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2. 26. 07:34

 

새내기 OT에 다녀오며

 

 

 

                                                                                                                        조규익

 

 

 

매년 이맘때(2월의 마지막 주)면 대학 본부가 주최하는 새내기들의 OT 모임이 있다. OT‘ORIENTATION’의 약자일 터인데, 서양의 대학들에서 기원한 Student Orien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새내기들에 대한 환영과 대학생활 안내, 새내기들과 교수 및 선배들의 만남, 새내기들 간의 친목 도모 등 다양한 목적과 내용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3천명 넘는 신입생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없으니, 각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열리게 된다. 올해 인문대학 OT는 포천의 한화리조트에서 있었고, 교수들은 그곳으로 가서 새내기들을 만났다.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부푼 갓 20의 젊음들이 텅 빈 계곡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으며, 나도 새내기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 그들 사이엔 45년 전 새내기였던 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5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시골 소읍(小邑)에 있던 모교의 OT 장소는 부속고등학교 강당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진행되던 당시의 OT가 내겐 참으로 씁쓸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었다. 객지에서 겨우 잡은 자취방은 주인집 뒤쪽의 쪽문으로 통하는 곳에 있었고, 주인은 아예 한 번 와보지도 않았다. 방세를 내기 위해 안채를 방문하면 받아 든 돈의 액수만 확인한 뒤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말을 섞을 필요도 섞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취방의 연탄온돌은 좀처럼 데워지지 않았고, 그 해 마침 연탄파동으로 연탄가게는 늘 텅 비어 있었다. 하루에 한두 덩이씩 연탄을 사서 새끼줄에 꿰어들고 언덕마을 자취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연탄이었던지라, 부엌에 갖다 놓아도 불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고, 가까스로 불이 붙어도 고약하게 만들어진 구들장 탓으로 방 안엔 온기가 돌지 않았다. 밤새 참새새끼처럼 떨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겨우 식사를 해결한 뒤 찾아가던 OT 장소.

 

‘4년 동안 이렇게 지루한 강의가 진행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겁을 주려는 행사가 OT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강당을 빽빽하게 채운 410명의 새내기들은 지루하게 짜인 강의들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웅성거리는데, 하루 일정이 끝나고 냉방으로 들어갈 생각에 나 혼자만 우울했었다. 그렇게 대학 새내기 시절의 OT는 내 회색빛 추억의 폴더에 지금까지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으레 회상하고 싶지 않은 회색빛 추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어서일까. OT 때만 되면 가급적 현장에 가지 않으려 꾀를 내곤 한다.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는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라진 내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미 6학년을 넘어섰고, 강의실 밖에서 요런 젊음들과 가까이 할 날들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들에게 꿈을 물었다. 대답은 국어교사, 아나운서, 출판 편집자, PD, 작가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없다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겠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나라가 아니니, 애당초 그들 내면의 현주소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진다./ 장래에 무슨 일로 입신(立身)할 것인지는 앞으로 결정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시야를 갖기 위해 지금 당장 하루-한 달-한 학기-한 해-대학 4-일생에 걸친 자신만의 시간표를 짜야 한다./ 그 시간표는 수시로 수정되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표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예의 내 시간표론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일만이 대학생활에 성공하고 인생에 성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올해도 어김없이 역설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몇이나 내 말을 알아듣고 실천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둘려보는 수밖에.

 

OT장에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새내기 부모들의 얼굴이 자꾸만 밟혔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대학 공부를 발판으로 험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서바이벌해주기를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에 보내놓고 고관대작이나 재벌이 되어주길 소망하거나 자신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밥이나 제대로 먹고, 착한 남녀 만나 자식들 낳아 기르며, 소소한 행복이나마 누리며 살게 되는 것. 이른바 소시민의 행복이라도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 부모들의 바람 아니겠는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제자들에게 그걸 안겨주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자신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촛불 들고 광야에 나서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혁명의 전사로 만드는 게 정치인의 할 일인가. 고매한 이상이나 그럴 듯한 이념을 추구하기에 앞서 젊은 영혼들에게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게 교육자의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 막바지의 스산한 풍경이 우울한 내 마음에 끝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나마 이렇게 피곤한 육신을 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마저 내겐 사치스러운 일일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1. 13:58

이제 태극기와 촛불을 내려놓을 때다!

 

 

 

 

 

 

오늘, 31절이다.

 

식민제국주의의 대표적인 깡패국가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날 아닌가. 바로 오늘, 국민 전체가 촛불 부대와 태극기 부대로 나뉘어 광장의 결투를 벌인단다.

