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1. 18. 17:16

󰡔<거창가> 제대로 읽기󰡕를 내며

 

 



거창의 가을


거창의 여름

 

 20001023일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거창가>>를 낸 뒤 최근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창가>를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런데, 지난 해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가항목을 새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학계의 ‘<거창가> 담론을 대략 훑어보게 되었다. 17년 전의 논점에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그 책에 공개한 자료들은 <거창가>에 관련된 그간의 의문점들을 완벽하게 해소해줄 만큼 명료했다. 그러나 당시 새롭고 결정적인 자료를 공개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서였을까. 빠뜨린 부분들과 오류들이 적잖았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새로운 자료들을 탈초(脫草)하고 역주하는 데 꽤 고생을 했는데, 근자 그런 번역을 자신들의 것으로 도용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그 자료의 사진들을 자신의 저서에 무단히 갖다 쓰면서도 출처조차 밝히지 않은 연구자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내겐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일부 사람들의 말처럼 그런 것이 학계의 관행(?)이라면, 나는 관행조차 이해 못하는 국외자인 셈이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간 내 작업을 소중히 간수하지 못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이번의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조규익 본으로 명명한 <거창별곡>, 거창부 폐장 초(居昌府弊狀 抄)」•「취옹정기(取翁政記)」•「사곡서(四哭序)등을 연결시켜, 당시 거창에서 벌어지고 있던 수령과 아전들의 탐학(貪虐)을 평이하게 설명한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와 함께 역주 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무단 도용하는 철부지들이 잘못 된 부분까지 그대로 베끼는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거창 현지를 답사하여 그 땅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거창가>의 여운을 찾았고, 그것들의 상당 부분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문자 텍스트로 남아 있는 것이 <거창가> 류의 사실적인 고발문학이라 해도, 현지인들의 거주 공간과 산하(山河)는 그 노래의 진정한 모습과 의미가 투영된 또 다른 텍스트였다. 옛날 은사님께서 공부는 발로 하라는 말씀을 진지 드시듯 하셨는데, 못난 제자는 그 뜻을 다 늙은 지금에서야 깨달았으니!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서 내려다보시면서 혀를 차고 계시지나 않을지, 부끄러움으로 모골이 송연하다.

 

<거창가>가 비록 지방 관리들의 적폐(積弊)를 고발한 문학이긴 하나, 그건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일일 뿐이다. 혹시 당시라면 관민 대립으로 읽힐 여지도 있겠으나, 민주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지금에야 적폐 청산과 관민 화합의 서사시로 이해될 바탕이 이미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봉건 시대 관청의 적폐에 대하여 항거한 거창 사람들의 정신이야말로 끊임없이 기리고 널리 선양해야 할 자랑 거리 아니겠는가. 지금도 <거창가>()에 대한 민()의 반발이나 저항으로만 해석하여 보고도 못 본 체 한다면, 그거야 말로 미련한 처사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임술년(1862) 당시 민란이 거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거창 외의 어느 지역에서 <거창가>거창부 폐장 초(居昌府弊狀 抄)」•「취옹정기(取翁政記)」•「사곡서(四哭序)같은 운문과 산문의 장르들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고 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한 경우가 있었단 말인가. 세계 역사를 훑어보아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근거들을 잘 갖추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매년 추수가 끝난 다음 거창가 역사 문화제라도 기획하여 거창의 정신을 전국적 아니 세계적으로 선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왜 그런 머리들을 쓰지 못하는지, 국외자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이 책의 목차와 머리말을 이곳에 옮긴다 

 

차례

1 <거창가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란 무엇인가?

1. <거창가>에 대한 오해의 전말 3

2. 거창가이고, ‘이재가인가? 8

3. <거창가> 내용의 사실성에 대한 근거 14

4. 붕괴된 수취체제와 민중의 신음 16

5. <거창가> 보조 텍스트로서의 취옹정기取翁政記
사곡서四哭序 55

6. 거창에서 찾아본 <거창가>의 흔적 66

7. <거창가>, 미래를 예비한 을들의 서사적 고발문학 90

 

2 텍스트 원문 및 번역문

1. <거창별곡>(조규익본) 원문 97

2. <거창가> 교합 및 현대어 역본 110

3. 거창부폐장 초원문 142

4. 거창부폐장 초역주 147

5. 취옹정기의 원문과 역주 170

6. 사곡서 원문과 역주 174

 

3 <거창가>(조규익본) 영인본 179

 

Summary 229

찾아보기 236

 

머리말

고서의 매력에 빠져 지내던 시절 고서 전문가 이현조 선생의 따뜻한 도움으로 <거창가>를 만났고, 지금부터 만 17년 전인 20001023<거창가>에 관한 첫 저서를 냈다. 탐서의 현장에얻은 사람과 책이 보물이었다. <거창가>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 호박 넝쿨에 참외·수박까지 딸려 온 형국이었다.

