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4. 6. 07:20

교수채용 비리유감

 

 

 

 

 미국의 대학에 잠시 체류하고 있으면서, 교수 채용의 과정을 그 대학의 교수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채용 심사가 완료되기까지 대략 5개월 정도 걸리는데, 서류심사와 전화 인터뷰를 통과한 응모자들 가운데 채용 예정인원 몇 배수의 인원을 직접 불러다가 며칠 동안 벌이는 여러 차례의 대면 인터뷰, 발표회 등 그 심사절차가 자못 복잡하고 번거로운 점이 놀라웠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심지어 호텔 투숙 과정 및 식사시간에도 예리한 평가의 눈이 따라다닌다니, 교수 한 사람을 뽑기 위해 미국의 대학들이 투자하는 돈, 시간, 정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심상하게 던지는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두 체크한다는 것이었다. 개별 면담을 통해 응모자의 전공수준이나 향후 연구계획 등 응모자의 수월성을 평가한 뒤 교수들은 회의를 갖고 각자의 판단에 대하여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교수를 뽑는 과정이 끝나는 것이었다.

 

 교수 한 명을 채용하기 위해 학과의 교수들과 스탭들이 총동원되고, 학교 당국도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미국의 대학들이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신입생을 뽑기 위해 학교와 교수들이 홍역을 치르는데, 미국의 대학들은 교수를 뽑기 위해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좋은 교수들이 좋은 대학을 만들어 놓으면, 돈 들여 선전을 하지 않아도 학생들이야 제 발로 찾아오는 게 아닌가. 미국의 대학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당연했다. 공정하고 엄정한 심사를 통해 채용된 교수들의 수월성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나라 대학들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부끄러움과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

 

 지난 정권 시절 저지른 이웃 J대학의 비리들이 최근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관심도 없고 복잡한 사안이라 잘 모르지만, 그들이 받고 있는 교수 채용 상의 비리 의혹은 참으로 흥미롭고도 뻔했다. 보도에 의하면, 그 대학은 국악분야의 교수를 한 명 채용키로 하고 20142학기에 초빙 공고를 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야금 전공자, 음악이론 전공자, 영어 수업 가능자' 등의 조건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국내엔 단 한 사람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사람을 뽑으려는 꼼수였던 것이다. 거추장스럽게 새삼 검찰 수사까지 필요한 일이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던 몇몇 국악 전공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을 모아 그 대학과 함께 지금 혐의를 받고 있는 모 인사를 성토하면서도, 드러내놓고 반발하지 못한 점을 지금서야 깨닫게 되었다. 국악계 인사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잡아 본 게 아마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라는 그들의 자조 섞인 한탄을 당시에는 귓전으로 들어 넘긴 나였다. 그래, 불쌍한 교수 예비군들이 어찌 총장 출신의 청와대 수석에게 덤벼 들 수 있었으랴?

 

 그러나 그게 어찌 이 대학 이 분야만의 일일까? 모든 대학들이 학연/혈연/지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내 사람 심기[뽑기]의 카르텔과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고르는 안이함에 매몰되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자기비하일까? 자기 대학 출신으로 70~80%, 심지어 90% 이상의 교수를 뽑아놓고도 희희낙락하는 게 대한민국의 대학사회다. 모교 출신 비율을 법으로 제한하려 하자 학과가 다르면 된다고 강변하며 같은 대학 다른 학과 출신의 학자를 교수로 뽑는, 그런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놓고도 학문적 수월성을 강요하는 게 우리나라의 수준이다.

 

 교수를 뽑으면서 아예 자기 대학 출신은 서류도 내지 못하게 규정해 놓은 미국의 대학들을 본다면, 목하(目下) 진행되고 있는 대학 붕괴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이른바 나라를 경영한다는 자들이 거대한 카르텔의 중심이 되어 자행했다는 짓을 보며, 북한의 핵무기를 걱정을 하는 국민들이 우스울 뿐이다. 그야말로 이미 뿌리가 다 썩어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고사목이 저 산 너머에서 날아올 악동(惡童)의 돌멩이를 걱정하는경우가 아닌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3. 21:18
아, 교수들의 꼬락서니여!
-새 정부에 참여한 문제교수들을 보며-

