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3. 7. 08:49

 

 

                                                                                                           

 

책을 잘 버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조규익

 

책과 돈은 한 군데 고여 있으면 썩는다. 한 나라의 경제가 잘 되려면 돈이 재빨리 활발하게돌아야 하고, 한 나라의 학계가 잘 되려면 책이 많이 만들어져 왕성하게 유통되어야 한다. 내 서재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이 언젠간 후학 누구에겐가 전해져 새로운 지식의 원료로 쓰인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겐가 증정한 내 책이 자취생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애완견의 똥받이나 시골집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중고서점 진열대에라도 올라 새로운 수요자에게 선택받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리라.

 

그러나 시계추처럼 당위와 현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책을 쓰지도 말고, 증정하지도 말라!’는 내 글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내가 누구에겐가 친필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이 중고서점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었고, 그 책들을 산 후배가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책들이 훌륭한 내 후배의 손에 들어갔으니,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했고, ‘책들은 돌고 돈다아니 책들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리 섭섭하고 슬퍼질까.

 

후배로부터 그 책 사진들을 받아든 순간, 내 책을 받았을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섯 사람 모두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듯 생생했다. 서운한 순서로 말하면 제자, 대학 후배, 몇 년 전 정년퇴임한 교수(*그는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이다!),  문학평론가로 활동중인 다른 대학 교수 등으로 나열된다. 갓 펴낸 전공 책에 박학다사(博學多思)’란 소망 섞인 헌사를 써서 제자에게 건넸으니, 당시 나는 그를 얼마나 아꼈던 것일까. 그 다음이 대학 후배. 1년 후배였으나, 학창 시절에는 사적인 만남이 거의 없었던 존재였다. 시내 모 대학에 재직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했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가끔 강의를 나오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면 종종 연구실로 찾아왔고, 함께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곧잘 나누던 사이였다. 시원치는 않으나 첫 수필집을 소람(笑覽)’이란 헌사를 써서 그에게 증정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수필집을 낸 사실이 겸연쩍었던 것일까. ‘웃으면서 보아 달라는 주문을 담은 헌사였다. 그 다음이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모 외국어문학과에 있다가 몇 년 전 퇴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는 교수. 그에겐 내 단평집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읽기>>를 건넸다. 그 다음은 전공 책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에 신년인사를 헌사로 적어 증정한 모 언론사의 기자다. 아마 보도 좀 해달라는 속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인 모 대학 교수다. 똑똑하고 실력 있는 현대문학 분야 전공자인데, 내가 무슨 연유로 이 책(<<로터스 버드와 홍길동 이야기>>)을 증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처음 후배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을 당시에는 밀려드는 서운함과 후회를 누르기 어려웠다.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 후배가 보내 준 그 책들에서 단 한 페이지를 넘겨 본 흔적이라도 발견했다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페이스북에 그 글을 포스팅한 다음 날 후배는 퀵서비스로 그 책들을 내게 보내왔다.) 내게서 받은 그대로 어딘가 던져 놓았다가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음을 그 책들은 내게 속속들이 일러바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금쪽같은' 그 책들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증정했다는 사실이 땅을 칠 정도로 후회스러운 것이다.  늘 책 욕심에 찌들어 살아온 나인지라, 책을(더구나 증정 받은 책을) 버리는 행위는 일종의 죄악이었다. 누군가들로부터 받은 책들에는 그들의 얼굴과 정신이 박혀 있었고, 그것들은 늘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를 다잡아 온 셈이다. 내가 남에게 책을 줄 때도 마찬가지 마음이다. 감사와 호의, 그리고 충고가 듬뿍 담긴 마음이다. 선배들에게는 감사의 뜻을 담는다. 힘들여 만든 책을 드릴 수 있는 선배가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우정의 뜻을 담는다. ‘너와 나는 친구, 앞으로도 변치 말고 살아가자는 뜻을 내 분신인 책에 담아 전하는 것이다.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충고의 뜻을 담는다. ‘학해양양(學海洋洋)/마부위침(磨斧爲針)/박학다사(博學多思)’ 등을 포함, 대상에 따라 그 수와 내용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런 마음을 담아 건넸으므로, 가급적 그 책이 오래 간수되길 바라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을 통해 깨달았다. 책은 무언가를 끄적거린 종이뭉치일 뿐 삶의 공간이나 잡아먹는 물건이어서,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책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무거운 책을 지고 다니며 소중한 삶을 방해받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우연히 내 눈에까지 들어온 것들일 뿐, 내가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들이 버려진 경우가 어찌 이것들뿐이랴. 분명 그들은 아파트 혹은 동네 어귀의 쓰레기통에 이 책들을 버렸으리라. 간혹 눈썰미 있는 쓰레기 처리업자나 폐지 수거자가 저울에 달아 종이 값으로 중간상에게 넘겼을 것이고, 그 단계에서 일부가 살아남아 중고서점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 노숙자들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지나가는 껄렁패들의 발길질에 너덜거리며 굴러다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면, 나는 아마 5분 정도는 족히 기절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증정본을 그나마 중고서점의 진열대에 오르도록 해준 이 분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기에 중고서점의 점주 눈에 잘 띄는 쓰레기장에 버려 주었는지, 이 분들이 눈앞에 있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제대로 버려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9. 1. 16:42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책이 없어 곤궁하던 어린 시절부터 책이 넘쳐나는 지금까지 책과 뗄 수 없는 것이 내 삶이다. 남의 책들을 사 읽고 모으며, 가끔은 책을 펴내는 게 내 일 중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막 학계로 진출하던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엔 책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수와 지식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정보의 유통과 저장을 위해 책의 효용가치는 절대적이었다. 책 하나 펴내지 못하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마구 변하여 모든 지식정보는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이제 크고 무거운 책이 거추장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하루 24시간을 구부정하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시절이다. 종이 위의 깨알 활자들이 어찌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가 있겠는가.

