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1. 9. 15. 15:24

‘욕’ 연구, ‘욕 댓글’

 

 

                                                                                                                                                       조규익

어제 우연히 인터넷으로 신문들을 뒤져보다가 재미있는 기사와 씁쓸한 댓글들을 발견하곤 조용한 연구실에서 몰래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방의 모 대학 교수 한 분과 박사 한 분이 공동으로 ‘4가지 욕의 유형’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모양이다. 국어국문학의 벌판에 고상한 연구주제들이야 널려 있지만, ‘결코 고상치 못한’^^이 땅의 언론매체들이 그런 연구들에 눈길을 줄 리 만무하다. 욕에 대한 연구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매체들에서 대서특필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한국 교수들이 얼마나 ‘쓰잘 데기 없는’ 연구들에 매달려 사는지 알 만하다.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전체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기사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욕을 네 범주로 나누었다고 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간본능이 그대로 표출되는 쌍욕’, ‘비아냥거림과 조소가 주를 이루는 방귀욕’, ‘애칭과 유희의 익살욕’, ‘꾸지람과 차별의 채찍욕’ 등이 그것들이다. 이 논문에서 어떤 내용이 전개되었는지 논문을 읽어보지 않아도 알 듯 했으며, 어려운 이론이나 사전의 도움 없이도 그 내용들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유쾌해진 게 사실이었다.

 

‘욕’이란 말은 ‘욕설,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음, 부끄럽고 무안한 사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 연구의 대상은 ‘욕설’일 것이다. 사실 욕은 사회언어학의 중요 연구 대상 가운데 하나다. 특정한 상황에서 쓰이는 언어, 그 상황의 중요한 요소들, 참여자들 간의 특별하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학적 특징 등은 사회 언어학 연구의 중요 내용들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욕설은 피부에 와 닿는 연구주제다. 사실 인간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욕처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있을까. 과연 욕 한 마디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개중에 결코 욕을 입에 담지 않고 살아가노라고 자부하는 고상한 분들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을 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을 다시 씹어 삼키는 경험들이야 어찌 안 하고 살아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욕은 배설이다. 음식을 먹은 다음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듯, 감정의 찌꺼기들을 욕으로 뭉쳐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이든 음식의 노폐물이든 배설을 못하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욕쟁이들이 오래 산다’는 것도 그 때문에 나온 속설이리라. 물론 아무데서나 똥을 싸면 안 되듯이 함부로 욕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적절한 방법으로 감정의 노폐물을 배설하는 일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리이자 능력’의 하나가 아닐까.

***

필자는 여기서 기사나 논문의 내용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의 댓글이 참으로 ‘재미가 있어’, 이런 것들이 ‘요즈음 식 욕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1) “아이구.. 대학도 대학 같지도 않는게....별걸...이런게 학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2) “학력과잉이 이런 데서 발현되는구나 싶다. 논총집에 실릴 논문이라니... 긍정적 기능도

있으니 교육인간학적으로 욕을 하라는 소리?”

(3) “요즘 기자들 참 편하게 먹고 사는 것 같아. 댓글이 조금만 맘에 안 맞아도 금방 삭제 되는데 이런 기사는 삭제도 안 되고 얼마나 오래 갈려나...내 댓글도 금방 주제와 무관 이라고 삭제되겠지...”

(4) “욕봤습니다.. 욕먹어가며 욕연구에 몰두하셧으니 이제는 욕에는 이력이 났겠구려...이

런 궂은 일하는 사람에게 욕하는 사람은 정말 욕먹어도 싸다는 소리 들을 겁니다..남 이 못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것이 진정 학자의 길이라 봅니다.”

(5) “정말 저걸 논문이라고.. ‘쌍욕’이 나오려고 하네...”

 

모두 ‘욕 연구’를 형편없이 비하하는 댓글들이다. 얼핏 (4)의 경우는 약간 호의적인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역시 비릿한 ‘비아냥거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구자가 속한 대학까지 비하하면서 ‘욕 연구’의 의미를 혹평하는 (1), ‘학력과잉’[‘욕 연구’나 하라고 ‘교수⋅박사의 직함을 준 줄 아느냐?’는 호통이겠지?]을 한탄하는 (2), 이런 기사를 써 올리는 기자를 탓하는 (3), 댓바람에 ‘쌍욕’을 휘갈기는 (5) 등, 참으로 분별없는 반응 일색이다.

