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3. 29. 18:40

 


 


흘러가는 물을 보며

 

 


부모님 묘소에서

 

 

많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조규익

 

 

두 해 전에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올해 가까운 친구 김성원이 떠났고, 며칠 전엔 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하던 정명기도 떠났으며,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이유로 비명(非命)’에 떠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그간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사색을 통해 나름대로 의미부여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까. 이젠 어떤 죽음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사(自然死), 병사(病死), 사고사(事故死) 모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또한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인한 최근의 자살들 역시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반듯하게챙겨 갖고 있지 않다면, 견디기 어려운 광경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는 요즈음이다. 사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고, 그동안 지탱해오던 사회적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자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엘케골의 말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으리라.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인간은 종교에 귀의한다고 한다. 사실 죽음이 매우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예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지금도 사람들을 교회로, 성당으로, 사찰로 이끄는지 모른다. 돈독한 논리체계로 사후 세계를 치밀하게 설계해 온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세계의 주재자인 신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경감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한 종교는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참으로 짧고, 그 가운데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덧없다. 하기야 한갓 미물로서 무슨 가치를 창조하겠노라뜻을 세우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던져진 존재라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생명의 장()’인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다 사라지련만. 대부분은 주어진 생애 동안 기고만장하여 같은 공간의 동지들과 멱살잡이로 날밤을 지새우기 마련이다. 소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지만, 대부분은 삶에 대한 헛된 집착으로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警句). 아침저녁 열심히 가꾸어 오던, 꽃 같은 얼굴이 한 줌 재로 바뀌어 풀밭에 뿌려질 때, 풍채 좋던 친구가 주검 옷에 둘둘 말려 석자 깊이의 무덤으로 내려 갈 때, 그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을 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법칙에서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시신으로 바뀐 그들과 나의 자리바꿈을 통해 비로소 삶과 죽음의 우주적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순간부터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하나, 둘 떠나는 이웃들을 보며, 그 순번이 내게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그 순간을 맞아야 할지,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메멘토 모리!!!

 

 


등걸에서 새싹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21. 15:27

<추천의 말>

 

존재의 자각, 그리고 간절한 신앙고백

 

 

조규익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허락했으나, 영혼에 비해 육신은 덧없고 허망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육신을 잃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주체는 영혼이고, 그 영혼의 완성이나 구제는 신의 영역이다. 육신은 욕망의 근원이므로 육신에 집착하는 자에게 육신은 굴레(bondage)’일 뿐이라는 것이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과연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탈각하고 정결한 영혼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신의 손길을 갈망한다. 신의 손길만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닥쳐 올 심판의 시간을 외면한 채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지금 이 순간, 시인 백승철의 신앙고백이 눈물겹도록 귀하다. 그는 몸을 불사르며 영혼의 완성을 간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도자의 그것이고, 그의 시는 편편이 신앙고백이다. 종교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핵심을 그의 시에서 발견한다. 전능하신 조물주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빌라도의 박해 속에서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조만간 도래할 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 등등. 그래서 그는 필사적이면서도 의연하다. ‘박해의 쓴 잔을 물리치지 않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인가. 그 역시 육신을 짓부순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영혼의 완성에 매진한다. 육신보다 영혼의 불멸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육신의 굴레를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내뱉는 그의 말들 모두가 절절한 신앙고백인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도신경>, 아니 성서 자체의 패러프레이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삶 갈피갈피 묻어나는 고통과 회한을 순화시켜 가는 구도자의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백 시인의 시편들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겨울나기> 전문-

 

 

우리는 흔히 겨울나기월동(越冬)’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두 말의 내포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심상하게 일컫는 월동이란 겨울을 뛰어넘은 그곳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봄을 상정하거나 기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시인의 겨울나기는 절망의 심연 그 자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견디게 되겠지라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에 줄기와 가지는 얼어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기에 나무는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사람 만이 희망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백 시인은 지금 빠져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대의 모진 겨울을 회감(回感)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 시인의 그 희망이 도타운 신앙의 심지가 되어 커다란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이 시는 내포하고 있다.

