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0. 6. 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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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박사의 『해녀 노 젓는 소리 연구』와 조규백 박사의 『텅 비니 만 가지 경지가 다 담기네-소동파 시선집(상)』이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5/16)로 출간되었습니다.

 

 

이성훈 박사(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한국문예연구소 정보팀장)가 『해녀 노 젓는 소리 연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5호)로 펴냈다. 해녀는 제주도에만 있는 존재로,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인 이른바 ‘숨비소리’를 휘파람 소리인데, 해녀들이 물질작업장까지 노를 저어서 오갈 때 불렀던 노동요 <해녀노젓는소리>를 유희요 <뱃노래>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의 삶을 추정하거나 섣부른 예단을 하는 경우도 이따금씩 본다.

 

그간 <해녀노젓는소리>는 제주도에서 채록한 자료를 중심으로 음악학적, 민속학적, 문학적 측면에서 연구가 더러 있었지만 개별 학문의 입장에서 이루어졌을 뿐 통합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었다. 또한 <해녀노젓는소리>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본토 해안지역에서도 전승되고 있는 만큼 본토에서 채록한 자료도 연구 자료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결과 <해녀노젓는소리>의 총체적 실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이 책은 목차에서 보듯이 <해녀노젓는소리>의 총제적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집필되었다. <해녀노젓는소리>의 형성 과정과 전승 양상, 가창 방식과 율격, 사설의 분류와 교섭, 가창자의 생애와 의식 등을 현장론적 측면과 작가론적 측면에서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다. 이를 위해 제주도와 본토에 정착한 해녀들로부터 채록한 해녀의 생애력과 <해녀노젓는소리> 사설을 주요 자료로 삼았고, 옛 문헌의 기록은 참고 자료로 이용하였다. 특히 본토에서 전승되는 <해녀노젓는소리>와 해녀의 생애력을 수집한 자료는 이 책의 필자가 2000년 9월부터 2007년까지 강원도 속초시․삼척시, 경상북도 경주시․포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사천시․통영시․거제시․남해군 일대를 두루 답사하여 조사한 결과물이다.

 

머리말

Ⅰ. 서 론

1. 연구 목적

2. 선행 연구의 검토

3. 연구 방법

 

Ⅱ. 형성 과정과 전승

1. 형성과 본토 전파

2. 가창 기연의 소멸

3. 사설 변이와 전승양상

 

Ⅲ. 사설의 분류와 교섭

1. 사설의 분류와 유형

2. 사설의 교섭양상

3. 구연상황과 현장성

 

Ⅳ. 가창 방식과 율격

1. 가창 동기

2. 가창 방식

3. 율격 구조

 

Ⅴ. 사설의 수집과 정리

1. 수집 및 정리의 통시적 양상

2. 제1기:단편적인 자료 수집 및 소개

3. 제2기:본격적인 자료 수집 및 정리

4. 제3기:체계적인 자료 수집 및 정리

5. 사설의 오기와 어석의 오류

6. 편저와 웹사이트 자료의 오류

 

Ⅵ. 가창자의 생애와 의식

1. 가창자의 생애

2. 가창자의 특성

3. 가창자의 의식

 

Ⅶ. 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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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백 박사(한국외대 강사/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가 『텅 비니 만 가지 경지가 다 담기네=소동파 시선집(상)』이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6호)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소동파의 전기(前期) 시(詩) 161수를 번역한 것으로, 각 시기의 체제와 내용, 풍격에 있어 대표성을 띤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다.

 

一. 중국

 

. 청(淸)나라 심덕잠(沈德潛)은 “소동파의 가슴에는 커다란 용광로가 있어 금, 은, 납, 주석 등이 모두 그 안에서 용해된다. 그 붓이 초광(超曠)하여 천마(天馬)가 굴레를 벗어나고 하늘을 나르는 신선이 노니는 듯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라고 평했다.

 

. 청나라 조익(趙翼)은 소동파의 시에 대해, “평심(平心)으로 소동파의 시를 읽어보니, 그는 재사(才思)가 넘쳐흘러 부딪치는 곳마다 생기가 일어나고, 흉중에 서권(書卷)이 가득하여 그때그때 두루 응용할 수 있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二. 고려 ․ 조선시대

 

. 서거정(徐居正)은 “고려 문인은 오로지 동파를 숭상하여, 과거 급제자의 방이 나붙을 때마다, 사람들이 ‘33인의 동파가 나왔구나’라고 하였다.”(『東人詩話』, 卷上) 이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고려시대 문인들이 과거급제 전에는 과거시험 준비 때문에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 합격 후에야 부담 없이 시 지시기를 배우는데 그 가운데 소동파의 시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고 하였다.