 

두 연구자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살피느라 얼마나 고생했을 것이며, 문학작품들이나 동서고금의 욕설 책들은 얼마나 읽었을 것이며, 사회언어학 이론서들은 얼마나 섭렵했을 것인가. 연구자들은 욕설의 분석을 통해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분석해보겠노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을 터인데, 신문기사는 기상천외한 욕설들만 부각시키고 네티즌들은 대뜸 욕설이나 퍼붓고 있으니, 지금 그들은 얼마나 참담할까.

***

무엇을 연구해도 세상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당장 세상을 변화시켜 주리라 믿는 사람들에게 인문학도들의 연구가 주는 당혹감은 대단할 것이다. ‘인문학 추방론’에 사로잡혀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설득할 방도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욕 연구’라도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연구자들의 선의가 어쩌면 그렇게도 매몰스럽게 거부되는지, 참으로 세상인심이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2011.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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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숭실인!

    오늘 블로그 첫 방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글들을 읽다가 여기 서옥까지 왔네요

    2011.10.07 00:51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08. 2. 23. 21:18
아, 교수들의 꼬락서니여!
-새 정부에 참여한 문제교수들을 보며-

                                                                           조규익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려면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언론과 인터넷 매체의 ‘무자비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얼핏 국회의 청문회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후보자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후자다. 검푸른 물 넘실대는 바다에 무슨 괴물이 숨어 있는지 모르듯, 넓고 깊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바다엔 어떤 ‘저승차사들’^^이 칼을 갈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공직에 임명받은 사람들이 도덕성으로나 지적 수준으로나 도토리 키 재기로 뻔한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장에서 대면한다 해도 그리 겁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일 테니 잘 닦인 언변으로 둘러대면 별 문제없으리라 믿고 있을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재야 지식인들이나 익명의 투사들은 참으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과연 자신들의 생업은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의문일 정도로 표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시시콜콜 뿌리까지 캐내고야 말지 않는가. ‘설마 누가 기억하랴!’ 싶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주례사나 연설문, 작은 칼럼까지 챙기는 그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중년 무렵에 그럴 듯한 자리 하나쯤 꿰차고 싶으면 입이나 손끝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자식 놈들 좀 나은 학교에 보내고자 슬쩍 옆 동네 친구 집에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등 ‘얄미운 짓’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동사무소, 세무서, 등기소, 출입국 관리소, 이발소, 수퍼마켓 등 ‘얄미운 대상’의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인터넷 바다의 투사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적당히 둘러대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된 세상이다.
이번의 경우 누가 교수출신 장관들의 표절문제를 들춰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의 바다에서 그들의 범죄행위가 속속 업데이트 되거나 베일을 벗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하나같이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른바 ‘잘 나가는’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탄식이 그 하나요, 비록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은 아니나 비리에 대한 사회적 응징을 목격하면서 갖게 되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과 안도감이 그 둘이다.

***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임명된 E여대의 김 아무개 교수, 청와대 수석으로 임명된 S여대의 박 아무개 교수 등은 그들 가운데 압권이다.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된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보니 두 사람 모두 해당 전공분야에서는 대단한 명망을 지닌 학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우러름의 대상이었을 것이요, 동학이나 선·후배들로부터는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은 그들을 얼마나  우대했을 것인가.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즉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격으로 그의 덕망은 더 이상 숨겨둘 수 없어 새 대통령에게까지 발탁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뛰어난 분들이 학계를 욕 먹이고, 한국 지식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도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십여 편이 넘는 저널들에 중복 투고했고, 박 교수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 한다. 중복 투고는 이미 노무현 정권의 김 아무개 장관 때 문제가 불거져 그를 사임으로 몰고 간 사건이기도 한데, 이번 사건은 그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 특히 중복투고를 통해 ‘연구비’를 꼬박꼬박 받았거나 그 논문들이 승진·재임용에 이용되었다면, 그것은 표절 이상의 비리일 수밖에 없다.
박 교수의 행위는 더 참담하다. 표절의 경우 대개 같은 반열에 있는 학자들의 글을 대상으로 하기 마련인데, 제자의 글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경우야말로 가히 해외토픽 감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002년과 2006년 두 건이나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니, 다시 무슨 변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튀어나올 것들은 없을까 우려하는 것이 과연 나만의 걱정일까.   박 교수는 “‘의혹을 받은 논문은 2006년 4월 제자보다 먼저 학회에 투고했고 게재가 8월에야 되었으며, 내 논문이 제자보다 먼저 나왔고, 이후에 제자에게 데이터를 쓰도록 허가해줬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다 한다. 데이터를 공유하면 분석의 문장까지 같아지는지 수십 년 간 논문을 써온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변명 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다.
논문의 선·후란 저널의 발행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논문 작성 과정의 일들은 알아야 할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두 논문의 문장들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발행일자가 다르다면 뒤의 것이 앞의 것을 표절했다고 판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기본 상식을 모르지 않을 박 교수가 어째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제자와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내용이 동일하게 되었다면 그런 사실을 각주로 밝혀 놓든가, 기자들의 추정대로 공동논문이라면 공저자로 제자의 이름을 넣든가,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진짜로 박 교수의 해명이 맞다면 그 제자가 박 교수의 논문을 표절한 것이 분명하니, 제자를 추궁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정신이 돌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제자가 학위논문 지도교수의 논문을 표절할 수 있겠는가. 제자가 지도교수의 논문을 ‘슬쩍 했다’기보다는 논문의 마감 시한에 쫓긴 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대충 ‘짜깁기’했다고 보는 게 정황 상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분은 제자들에게 아마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석사논문 쯤이야 대부분 학자들이 무시하는 현실이니, 들킬 염려도 없을 테고. 어차피 학계에 존재가 알려질 논문도 아니라면, 지도교수인 내가 좀 실례 하는 것도 그대에게 그다지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 라는 일방적 선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써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

