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8. 31. 22:51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다시 미국에 가며 

 

 

도전과 힐링!

 

사실 도전과 좌절이야말로 인생을 엮어가는 날줄과 씨줄일 텐데, 그 좌절을 힐링으로 바꿔치기하는 세상의 지혜를 새삼 배우기로 한다. 도전을 통해 희망을 그리면서도 그 실현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하거나 더 멋진 신기루를 찾아나서는 게 인간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러했다. 국문학도로서의 외길을 걸어오며 내 지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사유와 모색을 끊임없이 반복해왔고, 그것들이 바로 도전과 좌절이라는 최대공약수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내 분야의 블루오션이 해외 한인문학임을 깨달았고, 몇 년간의 여행을 마친 후 최근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란 책 한 권을 냄으로써 또 한 단계의 모색과 방랑을 가까스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해외 한인들의 문학을 제외할 경우 한국문학사에 대한 내 나름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나의 대책 없는 방랑벽을 잠재울 수 있었다. 결국 15년 전 UCLA에서 만난 재미 한인문학을 이번 기회에 다른 차원으로 모색하고 싶다는 욕망과 도전의 결기(決起/決氣)가 나를 추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

최근 Fulbright Commission에서 내 과제를 선정해 줌으로써 ‘Fulbright Researcher’ 혹은 ‘Visiting Fulbright Scholar’라는 영광스런 타이틀, 선망하던 미국의 대학가를 다시 밟게 되었다. 15년 전 선발되어 캘리포니아의 UCLA에서 나를 새로운 세계로 입사시킨 LG 연암재단의 해외연구교수와는 또 다른 의미의 학문적 커리어가 아닌가. 과연 1998년 이후 15년 동안 모색과 수정’, 아니 대책 없는 지적 방랑을 거듭해오던 연구도정에 내 나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까. 인식의 깊이와 폭을 넓히려는 무작정의 새로운 도전보다는, 그간 벌여놓은 너절한 공사판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후배들과 담소를 나눌만한 언턱거리라도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아내와 함께 17시간 비행의 고통을 감내하며 이곳에 날아온 이유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1. 17:31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상설시장>


<땀뻬레 상설시장의 육류가게>


<땀뻬레 상설시장의 빵가게>


<핀레이슨 산업단지>


<핀레이슨 산업단지 주차장 표시 및 구역도>


<핀레이슨이 지은 교회>


<핀레이슨 산업단지 내 신발가게>


<땀뻬레 핀레이슨 저택>


<하메 성 입구>


<하메 성에서 조경현과 백규>


<하메 성 안의 우물> 


<하메성 안의 채플>



<하메성 안에서, 임미숙과 조경현> 


<하메 성에서 만난 악사> 



<다시 헬싱키로>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상>


<핀란드의 루터교회>

 

 

산업화, 외세와의 투쟁, 그리고 미래의 꿈

 

 

