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1. 11:54

 

 

 

 

길 이야기

 

 

 

 

 

그대는 우울한 시절 햇살과 같아

그 시절 지나고 나와 지금도 나의 곁에서

자그만 아이처럼 행복을 주었어

 

~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가야만해

 

혼자서 걸어간다면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끔이라도 내 곁에서 얘기해 줄래

그 많은 시간 흐르도록 내 맘속에 살았던 것처럼

 

사랑도 사람도 나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첫 새벽 공기처럼 희망을 주었어

 

오랫동안 소리 없이 내게 살아왔던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모처럼 접해 본 윤도현의 노래 <>이다. 행복한 사람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살아있는 이상 걸어가야 하는 것이 길이다. 길을 말하다가 너에 대한 사랑으로 끝맺는 윤도현의 노래가 좀 낯선가. 작사자는 누군가 먼 길을 가다가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의 를 발견했을 것이다. 혹은 를 통해 함께 걸어가야 할길을 예감했거나 함께 해야 할운명을 깨달은 건 아닐까. 그래서 윤도현의 와 함께 함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아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없다.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그건 길이 아니다. 언젠가 시작되었겠지만,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길이고,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것이 길이다. 잘 찾아간 것으로 여겼지만, 곰곰 생각하면 잘 찾아간 길이 아닌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을 찾지만, 그 찾으려는 출발점도 마치 끝인 양 잘 찾아지지 않는 것이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이 길다의 형용사와 관계가 깊은 명사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마장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왔고 현대인들은 kmmile로 그 길이를 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의 짧은 인식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단위일 뿐이다. 끝인 것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을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길을 찾다 보면 시작과 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누군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시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웃으며 쉬면서도 갈 길을 걱정해야 하고, 다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갈 길과 돌아오는 길은 한 치도 끊어지지 않는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걸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사이에 부지런히 올레길을 찾고 둘레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헤맨다.

 

길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길을 내면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길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옳은 길그른 길을 구분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길이 옳았는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의 기준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길을 찾아왔으나 제대로 찾은 사람은 많지 않고, ‘올바른 길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길을 찾으러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발로 밟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이나 찾아다니며 맛볼 따름이다.

 

***

 

미국에 체류하면서 휴일이나 휴가에는 반드시 길을 나선다. 남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오클라호마 주는 미국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갖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음지에 속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식민주의'가 백인들의 원죄라면, 그 원죄의 역사적 표본을 이곳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를 건설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백인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쫓겨나 눈물의 장정[Trails of Tears]’이란 쓰라림을 맛보며 대부분 오클라호마의 한 구석에 강제로 정착당한 인디언들. 그들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오늘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클라호마주 전역 교통도

 


이번에 여행을 하고 있는 치카샤 및 촉토 인디언 지역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른바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 그늘을 확인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 각종 휴가나 방학 등을 활용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길의 매력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곳과 가려는 곳이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그 연결고리로서의 길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길들은 넓고 곧다. 특히 가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솜씨 좋은 장인이 대지에 그은 미학적 직선처럼 보인다. 그저 자를 대고 종이 위에 쭉 긋는 선이 미학이나 철학을 갖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대지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직격(直擊)하는 선은 생명이나 미학, 혹은 철학과 직결된다. 그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직선의 미학이 이곳 길들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동안 내가 천착해온 ‘66번 도로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직선으로 쭉 뻗은 오클라호마 주의 길들에는 들어 있다는 것이다.

 

 


Route 66 표지판

 


클린턴에서 스틸워터 오는 도중

 

땅이 넓으니 그런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있는 길들의 해석적 의미, 혹은 내 나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는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나 주택 등 인공의 구조물들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함께 하는데, 그 점이 그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요인이다. 땅 넓이에 비해 사람 숫자가 턱 없이 적으니, 굳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이런 도로들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엘크에서 클린턴 가는 도중

 

