나오곤 하던 지난날들이었다. 정열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라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는 그나마 몰랐다. 쥐꼬리만한 지식과 팽팽해진 자의식이 오만의 근원임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것으로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려니 믿고 지내던 무명(無明)의 시간대였다. 그러나 화살처럼 달려 나가는 시간의 가차 없이 차가운 결을 비로소 느끼게 된 지금. 내게 밀물처럼 찾아왔다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며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말씀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간 독실한 신앙인들을 내심 ‘도그마에 붙들려 자의식을 잃은 한심한 영혼’으로 여겨오지는 않았는가. 옳건 그르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와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융통성 없고 못 말리는 꼴통들’로 슬그머니 비하하며, 나 자신의 ‘중심 없음’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식인의 자유혼’ 쯤으로 합리화해온 것이나 아닌가.

 

***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을 자신의 말로 쉽게 풀어 우매한 내게 전해주려 애쓴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의 ‘말씀’과 만났다. 그 ‘말씀’을 들으며, 어린 영혼들에게 무수한 말을 들려주며 살아 온 내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갔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신봉하던 ‘말의 힘’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힘’이라 했다. 그 분이 지적한 말은 바로 생명을 담은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말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닌가. 말로 밥을 먹고 살면서도 ‘묵언(黙言)’을 숭상해온 내 진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말을 많이 한 날들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허공에 날려버린 ‘한없이 가벼운’ 말들의 펄럭임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불면(不眠)의 밤들을 보내야 했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어떻게 하면 말 안 하고’ 살 수 있을까를 화두로 몇 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아침밥을 먹으며 준비운동을 시작하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준비된 입으로 무언가를 지껄이는 일상이 바로 내 생활이었다.

 

***

 

문제는 진실성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말과 행위가 일치되었기 때문이라고 김 목사는 강조했다. ‘말씀 없는 신비주의’나 ‘말씀 없는 도덕적 행동주의’는 신앙의 겸손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 바리새인들처럼 문자에 얽매여 지낸다면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회복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주일마다 교회에 간다는 것 등등. 마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김 목사는 그간 말에 대하여 갖고 있던 내 콤플렉스를 체험적으로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그 뿐 아니다. ‘말의 힘을 가장 크게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수’라는 그 분의 말씀은 유일한 수단이면서도 말의 권능을 부인해오던 내게 충격이었다. ‘교수의 필수적인 능력은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이라는 그 분의 말씀은 내게 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는데, 그 말 속에는 ‘교수들 능력이라 해봤자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 뿐’이라는 속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계명은 크게 보아 요약인데, 그것을 또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김 목사의 설명이 자신의 말을 듣고 가졌을지도 모르는 교수들의 부끄러움을 약간 덜어준 효과가 있긴 했으나, 그래도 부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 그간 내가 해온 일이라야 텍스트의 요약이나 이론의 부연 혹은 생명 없는 말의 전달밖에 더 있었겠는가. 그걸 반복하면서 지식사회의 일원이랍시고 오만에 젖어온 존재가 바로 나 아닌가. 남들이 토해 내는 ‘생명의 말씀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생명 없는 말의 허위’를 진실로 강변해온 것이나 아닌가.

 

***

 

그동안 나는 말의 겉만을 보았지, 말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서, 인간은 언어의 주택 속에 산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조차도 그다지 절실하게 여겨오지 않던 나인지라, 목사님들이나 선생들이 목청껏 외쳐대는 ‘생명의 말씀들’을 그저 귓가에 스치는 바람결로 들어온 것이나 아니겠는가.

오늘 풍광 좋은 낙산의 해변에서 김목사님의 절절하신 말씀을 들으며 바람처럼 흘려보낸 내 풋풋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내 젊은 날의 오만을 조상(弔喪)하며... <2011. 2. 10.>

조규익(숭실대 교수)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안녕하세요. 초보 블로거입니다. 자주 들리겠습니다.

    2011.02.13 16: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0. 11. 24. 15:36

 *모처럼 가면을 벗고 육두문자 비스름한 푸념 한 마디만 풀어놓아볼까?
                          


