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노동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1.07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2. 2008.12.26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
  3. 2007.04.10 '가짜박사' 부추기는 사회
글 - 칼럼/단상2012. 1. 7. 20:28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조규익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피터 드러커가 말한 바와 같은 ‘지식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기술의 혁신이나 정책 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 지식의 생산이나 응용에 종사하는 이른바 ‘지식노동자’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를 지식사회라 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사회는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을 대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지식인들인가? 권력을 잡은 계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이 무한경쟁과 무질서로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 혹은 ‘약삭빠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지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이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최소한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지식사회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식사회이려면, 그 지식은 ‘건전한 양식이나 합리성’과 연동(連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자화상을 목격한 뒤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 보니 ‘지식사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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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부는 98년부터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 다양한 학문분야에 많은 학회들이 있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들만 다잡아서 획일화 시키면 학문의 질이 저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관변에서 단물을 즐기던 일군의 학자들이 ‘통치적 발상’의 부림을 받아 그런 묘안을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사실 학문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정부가 나서서 학술지의 등급을 매기는 나라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에 이 분야가 있었다면, 단연 우리나라의 교육부가 단독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나라가 학문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섰을까 생각하면 지식사회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필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물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머리 성성한 노학자들이 서류뭉치를 들고 학진의 사무원들 앞에 굽신거리며 ‘등재’의 재가를 받아오면서 희희낙락해온 것이 그동안의 희화(戱畵)였다. 모든 학회의 이름을 ‘○○학회’로 통일해야 한다면서 ‘연구회, 세미나, 포럼’ 등 모임의 다양한 명칭들을 없애버렸고, 참고문헌의 형태, 요약문의 길이, 주제어의 개수 등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점수를 매기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지식사회다. 단 몇 년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학회들이 국군의 날 의장대 정열하듯 정연해졌고, 그 형식요건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며, 편의성을 좋아하는 대학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로 업적평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키보드에 교수 이름만 쳐 넣으면 학진의 홈페이지에 연동되어 1년간 발표한 논문이 주르르 흘러나오니 행정적으로 얼마나 편한 일이며, 시비 또한 일어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학진의 규정만 잘 따르면 일반 학회는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 등재후보 학회는 등재학회가 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규정이라는 것이 형식요건에 그치는 것이라서 사실 심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굳이 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학회 운영진을 애태우는 일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온정으로 똘똘 뭉친 사회다.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의 학회들을 웬만하면 올려주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인 것을!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자 신청한 학회들을 무슨 근거로 탈락시킬 것인가. 자연스레 기본 요건만 갖추면 모두 등재후보, 등재학회로 등극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등재(후보)학회의 경우 웬만하면 학술지 발간비에 학술회의 비용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그간 한국의 학회들은 학진의 품속에서 꿀맛 같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 덕에 한국의 학계가 많은 논문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학에 입성하려는 학인들 가운데 분야에 따라 한 해에 열편도 넘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고 지금도 학진 등재논문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학자들이 많으니, 그 점만큼은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논문 쓰는 맛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하는 분이 있을 정도다. 분명 이 점은 등재 제도가 갖고 있는 기능들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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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 제도의 문을 닫겠다고 한다. 별 뚜렷한 대안도 없이 13년 동안 한국의 지식사회를 순치(馴致)시켜 온 제도의 막을 아예 내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등재 학술지로 승격하는 학회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형식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학회들도 없고, 형식요건에 맞는 것들을 내용상의 문제로 퇴짜를 놓을 강심장의 학자들도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학회들이 등재의 범주에 들어와 버렸고, 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교육부와 학계의 일부는 그 탓을 이젠 학자들에게 돌린다. 제도를 만들고 제대로 엄정하게 관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일부 드러나는 문제들만 거론하며 학자들의 ‘양식 없음’ 만 탓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 원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대안도 없이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자들의 학문적 생산과 평가, 혹은 학회라는 학문 공동체를 정부의 획일적인 잣대나 틀에 의해 재단하려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였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13년 된 제도를 보완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아파트 재건축’만도 못한 하책(下策)이다.

정부에서 내 놓은 안은 올해 10개, 내년에 15개, 내후년에 20개 내외의 학회를 선정하여 매년 1억 5천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해 ‘세계적인 학술지’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좋아 할까. 학회나 학술지들이 어찌 돈을 퍼붓는다고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으로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실패로 판명되고 있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 제도를 보면서도 다시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사용하는 배짱은 과연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우리 민족의 DNA 때문일까. 1억 5천만 원씩 5년간 특정 학회에 퍼붓는다고 ‘세계적인 학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을까. 따져 보자. 아무리 큰 학회라 할지라도 1년에 네 번 정도의 학술지를 간행할 것이다. 1회 간행비를 5백만 원으로 잡는다면 학술지 간행에 2천만 원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학술회의를 두 번 한다고 쳐도[매번 국제학술회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매년 한 번씩만 국제학술회의를 한다면] 2천만 원이면 넘칠 정도다. 그렇다면 남는 돈은 회원들의 연구비로 지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회 통장에 적립할 것인가?