 

누구의 한탄대로, 한국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졌다. 책이 빠져나간 공간을 옷 가게, 음식점, 술집, 커피 집 등이 파고들었다. 가끔씩 커피 집 창문으로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 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대다수는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성의 샘도 말라버린 것이다.

 

대학의 권력도 대부분 힘 있는 이공계가 잡고 있다. 총장도 보직교수들도(그 가운데 도서관장도) 책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린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도서관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도서관에서 값나가는 인문서적들이 차떼기로 퇴출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이렇게 반학문적, 반지성적 만행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현장이 대학이다. 그래서 종이책만이 책임을 믿으며 대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멸종을 눈앞에 둔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완주군 삼례읍은 특이하고 고결한 고장이다. 아주 오래된 비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고 각박한 삶에 지성의 문채(文采)를 입힌, 이 고장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소중하다. 2016829일은 이 땅에 타오를지도 모를 대한민국 판 르네상스가 바로 이 고장에서 점화된, 역사적인 날이다. 책을 잃어버려 마음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갈 길을 제시한 등대로 우뚝 선 날이다.

 

이 날 몇몇 지인들과 책 마을 개관식에 참석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삼례는 책이다!”라는 현수막이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매달려 있었다. 삼례성당 좌측 창고에는 책 박물관, 박물관 건너편에는 목공학교가 가동 중이었다. 이 부분이 책 마을의 중심이었다. 박물관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만화 등 2~3개 주제의 상설전시와 매년 1~2회의 기획전이 열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건너편의 김상림 목공소도 책 마을의 전통성을 보태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전통 목공의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고, 목수들의 작업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 그곳 역시 멋진 공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삼례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북하우스, 한국학 아카이브,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북하우스는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구성되었고,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북갤러리에는 전시실과 강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북하우스로 들어가니 고서점 호산방이란 이름 아래 한국학 관련 고서, 신문, 잡지, 사진, 음반자료, 중국일본서양 관련 고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책마을 헌책방1층에는 아동도서와 향토문화 관련 도서 등이, 2층에는 인문도서들이 비치되어, 10만권의 빛나는 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책방의 1층 한쪽에 카페가 마련되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그것은 대물림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책에 관한 에디슨의 명언이다. 이제 위대한 천재들이 만든 책들이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물림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 ‘망아지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만간 책도 사람도 삼례로 보내라는 새로운 속담이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삼례는 책의 메카로 변신할 것이며, 대한민국 정신사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삼례 책 마을에 가서 잠시라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볼 일이다. 책의 의미와 책의 일생을 보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8. 2. 16:54