뽀리(Pori)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 가득 충전한 뒤 다시 향한 곳은 헬싱키. 이번 일정의 막바지에 가까워진 것이다. 바쁜 일정에서 10여일을 덜어 다른 나라의 핵심 지역들을 순력(巡歷)하는 건, 우리 나름의 ‘장정(長征)’일 수 있었다. 아랫 날씨는 쌀랑했으나, 위에서는 태양이 빛났다. 로바니에미 인근과 달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에 차들이 제법 많았다. 아직도 몸서리쳐지는 추위 속에서 허우적대는 북쪽과 달리 이곳 길가의 자작나무들에는 녹색이 돌기 시작했다. 국토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나무들이 봄볕의 세례 아래 몸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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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로 보아 핀란드 제2의 도시 땀뻬레(Tampere)에 들렀다. 네시 호수와 퓌헤 호수를 잇는 작은 물길이 지나는 항구도시. 방직공장, 피혁공장, 제재소, 각종 기계공장, 아이티 업체 등 내용은 공업 중심의 현대 도시였으나, 모든 공장들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화석연료 대신 풍부한 수력을 이용하기 때문일까. 대기오염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곳이었다. 18만에 육박하는 인구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관계로 도심에서 약간의 인파를 목격할 수 있을 뿐 전반적으로 한산한 느낌을 받는 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이 도시의 상설시장. 각종 먹거리 중심의 살아 있는 생활문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빵과 생선, 각종 패션용품 등 모든 것들이 공존하며 그들의 풍요로운 현재를 증거하는, 생생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어딜 가나 들르는 ‘과거 혹은 죽은 자들의 박물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지금 혹은 산 자들의 박물관’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도심의 큰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섬유재벌 핀레이슨(Finlayson)의 산업단지. 그는 가고 없었지만, 그가 살아가던 저택도 신을 만나던 교회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고, 그의 꿈을 구현하는 각종 업무 공간들이 이 시대 산업화의 인력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매장에서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핀레이슨 디자인의 각종 생활용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디자인 천국’으로 자처하는 핀란드 인들의 자부심, 그 근원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핀레이슨 산업단지였고, 그곳을 품고 있는 공간이 땀뻬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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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뻬레로부터 40여분을 달린 뒤, 굳건한 핀란드 국방의지의 상징적 표상 ‘하메 성(Häme Castle)’을 만났다. 지배세력인 스웨덴에 의해 13세기 후반쯤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최근까지 보수(補修)를 거듭해 온 역사적 공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육지와 연결된 호수 안의 섬이었다. 중세 전반만 해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섬들이 있었고, 스웨덴 지배 이전 즉 가톨릭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이 지역의 핀족 원주민들에 의해 공동묘지나 시장터 등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있지만, 단단한 암석과 벽돌들을 여러 겹으로 쌓아 만든 성벽은 나그네로 하여금 다채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하게 했다.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투자했을 많은 노력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여울을 뛰어넘게 했다. 그들이 추위와 배고픔, 외적의 약탈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성 밖의 백성들을 얼마나 생각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성벽 안에서 자신들의 영화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그들의 우매함이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카펫에 각종 명화들로 장식된 빛나는 내부, 따뜻한 벽난로와 고량진미의 행복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무도회, 성 밖 전투에서 한 팔을 잃고 돌아온 기사에게 건넸을 형식적인 위로의 말 한 마디, 추수 때 들어온 세곡의 부족을 질책하던 노여운 음성 등등. 그 공간엔 역사의 환영(幻影)들이 끝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피지배의 질곡에서 고통 받다가 가까스로 독립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세워가고 있는 핀란드 인들의 영욕(榮辱)이 나그네의 눈앞에서 파노라마로 재현되고 있었다. 바로 그 역사의 질곡을 확인하기 위해 여섯 시간 시차의 땅에서 9시간 비행의 고통을 참아가며 이곳에 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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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헬싱키. 겨울에 내려 쌓인 눈은 녹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바람결이 찬 걸로 미루어 이 눈이 따스하고 달디 단 봄물로 흐르기까지 아마 두어 달은 족히 걸리리라. 헬싱키 현대 미술관 KIASMA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곁을 지나며 핀란드 인들의 정신적 지표를 상상한다. 핀란드 내전과 겨울전쟁 등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이끌어 많은 전과를 올린 만네르하임 장군. 결국 약소국이었던 핀란드의 패배로 끝나긴 했지만, 만네르하임이 보여준 불굴의 군인정신이야말로 오늘날의 핀란드를 이룬 초석이었을 것이다. 만네르하임 장군 곁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은 에스또니아(Estonia)의 딸린(Tallin)을 향해 발트해를 건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1:50
*알립니다. 저는 올해(2007) 초에 '조규익 임미숙의 유럽 자동차 여행기 <<아, 유럽!>>(푸른사상)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그 원고에 해당하는 기행문을 차례로 싣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여행기간의 역순(逆順)으로 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1신 : 삶은 우리에게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우린 2006년도 첫날을 아드리아 해에서 맞이했다. 바리 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하여 폼페이에 입성했다. 동에서 서로 달리는 길. 중간쯤부터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폴리를 지나 살레르노에 이르자 빗발은 굵어졌고, 폼페이에 들어오자 흙탕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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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바리 항에서 폼페이로 가는 도중 만난 아름다운 자연


도시는 썰렁했다. 1월 1일 휴일에 비까지 내리니 도심은 공동(空洞) 상태. 길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빗발 속에 간신히 호텔 하나를 잡은 뒤 도시를 대충 살폈다. 티레니아 해로 연결되는 살레르노 만을 접한 폼페이. 중심에 옛 도시의 폐허가 있고, 그 바깥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매표소 주변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았으나, 폼페이 폐허와의 만남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그 만남을 좀더 의미 깊도록 만들고픈 우리의 희망 때문이었다. 폼페이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줄기차게 비는 내리고, 나그네의 수심을 도와 밤은 더욱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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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시가지 일부


본의는 아니었으나 우연찮게 근래 우리는 폐허만을 찾아다녔다. 터키의 에페소, 그리이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에인션트 코린트, 그리고 이탈리아의 폼페이까지. 터키, 그리이스, 이탈리아는 바다로 접한 나라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길항(拮抗) 관계였던 이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지대인 터키, 완전 서유럽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유럽도 아닌 그리이스와 이탈리아다. 에게해, 아드리아해, 지중해 등 서로 물길처럼 연결되는 바다를 공통의 무대로 하는 나라들이다.
일찍부터 꽃 피운 인류문명을 세계로 전파시키며 주름잡던 주역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항만들을 기반으로 도시문명을 이룩했으나, 전쟁을 비롯한 인재(人災)와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의 천재(天災)로 멸망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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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의 한 부분


영속하고자 한 그들의 욕망이 허무로 귀결된 현실을 보며, 명백한 신의 섭리를 깨닫기도 했다. 섭리의 현실화이든 단순한 허무이든, 폐허로 남은 ‘옛날의 영화’는 범부(凡夫)들의 마음에 참담함만 안겨 주었다. 역사의 이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폐허의 돌조각에서 느끼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은 나날이다.
물론 시간은 매 순간 절대 동일할 수 없고, 최소한 ‘동질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제든 새로운 코린트, 새로운 에페소, 새로운 폼페이가 생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크게 보아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믿는 우리로선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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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 유물 저장고에 있는 시신의 부조


폼페이의 폐허 속에 쭈그리고 앉은 채 미이라처럼 형상화 된 어느 남자의 입에서, 누운 채 죽어버린 일가족의 입에서 우리는 분명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폐허를 대하면서 우리는 ‘살아있음’에 환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몸서리를 쳐야 하는가.
<계속>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