10개나 15개의 학회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학문분야만 따져도 수십에 이를 것인데, 그 정도로 전 분야를 커버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가 독점하거나, 상당수의 분야는 한두 개를 배정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예컨대 필자가 속해 있는 국어국문학[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 수백의 학회가 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몇 개의 학회들에 걸쳐 있는데,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한 두 개의 학회를 선정할 것인가. 여기서도 특정 부류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학문 외적인 ‘힘’이 구사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정주의나 연고주의가 정치권 못지않게 판을 치는 곳이 학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기존 정책들의 실패 또한 근원적으로 여기서 연유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다시 그런 부조리와 말썽을 반복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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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어떤 제도이든 부작용 없이 안착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학문의 본질이나 학자들의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등재’ 제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출범하여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가는 쪽으로 보완해가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 최선이다. 13년을 끌고 가다가 ‘이게 아닌가봐!’ 하고 내팽개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보완해 써야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등재 제도에 기대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해오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 자체를 버린다면 대학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또 미래의 결과가 불투명한 시험에 돌입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는 영원히 모르모트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고, 똑 같은 착오의 고리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2014년까지 등재심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면 된다. 현 제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논문의 질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도 학회지 별로 개별 논문의 심사를 시행함으로써 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논문의 인용지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그 점을 추가하면 된다. 유예기간 4년 동안 학술지의 인용도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는 것이다. 인용도에 따른 순위나 점수를 학술지들에 적용하여 등재[후보] 학술지들을 다시 스크린할 경우 우열이 판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술지 전체를 ‘일반학술지-등재후보학술지-등재학술지-선도학술지[가칭]’의 4단계 시스템으로 재편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선도학술지에 선정된 학회들에는 상당액의 지원금[1억 5천만 원까지 줄 필요는 없다!]을 지원함으로써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 다만 각 단계마다 ‘진짜로 엄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쉽게 승급할 수 없도록 관리한다면 학회의 질서는 저절로 잡혀 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지금의 제도를 부수지 않고도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용도를 새로운 잣대로 채용한다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 인용도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젊은 학인들이 논문의 우열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후배들의 논문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속한 학회의 학회지만을 인용하게 되는 폐단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폐단은 우리 지식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저절로 사라질 문제일 것이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대학 교수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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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만큼 지식사회 또한 휘청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으나, 정책이나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육제도나 학문정책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며, 바뀌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대학에 채용되기 위해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있다. ‘진정한 학자라면 학술 평가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질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든 그렇지 않은 학자든 모두 ‘제도 속의 구성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유불리(有不利)가 결정되는 생활인들이자 세속적 존재들이란 말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참에 제도를 한 번 확 바꿔버릴까?’라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떠올려야 할 덕목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이나 제도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지식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2012. 1. 7.>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12. 26. 15:34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
 
                                                  조규익(숭실대 교수)

                                                                                            

최근 고려대 경영대의 이미지광고로 이른바 ‘도토리 키 재기 담론’이 촉발되었고, 광고에서 상대로 지목된 서울대나 아예 거론도 되지 않은 연세대의 당사자들이 소극적으로나마 반응하면서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은 표면화 되고 있다.
 왜 이 시기에 이런 문제가 거론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생물이 존재하는 곳에서 경쟁은 생존의 필수적인 방식이고, 경쟁이 배제된 집단이나 경쟁에서 밀려난 집단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사회의 어느 분야보다 심한 경쟁의 복판에 놓여있는 것이 대학사회다.
 인간이나 동물은 생존에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공간에서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경우에는 경쟁보다 공존의 원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어 같은 것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공존할 수 없을 경우 경쟁이 심화되고, 결국 힘이 약한 존재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구 증가의 둔화로 취학아동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대학 진학인구 또한 급감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대학 진학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집단 속의 우수자원도 같은 비례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금까지 우수자원들을 독점 혹은 균점해오던 세칭 일류대학들은 ‘피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이 심화될 경우 페어플레이보다는 좀 더 자극적인 방법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기성의 사회 통념을 넘어서는 데서 그 자극성이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번의 고려대 경영대 광고는 ‘점잖음’을 바탕으로 하던 기존 지식사회의 통념을 깼다고 할 수 있는데, ‘자원고갈’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어있는 생존방식의 새로운 단초쯤으로 보아야 한다. 먹이가 줄어들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싸움을 벌이는 사바나의 동물세계나 경기후퇴로 시장이 줄어들면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영역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 지식사회다.
 지식의 생산과 응용에 종사하는 지식노동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 지식사회라면, 거기에 속한 구성원들은 지식의 세련성에 상응하는 도덕성과 질서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지식인들이고, 인성의 도야는 고등교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자본으로서의 지식을 민중문화의 고양에 사용할 것, 지식인 고유의 목적인 보편성이나 사상의 자유와 진리 등으로 인간의 미래를 전망할 것,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될 것 등은 이 시대 지식인들의 책무다.
 좋은 지식의 교육을 통해 인간사회에 기여할만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대학들의 사명이다. 지식의 보편성 및 사상적 자유와 진리는 지식인 최고의 무기이고, 그것만이 인간의 긍정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압살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여 인간사회를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제3자가 하는 것이고, 그 평가에 따라 인재들이 모여드는 집단이 제대로 된 대학이다.
 ‘고만고만한’ 집단들 속에서 ‘너보다 내가 잘 났다’는 광고문구 하나로 인재들의 눈과 귀를 호릴 작정이었다면, 그 주체들은 이미 지식사회의 일원이길 포기해야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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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2006. 3. 2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