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08. 5. 7. 11:53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에서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발간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시대 대외교섭의 채널이자 수단이었던 사행(使行)은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이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문제 해결’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하여 일본의 막부(幕府) 및 지방의 여러 세력들과 다원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대일사절은 외교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통신사(通信使),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호송사(護送使), 수신사(修信使)’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왜구문제가 해결된 15세기 중엽 이후에도 사행은 준비되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조선초기의 일본사행이 왜구문제의 해결과 함께 잠정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이후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에 사신파견을 요청하면서 속행된 통신사행 마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행은 ‘피로인(被虜人) 쇄환(刷還)’과 ‘회답(回答)’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사행이었기 때문에, ‘통신사(通信使)’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1636년(仁祖 14)이후 181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 막부로 파견된 사절단을 본격적인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약 500년 동안 일본막부가 있는 에도[江戶]로 가는 사신 행차를 통칭하여 '통신사(通信使)'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사행 전체를 ‘통신사(通信使)’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일본사행에 문화적 성격이 강해진 1636년 이후 1811년까지 막부를 대상으로 하던 사행을 ‘통신사(通信使)’라 할 수 있는데, 어쩌다보니 이 명칭은 일본 막부로 보내던 공식적인 사행들 모두를 의미하게 되었다.

통신사행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한양을 떠나 부산의 영가대, 일본의 오오사카[大阪] 등을 거쳐 막부가 있는 에도[江戶]까지 여행하였다. 6개월여의 오랜 통신사행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다양했던 만큼 그들의 관심사항도 제각각 많았다. 이에 따라 얻어지는 견문도, 기록자들이 남긴 내용도 다양하였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일본의 도시들은 화려함에 있어서 조선의 도시들과 달랐다. 더구나 도시에 몰려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를 썼다. 조선통신사 사행원과 일본인들 사이의 ‘글’과 ‘문화’를 매개로한 ‘상호소통’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조규익 교수가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머리말에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 기록들에 대한 해석 혹은 그 체계화”라고 했을 만큼 사행록의 연구는 조선통신사 연구의 주된 부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동안 통신사행에 대한 연구는 문학ㆍ역사ㆍ정치ㆍ외교ㆍ경제ㆍ회화ㆍ사상ㆍ민속(풍속)ㆍ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를 수탐(搜探)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숭실대학교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에서는 그간 발표된 국내·외 연구자들의 연구논문들을 두루 수집했고, 수집한 논문들 가운데 137편을 엄선하였다. 이 논문들을 내용 및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 이 총서다. 이 연구총서는 총 10권의 ‘연행록 연구총서’에 뒤이어 나온 결과물이다. ‘연행록’과 ‘조선통신사 사행록’을 아울렀다는 점에서 본 연구소는 ‘조선조 사행록’에 대한 연구결과를 망라하는 쾌거를 이룬 셈이다.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에는 60여명의 학자들이 연구한 논문 137편과 자료사진이 수록되었다. 문학(1-3권), 외교(4-6권), 역사(7-8권), 문화·회화(9-10권), 사상·인식·경제·무역·민속(11-12권)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13권에 우리나라와 일본 지역의 조선통신사 노정과 유적들을 답사하여 얻은 생생한 사진들을 엮어 넣음으로써 사행 현장을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연구총서의 발간으로 학자들은 기존 연구 자료의 수탐 및 정리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을 절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연구의 중복 또한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분야의 연구는 질적·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관련기사 링크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칼럼/단상2008. 1. 1. 00:43
여러분!

바로 10분 전에 정해년의 신년인사를 드린 것 같은데,
다시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리는 자리에 섰습니다.
어쩌면 내년 기축년을 맞이하는 순간엔 ‘바로 5분 전에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린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하는 요즈음입니다.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가며 아프게 허무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저로서는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기쁨과 좌절을 골고루 경험했습니다. 계획대로 연구논문들도 저서들도 냈고, 훌륭한 후배교수를 선발했으며, 연구소 일도 제법 한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벼르던 ‘일본지역 조선통신사 노정답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미답의 지역이던 대만에도 다녀왔습니다.

지난 가을엔 봉직하는 대학에서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대학에서 20년까지 근속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20년이 훌렁 지나가 버렸군요. 학교에서 표창까지 하는 걸 보니 20년 근속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를 키우는 심정으로 이제부터라도 남은 기간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제 연구실 건물 옆 공터에 멋진 반송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제가 정년을 맞을 무렵이면 아마 제법 근사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재직 20년 만에 연구실을 새 건물로 옮겼습니다. 조만식 기념관이라고, 사실은 제가 발의하여 이름을 지은 새 건물입니다. 새 연구실은 남향인데, 볕이 어찌나 좋은지 별도의 난방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창가의 난초들이 행복해하는 것 같고, 제 연구의 능률 또한 오르는 것 같아 새삼 새 연구실로 이사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저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수십 년을 지탱해준 유일한 의지처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향’이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름범벅이 된 고향의 해변, 모든 것이 죽어버린 해안의 갯벌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하마터면 의욕의 끈마저 놓쳐버릴 뻔 했습니다. 고향 어른들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의 무력감을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 이제 대망의 2008년이 밝았습니다. 올해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논문도 책도 ‘눈 건강’이 허락되는 한 써야겠고, 후배들과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지난 해 결과가 좋지 않았던 프로젝트는 기필코 따내렵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입니다. 해외의 미답지역들을 몇 군데 돌아보는 일, 일본 지역 조선통신사 노정의 나머지 부분을 답사하는 일도 과제입니다.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주관의 ‘연행록 관계 국제학술대회’ 또한 반드시 실현시켜야지요. 거의 매일 1시간씩 투자해온 달리기에 30분쯤 더 투자할 생각입니다. 올해부터는 누구 말대로 ‘아까운 인생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늘여 써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고향바다의 건강 상태도 체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자연으로부터 받기만 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이제부턴 우리가 상처받은 자연을 보듬고 치료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태안의 기름유출 사건은 우리에게 크나큰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여러분께서도 새해의 계획들을 이미 세우셨겠지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가정과 사회,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지요. 건강관리가 모든 계획의 첫머리에 와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저와 함께 매일 달려보십시다.

무자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두 손 모아 빌어드리며 세배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아침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