책 도둑

 

 

 

 

 

 

최근 긴요한 책 한 권을 샀다. 한 달 평균 두어 번씩 여러 권의 책들을 사지만, 이처럼 긴요한 책은 모처럼이다. 고전 자료들을 읽다가 풍수지리학 용어만 나오면 그 난해함에 의욕이 다운되곤 하던 터. 먼 지방의 서점에서 그에 관한 사전을 팔고 있었다. 대금을 지불한지 하루 만에 책이 배달되어 왔다. 만져보고 넘겨보니 좋았다. 알아야 할 것들이 빠짐없어 좋았다. 늙은 아빠, 늦둥이 어루만지듯 그 무거운 걸 집으로 들고 가서도 사랑스러워했다.

 

집에서 다시 학교로 옮겨 놓은 지 이틀. 그만 책이 사라졌다. 누군가 집어간 것이다. 가슴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삼엄한 경비 시스템! 엘리베이터 앞엔 카메라, 문에는 세콤이란 게 걸려 있는데... 누구였을까. 내가 방심한 채 문을 열어놓는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가끔 화장실에 다녀오는 5, 세면실에 가서 설거지하는 5~10분이 전부인데. 그렇다면 그는 그 틈을 노린 것일까. 출입문 바로 앞의 티테이블에 그 책은 놓여 있었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면 남들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괜찮을까? 그 걱정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열린 문으로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책을 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하랴? 내가 바보였다.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큼 누군가도 그 책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 안도하기로 했다. 그저 정가보다 몇 푼 낮춰 팔아버릴 책장사만 아니라면 다행이리라. 불현 듯 책 도둑(The Book Thief)’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영화로도 나왔으니, 책은 꽤 많이 팔렸을 것이다. 마커스 주삭(Markus Zusak)의 작품. 2005년에 첫 출간되었고, 브라이언 퍼시벌(Brian Percival) 감독의 영화는 2013년에 나왔다. 세상에! 도둑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예술이 있을까. 나찌 치하 독일에서 남동생과 함께 입양된 소녀 리젤의 이야기다. 동생은 죽고, 숨어 지내던 유대인 청년 맥스와 교감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고립된 맥스에게 책을 구해다 주고 세상일을 들려주는 리젤. 그러니 그 책 도둑은 더 이상 도둑이 아니다. 책은 영혼이고 도둑은 영혼의 소유자 혹은 매개자일 뿐. ‘훔친 책을 읽는 책 도둑은 아름다운 연금술사다. 도둑질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그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지 않는가. 내 책을 가져간 이가 눈꼽 만큼이라도 책 도둑’만 같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책이 짐이어서 아무도 책을 원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책을 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쉽사리 증정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기 전에 조심스레묻곤 한다. “책 한 권을 냈는데, 혹시 한 부 증정해도 될까요?”라고. 혹시 고맙지만, 필요 없어요!”란 대답이 나올까 두려워 조심스레묻곤 한다. 매몰찬 거절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표정에서 나는 상대방의 마음들을 읽는다. “, 또 귀찮은 짐이 하나 생겼구나!”라는 '말 없는 말'을. 그래서 그간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지냈는지 모른다. ‘그냥 집어가라 한들 누가 집어갈 것이냐, 이 무거운 짐들을이란 심정으로...

 

두어 해 전 어떤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연구실을 정리하는데, 조 교수님의 책이 하나 나왔어요. 그냥 버릴까 하다가, 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무언가가 뒷머리를 땅 치고 갔다. “그럼 학과 사무실로 보내주세요.” 간신히 대답한 뒤 한 시간 가량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처음의 야속했던 마음은 고마움으로 변했다. 내게 연락도 없이 폐기처분했다면, 쓰레기장에서 중고서적상으로 넘어가 뭇 사람들의 손때나 묻히는 광경이 우연히 내 눈에 뜨였다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추억 하나 더. 지난봄의 일이다. 완주군청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완주군과 합작으로 삼례에 책 마을을 꾸미고 있던 호산방 박대헌 사장의 부탁이었다. 책들의 계곡에서 그와 환담을 나누는데, 작업 중이던 직원 한 사람이 눈에 익은 책 한 권을 골라 내 눈 앞에 디밀었다. “교수님이 사인하신 책이네요!” 내 첫 수필집(<<꽁보리밥 만세>>)이었다. 그는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숭실에서의 병아리 교수 시절. 눈에 뜨이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다. 증정 대상은 그 가운데 한 녀석이었다. “책이란 원래 그런 거예요!” 내 표정을 살피던 박 사장의 위로 멘트였다. “그렇겠지요!”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가슴은 내내 아려왔다. 어쭙잖은 책들의 저자가 받을만한 마음의 상처였다.