 

 

학창 시절의 백 시인은 과묵했다. 말을 걸어도, 빙긋 웃을 뿐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은 시가 되어 나왔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풀려나오듯 그의 시들은 늘 빛나고 단정했다. 교단생활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의 폭은 넓어졌고, 신을 발견하면서 신앙고백으로 상승했다.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안(詩眼)이 견고하다. 흡사 <사도신경>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려는 듯 그의 필치는 거침이 없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신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고민과 고통 속에 허우적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막힌 가슴을 뚫어볼 일이다. <2015. 12. 30.>

 

 


백승철 시집 표지

 

 


약력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

 

 


식장에서 백 시인

 

 


발표와 낭송을 하고 있는 백 시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4. 20:59

 


헤이안 신궁의 웅장한 도리이

 

 


헤이안 신궁의 응천문

 

 


헤이안 신궁의 본전

 

 


헤이안 신궁의 봉물인 각종 술

 

 


헤이안 신궁의 뜰에 세워진 기원 팻말들

 

 


헤이안 신궁의 본전 앞에 세워진 기원 나무들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인들은 귀신들과 함께 산다는 말을 들어 왔고, 일본에 올 때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는 그들의 신을 모신 집(즉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일본 총리 아베의 신사참배가 세계적인 이슈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한사코 일본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참배하려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이 바로 우리를 괴롭힌 일본 전범들의 영혼을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책임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일본 정치의 책임자가 오히려 전범들을 참배하다니,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양국에서 하도 성토를 해대니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가끔 봉납(奉納)’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봉납 즉 사찰(寺刹)이나 신사(神社) 등에 금품을 기부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더 지극한 정성의 표시일 수 있다. 큰 신사들의 앞마당엔 술통들을 몇 단으로 쌓아올려 진열하고 특정 주류회사의 봉납물임을 표시해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술이나 만들어 떼돈을 버는 그런 회사들이 고약하게도 일본에서는 애국의 결사체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는 아베도 아마 그런 효과를 노렸으리라. ‘주변의 국가들이 하도 성토해대는 바람에 직접 참배는 못하니, 공물로나마 지극한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여기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네 국민을 단합시키겠다는 대외 정치적 노림수가 그 하나요,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재물을 아낌없이 봉납함으로써 자신도 신사의 귀신들에게 보통 국민들 이상의 정성을 표했다는, 대내 정치적 노림수가 다른 하나다. 그러니 그로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논란이 하나도 손해 날 일이 없는 셈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두 나라의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고 보는데, 나만의 느낌일까.

 

일본에 와서 놀라는 일이 있다. 개인들의 집에는 개인의 신사가,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신사가, 국가에는 국가 규모의 신사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결사체가 바로 신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몇 번 되지는 않으나, 일본에 오면 주택가를 돌며 개인 신사들을 구경하거나 마을 단위 혹은 국가 단위의 신사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취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큰맘 먹고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등을 가 보았고, 동네를 걸으며 개인 집의 신사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심지어 절에도 신사가 있었으니, 키요미즈 데라(淸水寺)에서 확인한 지슈신사(地主神社)가 그런 예였다. 어쩜 교회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다.

 

 


야사카 신사 입구의 도리이

 

 


야사카 신사의 본전

 

 


키요미즈 데라(淸水寺) 안에 세워진 지슈신사

 

 


요시다 신사

 

 


요시다 신사의 본전에서 기원하는 사람들

 

 


요시다 신사에 딸린 산음신사(요리와 음식의 신을 모셨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일까. 마을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작고 큰 도리이(とりい: 鳥居)들이 있고, 그것들을 통과한 안 쪽에 신전이 있었다. ‘鳥居鷄居(にわとりい)’로서 진언종을 설립한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공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신도에서 닭을 신의 전령으로 생각하기에 닭이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썼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다만, 내 보기에 도리이가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로 사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세계에서 도리이를 통과하면 신의 세계라는 것이다. 개인의 집들에 설치된 개인 신사들에는 도리이를 세울 수 없으니, 어쩌면 그 신사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액()을 막아주는 방책 역할을 해온 듯했다. 집안이 산 사람들의 공간이긴 하나 귀신들과 공존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삿된 기운을 막아 주는 신성한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이를 통과한, 이른바 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도 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돈으로 철저히 계산되고 있었다. 기복(祈福)이나 제액(除厄), 결혼 등 모든 행위에 돈이 따르고, 돈의 액수에 따라 복의 크기가 계량되는 속의 원리가 충실히 재현되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의 자기모순의 이기적인 행태는 속의 원리로 성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른바 카오스의 재현,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내 관점에서 아직 일본은 본태적 카오스를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었다.