이제 한국의 지식사회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한 편의 논문을 써서 이 저널, 저 저널에 싣는 행태는 그래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건 아니니 좀 덜하다고 치자. 학자금과 생활비의 조달에 잠 잘 시간도 없는 요즈음의 학인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과 씨름하고 지문이 닳도록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요즈음의 학인들. 그런 그들이 고심참담 속에 써 놓은 글을 누군가가 빼앗아가는 현실 앞에서, 같은 지식사회의 구성원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보탤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발탁되고 있는 이 잘못 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누가 나서서 이런 모순과 역리(逆理)를 바로잡을 것인가.
                                                                       2008.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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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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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28. 18:26
학회 유감

바야흐로 학회의 계절이다. 주말은 말할 것 없고, 주중에도 심심치 않게 학회들이 열린다. 그러나 여기에 동창회나 결혼식 같은 여타의 행사들이 겹치기라도 하면 학회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구나 꽃놀이하기 좋은 계절 아닌가. 이런 때 컴컴한 방에 모여 ‘재미없는’ 논문 발표나 들으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회에 가 보아도 ‘자발적인 손님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징발된’ 학생들이거나, 안면 상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을 뿐이다. 학회 임원들, 발표자, 토론자 등이 참석자의 거의 전부인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학회는 발표자 1명당 토론자를 대여섯 명씩 배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나마 토론자로라도 지정되면 참석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 역시 이미 ‘약발 떨어진’ 방법으로 전락해 버렸다. 팸플릿에 토론자로 올려졌다 하여 모두 참석할 만큼 순진하지 않은 게 요즘 사람들이다.
 
국내학회만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럴 듯한 명칭의 ‘국제학회’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시간이 다가오면 학회의 임원들은 뜨거운 양철판 위의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한다. 회의장을 들락날락하며 ‘파리 날리는 구멍가게’의 주인처럼 무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하릴없이 쳐다볼 뿐이다. 저명한 해외의 학자들이라도 불러온 경우의 민망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나, 시대의 변화를 그 주범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학회가 학문 공동체인 만큼, 개인의 파편화나 인터넷의 발달 등 공동체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실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다. 학회의 생명은 토론이고, 토론은 ‘다방향 통행’의 현장이다. 구성원들은 토론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개인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각자의 생각에 매몰되어있다. 남들의 생각에 좀처럼 마음을 열려 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겉으로는 제법 대화가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인터넷 속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더구나 익명의 ‘말 던짐’은 독선과 아집, 아니면 지저분한 ‘배설’일 뿐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한다. 왜 다른지, 혹시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따라주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적이다. ‘○사모’류의 집단들이 인터넷 안에 뭉쳐있지만, 그들 역시 불순한 동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패거리일 뿐 건전한 공동체는 아니다. 그들은 증오를 주 무기로 하는, 배타적 개체에 불과하다. 개인 간, 집단 간에 존재하는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정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내심이 없으니 폭력이 앞선다. 이런 공간에서 폭력의 1차적인 수단은 말이다. 독선과 폭력은 ‘반민주’의 표징이다. 학자도 인간인 이상 시대의 변화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남의 논문을 읽지도, 남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골방에 숨어, 제가 쓴 논문들을 저 혼자 읽으면서 만족해하고 잘난 체 한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말들인데, 자기에게 ‘지적 재산권’이라도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간혹 추궁을 당할 경우에는 ‘읽어보지 않았다’는 방패를 들고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 학회가 잘 될 리 없다. 학회가 죽고 학문도 죽었으니, 지금이 바로 암흑시대일 수밖에 없다.
                                                              조규익(국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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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9. 16:58
퇴임사 수필 칼럼

