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8. 30. 16:31

    시베리아에서 사람들을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3 

                                                                                                                             조규익

 

 

 


차창 밖의 자작나무들

 


차창 밖의 자작나무들

 


차창 밖의 자작나무들

 


차창 밖으로부터 웅얼웅얼 자작나무들의 천년 넘게 이어져 온 대화가 들려왔다 

 


차창 밖엔 무료에 지친 자작나무들도 있었다

 


차창 밖의 잣나무들

 


간혹 잡목들이 공존하는 곳도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마을

 


들꽃

 


호숫가의 작은 집들

 


마을을 빙 둘러 흐르는 강

 

 

 

시베리아에서 사람들을 보았네!

 

                                                                                                                             조규익

 

횡단열차는 수 없이 많은 작은 역들을 거쳐간다. 우리는 간혹 10~30분간 정차하는 경우 내려서 스트레칭도 하고, 맑은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시기도 하며, 산 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보기도 했다. 어느 나라나 산간 마을들에 윤기가 흐를 수는 없는 법. 러시아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무얼 해먹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논뙈기 밭이랑 하나 보이지 않았고, 온통 한대성(寒帶性) 수림(樹林) 뿐이었다. 그래도 간혹 만나는 노점상들의 좌판에 각종 과일들과 빵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걸 보면, 아마 이곳에도 농업이란 게 있는 건 분명했다.

 

여행자에게 열차의 시간도보의 시간은 다르다. 도보의 시간이 절망과 체념의 시간이라면 열차의 시간은 희망과 구원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걷다가 보면 그 길의 끝없음에 절망하고, 그냥 얼마간 살다가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는 공간이 시베리아임을, 나는 열차에 오르는 순간 깨달았다. 절망의 소련인들이 마지막으로 잡은 끈이 횡단열차였고, 그 횡단열차가 생김으로써 산간벽지에 절망과 체념의 터를 닦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춰준 건 아닐까. 물론 그 희망이 구원으로 이어지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맞다, 탈출이다! 내가 그랬다. 손바닥만한 한반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탈출을 꿈꾼 나였다. 십대 중후반, 이를 악물고 탈향(脫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탈출할 수 없는 지금, 깨달았다. 그 절망의 고향 언저리에서 아직도 서성대고 있음을. 아니 오히려 그 어린 시절의 절망을 한 톨도 깨부수지 못한 채 그 고향의 자장(磁場) 안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그래서 어쩌면 그 고향의 절망 속에 늙은 몸을 잠근 채 가뭇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왜 먼 길을 가는 걸까?

 


미움과 사랑을 한 그릇에 싣고

 


끝없는 길

 

누구나 짊어지고 가는 그 천형(天刑) 같은 운명의 짐을 이곳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멀리 보이는 시베리아 인들의 얼굴에서 보았다. 좌판에 늘어놓은 오이나 수세미들처럼 얼굴에 굵은 주름을 잔뜩 얹은 아줌마들이 알 수 없는 러시아말을 뚜르르~’ 굴리며, 깜짝할 사이에 떠나버릴 이국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는 곳이 시베리아였다. 가본 적도 없는 원동에서 모스크바까지, 아니 유럽, 중국까지 몸만 실으면 데려다 줄 횡단열차 역의 바로 앞마을에 살고 있지만, 그런 곳들을 여행할 생심이나 낼 수 있으랴! 그래서 그 옛날 유형(流刑)의 최종 공간이 바로 여기 아니던가? 검푸른 타이가에 한 발만 들여 놓으면 호랑이, 불곰, 늑대 등 온갖 맹수들이 들끓던 곳. 그러니 사람의 법보다 자연의 법이 우선하던 곳이었고, 지금도 거기서 그리 멀지 않으리라.

 

횡단열차를 타고 가며 고려인의 고통보다 시베리아 인들의 우수(憂愁)와 운명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고, 내 것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저 검푸른 타이가에서 태어나 졸졸 흐르는 샘물과 자연이 주는 양식을 먹으며 살다가 다시 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저 광대한 타이가의 한 복판에 문명을 대입해 보아야 우리네 도회(都會)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계속)

 


끝없는 숲, 그리고 강

 


무료한 강과 숲

 


가끔 구름도 비춰주는 강

 


지천으로 널린 시베리아의 잣

 


숲속의 흑진주, 블루베리

 


억척스런 러시아 아줌마

 


이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노점상들의 소박함

 


젊은 노점상

 


시베리아의 꿀, 술, 차...

 


잃어버린 우리의 오이 맛이 그곳에 있었네!

 


이들이 타이가에 서식하는 곰들이렷다!

 


시베리아의 이반차이를 만드는 꽃풀이랍니다!