 

사실상 어릴 적부터 신도에 충실한 인간상으로 길러지는 것이 일본인들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큰 신사에서 복전을 내고 줄을 흔들어 방울소리를 내며 복을 기원하는 부모를 보았을 것이고, 성장한 뒤 그들도 그런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 뿐이랴. 어려서부터 집 앞에 설치한 신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열심히 기원하는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은 일상의 큰 부분으로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뒤 짝을 만나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이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다만 한사코 전범들을 모아놓은 야스쿠니에서, 그것도 패전일에 참배함으로써 무언가를 노리는, 그 정치적 야욕이 미울 뿐이다.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의식을 지키는 일에만 충실하다면야 누가 딴죽을 걸 수 있겠는가. 피해자들의 속마음을 긁어놓으려는 못된 심보가 고약한 것이다.

 

며칠 전 길 가는 도중, 구부정한 할머니를 보았다. 골목 모서리의 빈틈에 세워진 작고 초라한 신사 앞에 꽃바구니를 든 채, 신이 좌정한 곳을 올려다보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말뜻은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구하고 있었다. 굽은 허리와 주름 진 얼굴이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기구하는 것은 궂은일의 해결일 수도,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경건한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신도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어엿한 종교이든, 개인 차원의 소박한 믿음이든, 순수하기만 하다면야 굳이 탓할 이유가 없다. 그것들이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집단적 야욕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가공할 정도의 부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저 할머니야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들의 존재나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인 아베의 욕망을 어찌 알겠는가. 필시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를 신에게 간구한 데 불과했으리라.


 

 


큰 길가 가게집의 신사


 

 


가게집 신사 내부의 모습

 

 

 

 


동네의 신사


 

 


동네집 신사 내부에 모신 신의 모습

 

 

 

 


개인 집 신사

 

 

 


키요미즈 데라 아랫 동네 개인 집의 신사

 

 

 


길가 신사에 꽃을 바치러 와서 기원을 하고 있는 할머니

 

 

 


호텔 옆에 있던 동네의 신사 '주길신사'

 

 

 

 

 

귀신은 일본 도처에 있었다. 야사카 신사에도 본전을 둘러싸고 많은 잡신들이 별도로 모셔져 있었으며, 요시다 신사에도 본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저곳에 작은 신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개인들의 신사에는 그들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에게도 조상신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여러 잡신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바로 일본의 신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신사는 로마의 판테온(Pantheon) 같은 곳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들이 모신 존재들이 악한 신령들이 아닌 이상, 그 신들의 이름으로 악한 짓을 저질러선 안 된다. 온갖 귀신들에 사로잡힌 일본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집과 편견, 이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집과 편견, 이기를 보호해주는 것이 귀신들의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집 앞의 신사, 동네의 신사, 지방과 국가의 신사를 출입하며 꿈을 키웠을 정치인 아베도 이젠 가슴을 열어야 한다. 나 혼자만 사는 게 세상은 아니라는 점, 일본인들을 귀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 게 미래지향적 정치인의 의무라는 점 등을 빨리 깨달아야 미구에 닥칠 또 하나의 비극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이번의 일본 행차에서 나는 신사가 일본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교과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5. 12. 21:01

 

                                <위에서 내려다 본 백양사 전경>

 

요것들을 어찌 할꼬?


