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6. 09:16

 

 

 

길 가다가 아이오와(Iowa) 족을 만나다!

 

 

 

 

 

 

미국에 온 이후 갖가지 일들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왔으나,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는 분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10월 털사(Tulsa)에서 34일간 진행되었던 ‘2013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여하여 오세이지(Osage)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이래 11월 하순 체로키(Cherokee) 인디언 네이션까지 답사함으로써 문명화된 다섯 인디언 부족들[Civilized 5 Indian Tribes]’ 중 두 개를 체험한 셈이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36개의 인디언 부족들이 주로 남부지역에 터를 잡고 있는데, 최소한 다섯 부족만이라도 접해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초반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나선 길이었고, 그 행선지가 바로 치카샤(Chickasha) 인디언 네이션이었다.

 

***

 

20131216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첫 목표지는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아다(Ada)였고, 거기로 가기 위해 타는 길이 177번 하이웨이였다. 177번길의 스틸워터 시내 구간은 퍼킨스 로드(Perkins Road)였고, 묘하게도 그 길은 퍼킨스 시티(Perkins City)로 연결되었다. 즉 퍼킨스 로드를 따라 스틸워터에서 벗어나 30분쯤 가니 퍼킨스 시티가 나오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계속 4마일쯤 달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Iowa Tribe of Oklahoma”란 글자들 밑에 이상한 모양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앙증스러운 표지판이었다.

 

 


스틸워터 시내의 퍼킨스 길(Perkins Rd.)

 


177번 도로에서 2~3분 가량 들어간 B의 위치에 아이오와 네이션이 있다.


 


177번을 달리다가 길가에 있는 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부족을 뜻하는 ‘tribe’란 말과 독수리 깃털로 만든 문장의 디자인이 분명 인디언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전에 아이오와 주[Iowa State]’는 들어보았으되,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인디언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의아해 하면서도 처음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1~2분 정도 달리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인디언 부족인 이상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를 돌려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이웨이로부터 빠져나가 5분 정도 들어가니 과연 오하이오 네이션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관리 사무소에 들어가니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기초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책임 있는 인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한참 만에 족장[Tribal Chairman]이 나와서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수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는 자기네 부족의 과거와 현재가 술술 흘러나왔다.

 

 


네이션 입구의 간판


아이오와 네이션


 


아이오와 네이션의 친절한 아가씨 Miss Kent Tehavno

 

 

토착 원주민들 가운데 하나인 아이오와 부족은 (연방정부와의) 각종 조약과 법령으로 인정된 자치정부를 갖고 있는, 말하자면 독립적 주권국가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자체 헌법과 각종 법률, 통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정말로 당신네 공동체가 독립국가냐고 물으니, 미국민이지만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식으로 정정하기도 했다.

 

 


아이오와 트라이브의 족장[Tribal Chairman] Mr. Gary Pratt

 

 

아이오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회색 눈[grey snow]’을 뜻하는 바코제(Bah-Kho-Je)’로 부르는데, 그 말은 겨울 몇 달 동안 난방 연기로 그을린 눈에 뒤덮인 그들의 집이 회색으로 보인 데서 나왔으며, 아이오와 주[Iowa State]의 이름도 아이오와 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했다.

 

오네오타(Oneota) 지역민들의 후손인 아이오와 부족은 1600년대에 남서 미네소타의 파이프스톤 쿼리(Pipestone Quarry)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1730년에는 북서 아이오와 오코보쥐(Okoboji) 호수와 스피릿(Spirit) 호수 지역의 마을들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아이오와 주 카운슬 블렆스(Council Bluffs) 인근에서 남쪽으로 이동했고, 18세기 중반에는 그들의 일부가 드 모인(Des Moines) 강으로 이동해 올라갔다.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미주리의 그랜드 플랫강(Grand and Platte River)가에 정착했고, 연방정부와의 조약에 따라 미주리, 아이오와, 미네소타 등의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연방정부와 맺은 1936년의 워싱턴 조약에 따라 그들 중 일부에게 네브라스카와 캔자스에 있는 그레이트 네마하 강(Great Nemaha River)을 따라 보호구역을 할당해 주었으나, 나중에 아이오와 족 일부가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구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3815일 날짜로 발령된 대통령령[Executive Order]에 의해 설립된 것이 원래 오클라호마 주 아이오와 보호구역이다. 나중에 아이오와 네이션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오클라호마의 아이오와족은 남부 아이오와이고,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아이오와족은 북부 아이오와다.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 지도 가운데 Iowa 족의 구역

 

 

 

족장은 특히 자신의 부족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과 불공평 등 그들을 억압한 역사의 시련들을 견디어 온 데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피력했으며, 아이오와 족은 현재 490명 이상의 등록 인구를 갖고 있으며, 페인(Payne), 오클라호마(Oklahoma), 링컨(Lincoln), 로건(Logan) 카운티 전역 혹은 부분들을 아우르는 사법 관할구역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이오와 족은 지역 행정 기관과 부족 기업들의 회계부서, 부족이 운영하는 경찰과 소방서 등을 포함 다양한 분야에서 160여명이 고용되어 활약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족장 뒤편에 있는 문장에 대하여 물었다. 인디언 부족들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실(Seal) 즉 문장(紋章)이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사실이었다. 각 문장에는 해당 부족들의 현실과 꿈, 그리고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1978년 밥 머레이(Bob Murray)가 디자인한 것인데, ‘생명의 순환 고리를 의미하는 원은 신성한 독수리의 깃으로 장식된 아이오와 전사의 전투모를 상징한다. 원 안에는 신성한 파이프[담뱃대]가 있는데, 아이오와 족의 각 클랜(clan)은 그 자신들의 신성한 파이프를 클랜 우두머리 집에서 가까운 방어구역 안에 갖고 있으면서 각종 제사나 의식(儀式), 특히 평화와 동맹을 맺는 절차들에 사용했다고 한다. 원 안의 쟁기는 아이오와 족의 농경 전통을 나타내며, 원의 양쪽에 매달려 있는 총채 비슷한 털 자루는 전통적으로 버팔로의 은신을 본뜬 떨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오와 족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활과 화살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원 아래 쪽의 독수리 깃털 네 개는 사방의 바람과 사계절을 나타내는데,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족은 독수리를 존경해왔으며, 부족과 신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독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치 않은 의미가 바로 이 문장에 숨어 있었다.