‘어려움을 당해봐야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들 치고 갑작스레 닥친 난관 앞에서 허둥대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家長),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首長),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들을 갖고 산다. 그 수가 하도 많아 어느 것이 내 얼굴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서 그 얼굴들은 대부분의 경우(아니 모든 경우) 진면(眞面) 아닌 가면(假面)들이다.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는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말이 되었지만, 원래는 심리학에서 사용되어온 학술적 용어다. 이 말은 에트루리아의 어릿광대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하거나 타인 혹은 주변세계와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칼 융은 말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나도 많은 가면을 갖고 있다. 자상한(혹은 엄하고 곧은) 아버지나 남편의 얼굴로 집에서 쉬다가, 출근을 위해 차에 시동을 걸면 그럴 듯한 가면으로 잽싸게 바꾸어 쓴다. 강의실 문 앞에 서면 자못 근엄한(?) 교수의 가면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에서는 악동의 가면을 쓴다. 그러니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가면을 진면으로 착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실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아놓고 후회들을 한다. 그의 가면을 보고 뽑았는데, 나중에 언뜻언뜻 보이는 진면들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국민들은 대통령이 선택한 각료들만큼은 진면을 보려고 애들을 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가면 뒤에 숨은 진면을 노출시키게 되고, 그 때문에 상당수는 낙마(落馬)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가면만 보고 사람을 뽑아 나라의 살림을 맡겨놓으니, 그 살림은 “잘 되어야 본전”일 따름이다.

***

지금 가면 이야기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못하다. 막 가자는 북한의 망나니들이 또 불장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저들은 불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존심과 함께 소중한 생명, 재산을 잃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천안함 사건을 당하고도 대비를 못했는가, 이번에도 우리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사실 ‘천안함 피격’만큼 우리 사회의 바보스러운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도 없다. ‘노루 친 몽둥이 삼 년 우려 먹는다’든가? 입만 열면 ‘대양해군’, 입만 열면 ‘연평해전’을 떠들어대며 폼을 잡던 해군의 ‘똥별들’은 다 어느 쥐구멍에 숨어들었는가.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선진국들과 경쟁을 하는 수준에 올랐다고 거들먹거리던 위정자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비까번쩍하는 이지스함을 띄우면 뭘 하는가?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철 덩어리 비스름한 잠수정 하나에 맥을 못 춘다면 천문학적 돈을 퍼부어 그런 함선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실사구시’를 하지 못하고 폼이나 잡고 있다면, 동네 건달패나 다를 바가 무엇일까. 그나마 그 정도로 창피를 당했으면 즉시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옳았을 텐데, 똑 같은 깡패들한테 또 당하고 말았다.

TV에 비치는 이른바 이 나라의 지도자란 자들의 낯짝을 보셨는지? 자못 근심스럽고 근엄한 가면을 쓰고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표정을. 천암함 처리과정을 보면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우리의 꼬락서니를 그 깡패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 놓고 한 대 더 때려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 놓고 스트레이트 펀치를 우리의 턱에 명중시킨 것이다. 백주대낮에 내 땅에 대포를 쏘아대는 모습을 두 눈 멀뚱 멀뚱 뜨고 바라보면서 ‘확전시키지 말라!’는 명령이나 내리는 비겁한 필부의 가면을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그 깡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깡패들은 모든 국민들이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대통령의 얼굴에 ‘겁장이의 가면’을 덮어씌우고 싶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조준되는 미사일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리? 반격할 용기가 없는데. ‘다음번에 또 때리면 가만 안 둬?’라고 중얼거리며 ‘밤탱이가 된 눈’이나 껌벅거리는 겁한(怯漢)에게 어느 깡패가 겁을 먹으리?

***

모조리 갈아 치워야 한다. 군대 근처에도 못 가본 필부들이 나라를 운영한답시고 자못 근엄한 가면을 쓴 채 거들먹거리는 꼴은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깡패들과 한 통속이 되어 사사건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애태우는 이 땅의 이른바 좌파들도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자존심도 실리도 모두 챙기지 못하는 필부의 궁량으로 육천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공염불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차라리 대통령의, 국회의원의, 장관의, 장군의 가면들을 벗어라. 차라리 ‘나도 여러분처럼 한 개 필부요!’라고 커밍아웃이라도 시원하게 해보아라.