 

Posted by kicho
알림2013. 8. 2. 16:47

 

 

전공 분야의 우물 깊은 곳에서 만난 새로운 영역들 … “작은 것에도 의미가 있죠”

-박태일·조규익·박정규 교수의 어떤 시도들-

                         

                                                              

                                                                                                                                    윤상민 기자 <교수신문>    

 

 

시 전공자의 지역 문학 연구, 고전문학 전공자의 고려인 한글문학 연구, 신문방송 전공자의 시 전집 편역…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종래의 국문학 연구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도서출판 경진 刊)을 발간한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刊)를 상재한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단재 신채호 시전집』(기별미디어 刊)를 내놓은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그 주인공이다. 자신의 주 전공 분야를 가로질러 새로운 분야에 발을 딛는 이들의 작업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3, 5월에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을 발간한 박태일 교수의 작업은 지역문학총서 시리즈 15, 16권이다. 말하자면 지역문학연구의 일환으로 시작한 셈이다.

 

박 교수는 오랫동안 계속됐던 일국주의 문학연구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로 지역문화연구를 시작했다. 기존의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거나 도태됐던 중견 작가나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우리의 민족문학이라는 큰 전통 속에 남기고 복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던 지역작가 발굴 사실 박 교수의 지역문화 연구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경남·부산 지역을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역문학연구>라는 학술지를 14집까지 낼 만큼 열정적으로 매달렸지만, 학술진흥재단의 변화로 원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중단됐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지역문학회(회장 김동근 전남대)를 창립하면서 그의 연구는 오히려 전국권으로 확대됐다. 제주, 전남, 충청, 인천에서 뜻을 같이 하는 교수들이 뭉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로 <한국지역문학연구> 총서를 2권까지 발간했다.

 

그렇다고 경남, 부산지역의 연구가 미진해진 것은 아니다. 이번에 출간된 15, 16권에 이어 그의 예전 작업들의 결실이 계속해서 총서로 출간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과 그 과정 속에서 뜻을 공유한 이들의 활동은 이렇게 한국지역문화연구의 풍성한 열매로 맺히고 있다.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지역 문학을 연구하면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작품의 상업성이 떨어져서 출판이 매우 어렵다. 입력부터 편집, 교정까지 주변 지인과 제자들과 함께 알음알음 하고 있고, 출판에 따른 모든 부담도 편역자 본인이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HK사업이니 BK사업은 그들의 작업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번에 출간한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무궁화』에 그가 부여하는 의미는 뭘까. 경남 지역의 중요한 작가의 발굴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美文主義의 전통을 가진 한국 시조의 전통과는 다른 사회학적인 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엮어낸 『소년소설육인집』 은 1920년 자생적 계급주의 문학을 몇몇 문학가가 독점했다는 국문학계의 통념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동문학, 지역문학가의 저변을 찾아냄으로써 계급주의 문학에 대한 반성을 시도했다. 올해 출간될 총서 17권은 1950년 이전까지 부산지역에서 나왔던 동인지에 대한 연구다. 잊힌 혹은 뭍힌 매체를 발굴해내기 위해 오늘도 연구실 불을 밝히는 박 교수는 말한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인 1, 2 세대의 한글문학은?

 

해군사관학교, 경남대를 거쳐 현재 숭실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규익 교수. 그는 지난달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펴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고려인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했다.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돼야 한다’는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 오랜 디아스포라의 고됨으로 우리 말과 문학과 역사를 잃은 고려인 2, 3세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그는 이 책에서 풀어놨다.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었다.

 

조 교수는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을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도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피해 이주한 고려인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됐고,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조차도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구소련 해체 후, 각 공화국들이 독립될 때도 ‘새로운 주변인’일 뿐이었다. 꿈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지만, 이곳 역시 그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 조 교수는 3년의 긴 여정 끝에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해냈다.

 

학부에서는 정치외교학을, 대학원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지난 2월 펴낸 『단재 신채호 시전집』도 그의 광범위한 연구 이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청주대 교협회장 당시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다 해직되기도 하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그의 연구 지평은 계속해서 확장돼 가고 있다. 당시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번역 1기생인 그는 박사과정에서 조선왕조시대의 신문을 연구했던 신문방송학자는 지역 언론, 한국신문학사 등의 연구 속에 1999년 신채호를 만났다. 단재가 지은 시가를 새롭게 발굴하고 기존에 발표됐던 국문시, 시조, 한시들을 정리해 『단재 신채호 시집』을 출간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신채호에 푹 빠져있다. 개화기 암울한 민족적 시련기에 활발한 언론활동과 독립운동, 아나키즘 운동에 매진했던 단재는 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그의 주옥같은 시들 역시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뒤켠으로 사라졌다. 박 전 교수는 신체시의 효시로 불리는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11)보다 훨씬 이전에 단재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적지 않은 시가를 발표했으며, 한시나 새로운 형식의 시가를 소개함으로써 전통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이를 변용해 근대적인 시가를 모색해냈음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학문이란 이처럼 전공 분야의 우물을 깊게 파내려가며 만나는 수많은 학문의 뿌리들이 뒤엉켜 더불어 뻗어나가는 굵은 뿌리처럼, 결국 하나의 학문이란 이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다음 저서가 궁금하다. <교수신문 2013. 7. 29. 3면>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