 

 

 


아이오와 족의 문장

 


아이오와 족이 존경하는 독수리

 

 

족장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방문한 갤러리에는 부족의 삶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비록 흩어져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합해 봐야 100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그룹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이방 나그네의 눈에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과연 이 작은 공동체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오와 족 부족 축제

 


갤러리에 전시된 Eric BigSoldier의 작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2. 12:58

 

 

미국에서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 지내기

 

 

 

#1 세관 검사나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DS-2019 서류와 비자를 내밀자 그 여성 심사관은 , 풀브라이트, G-1, 팬태스틱!’하며 서류를 대충 훑어 보고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한 뒤 선선히 통과시켰다.

 

#2 스틸워터(Stillwater)에 도착하여, OSU의 역사학과 사무실을 찾은 때는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 대낮이었다. 학과 비서 수잔(Susan Oliver)이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연구실 문 옆에 ‘Dr. Cho, Kyu-Ick/Visiting Fulbright Scholar’라고 선명하게 쓰인 명패와 깨끗하게 청소된 연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며칠 뒤에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고 명시한 학과의 명함도 찍어 주었다. 정중하게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의 수혜자로서 이 학과를 연구기관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풀브라이터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영예일 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느껴 알게 되었다.

 


연구실 명패


한국에서 연구기관 신청의 메일을 보내자 마자 환영의 답신을 보내 준 대닐로위츠 학장

 

#3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셋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보험계약이나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듯이, 이곳에선 그게 필요했다. 15년 전 LA에서의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는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곳이었다. 당시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여 퇴짜를 맞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한 나이 든 여성 사무원은 참으로 고상하고 친절했다. 시스템을 검색하더니 아내의 번호는 남아 있으나, 내 기록은 아예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풀브라이트로부터 받은 편의 요청공문과 미 국무성이 보증한 비자[U.S. Department of State (Fulbright Scholars Bearer Is Subject To Section 212(E)]를 보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여기서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며 간단한 인적 사항만 확인한 후 일을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난 스틸워터의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

 

#4 거쓰리 시티(Guthrie City)답사하다가 박식하고 교양이 풍부한 찻집 주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서로의 연락 정보가 필요하여 학교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펼쳐 보더니 풀브라이트 학자시군요!’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커피 값을 계산하려 하자 극구 사양했다. 우리는 팁이라 우기며 간신히 5불을 놓고 나왔다.

 


Guthrie City의 찻집에서 만난 지성적인 주인 셰릴(Cheryl)

 

#5 털사(Tulsa)에서 열린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가 끝나던 날, 주최 측에서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줄 자원봉사자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OSU 털사 캠퍼스 행정부서의 고위직 인사였고, 털사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라이드 서비스를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자기의 즐거움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운전해 왔다가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그는 풀브라이트 학자에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털사에서 나를 태우고 스틸워터까지 왔다가 돌아간 Dr. Ron Bussert

 

#6 텍사스 주의 달라스(Dallas)시에 갔을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달려 겨우 도착한 달라스는 오클라호마와 달랐다. 미국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한 우리였다.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면적이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그러니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과 오클라호마 주에서 텍사스 주로 넘어가는 것이 같을 리 없었다. 가보니 시내의 교통체계도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해놓은 다음, 아무래도 불안하여 막 떠나려는 어떤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차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차도 한국 차라며,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차종은 기아 소울이었다. 하도 반가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찍고 나서 그의 이름과 주소 혹은 이메일을 물어보기 위해 내 명함을 건넸더니, 보고는 풀브라이트 학자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Mr. Carl Smith]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는 내게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 메일 가운데 우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더더욱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서 감격했습니다![We were delighted to meet you and thrilled to have met a Fulbright scholar!]”라는 문장이 있었다. ‘thrilled’란 말 속에는 전율을 느끼다, 기쁘다, 감격하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이 말을 썼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매우 긍정적인 뜻으로 쓴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달라스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칼[Mr. Carl Smith] 선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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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아칸사(Arkansas) 주의 새내기 상원의원이던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가 입안하고 다음 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사인함으로써 법안으로 성립된 것이 바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잉여 자산들에 주목한 풀브라이트 의원은 그것들을 팔아 교육, 문화, 과학 분야 학생이나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증진시키는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1년 뒤 트루먼 대통령이 여기에 사인하여 확정을 본 것이 바로 이 법이다.

