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2. 31. 13:26

               

轍鮒之急

飽食煖衣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는 보도가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것. 즉 거짓으로 윗사람과 주변사람들을 농락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일에 대하여 딱히 반론을 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 달 초 같은 신문으로부터 올해를 대표할만한 사자성어 두 건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당시 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한 해의 영상을 뒤로 빠르게 돌려보았습니다. ‘지록위마’가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건 너무 싱거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우리네가 ‘지록위마’의 거짓과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있었던가요. 특히 지도층의 가식과 위선, 혹은 ‘갑질’의 행태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 본 적이 있었나요. 지금까지, 아니 지금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지록위마’의 상황을 그러려니 여기며 살아가는 게 속 편한 것이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팔자가 아닌가요. ‘지록위마’가 새삼 올해만의 사자성어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부지급(轍鮒之急)’과 ‘포식난의(飽食煖衣)’ 등 두 가지 성어를 추천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적실하게 나타낸 말이라고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자국) 속의 붕어’ 즉 ‘생존을 위해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할 뿐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물은 먼 훗날에나 필요하다’는 것이 ‘철부지급’의 뜻이고, ‘생활고로 죽어가는 서민들을 살려내는 것이 시급한데,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만 바라보고 있다’는 현실 비판이 그 말의 속뜻입니다. 당장 한 줌의 곡식이 없어 죽어가는 서민들을 바라보며 ‘100년 대계(大計)’를 고창(高唱)하던 그 시절의 위정자들을 장자(莊子)는 한심하게 바라보며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은 비극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당장 이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대체 무얼 쳐다보고 있는 걸까요.

 

‘포식난의’는 <<맹자>> ‘등문공 상편’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서 가르침이 없다면 짐승에 가까워진다[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는 맹자의 일갈(一喝)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가르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이 말의 의미는 온전해지는 것이지요. 국회의원 김현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기내(機內) 패악사건 등 올해 일어난 이른바 ‘갑질 사건’들의 근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은 필수적이라 본 것입니다. 이들은 권력이나 부를 거머쥐고 ‘포식난의’를 즐기는 대표적 부류입니다. 그런데 ‘포식난의’를 즐기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맹자의 말처럼 결국 ‘짐승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지식교육’ 아닌 ‘인간교육’을 말하는데, 그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가정교육’입니다. 1차적으로 김현의 부모나 조현아의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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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철부지급’과 ‘포식난의’를 올해 이 땅에서 근근이 살아온 서민들의 곤경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사자성어로 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새해에는 정말로 정치인들이나 부자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한 모금의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서민들의 급박한 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요즘 종북주의자들로 매도되는 일부 인사들이 그 ‘종북’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철부지급’ 중에서도 최고로 급박한 처지에 놓인 북한 주민들의 삶을 먼저 걱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고, 이 땅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붙어 다니는 ‘무책임’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도 어려운 서민들이 겪고 있는 ‘철부지급’의 상황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엔 서민들이 진정으로 ‘포식난의’를 즐기는 원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7. 21:23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백규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종걸’이란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그년’으로 지칭했다 하여 언론매체들이 떠들썩하다. 네티즌 가운데 몇 사람이 표현의 지나침을 지적하자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강변했다니, 더욱 기가 찰 일이다. 30년 가까이 국어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로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문제적 인간인가?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김용민이란 사람이 막말파동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리에서 쫓겨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당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면 바야흐로 이제 정치의 계절은 시작된 것 같다. 5년 전 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의 험한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언어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바로가기] 그러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지금,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이나 씁쓸하게 떠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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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요즈음 사람들이 ‘없으면 단 한 시도 못 산다’는 SNS 즉 ‘사회적(사교적) 연결망 서비스’에서 찾게 된다. 긴 문장 대신 짧은 문장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그런 서비스이다. 어떤 사실을 목도하거나 말을 들었을 때, 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잠시잠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멩이 던지듯 뱉어내는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다.

 

참 가관인 것은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서울시장도, 정당의 대표나 국회의원도, 상당수 대학교수들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쏘아대고 만다. 그 말은 즉각 팔로워(follower)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또 자신들의 팔로워들에게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간다.

 

일단 트윗 혹은 리트윗된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도 주워 담을 수 없거늘 하물며 수십만 수백만에게 전달된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는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진위에 관계없이 여론이란 허울을 쓰고 나라를 흔들어 놓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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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도, 서울법대 조국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씨와 공지영 씨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SNS 애용자들이다. 엄청난 팔로워들을 거느린 그들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이들의 한 마디 말이 갖는 의미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대중들이 쉽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들을 가볍게 SNS로 던져댈 일은 아니다. 그래서 SNS에 의존하는 요즈음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 문화인들이 그렇게 천박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번 되 뇌이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들은 아예 생략해 버린다. 일단 던져놓고, 나중에 잘못이 드러날 경우 수정하면 된다는 배짱들일 것이다. 그래서 늘 강호에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한 혼란 때문에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닌가. SNS를 애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흡사 ‘고자질하는 애들’ 같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일단 자신이 곰곰 생각하며 해결하거나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고 본다.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심산일까.