6개월 가까운 기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몰아 스위스의 산하를 건너고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듯한 충격을 스위스에서 운전하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다. 동쪽의 바리항에서 서쪽의 나폴리까지 이태리를 횡단할 때 느낀 평화로움과, 프랑스 남부로 가기 위해 몽블랑 산맥의 터널을 넘을 때 느꼈던 혼돈과 재생의 희열을 그 후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프랑스 중남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하이웨이와 독일 로만틱 가도를 달릴 때의 편안함과 드라이버로서의 자긍심을 그 후 다시 느껴본 적이 없다. 동유럽 루마니아를 종단하면서 열악한 도로사정과 그들의 험한 운전 관습 때문에 흘린 땀과 긴장감을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엘크 시 초입


치카샤에서 촉토로 넘어가는 길 어디쯤

 


OSU 중심을 가로지르는 먼로 길[Monroe Street]

 

***

 

15년 전 LA에 머물 때 간헐적으로 미국 안에서의 장거리 운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때 달리던 캘리포니아 서쪽의 1번이나 101번 해안도로를 잊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를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을 종단할 때의 그 천상에 오른 듯하던기분도 잊지 못한다. 미국 서부지역 사막지대의 가물가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 흔들거리던 차 안에서의 말 못할 두려움 또한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시도 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길과 운전자들이다. 땅은 좁은데, 사람도, 차도 많아 참으로 운전하기 어렵다. 시간은 없는데 도로가 막히면 짜증이 난다. 교통신호나 법규를 지키려다간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다간 뒤차 운전자에게 모진 욕설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집단 스트레스에 걸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고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핸들만 잡으면 매우 거칠어지는 것이 우리나라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누구나 세계 어딜 가도 최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어들기 천재, 앞지르기 천재, 신호위반 천재, 차선 안 지키기 천재, 경적 심하게 울리고 라이트 번쩍거리기 천재, 창유리 내리고 욕설 퍼붓기 천재 등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을 건 곡예운전의 달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운전을 그만 두어야 그나마 제 명대로 살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

 

미국에서는 길, 특히 오클라호마 주와 같은 전원지역의 길들 덕분에 행복해진다.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사이를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진다. 길 좌우에는 목장이 이어지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검정 소들이 가끔 고개를 들어 달려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목초지에서 베어낸 풀들을 말아놓은 건초뭉치들도 흡사 십대 남자 아이 얼굴의 여드름처럼 아름답게 돋아 있다.

 

 


킹피셔 인근 지역도로

 


킹피셔 인근지역에서 포착한 지평선 위의 소들

 


치카샤에서 촉토로 가는 도중, 산중의 한 목장을 지나면서 만난 소들. 이들을 가까이 보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이 녀석들이 웅얼거리며 걸어와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경한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형국이었지요.
      사람 보기 어려운 산 속의 목장에서,동양인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의 모양을 보며
내심 얼마나 멋쩍던지요.

 


촉토 인디언 지역[이곳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한 산악지역임]에서 만난 길

 


치카샤 지역의 길을 달리다가 만난, 어떤 목장 입구

 


토우손(Towson) 포트(Fort) 근처 길가에서 만난 농장입구[아마 주인 부부의 이름이겠지요?]

 

그 뿐 아니다. 땅 속에서 원유를 퍼내는 검은 색 채굴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은 흡사 사마귀처럼 끄덕거리며 원유를 길어 올린다. 흡사 까치집처럼 생긴 겨우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교목들이 길 좌우에 즐비하고, 다운타운을 벗어난 도시 외곽의 나무숲에는 멋지게 지은 집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마다 하얀색의 교회들이 하늘 높이 첨탑을 높이 올린 채 서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져 흥미로운 서사구조들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고, 각종 사건을 재료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발효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마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글로벌 시대에 누군들 역마살을 피해갈 수 있으랴. 그리고 어쩌면 역마살이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의 매력에 심취한사람들일 것이다. 역마살이 끼었대도 좋으니, 의미를 찾아 방황할만한 좋은 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스틸워터로 돌아오는 길에 잡은 한 컷[주택 옆에 목장이 있고,
그 곁에서 원유채굴기가 작업을 하고 있음].