 

***

 

방금, 내 연락을 받은 서점에서 다시 보낸 그 사전을 받았다. “누군가 집어갔어요!”라고, 어제 그 서점 주인에게 전화하자, 그 책 좋은 줄 아는 사람이군요. 재고는 있어요!” 라고 껄껄 웃으며 대꾸하고는 득달같이 보낸 것이다. 다시 받은 책은 누군가 집어간 그 책보다 가벼웠다. 몇 줌의 영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텅 빈 가슴의 한 구석이나마 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9. 01:09

 

 

도올 선생과 홍준표 지사를 보며

-신문기사를 읽고-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했다는 책[사진은 중앙일보 2013. 12. 7.]

 

 

10 몇 년 전의 일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까이에 모시고 있던 선배 교수 한 분이 평론가 모씨에게 증정한 책이 경매 물건으로 나온 것이었다. “○○○ 교수님께, △△△ 삼가 드림이란 헌사가 대문짝만한 사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었다. 저자가 유명인사에게 증정한 책일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이 경매업계의 상식이다.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은 그런 관습을 이용한 것일 테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실망으로 일그러지실 선배 교수의 표정이 떠올라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잽싸게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내가 찜했고, 결국 그 책은 지금도 내 서재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인터넷 경매에 참여하는 경우 언제나 혹시 그런 헌사가 붙은 책이 없는가를 먼저 보게 된 것도 그 일을 경험한 뒤부터다.

 

 

어제 인터넷을 열었다가 우연히 중앙일보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읽어본즉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한 책이 고서방에 나왔고, 누군가 그것을 구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책을 구입했으면 조용히 가지고 있을 것이지, 만천하에 공개한 그가 일단은 서운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헌사까지 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공개되었으니, 분명 도올 선생은 발분(發憤)했을 것이고, 홍 지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기사 말미에 홍 지사는 국회의원 등 공직들을 그만 둘 때 사무실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해명을 했지만,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인터넷이 하도 발달하여 카메라에 찍히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미국 오클라호마의 오지에 틀어박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조국에 있는 친구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밝혀진 증거물 앞에서 무슨 둔사(遁辭)’가 필요할까.

 

 