                                                                                                            백규

며칠 전 밤늦게 TV로 뉴스를 시청하다가 간이 떨어질 만큼 충격적인 광경을 접하게 되었다. 장성 백양사 인근의 한 특급 호텔 스위트룸. 반팔 속옷 차림의 승려들이 빙 둘러앉아 도박판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언론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겸 조계사 주지와 부주지를 비롯 이른바 도가 높다고 일컬어지는 승려들 8명이 그들이었다. 때는 4월 23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술과 담배를 곁들인 억대의 포커 도박판이었다. 24일은 백양사에서 고불총림 방장 수산당 지종 대종사의 49재가 봉행되기로 예정된 날. 앵커의 설명과 화면은 즉시 나의 상상력을 가동시켰다. 당시 그 승려들은 절 근처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옷가지들을 벗어던진 채 담배를 꼬나물고 술[보아하니 양주로 짐작되었다!]을 병째로 들이키며, 억대의 판돈을 걸고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도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백양사 근처의 호텔들을 검색해 본즉 2인 1실 기준 스위트룸 1박이 20만원 정도. 모처럼 객고(客苦)(?)을 풀기에 딱이었을 그런 좋은 곳에서, 더구나 돈이 넘쳐나는 그들이 방을 함께 쓰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각자 방을 얻은 다음 어느 한 방에 몰려 가 놀았을 가능성이 크다. 술상도 결코 쓸쓸하지는 않았을 게다.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하지 않았겠는가. 혹 술 따르는 여인들까지 곁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심하면 한 번씩 전국의 승려들이 조계사에 몰려들어 각목 들고 패싸움을 벌이던 일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가. 겉옷을 벗어던진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포커 판을 돌릴 정도라면, 그 자리에서 오고 간 말들은 어땠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고상한 법문(法門)이나 경구(經句), 혹은 선문답(禪問答)들이라도 돌리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몇 번 어깨 너머로 구경한 적이 있는 속한(俗漢)들의 고스톱 판을 떠올려 보았다. 대개 고스톱 판에서는 패가 잘 못 들어왔을 때 내뱉는 단발성 ‘쌍욕’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경우는 지저분한 음담패설에 허접한 농담들이 대부분이다. 투전판이란 고상한 말들이 오고 갈 자리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 아닌가. 함께 이 모습을 시청했을 아이들이나, 부처님 모시듯 ‘스님’들을 모시는 전국의 불쌍한 신도 할머니들에게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가끔 여행을 하다가 새참 시간에 맞춰 시골 마을에 들어가면 쫓아와 합장하며 들밥을 권하는 할머니들이 있다. 내가 삭발을 하고 다니니 그 분들은 나를 피곤한 탁발승으로 오인하곤 하신다. 합장을 하면서 ‘어느 절에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시는 것이 신심 깊은 우리네 시골 할머니들이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승려들의 이런 수행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그 화면에 말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시 오고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갖 지저분한 음담패설들까지 방송되었더라면, 찬란한 한국 조계종의 역사는 그 순간에 멈춰버렸을 것이다!!!

흔히 종교를 믿지 성직자를 믿는 게 아니라고들 말한다. 성직자도 사람인 이상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렇다. 이 승려들 뿐 아니라,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외국 신부들의 성추문들, 간혹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온갖 꼼수를 부리거나 여신도들을 성폭행하는 목사들... 성직자도 인간인 이상 어느 순간 세속의 유혹에 빠져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성직자를 보지 말고 종교의 참뜻을 바라보며 신앙심을 가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목자 없는 새끼염소들이나 선생 없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할 수 없듯, 성직자 없는 신앙인들을 생각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승려들이 불교 입문을 원하는 사람들이나 신도들을 만나면 으레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라 한다. 삼독심 즉 ‘탐진치[貪瞋癡]’란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 등인데, 인간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원인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삼독심을 버리는 게 그리 쉽겠는가. 자신들은 삼독심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세속인들을 상대로 ‘삼독심을 버리라!’고 일갈(一喝)한들 그게 무슨 감동을 줄 것인가. 차라리 그 많은 불경들 가운데 좋은 경구라도 골라 들려주어 듣는 사람 스스로 발심(發心)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자신은 원수들을 죽도록 미워하면서 신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친들 무슨 소용 있나? 자신은 재물에 끔찍한 애착심을 보이면서 ‘재물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천당 가기 어렵다!’고 외칠 수 있나? 차라리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시편 119장 105절] 혼자서 열심히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승려들의 참담한 행태를 목격하고나서 밀려드는 허무감을 주체할 수 없는 나날이다.  
                                                          

                                                                                                 <2012. 5. 11.>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29. 07:42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고정관념을 뛰어 넘은 영화 <워낭소리>가 우리사회 중장년층의 누선(淚腺)을 자극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전통정서에 쉽사리 호응할 것 같지 않은 2, 30대 청년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중장년층이야 어린 시절 향촌에서 워낭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라서 그럴 수 있다지만, 의외로 청년들이 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간 의외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벽같이 워낭소리에 잠을 깨던 꼬마들이 50대 장년으로 성장한 지금, 어린 시절의 추억이 화면으로 재생되어 나타난 것이다. 시절은 마구 변하여 산업화와 정보화를 지나 고도 지식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촉수는 아직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영화는 역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렁소와의 추억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우리는 왜 영화 속의 장면들을 보며 눈물을 떨구는가. 화면을 점령하고 있는 ‘느림, 늙음, 낙후’가 빚어 만드는 그 시절 삶의 진실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산업의 패턴이 변화하는 와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먼빛으로나마 다시 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무익한 ‘원점 회귀’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원점 회귀는 잃어버린 본향의 회복일 뿐 낙후한 상태로의 후퇴는 아니다. 물질적 개념 아닌 정신적 공간이 바로 본향이다.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그네 혹은 이방인으로 보는 것이 특정 종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렁소와 말없이 교감하며, 소 때문에 농약을 뿌리지 않고 기계영농마저 거부하는 노인이야말로 생명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적 인간상이거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원래 모습이다. 사실 본향 속에서만 그런 인간상은 존재할 수 있고, 체현될 수 있다.