아무 보는 사람 없어도 끄덕거리며 혼자서 열심히 원유를 길어 올리는 장한 채굴기

 


177번 도로를 달리다가 발견한 소규모 인디언[Iowa Tribe] 집단 거주지의 표지판

 


오클라호마주 길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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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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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1. 20. 14:53

 

 

우린 언제쯤이나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미국에서 알래스카 주 다음으로 크고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내 느낌으론 미국 내에서 최고로 부유한 텍사스 주[State of Texas]의 달라스(Dallas)시에 와 있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가 18451229, 미국의 28번째 주로 흡수된 텍사스 주. 이른바 '바이블벨트'로 불리는 이곳과 오클라호마 등 중남부의 여러 주는 전통적으로 높은 공화당 지지율을 보여주는 등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미국 입성 이래 서서히 쌓여온 피로에도 불구하고 달라스 행을 무리하게 시도한 것은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한 텍사스를 생략하고 떠날 순 없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초조감 때문이라 할까?

 

16일 오후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난 17일 오전. 도착 당일부터 오클라호마와는 현저하게 다른 교통체계와 북적대는 인파에 지친 우리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로 당장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실했지만, 그 욕망을 잠시 억누른 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529~ 19631122]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텍사스 출신의 43대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76~ ] 대통령이다. 케네디는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민주당적 대통령, 부시는 개신교 집안 출신의 공화당적 대통령이었다.

 


시민이 그려 박물관 계단에 붙여놓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 

 

하버드대 정치학과 출신인 케네디는 44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6세에 암살되었고,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인 부시는 200155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임기를 마치고 2005년에 재선된 뒤 200963세까지 임기를 마친 행복한 인물이다. 정치경력으로는 케네디가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두 번째 역임하고 있었으니, 이만 하면 똑같이 대권을 거머쥔 두 대통령이지만 상당히 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취임연설을 하는 부시 대통령 

 

두 대통령의 가문이나 경력, 정치적 성향, 정책의 성패, 개인적 성격 등 자세한 사항들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번거롭게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 점을 깨달은 우리는 달라스라는 같은 공간에 자취를 남긴 두 대통령을 찾아보고자 했다.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고 자탄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 좋은 기회에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방문한 곳이 이른바 ‘6층 박물관[The Sixth Floor Museum at Dealey Plaza]’.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창틀에 앉아 총을 쐈다는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 마련된 박물관인데, 사실은 일종의 사건 전말 영상 기록관인 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이 이용한 교과서 보관건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교과서 보관건물[오렌지색 건물] 6층 창문틀에서 오스왈드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이 사진 속의 아스팔트 위를 지나던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했다. 

 

19631122일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달라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케네디 대통령은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인근의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3발의 총탄 가운데 두 번째 총탄을 머리에 맞고 숨졌다. 이 사건의 전말이나 상세한 재판 과정, 저격범 오스왈드를 둘러싼 의혹 등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크나큰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지 사건의 발발에서 종말까지의 전 과정을 40여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박물관의 핵심 컨셉이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자 암살사건의 전모와 함께 왜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를 석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외견상 허름하지만, 이 박물관은 매우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위치 및 사이트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입구
                                                                                     


달라스를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시민들

 
                    어떤 시민이 그린 케네디 대통령

 
어느 초등학생이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애정

  

그 다음 방문한 곳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George W.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남부 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캠퍼스 안의 부시 대통령 센터 안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여사 및 부인 로라 여사 등을 비롯한 화목한 가족들, 학창시절과 군복무 시절의 각종 자료, 대통령 시절에 이룩한 대내외 업적들, 백악관 생활자료 등등.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기념관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대통령 스스로의 자부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미국 대통령이 걸어 온 영예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정말로 이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전말이나 의혹, 기념관에 전시된 업적들의 화려함이 아니었다미국인들은 과연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걱정했던 대로 관람객이 많이 몰려 우리가 케네디 박물관에 입장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고, 넓게 만들어진 부시대통령 박물관에서도 사람들의 어깨가 걸려 편안한 관람에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 미국인들인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긍지에 찬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점들 만으로도 대통령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증거로는 충분했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만난 그들은 대부분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어폰에서 울려나오는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40대의 젊은 대통령이 단 2년 동안 이룩한 업적에 놀랐고, 그가 바로 이곳에서 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숱한 여인들과의 염문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나 흑인 민권법 등에 관한 대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진실이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직은 비운의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대통령이 피격된 지점의 길바닥에는 지금도 x 표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이 십자가[cross]로 보였는데, 어쩌면 미국은 폭력으로 점철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케네디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나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이곳에  x 표시를  해 놓았으리라. 차라리 그어놓지나 말든지 이왕 표시하려거든 말뚝을 박아 새끼줄이라도 쳐놓든지. 공사장 인부들이 아스팔트에 굴착지점 표시하듯이 백묵으로 찍찍 엇갈려 그어놓은 모습이란! 그러나 그것이 미국인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당한 지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여사