 

우로 갈려 피 터지게 싸우던 70여 년 전 우리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모양이다. 이른바 대권주자들이 대열의 앞장에서 선동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대신 선동의 칼을 휘둘러 표를 얻어 보려는 저들의 무책임이 가증스럽다. 저런 사람들이 국민과 국가를 대표하겠다니, 이 민족의 불행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존경하는 역사철학자 카(E.H.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왜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바로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아예 떠올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실들과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70년 전의 일인데,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우행(愚行)’에 대하여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러니, 똑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제, 이쯤 멈추어야 한다. 촛불은 끄고, 태극기는 고이 접어 잠시 상자에 모셔 두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하자!

 

시작이야 어떠했건, 지금 이 순간은 촛불과 태극기 모두 독선과 아집의 표상일 뿐이다. 독선과 아집은 시간 앞에 무력하다. 잠시 내면을 관조하고 나면 언제 그랬었냐 싶게 독선과 아집은 해 뜬 후의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시간 앞에 영속되는 건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삭여보자.

 

제발, 이제 치고 받는 싸움일랑 그치고 심판의 깃발에 따르기로 하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2. 14. 18:10

속물적 포퓰리스트 혹은 어설픈 마키아벨리스트들의 난장판

 

 

 

 

촛불과 태극기의 행렬이 주말마다 도심에서 경찰의 차벽을 사이에 두고 세를 겨룬다. 흡사 아프리카 늪지대의 하마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서로 더 크게 입을 벌려가며 우열을 겨루는 형국이다. 현직 대통령을 광장의 단두대에 매달고 그 앞에서 벌이는 들판의 싸움이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살벌한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대통령 되어 보겠노라고 나선 몇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 주변에 죽 늘어선 대열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 가운데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의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물들은 더더욱 볼만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광장에 모인 군중의 정치적 위임을 받은 자들임을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권력만 뺏으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바보들의 행진을 자랑스레 벌이고 있지 않은가. 국민을 대신하여 복잡한 나랏일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들 본연의 업무임을 잊어 버렸으니, 그들에게 정치인으로서의 지혜나 자격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군중의 대열에 파묻혀 들어가 자랑스레 사진들을 찍어 뿌리기 바쁘다. 흡사 나는 바보야!’ 희죽이 웃으며, 바보짓을 하는 그들이 참으로 가관이어서 슬프다.

 

그들은 국민이 거리로 나서기 전에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를 제대로 했어야 하고, 거리로 나서려는 국민들을 설득하고 다독였어야 한다. 국민이 나서기 전에 국민을 안심시키고 자신들이 싸움판에 들어가 얻어 맞으면서라도 잘못들을 바로잡았어야 한다. 사실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야당의원이라고 나라를 난장판 만들어도 되는면허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흡사 자신들이 잘 해서 국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라도 한 듯, 거리의 민중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저들을 보라. 심지어 서투른 선동술을 구사하며 그들을 차가운 광장으로 불러내기까지 한다. 사실 그들이 제대로바보이기나 하다면 나라를 위해서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은 교활하기까지 한' 바보들이라서 나라에 비극적이다. 그들은 왜 그럴까. 아마 그들의 눈엔 사람들이 모두 표로 보일 것이다. 언론에 자기 얼굴 비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그들을 보라. 추운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깨동무하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놓고, 며칠 후의 여론조사 수치에만 신경을 쓰는 자들이 이 땅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애당초 이들의 관심과 목표는 국사를 잘 다루는 데있지 않았다. 대통령과 여당이 죽을 쑬수록 이들은 쾌재를 부른다. 국민들이 힘들어 불만이 쌓일수록 이들의 얼굴엔 화색이 돈다. 그 엄청난 권력이 아른아른 손에 잡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반대와 비난의 목청만 높인다. 그것을 선명성혹은 야당 기질이라 착각하는 그들이다.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식민주의자들이 조선의 당파싸움을 부각시켜 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 심어줄 패배주의의 근거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저급한 생각을 '속물적 포퓰리즘(populism)'이나  어설픈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으로 합리화 하기도 한다. 이미 많은 지적들이 있어온 우리 정치인들의 속물적 성향은 너무 자명하여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후자의 성향에 대해서는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래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지배자의 여우와 같은 간사한 책략/사자와 같은 힘은 그 나름의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어, 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안목 없음과는 주소가 다르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에 휘황한 로마문명의 힘을 불러 일으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급이 높은계산이었다. 경우에 따라 도덕이나 정의보다 개혁이 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 가능한 일. 그래서 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를 마키아벨리즘으로 보는 것은 마키아벨리즘을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스트가 본다면, 우리 정치인들의 저급함에 깜짝 놀라지 않을까.