 

풀브라이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 미국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년 미국 의회의 세출 승인을 받아 미 정부가 예산을 출연하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이에 상응하는 돈을 부담함으로써 문화 및 교육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프로그램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 내 Fulbright Commission한미교육위원단의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의 예산 출연으로 운영되며, 이 기구가 장학생 선발 및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모든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서 선발된 한국인 수혜자들은 미국에서 강의나 연구, 대학원 학위과정 이수, 중등교사 영어 연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인 수혜자들은 한국에서 강의 혹은 연구를 하거나, 중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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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느낌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학생이나 연구자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색도 모른 채 연구비 주는 것만 고마워하다가 미국에 와서야 풀브라이트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어진 영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들의 인식을 통해 풀브라이트의 진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은 풀브라이트 수혜라는 영예가 내겐 일종의 개 발의 편자였던 셈이다. 아는 자만이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14:02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마지막 날-좀 더 커진 마음을 안고 다시 스틸워터(Stillwater)!

 

 

 

짧았지만,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4일 만에 이 땅에서 일어난 수백년 격동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일이 어찌 간단하겠는가. 종족과 종족이 맞붙어 수백 년 삶을 이어온 터전을 뺏고 빼앗기는 투쟁이 바로 이 땅에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내연(內燃)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이 땅의 많은 학자들이 현장을 밟으며, 연구실에서 이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분석하고 예측하며 바람직한 방안을 연구해오고 있지만, 누가 그 정답을 알겠는가. 그 옛날 해저(海底)가 융기하여 하늘을 찌르는 산이 된 것처럼 어느 순간 역사의 주인은 바뀔 수도 있고, 수백 년 차별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자들이 채찍을 손아귀에 쥐는 순간도 있을 것 아닌가. 웅웅거리는 바람을 안고 누워 우리에게 겸허를 일깨워 주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의 드넓은 가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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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정 대부분을 마무리한 토요일 아침. 이 날이 마침 36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털사 시민 마라톤의 날이었다. 어디서 그렇게들 모여들었는지 평소에는 한산하던 도로가 사람들로 가득했다. 호텔 바로 앞이 출발선이기 때문인지 적지 않게 시끄러웠다.

 


호텔 창 밖으로 보이던 성가족 성당


시민 마라톤 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공연 준비를 하는 악단(City of Tulsa Pipes & Drums) 


악단의 드러머 매튜씨[Mr. Matthew] 


출발선에 그득히 모여 신호를 기다리는 시민들 


출발신호와 함께 달려나가는 시민들

 

 

한 시간 늦게 아침식사를 하고 마무리 토론과 정리를 위해 호텔 2층의 시마론 볼룸(Cimarron Ballroom)에 모였다. 모두 개운한 표정들이다. 10여 개 조로 나뉘어 지난 며칠간의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을 벌였다. 이곳에서 얻은 견문에 각자의 모국을 결부시켜 바람직한 방안을 찾는 것이 핵심이었다. 모두들 자기 나라의 형편이나 상황을 설명하기에 열을 올렸다. 따지고 보면 땅덩어리나 자원, 인재 등 모든 것을 두고 보아도 미국만한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참석자들 모두 자기 나라의 장점을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 모두는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리라. ‘자신의 나라도 미국처럼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적 사고의 표출이었으리라. 마지막 토론을 주관한 베키[Becky Collins, President and CEO, Tulsa Global Alliance], 마캄 박사[Dr. J. Markham Collins, Professor of Tulsa University], 덕 프라이스 박사[Dr. Doug Price, Dean of Global Education, Tulsa Community College]도 참석자들의 말들을 정리하고 요약하면서 연신 고개들을 끄덕거린다. 각국의 사례들이 그들에게 큰 참고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토론과 보고의 마무리 과정도 끝이 났다.

 


마무리 토론에 참여한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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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짐을 꾸려 내려오니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가기로 약속한 론 박사[Dr. Ron Bussert, Vice President for Administration and Finance]가 벌써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룸으로 모시고 가 커피 대접을 하며 통성명을 했다. OSU 털사 캠퍼스에 근무한다는 그 분의 집은 털사 시내에 있었다. 그러니 나를 집에 내려 준 다음 다시 그 길을 되짚어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하나의 약속을 받아냈다. 론 박사도 점심 전이고 나도 내 아내도 점심 전이니 스틸워터에 도착한 다음 점심 대접을 하겠다는 제의를 했고, 그 제의를 그 분이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미안감이 약간은 덜해졌다. 그 순간부터 이곳 풍습에 따라 편안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 스틸워터의 집까지 오는 데 1시간 남짓 걸렸으나, 서로가 궁금한 게 많아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집 앞이었던 것이다. 아내를 불러내 그 분과 함께 괜찮은 레스토랑 프레디폴스(Freddi Paul’s)’로 직행했다. 토요일 점심이라선지 식당은 한산했고, 음식은 달았다. 나지막한 어조로 자상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론 박사는 참으로 편한 상대였다. 나누는 대화도 맛이 있고, 먹는 고기 맛도 일품이었다. 하이클라스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교양의 정도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가까운 식사 동안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가벼운 피로가 기분 좋게 몰려드는 토요일 오후였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Ron 박사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Ron 박사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08:40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3일차-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성격으로 보아 사실상 마지막 날인 오늘. 여러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제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오세이지 족 보호구역을 둘러보며 갖게 된 감흥을 구체적으로 내면화 시키는 날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일정이 바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

 