케네디 대통령 추모비


추모비 안쪽의 상석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는 역사 진행의 합리성에 맞추어 가고자 한 그의 노력들을 읽어냈고,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들로부터는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긍심과 존경심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흐뭇한 미소들을 띠고 있었고,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이라크 전쟁을 두고 부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책의 실수 혹은 판단착오는 그것대로 계산하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전체적인 공적이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는 일은 민주국민의 성숙한 자세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12일 달라스의 Texas State Fair에서 아버지 부시와 함께.
부자 간의 다정한 모습과 미소가 국보급이지요?


세계적인 테러와 투쟁해온 부시 대통령


초등학교 교실에서 1일교사로 참여한 부시 대통령


어린이들의 건강 캠페인에 참여한 로라여사 모녀


2005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로라 여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펼치는 부시 대통령


연례 100km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서 오른쪽 발을 잃은
다니엘[Daniel Gade]소령을 부축하고 있다.


 자궁경부암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부시 연구소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잠비아 Kabwe의 Ngungu Health Center 리노베이션 작업에 나선 부시 전 대통령.
왜 우리 대통령들에겐 이런 모습이 없는 걸까요?


2000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인사말 "나는 한 당파에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뽑힌 게 아니고, 한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뽑힌 것이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들의, 
모든 인종들의,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대통령이다. 당신이 내게 표를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당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며, 당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 앞면

 

그렇다면 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같은 자신들의 대통령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존경을 보내는 미국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겐 그들처럼 존경할만한 우리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직을 맡아 수천만 생령(生靈)들의 기대와 소망(素望)을 한 몸에 받은 입장이라면, 더구나 자연수명으로도 이제 살만큼 산 입장이라면, 무슨 세속적 욕망을 다시 추구하고 싶단 말인가. 아주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에라도 나서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받은 벅찬 사랑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한 톨 한 톨 갚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었으련만, 하나같이 가당찮은 물욕과 권력욕에 찌들어 재직 중엔 신성한 대통령직을 더럽히고 물러나서도 오욕(汚辱)의 구렁텅이에서 지금껏 헤매고 있단 말인가. 국민들에겐 실망을 안겨주고 역사에는 더러운 자취를 남기는 그들을 어떻게 존경스런 대통령으로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케네디 박물관의 매점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샀다. 앤 보섬(Ann Bausum)<<Our Country’s Presidents>>란 책이었고, 이 책에는 조지 워싱턴부터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까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란 자긍심 넘치는 책을 쓸 수 있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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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1. 16. 03:43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주는 공간-오클라호마 메모리얼 뮤지엄(Oklahoma City National Memorial & Museum)

 

 

 

인간은 착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서양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 궁리해왔지만 쉽게 결론 날 문제는 아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학자나 성악설을 주장한 학자나 아무리 복잡한 논리들을 늘어놓았어도 모두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경우 공자의 말씀[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공자 말씀하시되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혀 얻게 되는 성품은 서로 멀어지게 된다/<<논어>> <양화> 2]에서나 어떤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지 선한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가는 것 뿐 아니겠는가. 다만 착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는 대개 그 정도에 한계가 있으나, 악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 그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진행 양상 또한 극적이다. 그래서 고금의 많은 문학가들이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그려내고자 노력해온 것이리라.