매일 바꾸어야 할 만큼 우리들의 삶이 가벼운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주변의 하찮은 물건 하나도 그냥 버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바로 존재의 이유다. 비록 한 마리의 소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야 할 소중한 이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의 디지털 기술로 번쩍이는 오디오, 비디오 기기가 넘쳐나지만 두 노인은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고물 라디오에 기대고 산다. 비록 낡았으나, 아직도 흘러간 그 시절의 노래들을 잘도 들려주는 그 자체가 그 라디오의 존재 이유다. 라디오처럼 늙은 노부부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은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호다.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해 가는 삶의 진실은 주름이라는 기호의 심층구조다.

따라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변하지 않음’ 혹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지속 그 자체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단절을 경험한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 늘 단절을 통해 변하는 것이 세상인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이면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영화는 변화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바탕에 깐 채 ‘불변, 느림, 지속’의 철학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수시로 경험하는 변화나 발전은 허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지속되고 있는 농경사회의 정서가 우리의 본향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마음에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8. 9. 23. 14:55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옹화상 혜근의 가송집 가운데 완주가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찰나와 영원의 경계, 그 깨달음의 미학

-나옹화상의 시가와 구원의 메시지-

 

조규익

 

 

Ⅰ.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어찌 할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자신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로서 자신을 개인적 주체로 발견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이처럼 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긴 하나, 남과 구별되는 개별자로서의 ‘나’는 분명 유일한 존재다. 말하자면 ‘본래의 자기’, 즉 실존적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보는 관점도 이런 입장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세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란 무엇인가. 바로 생로병사의 짐이다. 태어나고 죽는 일, 그 가운데 죽음은 인간이 전존재를 투사하여 알아내고자 해도 결코 만만하게 해답이 손에 잡히지 않는 문제다. 태어나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한 인간의 일생이라 한다면, 죽음은 액면 그대로 종말이다. 존재의 무화(無化)가 죽음이기 때문에, 실존의 범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형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죽음 이후의 단계에 대한 무지 등은 인간을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감으로 몰아넣는다.

허무감을 포함한 그 절망감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종교를 만난다. 그러나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여 인간의 실존적 고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괴로움은 신앙의 강도(强度)에 단순히 반비례할 뿐이고,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어느 정도 실존적 고뇌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종교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 구원의 정도는 깨달음의 진정성이나 강도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럴 경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실존적 공간인 현실로부터 존재의 사라짐이 우주적 차원에서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니라는 점, 존재의 사라짐이 종말이긴 하지만 어쩌면 액면 그대로의 종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등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적 깨달음이다. 물론 그 깨달음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인간은 고독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스펜서(Herbert Spencer)의 말처럼 인간이 종교에 상정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투쟁의 대상은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종교 속에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의 하찮음’을 깨우치는 일 그 자체일 것이다. 말하자면 실존적 고뇌로부터의 초탈만이 깨달음의 대전제일 수 있다. 존재의 육신을 굴러다니는 돌이나 나무 조각 등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비로소 그 깨달음은 인간 실존으로 하여금 현실적 얽매임에서 초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범부들은 실존적 고뇌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탁월한 근기의 존재들만이 실존적 고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맞서 싸운다고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자만이 어떤 형태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깨달음이란 실존적 고뇌에 대한 처절한 투쟁과 성찰의 결과다.

『아함경』의 65(『관찰경(觀察經)』)는 ‘관찰’의 중요성을 설한 내용이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는데,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므로 느낌을 즐겨 하고 집착한다고 했다. 집착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앓음, 죽음과 걱정, 슬픔과 번민, 괴로움 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실존적 고뇌들이다. 비구가 선정에 들어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참다운 관찰’이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실존적 고뇌에 대한 참다운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 속의 대중을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을 통해 노래를 통해 대중을 구제하려 애쓴 나옹화상(懶翁和尙)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불교계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Ⅱ. 나옹,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깨닫다

 

나옹화상의 깨달음 역시 실존적 고뇌로부터 출발했다. 채 피어나지도 않은 21살에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출가를 결행한 그였다. 사고(四苦)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출가를 결행한 싯다르타와 같은 행적을 보여준 것이다. 출가하여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로부터 게를 받고 여러 사찰을 순력하며 정진하다가 결국 원나라에 들어간 나옹화상은 지공화상(指空和尙)·평산처림(平山處林)·천암원장(千巖元長)·요당화상(了堂和尙)·박암화상(泊菴和尙) 등을 차례로 만나 도의 경지를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스승은 지공화상과 평산처림이었는데, 훗날 회암사에 지공의 유골과 사리를 모신 것도 그 인연 때문이었다.