                                                                           조규익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려면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언론과 인터넷 매체의 ‘무자비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얼핏 국회의 청문회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후보자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후자다. 검푸른 물 넘실대는 바다에 무슨 괴물이 숨어 있는지 모르듯, 넓고 깊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바다엔 어떤 ‘저승차사들’^^이 칼을 갈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공직에 임명받은 사람들이 도덕성으로나 지적 수준으로나 도토리 키 재기로 뻔한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장에서 대면한다 해도 그리 겁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일 테니 잘 닦인 언변으로 둘러대면 별 문제없으리라 믿고 있을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재야 지식인들이나 익명의 투사들은 참으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과연 자신들의 생업은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의문일 정도로 표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시시콜콜 뿌리까지 캐내고야 말지 않는가. ‘설마 누가 기억하랴!’ 싶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주례사나 연설문, 작은 칼럼까지 챙기는 그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중년 무렵에 그럴 듯한 자리 하나쯤 꿰차고 싶으면 입이나 손끝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자식 놈들 좀 나은 학교에 보내고자 슬쩍 옆 동네 친구 집에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등 ‘얄미운 짓’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동사무소, 세무서, 등기소, 출입국 관리소, 이발소, 수퍼마켓 등 ‘얄미운 대상’의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인터넷 바다의 투사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적당히 둘러대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된 세상이다.
이번의 경우 누가 교수출신 장관들의 표절문제를 들춰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의 바다에서 그들의 범죄행위가 속속 업데이트 되거나 베일을 벗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하나같이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른바 ‘잘 나가는’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탄식이 그 하나요, 비록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은 아니나 비리에 대한 사회적 응징을 목격하면서 갖게 되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과 안도감이 그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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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임명된 E여대의 김 아무개 교수, 청와대 수석으로 임명된 S여대의 박 아무개 교수 등은 그들 가운데 압권이다.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된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보니 두 사람 모두 해당 전공분야에서는 대단한 명망을 지닌 학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우러름의 대상이었을 것이요, 동학이나 선·후배들로부터는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은 그들을 얼마나  우대했을 것인가.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즉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격으로 그의 덕망은 더 이상 숨겨둘 수 없어 새 대통령에게까지 발탁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뛰어난 분들이 학계를 욕 먹이고, 한국 지식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도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십여 편이 넘는 저널들에 중복 투고했고, 박 교수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 한다. 중복 투고는 이미 노무현 정권의 김 아무개 장관 때 문제가 불거져 그를 사임으로 몰고 간 사건이기도 한데, 이번 사건은 그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 특히 중복투고를 통해 ‘연구비’를 꼬박꼬박 받았거나 그 논문들이 승진·재임용에 이용되었다면, 그것은 표절 이상의 비리일 수밖에 없다.
박 교수의 행위는 더 참담하다. 표절의 경우 대개 같은 반열에 있는 학자들의 글을 대상으로 하기 마련인데, 제자의 글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경우야말로 가히 해외토픽 감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002년과 2006년 두 건이나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니, 다시 무슨 변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튀어나올 것들은 없을까 우려하는 것이 과연 나만의 걱정일까.   박 교수는 “‘의혹을 받은 논문은 2006년 4월 제자보다 먼저 학회에 투고했고 게재가 8월에야 되었으며, 내 논문이 제자보다 먼저 나왔고, 이후에 제자에게 데이터를 쓰도록 허가해줬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다 한다. 데이터를 공유하면 분석의 문장까지 같아지는지 수십 년 간 논문을 써온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변명 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다.
논문의 선·후란 저널의 발행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논문 작성 과정의 일들은 알아야 할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두 논문의 문장들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발행일자가 다르다면 뒤의 것이 앞의 것을 표절했다고 판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기본 상식을 모르지 않을 박 교수가 어째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제자와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내용이 동일하게 되었다면 그런 사실을 각주로 밝혀 놓든가, 기자들의 추정대로 공동논문이라면 공저자로 제자의 이름을 넣든가,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진짜로 박 교수의 해명이 맞다면 그 제자가 박 교수의 논문을 표절한 것이 분명하니, 제자를 추궁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정신이 돌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제자가 학위논문 지도교수의 논문을 표절할 수 있겠는가. 제자가 지도교수의 논문을 ‘슬쩍 했다’기보다는 논문의 마감 시한에 쫓긴 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대충 ‘짜깁기’했다고 보는 게 정황 상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분은 제자들에게 아마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석사논문 쯤이야 대부분 학자들이 무시하는 현실이니, 들킬 염려도 없을 테고. 어차피 학계에 존재가 알려질 논문도 아니라면, 지도교수인 내가 좀 실례 하는 것도 그대에게 그다지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 라는 일방적 선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써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

이제 한국의 지식사회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한 편의 논문을 써서 이 저널, 저 저널에 싣는 행태는 그래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건 아니니 좀 덜하다고 치자. 학자금과 생활비의 조달에 잠 잘 시간도 없는 요즈음의 학인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과 씨름하고 지문이 닳도록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요즈음의 학인들. 그런 그들이 고심참담 속에 써 놓은 글을 누군가가 빼앗아가는 현실 앞에서, 같은 지식사회의 구성원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보탤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발탁되고 있는 이 잘못 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누가 나서서 이런 모순과 역리(逆理)를 바로잡을 것인가.
                                                                       2008. 2. 23.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