 

***

 

얼마 전부터 오클라호마에 왔으니 메모리얼 뮤지엄은 보아야 할 것이라고 어느 지인이 권유를 했다. 18년 전 뉴스를 보며 끔찍한 사건이란 생각을 했으면서도 실감이 안 나 그냥 들어 넘기고 만 셈인데, 이제 그 현장에 온 만큼 안 볼 수는 없는 일. 더구나 훨씬 규모가 크고 끔찍했던 2001년의 ‘911 테러로 치를 떨었던 만큼, 인간 악마성의 한계를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연방청사 폭파의 참화에서 살아난 오클마호마 주 깃발과 시 깃발

 


오클라호마시 국립 메모리얼 뮤지엄의 현재 모습

 

이런 사건이 터지면 흔히 용의선상에 오르곤 하던 이슬람 테러단체 아닌 미국인들이 자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는 점을 누군들 쉽게 이해하겠는가. 1995419일 오전 95. 트럭에 실려 온 2000kg 이상의 폭발물이 터져 오클라호마의 연방청사는 처참하게 망가졌고, 보육원 어린이 상당수를 포함 168명 사망에 6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연방청사의 공무원들, 어린이들, 일반인들 모두 테러범들과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 평소 일면식도 없었을 이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폭탄 테러를 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테러 당일 오전 6시 30분의 상황. 조찬기도회 준비상황과 기도제목

 


폭파테러 직전의 상황(일상업무 시작, 그리고 보육원의 어린이들...)

 


폭발물을 싣고 달려오는 라이더 트럭이 창밖으로 보이지요?

 


폭발 순간의 영상

 


테러 직후의 처참한 모습

 

주범인 중산층 출신의 걸프전 참전용사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 1968-2001]와 종범인 테리 니콜스[Terry Nichols, 1955~]는 둘 다 미시간에 근거를 둔 급진 우익 서바이벌 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서바이벌 그룹(survival group)이란 자신이나 자신의 그룹[혹은 국가]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슨 짓이든저지르는 미치광이 집단이다. 이들의 광기 앞에는 환상을 바탕으로 한 테러나 무차별의 증오만이 있을 뿐, 상식이나 이성은 있을 수 없었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건의 전말은 석연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미국사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테러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전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참상

 


참상

 


참상

 


참상

 

***

 

사실 우리 같으면 빨리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식간에 잔해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보란 듯이 새로운 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뒤면 새 건물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나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평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모조리 사라진 건물터엔 희생자들의 공동묘지와 기념물을 만들어 놓았고, 위에서 아래로 ½가량 파손된 건물을 세심하게 수습하여 박물관으로 재생시켜 놓은 것이었다. 사건 직전부터 발발, 수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 별 전 과정과 내용, 범인의 체포와 형 집행 등 사건 처리 과정, 희생자들의 신원 및 제반 관련 정보들, 시민들과 전 세계인들의 반응, 국가의 대응 내용 등 사건과 관련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폭발의 위력에 깨지고 부서진 시멘트 벽,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각종 철 구조물들, 소방관들의 희생적인 구조 활동, 구조견의 대견한 활약상,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을 구조하다가 정작 자신은 숨을 거둔 민간인 부상자들의 영웅적 활동, 시민들의 자발적 구조 활동 참여 등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잔해더미 속에서 아기를 구해 소방관에게 전하는 구조대원

 


구조대원으로부터 넘겨 받은 아기를 안고 있는 소방대원. 이 아기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음.

 


희생자들

 


이 아기들의 재잘거림이 들리시나요?

 


잔해 속에서 발견된 봉제 강아지 인형. 건물 안의 'day care center'에 있던 것으로 추정됨.
강아지의 슬픈 표정이 보이시죠?