 

***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과 함께 어리석고 교활한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바꿔버리기 위해서는 촛불이나 태극기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민심의 방향을 제시하는  집단지성은 감성보다 냉철한 이성을 토대로 보다 굳건해질 수 있다. 냉철한 이성으로 방황하는 정치인들을 다그쳐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인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를 가르쳐 본 적도 요구해 본 적도 없다. 지금 촛불을 끄고 태극기를 접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2. 17. 13:51

대통령의 콤플렉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비판하고 질타하느라 여념이 없다. 단군 이래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단결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우스갯말로 못난 대통령이지만 국민들의 단결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만도 하다. 의정 단상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선량(選良)들 가운데 몇이나 돌을 던질 만한자격을 갖추고 있을 것이며, 촛불을 들고 나선 나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몇이나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어차피 물러날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쯤 우리는 그를 거울로 삼는 게 옳다그를 거울로 삼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있다.

 

비선(秘線)의 인물이나 조직이 국정을 농단케 한 일에 대해서는 입이 천 개라도 변명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불통, 여염집 여인에 의한 연설문 수정(혹은 대필),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에 대한 집착 등은 대통령의 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콤플렉스. 인간의 현실적 행동 및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이나 감정의 복합체가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을 비롯한 내면의 응어리 혹은 억압된 감정으로 구체화 되며, 이런 무의식은 대부분 개인차가 있지만, 간혹 집단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콤플렉스는 무엇일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주로 자란 대통령이 타고난 책벌레는 아닌 듯 하고, 순발력 있는 두뇌의 소유자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성장기 내내 생존경쟁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일까. 앎에 대한 욕망과 투지에서 평균치 이하이고, 그러다 보니 모든 분야의 지적 수준이 평균 이하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사에 실패했다고 비판을 받긴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대체로 우수한 인재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으면서 자자구구(字字句句) 사전이나 인터넷을 들춰볼 수도 없고, 초등학생처럼 사사건건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존감을 손상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모든 보고사항을 문서로 받아보고자 했을 것이다. 혼자 꼼꼼히 읽어가면서 자유롭게 사전이나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자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충분치 못한 지적 용량을 부하직원들 앞에서 노출시키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리라. 대면보고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 점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불통이란 비판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대통령 자신의 자존심만 지킬 수 있다면, 불통에 대한 비판 쯤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대통령의 특징이 바로 눌변(訥辯)이다. 공자는 欲訥於言 而敏於行(말에 있어서는 어눌하게 하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이라 했다. 공자의 언급대로 심사숙고 끝에 내놓는 말을 어눌하다고 한다면, 그 어눌함이 생각 없이 내뱉는 達辯(달변)’보다 훨씬 낫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대통령  뺨칠 만한 눌변이다. 사실 세상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말 잘 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첫판에 , 사기꾼이다!’라는 느낌이 전기처럼 전해져온다. 내가 목격한 사기꾼들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눌변이 결코 부끄럽지 않고, 대통령의 눌변을 그리 큰 흠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토론 때 야당 후보로 출마한 어떤 젊은 여자와 마주 앉은 모습을 TV로 지켜본 적이 있다. 그 젊은 여자는 참으로 말을 잘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내겐 입만 살아있는선동가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차라리 어눌한 대통령이 나았다. 그런데,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TV에 나와서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모두 달변가들이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말과 속셈이 대부분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잘 놀리는 혀가 그리 중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다. 차라리 자신이 말로 뱉어낼 콘텐츠의 부족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말솜씨 없음만 부끄러워한다. 그게 바로 해결할 수 없는 그의 어리석음이다.

 