서거정은 이어서, “고려 고종, 원종 연간에, 송나라 사신이 시를 요구하자, 학사(學士) 권적(權適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 시에,

‘소동파의 문장은 해외까지 알려졌건만

송나라 천자는 그의 글을 불태웠네.

문장은 불에 태워 재로 만들 수 있겠지만

천고의 꽃다운 이름은 불태울 수 없다네.’

라 하니, 송나라 사신이 탄복하였다.”(『東人詩話』, 卷上)

 

. 고려 고종 23년, 몽고 침입의 와중에서 전주에서 동파문집을 중각(重刻)했던 사실에서도 당시의 소동파 열기를 짐작하게 해 준다.

 

.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卷上에서, “소동파와 황산곡에 이르러서는 고사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게 되어 뛰어난 기운이 멋대로 나오니, 구를 다듬는 묘함이 두보와 나란히 할 만하다.”라고 했다.

 

. 이규보는 동파의 시(詩)「泛潁」의 시구에서,

“갑자기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

나의 수염과 눈썹을 산란하게 하네.

동파가 백 사람으로 분산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에 있구나.”

라 한데, 느낌이 일어,

 

“시내 위에 어정거리며 맑은 물결 희롱하니

그림자 춤추고 몸 흔들려 괴상도 하구나.

갑자기 소동파가 영수(潁水)에서 놀던 일 생각나네

수염과 눈썹 흩어져 백 명의 동파가 되었다네.”

(「溪上偶作」시)

라고 읊었다.

 

. 이제현(李齊賢)은 소동파의 초상화에 대해,

“대궐에 출입하는 것 영광이 아니거니

장기(瘴氣)어린 해변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야인의 차림새에 누런 빛 갓을 쓰고

천고를 굽어보며 긴 휘파람 불고 있네.”

(「蘇東坡眞贊」)

라 했다.

. 이색(李穡)은 “큰 소나무 그늘 속에서 동파의 시를 읽었더니, 머문 물 같은 고담(古談)은 마치 황하를 터뜨린 듯 하였네.”(「過三角山>시)

이색은 또,

“심한 더위와 가을바람은 본래 때가 있는데,

평소에 즐겨 동파노인의 시를 읽었네.

누구의 마음이 물과 같이 맑기에,

옥을 녹이고 쇠를 녹아내리는 더운 여름을 다 알지 못하는가.”(「卽事」시)

라 했다.

 

이색은 또,

“내가 마시는 술은 한 그릇도 안되지만

반쯤 취하면 맛이 더욱 좋네.

동파노인은 뜻이 커서

만장(萬丈)이나 되는 불꽃처럼 세차네.”

(「廉東亭席上醉歌」시)

라 했다.

 

.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애호하여 각지에서 “적벽선유(赤壁船遊)의 기풍을 재현하기도 했고, 조선후기 시인들이 ‘소동파를 숭배하는 모임(拜坡會)’를 만들어 소동파의 생일을 기념하는 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문인이 소동파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동파의 인품이나 문장의 수준이 큰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의 문예숭상 사조와 조선이 송나라를 입국(立國)의 주된 모델로 삼은 점, 그리고 문학적으로 당송팔가문을 중시한 점 때문이다.

일부 순유(純儒)들은 학파나 사상의 차이로 비판적, 선택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 문인들은 동파와 유사하게 사화(士禍), 당쟁, 전쟁 등을 겪어, 그러한 처지의 유사성으로 인해 동파의 위인과 문학에 공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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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5.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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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2005년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두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려다 중국공안 당국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폭행을 당한 건 물론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재국 공권력에 의해 다른 나라 외교관이 폭행을 당한, 상식 이하의 사건이었다. 예상대로 당시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자인 우리의 인사들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분개한 어떤 인사가 그 사건을 들어 모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감명 받은 그 교수는 그 글을 당시 대학원에 재학하던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 시험 지문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끼어있던 중국 학생들이 그 내용에 반발하여 시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듣게 된 그 교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저의를 분석한 다음, 잘못 된 처사에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있는 우리 정부의 처사를 꾸짖은 글이었다. 당사자인 중국의 국민이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반성의 빛이라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학문을 배우러 이 나라를 찾아온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사무실로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안하무인의 불량배로 만들었을까. 요즘 하기 좋은 말로 그들이 ‘자유분방한 인터넷 만능시대의 총아(寵兒)’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에 법제화 되어 있다던 ‘독생자녀제(獨生子女制 ; 1가구 1자녀 원칙) 출신의 이른바 ‘소황제(小皇帝)들’이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는 ‘중화주의’의 DNA 때문이다.


