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아가들, 거두어진 아가들
조규익
언제부턴가 문숙희 교수 부부의 권유로 한 사회복지재단에서 ‘신생아 안아주기’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입으로 ‘봉사를 합네’라고 말하기 면구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일이지만, 이미 내 일상 가운데 최고의 스케쥴로 자리잡았다. ‘버려졌으나 가까스로 거두어진’ 신생아들을 만나는 매달 첫 토요일 오후. 설레는 마음으로 이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아가들의 눈빛에서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둘씩이나 낳아 키우며 그들을 안아 준 기억조차 아스라한 내가 남들이 낳아놓은 아이들을 제대로 안아 줄 수 있을까?’ 더구나 ‘철없는 미혼모들이 버린, 그 아가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을까?’ 처음에 한동안 망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끌려가듯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조막만한 아가천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갓 태어난 아가에서 두 달쯤 된 아가들까지 하얀 강보에 싸인 채 각각의 침상에 군대 내무반에서 ‘취침점검’ 받는 자세들로 누워 있었다. 대부분 잠에 취해 있는 가운데, 어떤 녀석들은 지독하게도 울어대곤 했다. 젖 먹을 시간이 된 경우, 쉬를 싼 경우, 몸이 불편한 경우 등 그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도 대충 세 가지로 분류된다. 개중에 먹성이 좋은 녀석들은 식사 시간도 되기 전에 칭얼대지만,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 몸이니 엄마와 같은 보살핌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안타까운 모습들도 없지 않았다.
대부분 녀석들은 안아주면 좋아한다. 어떤 녀석은 눈을 맞추며 배시시 웃기도 한다. 한참 안아 준 다음 울고 있는 다른 녀석을 안아주려고 침상에 내려놓기만 하면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그만큼 가슴으로 살갗으로 눈으로 전해지는 사랑에 굶주린 때문이리라. 녀석들의 얼굴과 눈망울을 쳐다보노라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엄마 아빠는 누구였을까. 이곳에 오기까지 나 어린 그 엄마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은 어땠을까. 그들이 나눈 사랑의 순간은 달콤했겠지만, 임신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이에 일어났을 갈등과 고통은 얼마나 씁쓸했을까. 오죽하면 이 천사 같은 아가들을 버려 이곳까지 오게 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의 표정은 모두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가. 이 아이들이 커서 홀로 서기까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다양한 인물로 커갈 것이다. 그 옛날 우리네 영웅들은 하나같이 ‘버려짐’의 쓰라린 기억을 안고 자라난 인물들이었다. 많은 전설과 신화에 보이는 ‘기아(棄兒) 모티프’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영웅으로 자라나 부족이나 민족을 이끈 지도자가 된 것이다. 최근 나는 이 아가들의 얼굴에서 숨어있는 대통령, 대기업 회장님, 판․검사, 멋진 배우, 훌륭한 선생님, 뛰어난 운동선수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만 그들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가 문제이리라. 내가 낳은 자식들에게만 사랑을 쏟아 붓는 우리네 사고방식으론 가능한 일이 아니겠지만, 골고루 햇볕을 쪼여주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새로운 의무가 아닐까. 가뜩이나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요즈음.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이 사랑을 나눈 결실로 태어난 아가들이다. 비록 비정상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자발적인 노력으로(?) 가능성을 지닌 다수의 인재들을 국가에 안겨준 셈이니 그 젊은 부모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들 아닌가. 그 아가들을 재목으로 키워낼 것인지 잡초로 버려둘 것인지는 국가와 국민들이 결정할 일이다. 이 틈 저 틈으로 새어나가는 국부(國富)의 물꼬를 이들의 양육에 돌려야 할 때다. 쓸데없는 싸움질들 그만 하고, 대통령도 국회의원들도 모두 한 달에 한 번씩은 보육원에 와서 아기 안아주기 봉사에 참여할 일이다. 나랏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이들을 최고의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