 

이제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린 채, 밀물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내 나라를 어찌 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선생님, 확전을 막는 거, 정말 중요합니다.
    이명박이 참 골치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다 '확전시키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소릴 듣고
    그래도 참 생각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구나 안심했습니다.
    아, 그래 저들이 막 쏜다고 우리도 막 쏘면 이 나라 불행한 인민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정하시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확전은 안 됩니다.

    2010.11.26 23:47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맞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2010.11.27 08:23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0. 9. 11. 08:43

"대리기사 노릇까지… 온종일 교수님 몸종"
상아탑의 그늘- 연구조교 A씨의 하루
교수 자녀 돌보기 등 잡무·심부름으로 하루
"내 공부할 시간은 없어" 참거나…그만두거나…

남상욱기자 thoth@hk.co.kr


'몸종''개인비서'라고 자학하는 학생들이 대학 교정을 배회하고 있다. 교수의 연구보조를 이유로 각 대학 교수 연구실에 상주하는 수 만 명의 대학원생 연구조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교수의 자녀 보육부터 세금명세서와 같은 개인서류 챙기기, 대리기사 노릇 등 '상전'의 갖은 일을 챙기느라 녹초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다. 교수 눈밖에 나는 순간, 그들의 미래가 단박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대학조교의 실상을 들여다봤다.

8일 오후 늦은 시각. 서울 모 사립대 문과계열 대학원 3학기째인 연구조교 A(29)씨가 교수 연구실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1년 내내 연구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이다. 가방에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겨드랑이에까지 두툼한 책을 끼워 든 그는 밤새 공부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학기 내 학위논문을 끝낼 계획을 세워두고 강행군 중이다. 하지만 A씨는 "오늘도 교수님 딸의 과제를 도와주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교수님 뒤치다꺼리에 공부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공부하러 대학원에 왔는데 이게 뭔가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석사과정을 마치는 내년 하반기에 대학원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다른 현실에 자괴감이 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 그 중심에는 물론 '부려먹기만 할뿐 공부에 도움을 안 주는 교수에 대한 원망'이 깔려있다. 그는 "교수가 쓸 논문자료를 찾고, 수업보조에다 시험이나 과제물을 확인하다 보면 이렇게 밤 늦게야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이런 고생도 미래가 보이면 감내하겠지만 지도교수는 논문지도 등에는 무관심하다"고 하소연했다.

A씨의 하루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오전 8시 교수 연구실로 출근, 그날 예정된 교수의 수업자료 챙기기로 일과를 시작한다. 수업에 들어가 출석 체크를 하고, 과제물을 걷거나 교수 전달사항을 전하는 게 그의 일상적인 수업보조 일이다. 간혹 과제물 채점을 직접 할 때도 있다. 그 사이 자신의 대학원 수업도 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지도교수가 학술지 발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 자료수집에 여념이 없다. "논문에 이름 하나 걸어준다"는 '대단한' 조건이 암묵적으로 걸렸지만, 그는 "내가 논문을 쓰는 건지, 교수가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할 수 없다. 학술지에 이름 하나 오르는 것이 다음 학기 장학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교를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조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향토장학금(집)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날 오후 그는 교수와 함께 인천공항에 갔다 왔다. 친한 외국 교수가 한국에 도착한다며 지도교수가 마중을 같이 나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교수 아들이 학교에 놀러 온다고 해서 오후 내내 놀아줬다"고 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새 퇴근 시간이다. 퇴근은 물론 교수가 집에 가는 시간이 기준이다. 저녁 술자리가 있으면 함께 가는 경우가 많고, 가끔은 술 취한 교수를 집까지 모시는 '대리운전기사' 역할도 해야 한다. 그는 "한 마디로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하루 근무시간은 평균 12시간. '개인 비서'노릇을 하며 월급은 평균 80만원 가량으로 정확히 등록금만큼이다.