8시에 버스를 타고 길크리스 박물관 강당으로 이동하여 털사대학교 영화학과 제프[Jeff Van Hanken]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과거의 그 때에 있던 일들이 아니다!-미국 서부 이미지들의 신뢰성과 정의에 관한 환상들[That ain’t how it was! Illusions of Authenticity and Justice in Images in the American West]”이라는, 약간은 난해하면서도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에 들어 있는 서부의 이미지들이 인디언이나 서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여타 미국인들이나 세계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의 기초로 작용했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화면들을 보며 그간 접한 서부영화들이 인디언이나 미국의 서부에 대한 내 편견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짐을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기록영화의 화면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화면


인디언 출신 헐리웃 배우 Hattie McDaniel


서부영화의 한 장면


서부영화의 한 장면

 

제프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같은 자리에서 감동적인 이벤트를 겸한 또 하나의 행사가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원주민 연락관[Tribal Liaison]을 맡고 있는 마크씨[Mr. Mark Wilson]가 무대에서 다양한 종족의 이름을 부르자 초등학교 학생들이 큰 깃발을 하나씩 들고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털사 지역 공립학교 인디언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고,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은 오클라호마 주에 본부를 갖고 있는 39개 원주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오클라호마 인디언 종족들은 1830년의 인디언 강제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근거,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자발적이거나 토지소유권을 받아 이 지역에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인디언 교육 프로그램은 털사지역 공립학교들에 출석하는 인디언의 후예들[대략 4600]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과거 미국 인디언이 갖고 있던 풍부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입장한 초등학생들


초등학생들은 퇴장하고 남아 있는 학교의 깃발들

 

39명의 초등학생들이 무대 안쪽에 촘촘히 도열하자, 인디언 복장을 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오더니 앰프를 통해 울려나오는 배경음악에 맞추어 가냘픈 목소리로 미국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가 차라리 쨍쨍하게 높은 목소리로 불렀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흡사 식민지배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소수민족의 가냘픈 아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배자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란! 글쎄. “비록 우리들이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땅도 빼앗기고 민족의 정체성도 빼앗겼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충실한 미국인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력한 가냘픔으로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내 마음에 전해져 오는 내 나름의 공감때문에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대표로 미국 국가를 부르던 인디언 어린이

 

점심 후 미국 서부의 실제 역사라는 패널 토의에서는 다양한 연사들의 의미 있는 발표들이 이어졌다.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크리슨 박사[Dr. Kristen Oertel]의 사회로, 스테이튼 아일란드 대학[College of Staten Island] 지리학 교수인 드보라 박사[Dr. Deborah Popper]서부 지역 환경사: 바람 속에 쓸려간 옛 약속들[Western Environment History: Old Promises in the Wind]”, 아칸사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 역사학과 교수인 엘리엇 박사[Dr. Elliot West]휘청거리는 인디언들과 실제 인디언들[Reel Indians and Real Indians]”, 노쓰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Northwe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역사학과 교수인 로저 박사[Dr. Roger Hardaway]서부지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각각 발표했고, 박물관 전시물들을 관람한 뒤 각계의 저명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임으로써 주최 측이 애당초 내건 서부지역의 미래[The Future of the West]”라는 세미나의 마감 타이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패널리스트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 받은 인물은 변호사, 인디언 부족 판사, 학자 등으로서 종교적 자유, 죄수들의 권리, 수자원 권, 조약의 권리 등을 포함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30여년을 노력해온 포니족(Pawnee) 출신의 명사 월터 씨[Mr. Walter R. Echo-Hawk]였다. 인디언들이 받는 법의 보호와 한계에 대한 그의 설명을 통해 이 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드보라 박사의 강연 제목


점심이 차려진 길크리스 박물관의 비스타 홀(Vista Hall)


식사를 마치고 발표를 듣는 각국의 학자들


패널리스트들의 클로징 토론을 듣고 있는 학자들


학자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받은 포니(Pawnee)족 출신의 Walter Echo-Hawk씨


토론 후 학자들과 함께 한 월터씨

 

마감 패널 토의가 끝난 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로비에서 삼삼오오 저녁식사를 초대한 호스트와 만나 호스트의 차로 각자의 가정이나 레스토랑으로 흩어져 갔다. 대개 한 사람의 호스트에 2~4명이 배정되었는데, 나를 초청한 호스트는 바로 첫날 나를 픽업해준 자원 봉사자 클라크[Clark Frayser]씨였다. 첫날 그의 차를 타고 호텔로 오면서 그의 한국 방문 경험과 한국에 대한 호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미국인으로서는 지나치다 싶게 소탈한 점이 처음엔 의문이었다.

 


패널 토론장에서의 클라크 씨[Mr. Clark Frayser]

 

다른 호스트들과 달리 나 혼자만을 초청한 이유를 묻자 한국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10년 전 한국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서울에서의 즐거웠던 체험, 현대자동차와 포항제철 등에서의 놀라웠던 체험, 비무장 지대 땅굴에서의 긴박했던 체험 등등 한국에 대한 추억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또 다른 미국인들과 그의 분위기가 다른 이유를 묻자,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혈통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인 할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언 할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자신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50%의 체로키 족 피를 갖게 되었고, 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자신이 태어났으므로 자신은 40%의 체로키 족 피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순수 유럽계 백인들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이혼 후 만나 함께 살고 있는 걸프렌드(girl friend)’가 저녁에 일을 하므로 집에서 식사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다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서 꼭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클래식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후자를 선택하자 지체 없이 출발하여 30여분 뒤 도착한 곳이 산타페(Santaf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호스트이든 게스트이든 대개 클래식한 분위기만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산타페의 이색적인 분위기에 놀라게 되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땅콩을 껍질째 볶아 한가득 넣어놓은 통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릇에 그득그득 담아갖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함부로 껍질들을 바닥에 버리곤 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술들이 진열장에 가득했고, 손님들 대부분이 음식과 술을 함께 마시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기준의 미국 레스토랑은 아니었고, 클라크씨는 그 점을 내게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천정 장식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산타페에서 돌아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클라크씨
 