평산으로부터 임제선(臨濟禪)을 심수(心受)한 그가 주력한 것은 간화선(看話禪)이었다. 즉 옛 선사들의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참선법이 바로 그것이다. 임제종은 조계(曹溪)의 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 등을 거쳐 임제 의현(義玄)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선풍은 임제종풍이었는데, 태고화상 보우(普愚)와 나옹 이후에 그것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나옹은 무엇을 깨달았으며, 대중들에게 무엇을 깨우치고자 했을까. 무엇보다 그가 갖고 있던 의문의 핵심은 ‘나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실존적 고뇌를 느꼈을 것이고, 인간의 본질적인 면에 대한 탐구의 욕망 또한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 시문은 깨치기 전의 나옹이 지은 게송이다.

 

선불장(選佛場) 안에 앉아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김달진 역>

 

나옹이 스승 요연을 하직하고 여러 절들을 배회하다가 회암사에 와서 대중들에게 내렸다는 게송이 바로 이것이다. 출가한 후 보고 듣고 참구한 그것이 출가하기 이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선방에 앉아 참되게 관찰한 결과 그 모든 것들이 나이며 내가 곧 내 주인이라는 사실 등을 강조한 내용이다. 나옹은 이 게송을 내린 뒤 4년을 부지런히 수도하다가 홀연히 도를 깨쳤고, 그 길로 중국에 가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 더 높은 도를 구했다.

그는 원나라에서 각처를 떠돌다가 스승 지공을 만났으며, 그에게서 임제선을 받았다. 그 스승에게 올린 깨달음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과 대지는 눈앞의 꽃이요

삼라만상도 또한 그러하도다

자성(自性)은 원래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티끌마다 세계마다가 다 법왕신(法王身)이네

<김달진 역>

 

비로소 그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객관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본래 주관적 의식 즉 자성으로 관조하니 온갖 삼라만상이 청정한 법신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강조되던 ‘나’는 대상을 만나면서 대상에 내재된 본래의 면목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넘어서면서 깨닫기 이전과 깨달은 이후의 경지가 비로소 합일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 지공에게 올린 다음의 게송에 나타난다.

 

모르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면 티끌마다 바로 온몸이네

모름과 깨침을 모두 다 쳐부쉈나니

닭은 아침마다 오경(五更)을 향해 우네

<김달진 역>

 

미(迷)와 오(悟)의 다름과 양자의 통합을 노래함으로써 ‘깨닫지 못함’ 뿐 아니라 ‘깨달음’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노래의 내용적 핵심이다. 깨달으면 온 세상만물에 자아의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이 그대로 현출(現出)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깨우치지 못함’과 ‘깨우침’은 분리된 채 모순의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자는 ‘쳐부숨’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뜻이 3행에 나타나 있고, 그러한 통합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아침마다 오경을 향해 우는’ 일이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며, 피-아의 구분이 허물어진 합일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에 이어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고 대답한 지공의 말은 피-아의 구분을 허문 경지, 아니 오히려 ‘피-아의 구분을 허문’ 일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를 노래한 것이나 아닐까.

그 뒤에도 나옹은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도력을 높이는데 진력함으로써 우리나라 선맥의 큰 봉우리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성도(成道)에만 주력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 널린 불쌍한 중생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옹화상은 두 번의 깨달음을 얻은 셈인데, 진여자성(眞如自性)의 깨달음이 그 첫 번째이고, 자성의 깨달음을 얻지 못해 고뇌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그 두 번째 것이다.