 


평안의 상징인 테디 베어[일리노이주 퍼스트 레이디 브렌다가 보낸 테디베어를
오클라호마 퍼스트 레이디 케이티가 희생자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음]

 


산자들이 희생자들의 안식을 빌며 만든 종이학

 


테러 당시 크게 손상을 입었다가 새롭게 단장된 연합감리교회[First United Methodist Church]

 


희생자 추도식에서 조사를 읽고 있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


미국인들, 아니 이곳을 방문한 세계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살아남은 이들을, 그리고 삶이 영원히 변해버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이곳을 보고 떠나는 모든 이들은 폭력의 충격을 잘 알게 되었다. 부디 이 기념관이 평안을,
강건함을, 평화를, 희망을, 그리고 평온함을 주기를..." 이라고.

 

***

 

부끄러운 테러, 혹은 비극적 참상을 교육의 현장으로 바꿔놓을 줄 안다는 점에서 참으로 대단한 미국인들이었다. 이곳을 끊임없이 찾아와 그 때의 충격을 느끼며 자손들에게 테러의 죄악을 교육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했다.  뿐 아니다. 보존된 현장을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그들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가 만약 무너진 삼풍 아파트를, 다리의 상판이 떨어져 내려앉은 성수대교를 그대로 보존하여 반성과 경각심의 자료로 삼을 수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우리는 선진국 대열의 앞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잘못의 현장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며 깨우쳐야 한다.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의 부조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짧은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비극이다. 이제 우리도 큰 사건의 현장은 오래 보존하여 후세를 위한 교육의 자료로 삼아야 할 때다.

 


테러에서 아무 손상없이 살아남았다는 성조기

 


테러 이후 박물관으로 환생한 연방청사와 주변의 모습

 


최악의 테러사건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박물관 대각선 건너편 코너에 있음]

 


희생자 묘역

 


희생자 묘역 앞에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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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

    정말 좋은글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퍼갑니다

    2013.11.16 03:50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Ad 님, 제 사이트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Oklahoma City National Memorial & Museum 내용 중 몇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2013.11.20 12:42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1. 5. 11:47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오클라호마를 관통하는 옛 길 하나가 있다. 이른바 66번 도로[Route 66]. 이 길의 역사성이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거론하기로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 길에 주목해왔다. 토요일인 어제도 우리는 차를 몰고 이 길의 탐사에 나섰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외견상 약간 퇴색되긴 했지만 아름다운 도시 유콘시티(Yukon City)를 만났다.[유콘 시티에 관한 글은 다음 기회에 싣는다] 이 도시의 유콘 퇴역군인 박물관[Yukon Veterans Museum]’에서 우리는 코끝이 찡해오는 슬픔과 가슴 멍한 감동을 만나게 되었다.

 


유콘시 역사박물관[이 박물관의 3층에 퇴역 군인 박물관이 있음]

 

***

 

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을 찾지 못해 안내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는 여성이 찾아오는 길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Yukon Historical Museum에 대한 글은 미국통신 27로 싣는다] 이 박물관의 맑고 품위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 캐롤[Carol Knuppel]의 안내로 소중한 생활사 컬렉션을 두루 살펴 본 다음, 같은 건물 3층에 마련된 퇴역군인 박물관을 우연히 찾게 되었고, 거기서 일을 보고 있던 톰[Mr. Tom Thomas]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박물관 안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색깔은 바랬으나, 낯설지 않은 몇 장의 사진을 목격하게 되었다.

 


유물을 들어 보이고 있는 톰 씨


한국전 코너 표지판

 

, 그것은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우리네 누이와 아주머니의 힘겨운 모습이었다. 칭얼대는 동생을 광목 포대기로 감아 업고 배고픔을 달래던 우리 누이, 전쟁 통에 죽었거나 끌려가 부재중인 남편 대신 산에서 땔감을 산더미처럼 지고 오던 이웃 아주머니, 비누도 제대로 없던 시절 냇가에서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던 동네 아주머니들, 덜컹대던 버스, 동산만큼 무거운 짐을 실은 리어카를 활기차게 끌고 가는 어떤 장년 남자, 자신의 사진을 찍는 사람의 동작을 흉내내는 듯한 코흘리개 남자아이, 서울 수복의 감격이 짙게 배어 있는 서울시청, 그 때까지만 해도 웅장한 자태로 서 있던 동대문 등등. 그런데 이 사진들을 과연 누가 찍었을까. 사연을 알아보니 유콘에 살던 퇴역군인의 아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란다. 원판 화질이 안 좋았으나 우리로서는 그 사진들을 우리의 카메라로 다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누구 혹시 이 아줌마를 아시나요?


