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10.26 15:14

 





 

, 홍범도 장군!

-2017년 홍범도 장군 순국 제 74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 참가기-

 

 

맑은 가을날 오후. ‘여천 홍범도 장군 순국 제74주기 추모 및 학술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강당을 찾았다. 꽤 많은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홍범도기념사업회의 이종찬 이사장이야 원래 유명한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 논문의 토론자로 나선 최영근 선생(알마틔 고려극장 문예부장), 반병률 교수(외국어대), 김보희 박사, 장세윤 박사(동북아 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소장) 등은 오랜 인연들이다. 특히 희곡 날으는 홍범도2013년에 연출한 리 알레그 선생이 모스크바로부터 와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감회가 깊었다.

 

2부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역사기록 소설 홍범도의 역사성(윤상원 전북대 교수), 희곡 홍범도의 역사 수용 및 인물 형상화 양상(조규익), 「「홍범도를 매개로 하는 체제 옹호의 서사(임형모 군산대 겸임교수) 등이었다.

 

1940년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조선극장의 총연출자 겸 희곡작가 태장춘은 친구였던 시인 조기천의 권유로 희곡 홍범도를 쓰게 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극장의 수위장으로 있던 장군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희곡의 소재로 바꾸어 나갔다. 장군은 태장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전부터 만들어 온 많은 메모들을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를 만들었고, 태장춘은 그것을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만든 것이다. 그 일지의 원본이 태장춘 혹은 장군으로부터 사라진 뒤인 1958, 태장춘의 부인 리함덕(고려극장 인민배우)이 베껴 쓴 둥사본 홍범도 일지가 이인섭을 통해 교포 작가 김세일에게 전달되었고, 김세일은 이 기록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홍범도󰡕를 써서 레닌기치에 연재했다. 장군은 태장춘을 만날 때마다 결코 자신을 영웅화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것을 강조했다. 자신보다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출 것도 요구했다. 말하자면 극작가 나름의 창작성을 인정하지 않고, 희곡을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기록물로 만들 것을 요구함으로써 희곡 홍범도는 일종의 서사문학처럼 늘어져 버렸고, 등장인물도 36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발표 중


발표 후 토론


토론이 끝나고

1942년 완성된 홍범도(초연 당시 제목은 의병들)는 같은 해 최길춘의 연출로 드디어 무대에 올려졌다. 원래 태장춘은 홍범도3부작(‘사냥꾼 출신 홍범도의 투쟁을 그려낸 의병들-1/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붉은 빨치산의 지휘자가 되는 것-2/레닌과의 만남 이후 이상적이며 분명한 혁명가 혹은 국제주의자가 되는 것-3’)으로 완성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1943년 별세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홍범도1947년에 이길수의 연출로, 1957년에 채영의 연출로, 1960년에 맹동욱의 연출로 연거푸 무대에 올려졌고, 2013년에는 날으는 홍범도로 개제(改題)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이때의 연출가가 바로 이번에 직접 참여한 이 올레그 선생이었다. 바로 그 분이 발표 시간 내내 청중석에 앉아 계셨다.

 

전체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희곡 홍범도.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을 홍범도 잡기 서사일본군 잡기 서사의 두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의 서사를 형성하는 모티프(motif, 話素)들은 상당히 많았는데, 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를 그려내다 보니 그 모티프들의 짜임이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흠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두 서사들과 각각의 모티프들을 살펴보자.

 

홍범도 잡기 서사

 

*1

-배신모티프: 우진원흥재덕월향 등이 배신과 음모를 통해 홍범도 잡기에 나섬. 우진은 야마도의 끄나풀인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홍범도의 가장 믿음직한 수하로 행세하면서 홍범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일진회 회원인 원흥과 재덕 역시 야마도의 하수인으로 홍범도의 체포에 나섬.

-기만모티프: ‘월향이 일본군 장교를 죽인 자라는 광고를 냄으로써 의병들을 안심시키고 홍범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만계(欺瞞計)를 적절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음.

 

*21

-날조모티프: 홍범도 처의 편지를 날조하여 홍범도 귀순 시키기.

*22

-염탐모티프: 재덕원흥중대부관 등이 밀고꾼 조니를 통해 마을의 의병 참여자들을 염탐.

-사냥모티프: 원흥이 의병들을 지칭하는 백두산 포수를 들먹이며 묘한 수단으로 홍범도를 잡겠다고 함.

 

*31

-함정모티프: 우진이 거짓으로 의병들과 홍범도를 궁지에 빠뜨림.

일본군 잡기 서사

 

*21

-복수모티프: 야마도가 첩자로 파견한 월향이 동생인 홍범도 부대의 의병 일남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진실을 듣고 홍범도 부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함.

 

*22

-사냥모티프: 연옥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백두산 포수로서 못된 짐승을 잡는다고 언급함으로써 일본군 잡기 서사의 핵심으로 사냥 모티프 제시.