 

Ⅲ. 고해의 중생들을 노래로 인도하다

 

작자 문제로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를 보이긴 하나, 나옹은 <서왕가>·<낙도가>·<승원가>·<참선곡> 등 네 편의 가사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수도자의 신앙고백이자 무명에 갇혀있는 고해 중생들을 권면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선지식(善知識)의 호소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나옹은 방황과 수행, 참선을 통해 진여자성을 깨달았다. 그런데『법화문구4』에서는 ‘보리(菩提)의 도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을 선지식’이라 했다. 보리를 추구하는 대중들에게 부처 말씀의 진리를 설하여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나옹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근기가 높은 대상만이 터득할 수 있는 선문답보다 일상적인 말 문학으로서의 가사가 대중의 근기에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 나옹이었다. 그것은 고해 중생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였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깊이 병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들이 수시로 침입하고, 안으로는 원나라 지배하의 권문세족들이 종교와 결탁하여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신흥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여 불교 이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현실도 위기의식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계의 선봉에 선 지도자 나옹은 사면초가에 빠진 불쌍한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불교계에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자족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기적이고 소승적인 구도행각의 전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대중을 먼저 구제하는 것이 귀하다고 믿고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완성시킨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옹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도를 닦아 서방정토로 가자’고 권면했다. 그 권유의 말이 가사형태로 결구되어 <서왕가>가 된 것이다. 내용 상 이 노래는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①‘나도 이럴망정~죽은 후에 속절없다’, ②‘저근 덧 생각하야~삼계바다 건네리라’, ③‘염불중생 실어두고~지옥은 갓갑도쇠’, ④‘이 보시소 어로신네~어느 날에 그칠손고’, ⑤‘저근 덧 생각하야~염불소래 요요하외’, ⑥‘어와 슬프다~나무아미타불’ 등이 그것이다.

①은 서사요, ⑥은 결사이며, ②~⑤는 본사다. ①은 죽음에 의해 허무해지는 인간 존재의 유한한 본질을 제시한 부분이다. 그러한 인생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감행한 출가수행의 큰 뜻을 밝힌 것이 ②이며, 세속적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밝힌 것이 ③이다. ④에서는 염불공덕의 위대함을, ⑤에서는 염불공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각각 노래했으며, 염불을 적극 권유한 것이 마지막 부분이다.

사실 <서왕가>는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구도에 나선 나옹 자신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옹은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인생의 무상을 절감했다.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내용이 바로 서사인 ①이다.

 

나도 이럴망정 세상에 인자(人子)러니

무상을 생각하니 다 거즛 것이로세

부모의 끼친 얼굴 죽은 후에 속절없다

 

나옹의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선관서령(善官署令)의 벼슬을 지낸 서구(瑞具)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벼슬이 현직은 아니었으나 세속적인 삶에 그다지 각박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절친하던 친구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부모가 남겨 준 자신의 얼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적 법칙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의 주된 내용이다.

  <회암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 소재. 1328년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여 조선 초기까지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음.>

출가 후 나옹은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수도에 전념하다가 1344년 양주의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지공을 만나 4년간 법을 배웠으며, 휴휴암(休休庵)에서 정진했고, 다시 자선사의 처림을 찾아 도를 닦았다. 그 후 육왕사에서 고목영(枯木榮)을 만나 불법을 논한 다음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그 즈음 원나라 순제는 그를 연경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임명하고 금란가사를 보내주었다.

광제선사의 주지를 내놓은 그는 다시 지공을 찾았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공민왕의 종용으로 신광사에 거주했고, 승과의 시관이 된 후 1361년부터 각지를 순력한 뒤 출가 후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왕사로 봉해진 뒤 송광사에 거주하다가 다시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절을 중수했으며, 문수회(文殊會)를 통해 법명을 내외에 크게 떨쳤다.

대충 살펴본 그의 구도 행은 아무나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종횡무진이었다. 특히 원나라에서 만난 지공과 처림은 그로 하여금 수행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임제선을 전수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계의 선맥을 형성한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도를 위한 그의 방황이나 순력은 <서왕가>의 둘째 부분에 그대로 나타난다.

 

적은 덧 생각하야 세사를 후리치고

부모께 하직하고 단표자 일납의로

청려장을 빗기 들고 명산을 차자들어

선지식을 친견하야 이 마음을 밝히리라

천경만론을 낫낫치 추심하야 육적을 잡으리라

허공마를 빗기 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 들어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육근문두에 자취 없는 도적은

나며 들며 하는 중에 번뇌심을 베쳐놓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리라

 

‘선지식을 친견하여 마음을 밝히는 일’,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 등이 이 부분 내용의 골자이자 화자의 핵심적 의도다. 세속적 욕망에 비례하여 인생의 무상감도 늘어나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우선 그 욕망을 단진(斷盡)하고자 했다. 그러나 욕망의 단진이 말처럼 쉽지 않았으므로, 그 지혜를 찾아 많은 시간과 공력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옹이 선지식을 친견하고자 우리나라와 원나라의 많은 사찰들을 순력했고, 법력이 높은 고승들을 찾아다닌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의 목표, 즉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은 수행자들 모두가 염원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삼계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심이 극성을 부리는 욕계(欲界)와 욕심이 없어진 색계(色界)를 건너 영적인 정신세계인 무색계(無色界)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나옹이 많은 선지식들을 만나며 경험한 깨달음의 순간들이야말로 ‘삼계바다’를 건너가는 순간들의 현현(顯現)이었던 것이다.