 

다른 곳보다 비교적 맛있었던 스테이크와 몇 잔의 맥주를 마신 뒤, 우리는 거기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여 내가 미리 마련해간 하회탈 선물을 내밀자, 뛸 듯이 기뻐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선물을 가져왔으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가 불쑥 선물을 내미니 우선 놀란 것 같았고, 그 선물이 [mask]’이라는 점에 또 놀란 듯 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이메일로 미리 받아본 프로그램에 가정 초대 만찬[Home Hospitality Dinners]’이란 내용이 있음을 알고, 혹시 몰라서 미국에 올 때 준비한 선물들 가운데 하회탈을 갖고 온 것이었다.                                         

                                                                                      



클라크 집의 안쪽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체로키 문장

"
거실 등 클라크 씨 집의 내부


거실


거실에서 백규


클라크 씨의 딸

 

내가 큼지막한 하회탈을 건네자 깜짝 놀라며 다짜고짜 자신의 서재로 나를 끌고 갔다. 그런데 한쪽 벽면이 각종 탈들로 가득한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는 탈 애호가였던 것이다. 체로키 탈, 중국 무희 탈, 일본 가부키 탈 등 다양한 탈들이 걸려 있는 사이에 아이들 조막만한 하회 각시탈도 걸려 있었다. 그곳에 대감탈만 빠져 있었는데, 바로 내가 그걸 갖고 온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절묘한 선물이었다. 말 그대로 뛸 듯이기뻐하는 그의 모습이란!

 


                                   내가 건넨 선물을 들고 서 있는 클라크 씨 

 

그의 안내로 집안을 두루두루 구경했는데, 온통 체로키 유물 일색이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정신이 집안에서 묻어나온다고 할 정도로 좁은 집안에 그득한 그림, 공예품, 사냥도구 등 유별난 컬렉션이었다. 자신의 가계도[family tree]를 보여주며 체로키와의 인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로키 혈통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만은 아껴두기로 했다. 그는 이 지역에 자신을 포함, 체로키 등 인디언 혼혈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고 강조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는 우리가 지난 3일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인디언 문화의 표본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부이긴 하지만, 주류의 미국인들이 감추며 살아왔을 혼혈의 사실을 흔들며 자랑하는 것은 다민족다문화의 공존과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의식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아닐까.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공예가의 목각(모기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만든 작품)
 

 


                    자신의 거실에서 체로키 사냥법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클라크 씨
 

 

    ***

세미나 셋째 날.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강당에서 설파한 미래의 서부는 배제나 차별 아닌 공존과 포용, 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을 것이고, 클라크 씨는 그 사례로서의 자신을 내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끌벅적한 산타페에서 체로키 식(?)을 가미한 식사를 대접했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일부분이나마 체로키 생활양식을 보여준 것이나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과연 공고한 레이시슴(racism)의 벽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지, 역사의 진행이 항상 순조로운 방향만을 타게 되는 것인지 등등.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 작은 희망이나마 갖기로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30. 07:46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2일차-대초원[Tall Grass Prairie]에서 멋진 울음 터를 발견하고

 

 

 

 

연암 박지원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요동벌판을 만나자 멋진 울음 터로다. 크게 한 번 울어볼 만 하도다!”라고 소리쳤다. <<열하일기>>의 이른바 호곡장(好哭場)’이 그것.

 

8시에 버스 두 대에 분승한 우리들은 2시간여를 달려 드디어 광활한 초원으로 들어섰다. 작은 키, 중간키, 큰 키의 각종 풀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에 깔려 있고, 저 멀리 검고 흰 소떼가 대지에 주둥이들을 박은 채 풀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간이 관목지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온통 풀밭이었다. 미국인들이 ‘Tall Grass Prairie’[이하 ‘TGP’로 약칭]라고 부르는 자연 초지(草地)였다. 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드문드문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서 있고, 땅 속에서 퍼낸 원유와 가스를 저장하는 탱크들도 보였다. 말하자면 땅 위에는 달디 단 젖과 고기를 만드는 영양 만점의 풀이 그득하고 땅 밑에는 인류문명을 지탱하는 또 다른 젖인 원유가 고여 있으니, 이 나라는 대체 어찌하여 이런 복을 타고 났단 말인가.

 


Tall Grass Prairie Preserve 표지판과 뮤지엄

 


털사 시티와 오세이지 보호구역 및 톨그래스 프레이리가 나온 지도

 

연암은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알고, 칠정(七情) 모두에 울 수 있다는 건 모른다네.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지.울음이란 천지간에 우레와도 같은 것. 지극한 정이 발로되어 나오는 것이 이치에 맞아든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다. 기뻐도 슬퍼도 울 수 있는 것은 연암 뿐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가 대초원울음 터로 생각한 것은 나의 왜소함을 비웃는 듯한 그 광활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허허로운 듯한 외피 속에 그득 담긴 가멸찬 풍요, 그리고 그로부터 느끼는 상대적인 빈곤이 둘째 이유였다. 60 가깝도록 손바닥만한 풀밭에서 소꿉장난하듯 살아온 인생의 눈에 광대한 대초원에서 느끼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바로 내 울음의 근원이었다. 연암도 그랬으리라. ‘들판에서 해가 떠서 들판으로 지는그 요동벌판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가난하고 좁디좁은 조선 땅과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 무리


대초원 저편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흰소와 검정소들


대초원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는 long horn cows

 

***

 

두 대의 버스는 호텔로부터 두 시간 가량 달려 TGP로 들어섰다. 까마득히 넓어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대초원. 안내자로 나선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들으며 초원 사이로 난 트레일을 느릿느릿 달리는 버스의 창을 통해 그 넓이를 마음으로나 가늠할 뿐이었다.