누구 혹시 이 아줌마를 아시나요?


서울시내 어딘가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자


1954년 당시 서울시청


누구 혹시 이 아이를 아시나요?


1954년도 서울시내 한 곳 


1954년도 서울시내 한 곳의 한옥


1954년 당시 버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이 혹시 사라질세라 카메라를 소중하게 부여안고 다른 노정들의 방문은 생략한 채 2시간 가까운 거리를 달려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여 컴퓨터 화면에 띄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진들 모두의 화질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톰에게 전화를 하자 다음날[일요일, 즉 오늘] 12시에 사진 기증자가 이곳에 오니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Yukon Veteran's Museum을 다시 찾았고, 거기서 이 사진을 찍은 퇴역군인의 신원을 알게 되었으며, 기증자의 아들인 Mr. Richard Cacini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역시 미 육군에서 30여년을 근무한 군인이었고 그의 아들 또한 군인이었으므로, 이탈리아계 이민인 카치니 가문은 3대가 군에서 복무한 모범적 사례였다. 우리는 어제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카메라와 스마트 폰으로 사진들을 다시 찍고, 휴대용 스캐너로 일일이 스캔하여 별도의 파일로 보관하기도 했다. 리차드 씨의 흔쾌한 협조로 열 장이 넘는 사진들을 송두리째 우리의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Mr. Rick Cacini


Mr. Rick Cacimi와 처음 만나서


Mr. Rick Cacini, 백규, 그리고 Mr. B Mac[미 해병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낸 감사의 편지


퇴역군인의 날 행사 포스터

 

 

미 육군의 하사관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던 카치니는 각각의 사진들 뒷면에 장소와 연도를 표기했는데, 연도가 모두 1954년인 점으로 미루어 전쟁 직후의 우리 땅[의정부, 서울]에서 찍은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눈시울을 촉촉하게 한 것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따스한 시선으로 어려운 시절의 우리 모습을 잘도 잡아냈다는 점이었다. 의정부에서 찍었다는 나뭇짐 지고 가는 여인사진 뒷면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당신이 혹사당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여인은 200~400파운드 무게의 짐을 져 나르고 있다. 그녀가 내려놓았을 때 나는 그 지게를 들 수조차 없었다.[Don’t tell me you are overworked! This lady is carrying between 200 and 400 pounds. I could not even lift the ‘A-Frame’ when she put it down.]”

 

그는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지고 가던 가냘픈 여인을 만났고, 삶의 무게가 그의 마음에 감동과 동정의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한국인이 당하고 있던 현실적 고통을 큰 소리로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동생을 업고 있던 작은 소녀의 사진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이 작은 소녀는 겨우 여섯 살인데 몇 달 동안 애보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거의 모든 어린이들은 등에 아기들을 끈으로 묶어 업고 다닌다.[The little girl is six and has been a ”baby sitter“ for many month. Nearly every youngster has another strapped on his back]”

 

여섯 살 난 여자애가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에 사진사의 시선이 꽂히는 순간이다. 한 집에 일곱 여덟씩의 아이들이 북적대던 우리 어린 시절, 젖먹이 아이들을 업어 키우는 일이야 당연히 형이나 누나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런 일을 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의 앵글이나 초점과 메모의 내용을 결부시키면, 사진사의 단순한 호기심보다 따스한 동정과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

 

이 소녀와 아줌마는 지금쯤 이 땅을 떠났거나 고령의 여인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쩜 지금까지도 어떤 미군이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던 그 시절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인연으로 우리는 이 먼 미국 땅에서 사진으로나마 그들을 만나게 되었을까. 누군들 알았겠는가. 다른 지역에 비해 한국인들이 적은 오클라호마의 잊혀져가고 있는 소도시 박물관에서 사진으로 만나는 우리의 어제가 이토록 내 유년기의 상처를 건드릴 줄을. 1111일 이곳 박물관에서 열리는 퇴역군인의 날[Veteran’s Day]에 우리는 초대를 받았다. 반드시 그들을 만나서 지금의 우리는 기적처럼 일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음을 알려주리라. 그들의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625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심어주리라.