2007/02/23 12:49

http://blog.naver.com/jack2816/100034595852

 

퇴임사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39년 근속한 교수직을 떠나며,



  바쁘신 중에 오셔서 인자한 말씀으로 축사를 해주신 존경하는 이효계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순서를 맡아주신 교무처장, 교목실장, 경영학부장, 그리고 유한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축도 순서를 맡아주신 김기태 목사님 감사합니다. 김목사님은 과거에 육군사관학교 교회 담임목사와 국방부 군종실장을 하실 때 저의 신앙생활을 가까이 지켜주셨던 은인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시낭송을 해주신 김종천, 송광석군 감사합니다. 저는 숭실에서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가까운 곳에서 항상 도와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신 숭실대 교직원 선생님들께 최고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준 재학생, 졸업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잘 가르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동안 16명의 박사후보가 저의 지도를 받았는데 14명만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떠나버린 2명의 얼굴이 요즘 자꾸 어른거려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멀리서 오신 김용준 교수, 김병우 교수, 권오탁 교수, 강성안 박사, 가까이서 행사를 준비해주신 윤재한 교수, 박유동, 정청식, 홍성의, 김선희 박사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긴 세월 한 울타리에서 형제보다 가깝게 우정을 나누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경영학부와 경상대학 교수님들께 어떻게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연구실인 경상관 505호는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별세하신 고 이길영 교수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505호실로 짐을 들여놓으면서 그 분의 못 다하신 일까지 더블로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요일, 공휴일 가리지 않고 주당 근 80시간씩 연구실을 지켰습니다. 밤을 새운 날까지 합치면 아마 20년에 해당하는 지난 10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0년을 더했다면 75세 은퇴를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정년은퇴가 천만다행이고 즐거운 은퇴입니다.


  마지막 1년을 시 쓰기에 몰두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문 한두 편 더 쓰는 것도 좋겠지만, 마지막 1년이 색다르게 장식되었으니 참 좋습니다. 시를 쓰면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과학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종종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회과학도는 이 세상을 한심한 나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저의 전공인 품질경영 Total Quality Management와 커뮤니티는 한국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인증제가 도입되고 대학들도 인증을 얻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인증제는 TQM과 커뮤니티의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아, 언제 봄이 올 것인가. 그런 갈등 심리가 저의 시, ‘나의 봄’, ‘색상반전’, ‘신화’ 등에 부분적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시에 집중하면서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 자료를 프린트한 수 만 페이지와 전공서적 수백 권을 연구실에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대학원생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언젠가 또 필요할지 모른다는 마음에 자료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연구실을 비우면서 일부는 도서관과 단대 도서실에 기증했고, 나머지 절반은 집으로, 절반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기분이 한결 좋습니다. 물방울 품은 꽃잎처럼, 잠시만 내 곁에 머물러줘도 감사할 일입니다. 노트와 수만 장의 뭉치를 던져버리는 내가 마치 낙엽을 떨구는 가로수 같다 생각하고 휘파람 불면서 방 청소를 끝냈습니다.  