 

팔로워들 가운데는 얼마나 단세포적이며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 많은가. 이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일들을 ‘아가들’에게 고자질하여 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SNS에 의존하는 현대의 정치를 ‘고자질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종걸이란 국회의원도 아마 그 SNS의 마력에 빠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후보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자회견을 하든 칼럼을 쓰든, 아니면 만나서 항의를 하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년’이란 상말 호칭을 사용하여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뿌려댄단 말인가. 그러고도 스스로가 국회의원임을 내세울 수 있는가? 국회의원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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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설자(口舌者)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滅身之斧)라[입과 혀는 화가 들어오는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상인지어(傷人之語)는 환시자상(還是自傷)이니 함혈분인(含血噴人)이면 선오기구(先汚其口)니라[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니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등의 말들은 모두 옛날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몹쓸 시대로 변했다 한들, 환갑 진갑 다 지냈거나 그에 가까운 어른들이 옛날 열 살 남짓되던 아이들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정치인들이여! 부탁하노니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당분간 제발 그 입들에 자물쇠 좀 채워주기 바란다.

 

<2012. 8.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3. 27. 18:56

힘 내라, 손수조!!!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겨드랑이에 날개나 비늘을 달고 태어난 영웅, 힘이 센 아기장수의 비극적 종말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가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滅門)될 것을 우려한 부모가 그를 맷돌로 눌러 죽이자 건너편 산 밑에서 용마가 구슬피 울며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중세 권력의 횡포로 뜻을 펴 보지 못한 채 무수히 죽어간 영웅들. 이 땅에서 어렵사리 삶을 이어가던 중세의 민초들은 영웅을 대망하면서도 지배계층의 논리에 가담하여 ‘어린 영웅 죽이기’에 나서는 모순을 자행한 것이다.

4⋅11 총선이 다가오면서 백주 대낮에 ‘어린 영웅 죽이기’가 어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딱한 광경을 목도한다. 스물일곱의 손수조 후보. 그가 후보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양심도 패기도 다 썩고 허우대만 남은 어른들이 활개치던 정치판에 이제 새 바람이 불겠구나. 패해도 좋으니 신나게 한 번 싸워 보거라. 불순한 암수로 민심을 호리는 정치인들을 그대의 풋풋함으로 제압해 보거라.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와 함께 증폭되는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바나에 내던져진 한 마리 양같은 그가 안쓰러웠다. 스물일곱의 북한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입도 달싹 못하던 인사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일을 목격하며 내 불안은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에 ‘3000만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당찬 말을 했다가 도저히 안 되자, 그 약속을 포기하겠다고 한 모양이다. 또 한 건은 그 돈 3000만원의 출처. 그는 원래 이 돈이 전세방을 뺀 것이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 전세방은 아직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할 일 없는 누군가 확인하곤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전세방을 빼서 쓰려고 했는데, 요즘 전세방이 잘 안나가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꾸었노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수조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언론에 보도된 것들만 대충 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모 서울대 교수는 트위터에 "'형사 책임'은 아니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라 몰아댔고, "서울 남영동에 18평 원룸으로 전세 3000만원짜리가 있다고? 증여세 공제한도액이 3000만원인 바 탈세 목적으로 이중계약서가 작성된 것이 아닌지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법률적 멘트까지 날렸다. 공모 소설가는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해야 할 일이라 했고, 진모 교수 역시 ‘면책특권’을 들먹거리며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 뿐인가. 어떤 당의 대변인이란 사람도 이런저런 말로 손 후보와 그 당을 비아냥거렸다.

대단한 사건이다. 한 마디씩 내뱉은 인사들의 경륜으로 보나 나이로 보아 그들의 작은 딸 쯤 될 스물일곱 살짜리 손 후보의 말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가 북한의 김정은보다 어쩌면 훌륭한 ‘아기장수’의 영웅성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갖게 되었다. 왜 그들은 ‘와!’ 하고 달려들어 그의 작은 몸을 ‘맷돌로 눌러’ 죽이거나 물어뜯어 죽이려는 것일까.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젊은이가 참하게 직장생활이나 해야 하는데...’라고 자못 다정한 멘트를 날린 모 정당 유모 대표의 말처럼 걱정스런 부모의 심정 때문일까?