 역사에도 대사작용(代謝作用)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사조나 발전적 비전을 받아들여 과거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작용은 역사에도 필수적이다. 대사작용이 멈춰버린 한-중 외교사의  흐름 속에서 중화주의라는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한 중국인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왜곡하며 ‘자민족 우월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시험지를 들고 대학원 사무실로 항의 차 몰려온 아이들이나 이번 성화 봉송에서 집단으로 행패를 부린 그들의 행동양식은 한 틀인 셈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들로부터 대물림 받거나 교육된 의식이거나 행동양식일 뿐이니, 말하자면 '역사의 조건화(conditioning)'라고나 할까. 자극과 자극 또는 자극과 반응 간의 연합을 통해 특정 행동이 유발되거나 학습되어지는 과정이 ‘조건화’다. 한 번도 우리나라와 선린(善隣)의 관계 설정에 나서본 적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중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의식’을 대대로 학습해 물려주고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의 조건화’다.

 자기 절제를 통해 착한 이웃 혹은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금도(襟度)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들은 양식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간 한-중 관계사는 외교적 상식에 비추어 유쾌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늘 영향을 받아야 했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중국이 한동안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창문 노릇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강-약’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늘 확인하고자 했고, 우리는 언제나  ‘화(和)/전(戰)’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고, 세계와 인접해 있어 각종 문물이 다양하니 대륙의 변방인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내내 사신들을 줄기차게 파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저들과의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했고, 우리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문화를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의 상징적인 힘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비록 외교적 생존술이었다 해도,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현실적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사신 파견이 굴욕적인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때의 사신행차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오랑캐라고 질타해온 청나라 때 사신행차들의 굴욕이야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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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사행을 기록한 죽천행록>

 


 인조 2년(1624)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에 파견한 주청사행(奏請使行)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했으나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하여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승인이라는 명분이 절실했다.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청사행은 국내정치용이었던 것이다. 정사 이덕형(李德泂)이 명나라의 관료들로부터 당한 농락과 시달림은 역사상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 조선에게 가해온 행패의 축소판이다. 예컨대 위대중이란 자는 주청사행을 괴롭힌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누르하치와 같은 오랑캐 류라는 점, 인조반정은 명분이 전혀 없는 죄악임에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 조정에 대한 기망이라는 점, 누르하치에게 먹힌 요동만 회복하면 저절로 조선의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수 있으므로 그 때까지 책봉의 조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주청사행의 사명 수행을 극력 저지했다. 툭하면 시랑 정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출근하는 그들을 만나고자 추운 겨울날 새벽 길가에서 떨며 기다린 것은 물론 각로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침을 당하자 섬돌을 붙들고 울며 사정하는 노구(老軀)의 정사는 우리 민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고명과 면복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정사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농락하는 중국의 관료들이야말로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약소국을 능멸하는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를 담당한 것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었다. 연경까지 대개 비슷한 코스로 두 달 가량 걸리는, 왕복 6천리의 지겨운 길이었다. 500여명의 일행이 도보로 오가던 길. 교통편과 숙박시설이 변변할 리 없었다.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보단 나았겠으나, 정사·부사·서장관 등 윗사람들이라고 크게 편안할 것도 없었다. 목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제때 옷 갈아입는 일 또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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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노정 답사 중 만난 하북성 노룡현의 고려포 역참에서>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례 사행단만 가는 게 아니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에도, 왕의 죽음에도, 왕위를 물려주거나 선왕을 추숭할 때도 사신들을 보냈으며,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 임시 사행단은 수시로 파견되었다. 그런 역사가 조선조 내내 이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반복되어온 사행 파견의 불평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 말 황준헌(黃遵憲)이란 자의 ‘조선책략(朝鮮策略)’같은 글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언설이야말로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난동을 부린 중국 청년들의 ‘한국관(韓國觀)’을 정확히 적시한 내용이다. 멀쩡한 남의 나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언론사의 특파원을 폭행하고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 강변한 중국. 자국의 배가 서해상에서 골든로즈호를 침몰시키고 도주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 선박이 구난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났다’고 억지 논리를 편 중국. 그것도 모자라 이제 그들은 남의 나라에 몰려와 자신들의 국기를 휘두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스포츠 경기장을 제외한 그들의 영토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국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유학생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누비게 만들었으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을 떠나 너희가 살 수 있느냐’고 큰 소리 치는 철없는 중국의 젊은이를 보며, 그들의 만용과 만행을 가능케 한, 비뚤어진 중화주의가 세계평화의 재앙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묻건대, 이런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우리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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