그간 고서에 관심을 갖고 종종 온라인, 오프라인 경매에 참여해왔다. 심심치 않게 확인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생전에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아도 세상을 뜬 뒤 그 책들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레기 취급하여 고물상에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오프라인 경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떤 학자의 책을 여러 권 입수한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책들이 경매시장에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책 주인 죽은 뒤 두 달 만에 그의 소장서적들 모두가 시중에 깔렸다는 대답이었다. 무식한 자식 놈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간 저서들을 몇 권 내놓은 입장으로 고서 경매에 참여하면서 혹시 내 책을 경매장에서 만날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최근 들면서 내 책도 경매 사이트에 뜨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출판사에서 재고도서를 고서점에 돌렸을 수도 있겠으나, 독자들이나 학생들이 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리라. 그 책들이 그저 내가 누구에겐가 정성스럽게 헌사를 써서증정한 것들만 아니길 기원할 뿐, 이제 그런 것들을 거둬들일 방법도 의지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얼마 전의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다른 학과의 모 교수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꺼내 본 즉 그 몇 년 전 그에게 증정한 내 책이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연구실을 정리하려는데 몇 년 전에 받은 당신의 책이 나왔다. 보관할 여력도 없고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되돌려 드린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일단은 야속했지만, 곰곰 생각하니 고맙고 솔직한 말이었다. 만약 자신의 전공과 무관하다하여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것이 어느 경로로 중고서점에 들어갔다면,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경매장에 나왔다가 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와 대판 싸웠거나 심하면 원수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는 내 분신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내게 돌림으로써, 일어날 수도 있었던 참화(?)를 미연에 막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일시적인 서운함으로 더 큰 비극을 막은 셈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실, 이사하다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책이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책 짐을 반기지 않는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너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획일화 되면서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사철만 되면 아파트 쓰레기장이 버려진 책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책을 내도 전공자 이외에는 무턱대고 증정하지 않는다. 책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먼저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권 증정해도 되겠냐고. 대부분은 기꺼이 받겠다고 대답하지만, 과연 마음속도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무턱대고 증정했다가 뒷날 고서 경매장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책을 건넨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도올 선생이 보기에 홍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괜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사상의 결정체인 동경대전을 해석한 자신의 책을 건넨 것 아닐까. 백성들 편에서 정치를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이었든 자발적인 행동이었든 홍 지사는 그 책을 버렸다. 그가 아마 한 줄이라도 읽어봤다면 그 책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인물들 가운데 책을 가까이 한다거나 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선거철에 매문가들을 동원, 자신의 일생을 미끈하게 윤색하여 선거용 책자를 내는 인사들은 여의도에 깔려 있지만, 제대로 책을 접하거나 쓰는 인사들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안다. 사실 그런 인사들에게 힘 들여 쓴 저서를 증정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홍 지사를 정치권에서 그 중 나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 왔고, 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믿음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번 일은 아마도 그의 말대로 측근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도올 선생께서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라. 그리고 그 가가대소에 난해한 주석을 달지 마시라. 홍 지사께서도 더 이상 둔사를 내 놓지 마시고, 화끈한 전화 한 통화로 도올 선생의 마음을 풀어 주시라. “우리 자갈치에서 만나 산성막걸리로 회포 한 번 풉시데이!”하고 말이다.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30. 20:02

선진국에서 확인한 도서관의 힘

조 규 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책을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책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사정이 달라졌다.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사를 밥먹듯 하는 요즘 생활에서 처분 대상 영순위가 바로 책이다. 가끔 아파트의 쓰레기장에 수북이 쌓이곤 하는 화려한 장정의 책들을 보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에서도 책을 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이 책을 사지 않아도 탓하는 국민이 없다. 도서관이 무엇 하는 곳이며 왜 중요한지 아는 정치인도 별반 없다. 이른바 출판대국인 이 나라에서 만드는 책들은 학습참고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니 두고두고 읽으며 의미를 반추한다던가 그럴 목적으로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애당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일이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문화의식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책과 도서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나 부러운 그들 대학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꺼내지도 말자. 틈날 때마다 동네의 도서관에 나가서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하곤 했다. 도서관의 주 이용객은 주부와 노인,초·중등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이라 해도 우리 나라처럼 시험공부나 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책들을 마음껏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부대행사로 여는 각종 과외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부들과 노인들이었다. 구부정한 노인들이 책을 한아름 들고와 반납하고 서가를 돌며 새로운 책을 찾는 모습. 주부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책을 읽거나 대출하는 모습은 선진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점심때 만 되면 널찍한 식당을 점령해 수다로 시간을 죽이는 우리네 주부들을 생각하며, 할 일 없이 공원에 나와 먼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우리네 노인들을 생각하며 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부와 노인들이 꼬마들 손을 잡고 동네도서관에 나와 독서삼매에 빠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아마도 우리의 모습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룸살롱, 갈빗집, 다방, 노래방 등이 촘촘히 박힌 수렁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건져내려면 단 한 순간이라도 내면을 가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도시마다 구색으로 하나씩 세워놓은 듯한 도서관이란 으레 학생들이 찾아가 노닥거리거나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후진적 현실을 바꿔야 한다.

과격하고 이기적이며 진지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확바꾸려면' 전국민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도서관을 확충하고 도서관 이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나 독서 열풍은 단기간의 캠페인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이 손자녀들을 이끌고 도서관을 찾아 자신들의 진지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든 채 도서관을 찾는 일이 생활화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經)을 읽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진지해지고 독서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아파트 쓰레기장에 멀쩡한 책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학습참고서 아닌, 제대로 된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살아날 것이고, 우리 나라도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될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날이 바로 우리가 한 차원 높아지는 날이다.

( 출처 : 출판저널 286호, 2000, 9, 5 )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