 

오세이지(Osage) 카운티에 속해 있으며, 포허스카(Pawhuska) 다운타운으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한 TGP. 초원 보호구역으로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역사의 현장이자 유물인 셈이다. 원래 텍사스로부터 마니토바(Manitoba)까지 14개 주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도시의 확장과 농지의 전용으로 남아 있는 공간은 원래에 비해 겨우 10% 정도라 한다. 엄청난 크기와 기괴한 표정의 검정 소 바이슨(bison)들이 무리를 지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생태공간이다.

 


                                           톨그래스 프레이리 구역도       

 

TGP의 관문인 포허스카는 19세기 이래 오세이지 부족의 중심역할을 해온 도시인데, 오세이지 족은 갠자스에 있는 보호구역의 땅을 팔고 포허스카를 둘러싼 땅을 새로 사들였다고 한다. 지나면서 얼핏 보기에 새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이 구역의 오세이지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석유의 발견으로 그들은 농업과 목축으로부터 벗어나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 그룹들 가운데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오세이지 족은 자기들 땅의 광물 채굴권을 갖고 있으며, 특히 석유와 가스는 오세이지 부족원들 뿐 아니라 그들 영역 안에 사는 다른 부족원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수입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TGP 1986년 이래 오클라호마의 웅장한 자연경관과 독특한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해 온 미국의 자연 보호 단체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만들어졌다. The Nature Conservancy의 오클라호마 지부가 총면적 77,000에이커[120평방 마일]에 달하는 12개의 보호구역을 소유하거나 돌보고 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TGP에 들어선 우리는 바이슨 루프(Bison loop)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바이슨 관찰에 나섰다. TGP 본부 사무실보다 4~5마일 앞선 곳에 까마득한 넓이의 면적이 원형의 트레일로 구획되어 있는 곳이 바로 바이슨 루프였다. 풀이 없는 겨울 동안 녀석들이 먹을 건초 덩어리들을 쌓아놓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앞마당에 모여 있던 수십 마리의 바이슨들이 우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곤 길 건너 풀밭으로 슬금슬금 피해가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녀석들은 길을 건너가면서도 우리 쪽을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무어라 투덜대는 게 분명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불만이었을 텐데, 만약 우리가 다급하게 뒤쫓았다면 그 무서운 뿔을 곧추 세우고 덤벼들 것 같은 위기를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저 멀리 초원 한복판으로 몰려간 바이슨들은 길게 1자 대형을 유지하며 지평선으로 접근해갔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가물가물 멀어지다가 그들의 대열이 지평선과 합치되면서 우리는 자리를 떴다.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borrowed from Google.com)


우리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바이슨 무리


바이슨들이 물러난 자리에 남겨진 엄청난 거름

 

한때 개체 수가 3천만 마리를 상회하던 바이슨은 대초원의 왕이었다. 어깨 높이 180cm1톤이 넘는 체중을 자랑하는 웅장한 체격의 바이슨.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 규모로 떼를 지어 초원을 배회하는 바이슨은 결코 식물이나 토양을 황폐화 시키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적당히 먹고 계속 움직여 뜯어먹은 곳의 식물을 다시 복원시키기 때문이다. 1800년대 후반에는 1000 마리도 남지 않아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보호에 힘입어 현재는 약 35만 마리 정도로 불어났다고 한다. 멸종의 위기는 벗어난 셈이고, 15000마리는 미국 내 공공의 땅에서, 나머지는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사유물로 각각 관리되고 있었다. 지금 The Nature Conservancy는 생태 시스템 복원작업의 한 부분으로 보호구역에 바이슨을 재입식해오고 있는데, 우리의 버스들이 바이슨 루프에서 시속 10마일로 서행한 것도 바이슨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안내원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이슨 무리를 좇고 있는 각국의 학자들


인도의 탁월한 농학자 파트로 교수와 함께

 

사실 이 지역에 바이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감에도 야생화들은 화려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기이한 종류의 풀들이 그득했다. 갖가지 새들은 지천으로 날아다니고, 여우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의 개체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TGP 조성 이후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아 수질과 토양이 개선되면서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빚을 최소한으로라도 갚고 있다는 증거였다.

 

***

바이슨과 이별한 우리가 점심식사를 위해 멈춘 곳은 TGP Research Center였다. 그곳에는 우리의 점심 도시락을 싣고 온 트럭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배분된 샌드위치 속의 바비큐가 바이슨 고기인지 묻고 싶었으나, 바이슨들의 표정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오클라호마 음악에 미친 복합문화적 영향[The Multi-Cultural Influences of Oklahoma Music]”이란 제목의 강연 겸 공연을 접하게 되었다. 강사는 Dr. Hugh Foley[Professor of Fine Arts at Rogers State University]였고, 그 아들이 특이한 복장으로 나와 인디언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새로운옛날 음악을 새파란 젊은이로부터 듣는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부자가 음악으로 통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이론으로 설명하면 아들은 타악기로 직접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TGP 리서치 센터 강당에서 공연 중인 휴 폴리 교수의 아들


휴 폴리 교수와 그의 아들

 

분명하진 않으나 노래들의 가락이 우리의 전통음악과 상당히 유사하여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설명하고 들려준 건 Red Dirt Music. 우리말로 번역하면 황토음악쯤 될까? Red Dirt Music은 오클라호마에 흔히 보이는 누런 흙에서 그 이름을 얻은 음악장르라 한다. 원래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가 Red Dirt Music의 중심으로 알려져 왔는데, 텍사스에도 Red Dirt Music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한때는 두 장르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2008년부터 그 차이가 소멸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음악, 특히 원시음악과 Red Dirt Music을 비교한다면,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연 내내 드는 것이었다.