대통령이 눌변과 함께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렬한 글 솜씨인 것 같다. 연설문 담당관에게 연설문을 받고서도 다시 최순실의 수정을 받은 이유는 뭘까. 최순실의 어투나 문장이 편했을 것이다. 잘 나고 뛰어난 사람들이 현학적으로 작성한 글보다는 통일은 대박식의 단문이 수준에 맞아 훨씬 맘이 편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 두 번 글 도움을 받다 보면, 스스로 글 쓰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글은 습관이다. 한 번 최순실에게 맡겨 본 대통령으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대필자 혹은 검토자를 다른 누구로도 바꿀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맘을 콕 짚어낼 수 있을까?’라는 찬탄을 보내며, 대부분의 연설문을 그녀에게 맡기는 동안, 대통령 자신의 글 솜씨는 점점 퇴보하고 말았으리라. 아니, 단 한 줄의 글도 제 손으로 써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니, 내로라하는 참모들을 대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면, 책이라도 열심히 읽고 짧은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자 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단 한 번도 국민들 앞에서 어눌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으며, 참모들 앞에서 단 한 점의 무식한 모습도 보여줄 수 없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것이 대통령 권위의 전부라 생각하여 아예 취임 첫날부터 대면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이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이다. 대통령만큼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와 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여성도 드물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신의 얼굴과 피부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역시 여성인지라 아름다움에 관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여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덕에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이 이토록 발전했겠지만, 대통령까지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각종 주사까지 맞아가며 피부나 머리 관리를 해야 했는지,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화장품 광고마다 화이트닝(whitening)’을 강조하고, 각종 주사제를 선전하며 어린애 같은 피부를 내거는 광고에 한국 여성들이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는 건 일견 당연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랏돈으로 각종 주사제까지 사들이고, 마구잡이로 비선의 의사들을 불러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와중에 불거진 사건이 세월호 7시간이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60 넘어 귀한 것은 내면의 덕이 내뿜는 광채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덕지덕지 바르고, 주사바늘로 밀어 넣어 팽팽해진들 그게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대부분 돈과 시간의 낭비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우스워지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부질없는 일로 국민의 기대와 공적 임무를 저버리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콤플렉스 탓이다. 그리고 그 콤플렉스는 그간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했거나 불건전했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처음부터 대통령에게 이런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비선을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비선이 없었다면, 국정농단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물론 죄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게 생겨난 내면의 암 덩이일 뿐이다. 형사법으로 다스릴 죄이기 이전에, 용한 의사들이 달려들어 정확히 진단을 내린 다음 뿌리를 뽑아야 할 병일뿐이다. 지금 우리는 불쌍한 환자 하나를 거리로 내쫓은 뒤 괜한 마음고생으로 뒤척이고 있는지 모른다대통령은 다중(多重) 콤플렉스 환자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추상같은 법의 단죄와 함께 치료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1. 30. 20:42

블로그의 빗장을 다시 열며

 

 

 

연구실의 오후. 나른함을 느끼는 찰나, 옛 제자로부터 까톡!’이 왔다. ‘이제 블로그에 글을 안 올리시느냐는 항의성 채근이었다. ,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구나!

 

한동안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대통령의 어이없는 비정(秕政)이 만인의 공분(公憤)을 불러왔고, 촛불의 행렬이 거리를 메우는 나날이다. 촛불을 들고 나가든, 촛불 대신 글을 적든, 무언가를 하는 게 옳았으리라. 그러나 저 휩쓸리는 인파 속에서 내 몸을 곧추세울 자신이 없고, 가슴 속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토해내려 책상에 앉아본들, 큰창자 저 밑에 똬리 튼 토사물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는 게 요즈음이다.

 

미개구착(未開口錯)!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봐야 부질없음만 절감할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이니,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큰 신문들을 통해 어쭙잖은 글 나부랭이들을 써내곤 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 같은 흙수저에겐 그의 등장 자체가 희망이었다. 그가 기득권층을 다독이며 이 땅 흙수저들의 입지를 다져 나가길 맘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나치게 말을 잘했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가끔은 할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거나 조용히 다른 쪽의 진영을 미소로만 대했어도, 그런 일은 피해갈 수 있었으리라. 아쉬웠다. 그러나 더 후회스러운 것은 나였다. 좀 더 진득하게 애정을 갖고 지둘려야했었다. 깊은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내며,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대는 데 일조를 보태고 만 나였다.

 

허탈함이 컸다. 말의 부질없음에서 오는 회한일 것이다. 적어도 밖을 향해서는 한동안 묵언(默言)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한두 달 사이의 일도 내겐 그와 같은 의미의 사건일 뿐이다. ‘말을 매우 잘함말을 되게 못함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두 사람.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구설(口舌)은 화환지문(禍患之門)’이라는 옛말을 입증하는 사례들일 뿐이다. 노 대통령은 말을 너무 잘해서, 박 대통령은 말을 너무 못해서 모두 화를 자초했다고 한다면, 현상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일까. 내 느낌에 노 대통령은 어느 경우에도 막힘이 없었다. 독서량도 많았다지만, 구변이 청산유수였다. 만약 그 구변의 70%만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반면에 박 대통령은 참 눌변(訥辯)이다. 오죽하면 별로 호감이 안가는 언론인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으로부터 베이비토크(baby talk)’란 비아냥조의 놀림마저 받았겠는가. 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펑퍼짐한 강남아줌마를 비선(秘線)의 스피치라이터로 쓰고 있던 일만 보아도 말을 못하는 데서 오는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촛불의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대통령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그 결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 할 터. 애시당초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자신을 망치고 국민을 힘들게 하며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니, 모두를 기만한 그 죄가 매우 크고 무겁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구약성서󰡕 잠언2813)는 성서의 구절. 그가 향해야 할 회개의 광야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가. 둔사(遁辭)와 은폐의 덫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더 이상 만인을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닫아걸었던 블로그의 빗장을 열고, 세상과 소통을 재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 버리고자 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