이미 <거창가>를 두고 몇 분의 좋은 논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거창가>불완전한 텍스트였다. 그 불완전성은 세 건의 산문들에 압축된 콘텍스트가 해결해 주었다. <거창가>의 마지막 퍼즐은 스스로 풀렸다. 그 시기 거창에서 자행된 탐학의 주체가 부사 이재가在稼로 밝혀지자 상당수의 문제들이 싱겁게 해결된 것이다

작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가를 새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민백이 나온 지 25, 필자의 저서 󰡔거창가󰡕가 나온 지 16년만의 일이다. 모든 것들이 전광석화처럼 바뀌는 우리 사회에도 만만디는 있는 법인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이전 책의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 거창가란 제목을, 이번엔 ‘<거창가> 제대로 읽기로 바꿨다. <거창가>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제대로보아야 그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창가>에 노래된 갑질들의 내용을 평이하게 설명했고, 이전 책에서 범한 한문 번역과 주석의 오류들을 수정했다. 그 책에 산문들이 너무 복잡·산만하게 배치되어 일반 독자들은 알아보지 못한 흠도 있었다. 그래서 원문과 역주들을 참고하기 편하도록 제2부에 몰아놓았고, 1부에서는 <거창가>를 설명하되 그 산문들을 참고자료로 끌어왔다. 거창부폐장 초를 가사로 풀어 만든 것이 <거창가>이고 문제적 인간들을 풍자한 희문戱文취옹정기사곡서이니, <거창가>의 내용을 설명하려면 이들 산문들을 끌어와야 했다. 현지답사를 통해 거창이 <거창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텍스트임도 확인했다. 아직도 그곳엔 그 시절의 아픔이 살아 있었다. 그걸 이 책에 담게 되어 무척 곰지다.’ 그러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거창가>의 작자 및 거창부폐장 초취옹정기사곡서등의 필자 추정 문제는 부득이 다음 책으로 미룬다. 다소 복잡한 이유 때문이다.

 

9년 전 별세하신 김태순 선생님은 생전에 <거창가>거창의 최고 자랑거리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 혜안이 없는 요즘을 아쉬워하며, 그 분의 명복을 다시 빌어드린다. 늘 고서를 통해 가르침을 주시는 인산 박순호선생님, 거창박물관의 구본용 관장님, 거창향토사연구소의 김영석 선생님, 정쌍은 선생님, 이산 선생님, 거창군청 이남열 공보담당관님 등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해온 학고방의 하운근 사장님과, 책을 멋지게 만들어주신 조연순 팀장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에 숭실 근속 30자축의 뜻을 담았다. 건강 속에서 즐겁게 살아온 세월이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고 있다.

 

정유년 가을에

백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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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 2. 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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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소식2012. 2. 23. 17:30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에 관한 사진자료집 출간!!!

 

  <발간된 책>

  <우즈벡 지진허 마을의 백산옥 할머니(1909년생)>

  <우즈벡의 프라우다 농장 학교 교사들(1960년대)>

<평양에서.  오른쪽 첫번째가 최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오른쪽 네번째 인물이 김일성(1946년)>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
김 이그나트, 김 블라지미르, 조규익 엮음
도서출판 지식과교양, 2012. 3./ 15,000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지나온 세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자료집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로 출간되었다. 숭실대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지식인 김 이그나트 및 김 블라지미르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보통사람들로부터 유명인들까지]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으로 엮었다. 그동안 이 지역 고려인들에 관한 문서자료들은 꽤 출간되었지만, 두어 건의 작품사진집 이외의 사진자료집이 학술자료총서의 형태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조규익
  1부 : 고려인들의 삶
  2부 : 가르침과 배움
  3부 : 일과 일터
  4부 : 고려인 가족
  5부 : 풍속[돌⋅결혼⋅회갑⋅장례]
  6부 : 나라 밖의 북한인들, 북한의 고려인들
  발문 : 우리는 돌아간다-김 블라지미르 씀/오두영 역


 1937년 강제이주 시기[몇몇 경우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도 있다]부터 최근까지 고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을 선별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 관한 어떤 연구서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자료들을 통해 고려인 연구자들이나 그간 고려인들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들어왔던 일반인들은 고려인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자들은 그간 몇 년 동안 현지의 고려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그간에 겪은 고초를 들었고, 그들의 선조와 자신들이 남긴 기록들을 수집했으며, 미래의 소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편자인 조규익 교수가 그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자료정리 작업과 연구 작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확보한 사진자료만 1천 건이 넘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나머지 사진들을 계속 출간하겠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다.


 구소련 체제 아래 우리와 단절의 역사를 지속해온 고려인이 우리 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그들을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닌 ‘고려인’으로 타자화(他者化)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야 하며,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들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학술적 차원의 해석이나 연구보다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 교수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조 교수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것처럼 ‘지워진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국민적 관심 속에 이런 작업들의 의미와 가치가 강조되어야 하리라 본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기대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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