 

점심 겸 공연이 끝난 뒤 랜취 하우스와 뮤지엄, 초원 사잇길 등을 거쳐 들른 곳이 오세이지 박물관[Osage Tribal Museum]이었다. 도착하니 그들은 이미 우리를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연사는 Kathryn Red Corn.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으로서 오세이지 족 출신의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오세이지 족의 역사와 TGP에 대한 부족의 흥미'를 주제로 30분 이상 차분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나는 현재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는 어떻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앞으로 얼마나 부족의 정체성[tribal identity]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나 ‘Government 차원에서 다른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것, 각종 민속행사 등을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등 매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을 뿐, 그런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Dr. Cheryl Matherly와 함께


Tall Grass Prairie 뮤지엄 앞에서

 

미국 최초의 인디언 부족 박물관인 오세이지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의 전통에 따라 생활해왔거나 현대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오세이지의 역사, 전통, 관습 등에 정통한 사람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원들의 역사를 기념하거나 그것들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1년 내내 많은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의 대표란 사람이 전통복장으로 행사장에 앉아 있었지만, 흡사 쇼윈도에 앉아 있는 마네킹처럼 생기 없이 인디언 부족의 미래를 대변하는 듯 했다.

 


오세이지 박물관(The Osage Tribal Museum)


오세이지 박물관에서 만난 공주(2013년 선발), 부족대표, 여성명사


오세이지 박물관 안에 붙은 그림


오세이지 박물관 벽을 채운 오세이지족 인물들


오세이지 족이 분배 받은 땅(지적도) 


오세이지 족의 대표와 함께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 Kathryn Red Corn과 함께


TGP에서 석유를 채굴하던 옛날의 채굴기(오세이지 박물관 뜰)

 


오세이지 부족 사무소 앞에 세워진 기념 표지판

 

***

 

시간의 단층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역사의 뒤안길을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주파한 셈이었다. 대초원에도, 바이슨의 눈빛에도, 인디언들의 마음에도 그들 과거의 기억들은 화석화 된 채 촘촘히 박혀 있는 듯 했다. 지혜로운 후세의 누가 있어 정을 들고 그 화석들을 캘 날이 있으리라. 종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할 유전자가 그 화석들 속에서 검출되고, 종국엔 이 땅에서 사라진 영광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초원과 인디언들이 내게 주는 무언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사라지겠지만, 내일을 위한 씨앗 정도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오늘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강하게 느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8. 23:55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래의 꿈을 찾다!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제1일차-치밀한 미국인들

 

 

 

 

풀브라이트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미국 내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들에 체류하고 있는 학자들은 기간 중 최소 1회 이상 34일의 발전 세미나에 참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최근 나는 미리 3회까지의 시기와 주제만을 알려 준 다음, 신청을 받아 배정하는 풀브라이트 측[CIES(Council for International Exchange of Scholars, 국제 학자 교류 위원회’) Enrichment Seminar Team]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광대한 미국 땅에서 미리 장소를 알려 준다면 대개 한쪽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고안해낸 지혜였을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옛날의 서부에서 새로운 서부로: 미국 스토리의 형성에 기여하는 땅의 역할 [Old to New West: The Role of Land in shaping the American Story](10/23-26)

2. 법의 지배: 인권과 정의[Rule of Law: Human Rights and Justice](11/20-23)

3. 사회적 기업가 정신: 혁신하는 비영리 단체들과 발전하는 공동체들[Social Entrepreneurship: Innovating Nonprofits Developing Communities](2014 3/19-22)

 

모두 유익했으나, 그래도 나와 가까운 쪽은 1번이었다. 1번을 1순위, 2번을 2순위로 선택하여 신청했으나, 1번의 지원자가 많아 부득이 나를 대기표에 올렸다는 연락이 왔다. 어쩔 수 없이 2번으로 갈 각오를 하고 있던 차 928일에 털사 전 지구 연합[Tulsa Global Alliance, 약칭 TGA]’에서 이메일이 왔다. 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번을 주제로 자신들이 이번 세미나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신청할 사람은 하라는 연락이었다. 대기표에 올려놓았다던 나에게까지 연락한 것을 보면, 막상 뚜껑이 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오클라호마의 털사시티(Tulsa City)가 세미나 장소임을 알게 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나로서는 사막 속의 단비인 셈이었다.