참, ‘뭣 같은 정치판’이라지만, 대명천지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아기장수’ 하나 용납하지 못할 만큼 옹졸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도 이젠 ‘아기장수’ 하나쯤 키워 우리 미래의 한 부분을 맡겨볼만한 때도  된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러니 손 후보는 그들의 어투대로 ‘절대 쫄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 말 많은 자는 말로 망하게 마련. 가급적 말수를 줄여 공격의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약한 모습 보이면 달려드는 게 하이에나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 어른들이 어린 후보의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매우 부끄러워지는 어제 오늘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1. 24. 15:36

 *모처럼 가면을 벗고 육두문자 비스름한 푸념 한 마디만 풀어놓아볼까?
                          


‘어려움을 당해봐야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들 치고 갑작스레 닥친 난관 앞에서 허둥대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家長),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首長),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들을 갖고 산다. 그 수가 하도 많아 어느 것이 내 얼굴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서 그 얼굴들은 대부분의 경우(아니 모든 경우) 진면(眞面) 아닌 가면(假面)들이다.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는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말이 되었지만, 원래는 심리학에서 사용되어온 학술적 용어다. 이 말은 에트루리아의 어릿광대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하거나 타인 혹은 주변세계와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칼 융은 말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나도 많은 가면을 갖고 있다. 자상한(혹은 엄하고 곧은) 아버지나 남편의 얼굴로 집에서 쉬다가, 출근을 위해 차에 시동을 걸면 그럴 듯한 가면으로 잽싸게 바꾸어 쓴다. 강의실 문 앞에 서면 자못 근엄한(?) 교수의 가면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에서는 악동의 가면을 쓴다. 그러니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가면을 진면으로 착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실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아놓고 후회들을 한다. 그의 가면을 보고 뽑았는데, 나중에 언뜻언뜻 보이는 진면들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국민들은 대통령이 선택한 각료들만큼은 진면을 보려고 애들을 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가면 뒤에 숨은 진면을 노출시키게 되고, 그 때문에 상당수는 낙마(落馬)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가면만 보고 사람을 뽑아 나라의 살림을 맡겨놓으니, 그 살림은 “잘 되어야 본전”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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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면 이야기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못하다. 막 가자는 북한의 망나니들이 또 불장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저들은 불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존심과 함께 소중한 생명, 재산을 잃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천안함 사건을 당하고도 대비를 못했는가, 이번에도 우리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사실 ‘천안함 피격’만큼 우리 사회의 바보스러운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도 없다. ‘노루 친 몽둥이 삼 년 우려 먹는다’든가? 입만 열면 ‘대양해군’, 입만 열면 ‘연평해전’을 떠들어대며 폼을 잡던 해군의 ‘똥별들’은 다 어느 쥐구멍에 숨어들었는가.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선진국들과 경쟁을 하는 수준에 올랐다고 거들먹거리던 위정자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비까번쩍하는 이지스함을 띄우면 뭘 하는가?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철 덩어리 비스름한 잠수정 하나에 맥을 못 춘다면 천문학적 돈을 퍼부어 그런 함선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실사구시’를 하지 못하고 폼이나 잡고 있다면, 동네 건달패나 다를 바가 무엇일까. 그나마 그 정도로 창피를 당했으면 즉시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옳았을 텐데, 똑 같은 깡패들한테 또 당하고 말았다.

TV에 비치는 이른바 이 나라의 지도자란 자들의 낯짝을 보셨는지? 자못 근심스럽고 근엄한 가면을 쓰고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표정을. 천암함 처리과정을 보면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우리의 꼬락서니를 그 깡패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 놓고 한 대 더 때려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 놓고 스트레이트 펀치를 우리의 턱에 명중시킨 것이다. 백주대낮에 내 땅에 대포를 쏘아대는 모습을 두 눈 멀뚱 멀뚱 뜨고 바라보면서 ‘확전시키지 말라!’는 명령이나 내리는 비겁한 필부의 가면을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그 깡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깡패들은 모든 국민들이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대통령의 얼굴에 ‘겁장이의 가면’을 덮어씌우고 싶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조준되는 미사일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리? 반격할 용기가 없는데. ‘다음번에 또 때리면 가만 안 둬?’라고 중얼거리며 ‘밤탱이가 된 눈’이나 껌벅거리는 겁한(怯漢)에게 어느 깡패가 겁을 먹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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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갈아 치워야 한다. 군대 근처에도 못 가본 필부들이 나라를 운영한답시고 자못 근엄한 가면을 쓴 채 거들먹거리는 꼴은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깡패들과 한 통속이 되어 사사건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애태우는 이 땅의 이른바 좌파들도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자존심도 실리도 모두 챙기지 못하는 필부의 궁량으로 육천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공염불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차라리 대통령의, 국회의원의, 장관의, 장군의 가면들을 벗어라. 차라리 ‘나도 여러분처럼 한 개 필부요!’라고 커밍아웃이라도 시원하게 해보아라.

 

이제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린 채, 밀물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내 나라를 어찌 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