선지식들로부터 법을 배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진여자성을 회복해야겠다는 결단을 중생들에게 말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나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오욕칠정이나 세속적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가에 대하여 다시 역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 내용이 바로 <서왕가>의 세 번 째 부분에 나온다. 염불도 하지 않은 채 애욕에 잠겨 세월을 허송하고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생각지도 못한 채 항하사같이 무수한 공덕을 내어 쓰지 못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나옹은 ‘서왕’ 즉 극락세계가 멀어지고 지옥이 가깝다고 일갈한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중생들을 꾸짖은 다음 염불공덕이 얼마나 크며, 그로 인해 도달하게 될 극락세계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서왕가>의 네 번 째와 다섯 번째 부분에 나오는 것이 곧 그 내용이다.

 

백년 탐물은 하루아침 티끌이오

삼일 하온 염불은 백천만겁에 다함없는 보배로세

어와 이 보배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 장금이리라

건곤이 넓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일월이 밝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삼세제불은 이 마음을 아르시고

육도중생은 이 마음을 저버릴새

삼계윤회를 어느 날에 그칠손가

화장바다 건네저어 극락세계 들어가니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둘렀으니

구경하기 더욱 조해

구품연대에 염불소리 자자 있고

청학백학과 앵무공작과

금봉청봉은 하나니 염불일세

청풍이 건듯부니 염불소리 요요하외

 

‘하루살이 같은’ 인생 백년에 재물을 탐해 보아야 하루아침의 티끌만도 못하지만, 염불은 사흘 동안만 해도 백천만겁의 세월에 없어지지 않는 보배라고 했다. 또한 그 보배는 천겁을 지나도 낡지 않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과 같다는 것이 화자의 확신이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염불을 하면 극락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삼세의 모든 부처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으나 육도의 중생들은 이 진리를 저버리니 안타깝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찾아가야 할 극락이란 어떤 곳인가.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두른 곳, 아홉 종의 연꽃 대좌에 염불소리가 자자히 들리는 곳, 푸른 학·흰 학·앵무·공작새·금빛 봉황새·푸른 빛 봉황새가 염불 하는 곳이다. 불어오는 맑은 바람 속에 염불소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곳이 극락이니, 세속의 욕망에 잠긴 중생들이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왕생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종결 부분에서 화자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염불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면서 노래의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노래는 나옹 스스로 경험한 구도와 깨달음의 과정을 바탕으로 들어놓은 신앙고백이자 대중 교화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Ⅳ. 욕망의 짐을 벗고 가볍게 떠나라 하다

 

청산은 나더러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더러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의 시문집인『나옹집』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시의 작자를 사람들은 나옹화상이라 한다. 누구는 당나라 시인 한산(寒山)의 작품이라 하기도 하고, 아예 작자 미상의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청산송>이라 명명하고 싶은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정서는 ‘무욕의 가벼움’이다. 그런 점에서 작자를 나옹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옹만이 가식에서 떠나 이런 노래를 지을 수 있으리라 보았을 것이다. 아니, 나옹이라면 종당엔 이런 노래를 지었어야 한다고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몇 가수들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패러프레이즈하여 대중가요로 부른 것이나 아닐까.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하덕규가 짓고 가수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도 나옹의 <청산송>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희은의 맑고 구성진 음색과 한계령의 초초함이 어울려 탈속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 노래가 현대판 <청산송>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한계령 넘는 길>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어깨를 떠미네

 

물론 양자 모두 나옹의 시에 비해 부질없이 길어진 느낌의 노래들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애욕과 물욕에 찌든 현대인들의 고뇌를 훨훨 날려줄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점도 사실이다. 애당초 간결·담백했던 나옹의 서정이 700여년 세월의 강을 건너며 매우 복잡해진 사람들의 내면을 담아내느라 이토록 장황해졌으리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고, 많은 선지식들을 찾아 문제해결에 몰두한 나옹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무욕의 가벼움’이었다. 그는 그것을 당대의 중생들 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사자후(獅子吼) 아닌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도 미움도 모두 벗어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는 것.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야 극락세계가 어찌 멀리 있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