물론 그는 마음에 담아둔 말을 교수에게 한 적이 없다. 그는 "장학금은 물론 논문 심사까지 교수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힘들다고 어떻게 얘기하겠나. 참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한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심해어

    백규님, 기자의 작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기사 보다 더 한 일들이 대학원생들과 강사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대학원의 현실입니다. 다만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고, 또한 논문을 포기할 수 없기에 더러워도 참는 것일 뿐입니다.
    교수, 교수가 대체 무엇이라 말입니까? 진정한 스승이 사라진 이 대학 사회에서 교수는 단지 국어 사전에 나와 있는데로 '대학에서, 전문 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문 학술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몇이며,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글을 읽으며 "혹 기자의 작문 아닌가"라는 반문에 화가 날 뿐입니다.
    제 선배들 중에 정말 술자리에 대학원생들을 데려나와 술자리 끝날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선배 교수 여럿 봤습니다. 그건 아주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가관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전 그런 선배들, 그 이후로 인간같지 않아서 만나지 않습니다. 내 비록 학문은 모자라나 인간인 것이 분명한데, 어찌 개떼들과 어울리겠습니까?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런 교수들 아주 가까이에 떼거리로 있을 겁니다. 개떼들처럼 말입니다.

    조선의 문신 조지겸의 시가 떠올라 한 수 올려 봅니다.

    鬪狗行 개떼들 / 조지겸 趙持謙

    衆狗若相親 개떼들 친하게 지낼 때에는
    搖尾共行止 꼬리 흔들며 어울려 다니지만
    誰將朽骨投 누군가가 썩은 뼈다귀 하나 던져주면
    狗起衆狗起 한마리 두마리 일어나 우루루 달려가
    其聲은은의우牙 이빨 드러내고 으르릉 먹이 다투어
    大傷小死何紛紛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물려 죽지
    所以貴騶虞 그래서 추우를 참 고귀하다 하는 거야
    高臥天上雲 구름 위에 높이 누워 유유자적하니깐

    * 은은(犬+言, 犬+言) 의(犬+示) 우(口+牛) 추우(騶虞)鬪 : 인자한 성질을 지녔다는 전설상의 짐승

    정치판만 이와 같은 개떼가 득시글한 것은 아닙니다. 대학의 교수사회도 개떼와 같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친하게 지낼 때에는 서로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다정한 척 합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 눈앞에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아니하고 달려가 서로 물어 뜯습니다. 마치 개떼처럼 말입니다. 이익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수라장이 됩니다. 결국 대학의 교수들 간의, 또는 교수와 강사들, 교수와 대학원생들 간의 온갖 갈등도 뼈다귀를 차지하기 위한 개들의 아귀다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중에 가장 회생자는 힘없는 강사들과 대학원생들임을 어찌 모른다 하십니까?
    진정으로 모르시는 것입니까? 아님 반어입니까?

    2010.09.13 23:18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승희

    동감합니다. 저도 소위 SKY 대학 대학원 연구조교를 하면서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꾹 참고 석사를 졸업했는데 이제는 학교를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교수들 중에는 술 취하면 여학생에게 성희롱을 하는 교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을 떠맡기고 돈은 한푼도 주지 않는 교수 등 악질 교수가 다양한데, 여러 대학원생들의 밥줄이 걸려 있는 터라 교수를 마음놓고 신고하지도 못합니다.

    2010.09.16 21:36 [ ADDR : EDIT/ DEL : REPLY ]

카테고리 없음2008. 10. 26. 15:16

황주홍 강진 군수님의 매서운 회초리
*이 글은 <조선일보> 2008년 10월 20일자에 실린 기고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경구'라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백규-


[기고]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먹고 마시는 모임에 시간 탕진
이런 풍토에서 노벨상 나올까
황주홍 전남 강진군수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다. 이틀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니 그럴 만하다. 물리학상은 3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화학상은 일본과 미국의 학자들이 휩쓸었다. 그 바람에 우리 한반도도 떠들썩했다. 내용은 좀 달라서, 왜 우리는 일본처럼 될 수 없느냐는 주제로 요란했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과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일본인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면 연구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휩쓰는 거다. 그뿐이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연구하고 공부한다. 한국 성인 1인당 독서량이 192개국 중 166위라는 UN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들은 이 부족분을 인맥과 로비와 '배째라'라는 저돌성으로 충당하며 사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끼리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들기다. 공식적으론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접대하고 접대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문제는, 다른 선진국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퇴근해서 집으로 직행하는 한국인 드물고, 퇴근해서 1차 2차로 직행하는 선진국 사람 드물다. 발렌타인 한번 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한국인 반면, 발렌타인 한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일본이고 미국이다. 그 차이에서 승부가 크게 갈린다.