 

스틸워터에서 차를 몰고 달리면 1시간 남짓 걸리는 털사가 아닌가. 어차피 풀브라이트에서 비행기 표를 비롯한 모든 비용을 대 주는데 이왕이면 여행하는 셈 치고 먼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으냐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썩 좋지도 않은 미국 비행기들을 갈아타면서까지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무엇보다 1번 주제가 내겐 환상이었다. 1012TGA가 보내 준 Overview[행사개요]를 보고는 더더욱 가슴이 설렜다. 이 지역 인디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탐구가 세미나 내용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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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결정되면서 주최 측의 주도면밀함이 감지되었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참석자들[이번에는 40개국 70명의 학자들]의 교통편과 숙박 및 식사 주선, 세미나 장소 마련, 강사 및 패널리스트 섭외, 자원 봉사자 동원, 이동 차편 마련, 현장 견학 등 행사 전반의 일정을 짜고 조정하는 일들일 텐데, 사실 가까이에 사는 내가 오히려 쉽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 표를 사서 보내주고 공항에 픽업을 나가면 그만이지만, 내 경우는 나 스스로 차를 몰고 가거나 주최측이 누구를 보내서 라이드를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 차를 몰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규정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TGA의 행사 책임자 Bob Lieser씨와 이곳 역사학과 학과장 사이에 몇 번의 이메일이 오고 가는 것 같더니 최종적으로 내게 이메일이 왔다. 스틸워터에 있는 OSU 메인 캠퍼스와 OSU 털사 캠퍼스를 왕래하는 셔틀버스[Orange Big Bus]에 자리를 예약해 놓았고, 털사에 도착하는 대로 Mr. Clark Frayser가 픽업을 나갈 것이며,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오는 날엔 Dr. Ron Bussert가 스틸워터의 집까지 나를 태워다 준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통보해 주는 것 아닌가. 참으로 한 치의 빈 틈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이었다. 내가 만약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 경우, 참가자가 스스로 차를 몰고 오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규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이들의 자세가 첫판부터 범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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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310. OSU 털사 캠퍼스에 도착하니 클라크 씨가 차를 대놓고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로 호텔[Holiday Inn City Center]에 도착하여 등록 후 체크인을 한 것이 330. 방에서 쉬다가 5시 정각에 호텔 2층의 시마론 포이어(Cimarron Foyer)와 테라스 등에서 간단한 음식을 들며 참석자들끼리 환담을 나누다가, 버스를 타고 세미나 장소인 길크리스(Gilcrease) 뮤지엄[미국통신 12 참조]으로 이동했다.

 


TGA에서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준 일정표


세미나 기간동안 패용한 명찰


참가자들의 숙소[Holiday Inn City Center, Tulsa]

 


호텔 방에서 내다 본 털사 다운타운의 모습[가운데 첨탑 건물은 성가족 성당]

 

뮤지엄 강당에서 열린 행사의 내용은 환영사와 기조연설이었는데, 털사 대학교 세계교육 담당 교무 부처장인 셰릴 박사(Dr. Cheryl Matherly), 미 국무성 교육문화국 성인 프로그램 매니저인 레빈(David Levin) , IIE[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국제 교육 연구소]의 캠벨(Kristin Campbell), 털사 대학교의 길크리스 박물관 담당 부총장인 듀안 킹 박사(Dr. Duane King) 등의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환영사에 이어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론다 박사(Dr. James Ronda)로부터 미국 서부의 발견[Finding the American West]’이란 주제의 기조연설을 들었다. 그는 미국 서부의 광범한 역사를 소개한 다음 서부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핵심 장소로 오세이지(Osage) 카운티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넓은 의미의 서부, 특히 오클라호마가 갖고 있는 무궁한 현실적 의미와 한계를 설파했고, 우리가 내일 보게 될 Tall Grass Prairie[대초원, 이하 TGP로 약칭]가 갖고 있는 인간적물질적 경관의 의미를 이해해 줄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우연이겠지만, 그는 강연 서두에 오클라호마 주를 소개하면서 "Oklahoma State is taller than South Korea."라고 '콕 집어' 말했는데, 미국의 1개 주보다 작은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작은 나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기조발표를 하는 Dr. James Ro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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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우리는 박물관의 비스타 룸(Vista Room)으로 이동,하여 Rick Morton, Nathan Eicher, Isaac Eicher 3인조 스윙밴드(swing band)의 서부 지역 컨트리 뮤직인 블루그라스를 감상하며 첫날의 만찬과 대화를 즐겼다. 그 자리에는 오클라호마 지역의 풀브라이트 동문들, 털사 커뮤니티의 지도자들, TGA 관리 이사들, 기업 회원 등 많은 지역 유지들이 초대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색적인 인사가 바로 인디언 출신의 이 지역 최고 기업가 메슈리 박사[Dr. Dayal T. Meshri]였다. ARC[Advance Research Chemicals, Inc.]CEO인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반복하여 강조했다. 특히 현대자동차를 방문한 일과 부산에서 술을 마시던 추억을 크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소통의 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찬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3인조 밴드


만찬장에서 스리랑카의 학자 Dr. Asanthra, 인디언 출신 CEO Dr. Dayal T. Meshri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Dayal T. Meshri,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TGA 대표 Ms. Becky 및 Mr. Charles와 함께


만찬장에서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Cheryl Matherly, 털사대학교 한국인 학생 김세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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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만찬이 끝났다. 첫날의 몇 시간을 보내며 나머지 일정도 빡빡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미나 기간에 무엇을 배워야 할지 뚜렷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40개국에서 몰려든 70명의 학자들이 영어라는 기호 하나로 훌륭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영어와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느끼기 시작했고,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모든 일들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미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나와 우리의 쓸데없이 대범함에 일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 순간 톱니바퀴처럼 철저한 정확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대충 해!”라는 상투어야말로 나와 우리의 진로를 막는 커다란 돌덩어리임을 깨닫게 된 것은 세미나 첫날에 얻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