 

*31

-복수모티프: 월향이 홍범도의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우진의 정체를 홍범도에게 경고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인 원수 일본군과 배신자 우진에게 타격을 입힘.

-기만모티프: 변장한 홍범도가 일본군을 총공격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변장한 채 치강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작전에 성공함.

 

*4

-복수모티프: 일본군을 토벌하고 배신자 우진원흥재덕을 잡아 처형함.

-사냥모티프: 일본군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의병 용준을 구해내면서 훌륭한 포수가 되려면 악한 짐승에게 물려 보아야 한다는 비유의 말을 던짐. 즉 일본군을 잡으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사실이 이 비유의 핵심임.

 

이런 점들로부터 희곡 홍범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할 수 있었다.

 

1. 살아있는 주인공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의 체험을 작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가 실화극 내지 역사극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2. 주인공 홍범도는 민중들 사이에 전설적 영웅으로 자리 잡은 존재였으나, 주인공의 영웅성을 과장하지 말고 주변 인물들의 활약상을 부각시켜 달라는 홍범도의 주문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소화시키고, 작품의 사실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3. ‘홍범도 잡기일본군 잡기라는 상반되는 서사들을 작품의 두 축으로 내세우고, 각각의 범주에 배신기만날조염탐사냥함정복수등의 모티프를 설정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주제를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

4. 실존하던 주인공의 강한 주문에 따라 철저한 사실성의 구현을 지향했으면서도, ‘전설적 영웅이자 호랑이 잡던 백두산 포수라는 홍범도의 이미지를 이야기 전개의 미학적 요소로 드러나지 않게 군데군데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이나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

 

이제 옛날의 홍범도를 역사의 뒤안에 묻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가 새로운 시대의 홍범도를 만들어 무대에 올림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단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2017. 10. 25.)


이종찬 이사장과


행사 후 저녁 자리에서 이종찬 이사장, 반병률 교수 등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환담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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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10.0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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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3.08.0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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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소식2013.07.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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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3.07.13 15:21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총서 42/태학사]이 출간되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즉 구소련 지역에 거주해 오는 고려인들의 한글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출간한 것이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다. 구소련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생산 및 소비 체제는 정부에서 관장하던 전문예술단(혹은 기관)과 함께 각 지역의 꼴호즈나 솝호스 등 생산단위 별 소인예술단들이 담당하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카자흐스탄 극성 꼴호즈의 ‘가야금 가무단’이나 뽈리뜨옫젤 꼴호즈의 ‘청춘 가무단’ 등 꼴호즈를 비롯한 생산현장이나 고려인 일반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 소인예술단이며, 1932년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세워진 ‘원동변강 조선극장’을 모태로 여러 지역으로의 이전과 개명(改名)의 과정들을 거쳐 1968년 카자흐 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알마틔로 옮겨져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 음악극 고려극장’으로 최종 정착된, 이른바 고려극장이 전문예술단(혹은 기관)이다. 이들 예술단에서 창작⋅공연한 한글 노래들과 드라마 등을 분석하여 주제의식과 문예미학 등을 찾아낸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총서: 고려인의 문예미학, 그 정맥을 찾아

 

제2부 소인예술단과 한글문학

 

제1장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적 지향

Ⅰ. 생산현장과 소인예술단

Ⅱ.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생산 및 향유방식

Ⅲ. 구소련의 미학과 국문노래들의 주제의식

Ⅳ. 민족적 형식과 대중미학

 

제2장 고려인 노래의 전통노래 수용

Ⅰ. 전통노래와 변이의 당위

Ⅱ. 고려인들의 전통 민요와 변이의 단서

Ⅲ. 지속과 변이, 그리고 문화접변 현상

Ⅳ. 문화접변과 보편정서

 

제3장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서

Ⅰ.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당위

Ⅱ.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문학적 형상화

Ⅲ. 디아스포라 의식의 관습성

 

제3부 전문예술단[고려극장]의 한글문학

제1장 고려극장의 존재의미와 가치

Ⅰ. 고려극장과 고려인

Ⅱ. 고려극장의 발자취

Ⅲ. 공연된 연극의 내용과 흐름

Ⅳ. 민족의식, 연극, 고려극장

제2장 고려극장에서 불린 한국어 노래들의 의미

Ⅰ. 전문예술집단으로서의 고려극장

Ⅱ. 가창된 노래들의 텍스트 양상 및 갈래

Ⅲ. 주제의식의 양상

Ⅳ. 고려인 민족예술미학의 메카, 고려극장

 

제3장 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의 희곡과 고전 수용 양상

Ⅰ. 고려극장의 개척자, 연성용

Ⅱ. 예술적 성과에 관한 평가

Ⅲ. 고전의 발견과 재해석 향상

Ⅳ. 고전의 재해석과 변용

 