낮 시간에 일하는 것은 한국이나 선진국이나 별 차이 없다. 결정적 승부처는 오후 6시 이후의 '자유시간'에서다. 긴긴 자유시간을 우리는 과거를 위해, 편법을 위해 소비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마치 낮 시간의 연장처럼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생활은 밋밋하고 심심하고 외롭다. 재외동포들은 한국을 '즐거운 지옥'이라 한다. 야간생활이 어쩌면 이리도 위태위태 박진감 있고 육감적인지 힘들지만 재밌어 죽겠다는 거다. 노벨상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장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 단언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한국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다. 공부하지 않고 공부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로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6시 이후가 '선진화'되지 않는 한 노벨상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노벨상뿐이랴. 한국과 한국인이 6시 이후의 긴 시간을 이렇듯 철저히 과거 찾기, 인연 만들기에 사용하는 한 조국에 더 큰 희망은 솔직히 어렵다. 한국의 선진국 반열 진입은 6시 이후의 과거몰입적, 인맥제일주의적 행태의 변경 없인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이 인식이 일본의 노벨상 독식에 따른 우리들의 요란한 반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칼럼/단상2008. 2. 27. 14:16
 

참회의 글


                                                    조규익


불교경전에 ‘개구즉착(開口卽錯)’ 또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오묘함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되씹어 보아야 하는 경구이지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면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격이거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르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의 선사(禪師)들이 흔히들 써온 이 말은 진리를 깨닫는데 말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큰 화를 낸 제가 정작 큰 일을 만나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 일'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지요? 그 당시 제 가시 돋친 말의 대상이 되었던 분에게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침 저는 ‘개구즉착’이란 성어에 빗대어 제 그러한 실수를 참회하고자 합니다.

***

 2년쯤 전인가요? 저는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김 아무개 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그 글을 아래쪽에 첨부합니다)  당시 논문발표와 관련하여 그 분이 저질렀다고 보도된 일들이나 그에 관한 그 분의 해명이 너무나 궁하고 불쾌했던 저로서는 ‘욱’하는 성미를 참을 수 없었고, 급기야 글 한 쪽을 써서 일간지에 실었던 것이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통쾌해 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분이 당시 인기 없던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함께 학문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외람된 사명감(?)에 저지른 일이었지요.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장관에 임명된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의 ‘추한 모습’을 목격하며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행위에 비하면, 그 시절 그 분의 잘못이야말로 참으로 ‘애교스러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저를 몹시도 괴롭히는 요즈음입니다. 그 분의 잘못에 대하여 그런 글을 썼다면, 지금 문제된 분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글을 써야 형평이 맞는 것일까요?

***

제자의 글을 표절하고, 한 논문을 십여 곳에 중복 게재했으며, 십여 년 가까이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발표하지 못했다면, 학자로서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지요? 그것뿐인가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부동산 등에 투기해온 그들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수들은 긴 방학을 즐길 수 있어서, 학문 하는 여가에 전국을 누비며 땅 투기에 전념할 수 있었노라고 ‘당당하게’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가 잘 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부동산 투기라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고뇌하는 제 주변의 교수들은 그럼 어떤 사람들일까요? 왜 새 정부에는 그런 사람들 뿐인가요? 이토록 그들에겐 ‘이런 사람도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단 한 사람’의 표본적 인물도 없는 걸까요?

***

새 정부에 참여하신 문제 교수님들! 당장 거기서 내려오세요. 거긴 여러분께 분에 넘치는 자리입니다. 제가 강요할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투기로 벌어들인 부동산을 처분하여 제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라도 내놓으시는 게 어떨지요? 그런 다음 그간 소홀히 했던 학문 연구에 매진하세요. 그렇게 하는 길만이 그나마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제 실수를 참회하노니, 강호 제현께서는 부디 제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2008. 2. 27.


 백규 드림



*첨부(조선일보 2006년 7월 28일 오피니언 칼럼)


교육부총리, 안 되겠소

                                                         

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