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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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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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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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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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12. 26. 15:34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
 
                                                  조규익(숭실대 교수)

                                                                                            

최근 고려대 경영대의 이미지광고로 이른바 ‘도토리 키 재기 담론’이 촉발되었고, 광고에서 상대로 지목된 서울대나 아예 거론도 되지 않은 연세대의 당사자들이 소극적으로나마 반응하면서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은 표면화 되고 있다.
 왜 이 시기에 이런 문제가 거론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생물이 존재하는 곳에서 경쟁은 생존의 필수적인 방식이고, 경쟁이 배제된 집단이나 경쟁에서 밀려난 집단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사회의 어느 분야보다 심한 경쟁의 복판에 놓여있는 것이 대학사회다.
 인간이나 동물은 생존에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공간에서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경우에는 경쟁보다 공존의 원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어 같은 것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공존할 수 없을 경우 경쟁이 심화되고, 결국 힘이 약한 존재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구 증가의 둔화로 취학아동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대학 진학인구 또한 급감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대학 진학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집단 속의 우수자원도 같은 비례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금까지 우수자원들을 독점 혹은 균점해오던 세칭 일류대학들은 ‘피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이 심화될 경우 페어플레이보다는 좀 더 자극적인 방법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기성의 사회 통념을 넘어서는 데서 그 자극성이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번의 고려대 경영대 광고는 ‘점잖음’을 바탕으로 하던 기존 지식사회의 통념을 깼다고 할 수 있는데, ‘자원고갈’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어있는 생존방식의 새로운 단초쯤으로 보아야 한다. 먹이가 줄어들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싸움을 벌이는 사바나의 동물세계나 경기후퇴로 시장이 줄어들면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영역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 지식사회다.
 지식의 생산과 응용에 종사하는 지식노동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 지식사회라면, 거기에 속한 구성원들은 지식의 세련성에 상응하는 도덕성과 질서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지식인들이고, 인성의 도야는 고등교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자본으로서의 지식을 민중문화의 고양에 사용할 것, 지식인 고유의 목적인 보편성이나 사상의 자유와 진리 등으로 인간의 미래를 전망할 것,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될 것 등은 이 시대 지식인들의 책무다.
 좋은 지식의 교육을 통해 인간사회에 기여할만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대학들의 사명이다. 지식의 보편성 및 사상적 자유와 진리는 지식인 최고의 무기이고, 그것만이 인간의 긍정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압살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여 인간사회를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제3자가 하는 것이고, 그 평가에 따라 인재들이 모여드는 집단이 제대로 된 대학이다.
 ‘고만고만한’ 집단들 속에서 ‘너보다 내가 잘 났다’는 광고문구 하나로 인재들의 눈과 귀를 호릴 작정이었다면, 그 주체들은 이미 지식사회의 일원이길 포기해야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