제4장 극작가 태장춘의 희곡과 역사 수용양상

Ⅰ. 고려극장과 태장춘

Ⅱ. 작품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평가

Ⅲ. 텍스트의 성립과 내용적 짜임

Ⅳ. 작가의식 및 주제

Ⅴ. 연극 미학적 해석의 모범적 선례

 

제5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새 고려인’으로서의 한진

Ⅱ. 언어와 민족문학, 고려인 문단에 대한 관점

Ⅲ. 주제적 관심과 미학적 성취

Ⅳ. 새로운 연극미학의 수립

 

제6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고전을 통한 현실의 해석

Ⅱ.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를 통한 봉건체제 비판

Ⅲ. 봉건 착취에 대한 비판과 디아스포라의 정서

Ⅳ. 두 작품의 공시적⋅통시적 위상

Ⅴ. 고전의 해석과 연극미학의 수립

 

제4부 총결: 민족 문예미학으로 피어난 디아스포라의 역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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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06.07 16:33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제공:김병학>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 백규 연구실에서>

 

율리아와의 만남

                                                                                                    백규

몇 년 간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고려인 극작가 한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승을 뜬 지 올해로 19년째. 말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국립고려극장 문예부장을 지낸 그였다. 10여 편의 희곡작품, 19편의 단편소설,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등을 오롯이 모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이 정리했고, 내가 꾸려나가는 연구소에서 문예총서의 하나로 펴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인가. 책을 펴낸 지 얼마 후 국제한인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연구’라는 테마의 국제학술회의에서 기조발제<관련 글 보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려극장에서 활약한 극작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이미 한진의 작품들을 확보해 놓은 터에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병학 선생이 또 하나의 낭보를 보내왔다. 한양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것. 발표회장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자체가 멋진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텍스트를 읽었다. 작품을 읽는데, 모르는 사이에 간간 눈물이 흘렀다. 작품들의 행간에서 그의 외로움과 슬픔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갈등과 방황, 현실과의 밀고 당김을 통해 결국 민족을 발견하게 된 그의 집념이 감동적이었다.

한진은 누구인가. 북한의 극작가 한태천과 모친 박성수 사이에서 1931년 태어난 그는 천재였다. 역사와 전통의 광성중학을 2년만에 마치고 평양제일고급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8년 김일성 종합대학 노문학부에 입학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그의 지도교수이며 훗날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정상진이었다. 정상진은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장(1948~1950)과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1952~1955)을 지낸, 당대 굴지의 재사였다. 정상진으로부터 문학원론과 세계문학을 배운 한진과 그의 친구 이진[이경진]은 당시 최고의 수재로 인정을 받던 북한의 꿈나무들이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 여름 대학으로 돌아와 외국유학시험을 치르고 유학생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인 10월 모스크바 영화대학 시나리오 학과에 입학했다. 모스크바에 유학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은 그들의 조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그곳의 분위기에 취하면서 비로소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때마침 흐루시쵸프가 등장하여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자신의 개인지배를 강화해 나갈 요량으로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을 속속 숙청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연안파로 몰려 파직 당한 모스크바의 북한대사 이상조의 망명 소식은 소련의 심장부에서 자유의 맛을 본 지성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한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몇 고비의 우여곡절을 거쳐  1958년 8월에 망명을 결행했고, 시베리아 바르나울시 TV 방송국 책임편집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를 만나 결혼했다. 그 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옮긴 그는 영화사진연구소, 레닌기치 등을 거쳐 고려극장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설과 희곡창작을 지속한 것은 물론이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말년인 1993년 7월 13일 「서울손님」이란 희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는 잠들었다. [*이상 한진의 전기적인 사실은 김병학의 '한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한진전집>>(인터북스, 2011) 참조.]

소련 고려인 문단의 최고 비평가 정상진도 인정한 바 있지만, 그는 고려인 문단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작품 형상화의 수준에서 여타 작가들은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이처럼 소련의 고려인 문단을 통틀어 미학적 차원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만한 작가로 그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진과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브노브나 사이에 안드레이와 드미트리가 태어났고, 율리아는 안드레이와 러시아 여인 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한진의 손녀 율리아가 러시안의 외모를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지식층의 자녀로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전쟁에서 우리를 적으로 삼아 총부리를 들었던 한진. 그러나 넓은 세상에 나와 이념의 허망함과 남녘 동포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을 체제 경쟁에서 남쪽의 승리를 입증하는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언제나 현실이 이상을 압도한다는 인간세상의 자명한 진리를 보여 준 생생한 사례로 보아야 하는가?

어쨌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이 걸어야 할 미래의 길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그의 손녀 율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고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의 행복한 ‘오버센스’인가? <2012. 6. 7.>

*사진 위는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 아래는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백규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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