  시집을 계획한 것은 작년 봄부터입니다. 저는 HTML 태그를 배운 다음 자작시에 사진과 음악을 붙여서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중소기업대학원 35기 졸업생 오일균씨가 저의 게시물을 보고 도와주셔서 편집과 출판이 모두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오일균씨는 프로 사진작가입니다. 자기가 직접 촬영한 사진 수백장을 꺼내어 일일이 검토하고 주옥같은 70편을 무료로 기증해주셨습니다. 시의 내용과 사진작품이 잘 조화되도록 여러 차례 편집을 수정했고 또 출판비용까지 저렴하게 해주신 점, 너무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AMP 35기 여러분이 응원차 왕림하셨습니다. 임수경 35기 회장(미니골드 대표), 김선희 35기 총무, 김강삼 트레인즈 사장, 김기상 박물관 디자인 가나이넥스 대표, 이점옥 마이더스 대표, 여러분 감사합니다. 시집에 나오는 인물 모델은 대부분 AMP 35기 원우님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아무나 쓰느냐, 어떻게 검증을 받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하다가 영어영문학과 심방자 교수님께 애로사항을 호소했더니 김영호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누님 같으신 심교수님 조언은 정확했습니다. 김영호 교수님은 저의 습작수준의 시를 일일이 다 읽어주시고 준엄하게 그러나 자상하게 시정신과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시면서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멋쟁이 학자로서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시는 백규 조규익 선생님, 존경합니다. 문예창작학과 김인섭 교수님의 오늘 말씀은 인문대학 교수님들이 저에게 베푸신 마지막 코스 확실한 피니시블로의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습작생활을 해보라는 충고로 접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학문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무작정 달려드는 저의 무례를 참아주시고 오히려 감싸안아주신 인문대 교수님들의 협력과 인간미에 저는 홀딱 반했습니다. 이걸 모르고 그냥 목에 힘이나 주고 눈살 찌푸리며 캠퍼스를 떠나게 되지 않은 것은 망외의 행운입니다. 자기 전공만 최고인 줄로 알고 살았는데, 이번에, 학문영역 간 상호이해와 교류가 살아있는 전인교육의 숭실 캠퍼스를 흠씬 맛보고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이제 끝으로, 제 곁에서 묵묵히 그러나 걱정의 눈길로 긴 세월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내 조정자는 제가 육사 졸업반 때 전국대학생 학술토론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국농촌문제에 관한 발표를 아주 당당하게 했고 저는 그 때 사회를 맡았었습니다. 당시 대회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호 시인이 이번 저의 시집에 축시를 써주셨습니다. 보배 같은 친구의 시를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이 모든 감사의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숭실에 오게 된 것도, 여기서 근 30년이나 즐기며 마음껏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마지막 1년까지 참 사랑을 배우면서 떠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차고 넘치는 축복임을 느낍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저를 지켜 인도하신 주님께서 또한 좋은 것으로 이미 예비하신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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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9
우리시대의 위기와 인문학

                                                                            조규익

전통 왕조시대의 종말과 함께 식민 상황에 접어들었고, 식민 상황의 종말과 함께 분단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는 크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요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나라이든 역사적·사회적 변화에는 가치관이나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전통의 계승이 순조롭고, 지속적인 발전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대대로 같은 공간에서 삶을 이어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혁신적이거나 이질적인 규범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왕조에서 근대국민국가로 이행되었어야 할 시점에 식민 상황을 맞이했고, 식민 상황에 이어 분단 상황을 맞이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관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 특히 6·25 전쟁 후 반세기 동안 농경에서 산업화의 단계로, 산업화에서 정보화의 단계로, 정보화에서 고도 정보화의 단계로 숨차게 달려온 우리 사회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바람직하려면, 그것이 개인적 욕구를 자제하고 공동체의 이상 실현을 위해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
세대의 차이, 빈부의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 남녀 간의 차이 등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념이고, 바람직한 가치관 또한 그로부터 생겨난다. 전통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기성세대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도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특권층과 박탈감에 고통 받는 서민층 간의 갈등, 가정과 사회의 억압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남녀 간의 갈등 등, 현재 우리는 다양한 갈등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을 해소시킬 만한 이념이나 가치관 또한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위기는 여기서 빚어진다.
양과 질에서 남보다 우세한 정보만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의 유일한 열쇠라고 믿는 시대정신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부정적 소산이다.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런 경쟁이 가속화 될수록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면, 이미 형성된 인터넷 만능의 현실은 인문학의 존립에 가히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숙이나 완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대학교육은 이제 재화 창출만을 지향하는 직업교육으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당장 돈벌이에 소용되지 않는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업교육에 가까운 각종 응용학문들이 대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오던 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기성세대, 젊은 세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인문학을 기피한다. 인문학이 ‘당장 재화를 안겨주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시각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인문학은 홀대받고 무시된다. 인간의 정신이나 문화 등을 주 대상으로 연구·분석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정신과학이자 인간과학이다.
인간의 본질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쇠퇴야말로 ‘인간의 소외’를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인간의 소외는 공동체를 물질 지상(至上)의 비인간적 공간으로 전락시킨다.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소외나 인간성의 말살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죽이는 일에 앞 장 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행태다. 시대의 병리현상을 절감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대학에서 직업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에도 사오십 대만 되면 현장에서 축출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오십 대를 상품가치가 없다고 축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화의 대표적 사례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빚어낸 부정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폭 넓은 가능태로 만드는 학문이다. 처음부터 직업교육만을 받을 경우, 그 효용가치가 다하는 날 인간도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태의 인간은 창조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쇄신과 수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갈 수 있다. 대학이 폭 넓은 인간을 길러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의 고유 영역은 인정되어야 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바야흐로 죽어가는 인문학을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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