 

***

 

다시 한 번 여쭙건대, 어딘가에 살아 있을 이 소녀와 아줌마를 누구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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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규선생님께
    이제야 T-story 시스템에 익숙해집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들어왔다가 나갑니다.
    미국에 계신 모습을 뵈면서 그리워할게 아니라
    한국에 계실 때에 이따금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 전쟁 직후에 찍은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네요.

    2013.11.13 03:3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구 선생님,

    드디어 방문해 주셨군요.
    차린 게 변변치 않아서 미안합니다만, 가끔 찾아주시고 담소나 나누시지요.
    사실 이 지역이 한국 관련으로는 불모지라 할 수 있는데, 워낙 미국의 바탕이 넓고 두터워서 그런지 꼼꼼히 찾아보면 제법 물건이 될만한 게 있을 듯 합니다. 시간 여유를 갖고 있다면 건질만한 게 적지 않을 듯 한데, 이제 슬슬 짐을 싸야 할 때가 다가오니, 약간씩 초조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남은 시간 힐링에 주력할까 합니다. 여유로운 마음만큼 큰 귀국선물이 있을까요?
    속을 확실히 비워갖고 갈테니, 막걸리나 맘껏 부어 보십시다.

    앞으로도 블로그에서 가끔 뵐 수 있길 바랍니다.
    한국은 지금 춥다는데, 건강 조심하시고요.

    백규 드림

    2013.11.13 10:02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0. 30. 07:46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2일차-대초원[Tall Grass Prairie]에서 멋진 울음 터를 발견하고

 

 

 

 

연암 박지원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요동벌판을 만나자 멋진 울음 터로다. 크게 한 번 울어볼 만 하도다!”라고 소리쳤다. <<열하일기>>의 이른바 호곡장(好哭場)’이 그것.

 

8시에 버스 두 대에 분승한 우리들은 2시간여를 달려 드디어 광활한 초원으로 들어섰다. 작은 키, 중간키, 큰 키의 각종 풀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에 깔려 있고, 저 멀리 검고 흰 소떼가 대지에 주둥이들을 박은 채 풀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간이 관목지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온통 풀밭이었다. 미국인들이 ‘Tall Grass Prairie’[이하 ‘TGP’로 약칭]라고 부르는 자연 초지(草地)였다. 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드문드문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서 있고, 땅 속에서 퍼낸 원유와 가스를 저장하는 탱크들도 보였다. 말하자면 땅 위에는 달디 단 젖과 고기를 만드는 영양 만점의 풀이 그득하고 땅 밑에는 인류문명을 지탱하는 또 다른 젖인 원유가 고여 있으니, 이 나라는 대체 어찌하여 이런 복을 타고 났단 말인가.

 


Tall Grass Prairie Preserve 표지판과 뮤지엄

 


털사 시티와 오세이지 보호구역 및 톨그래스 프레이리가 나온 지도

 

연암은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알고, 칠정(七情) 모두에 울 수 있다는 건 모른다네.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지.울음이란 천지간에 우레와도 같은 것. 지극한 정이 발로되어 나오는 것이 이치에 맞아든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다. 기뻐도 슬퍼도 울 수 있는 것은 연암 뿐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가 대초원울음 터로 생각한 것은 나의 왜소함을 비웃는 듯한 그 광활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허허로운 듯한 외피 속에 그득 담긴 가멸찬 풍요, 그리고 그로부터 느끼는 상대적인 빈곤이 둘째 이유였다. 60 가깝도록 손바닥만한 풀밭에서 소꿉장난하듯 살아온 인생의 눈에 광대한 대초원에서 느끼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바로 내 울음의 근원이었다. 연암도 그랬으리라. ‘들판에서 해가 떠서 들판으로 지는그 요동벌판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가난하고 좁디좁은 조선 땅과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 무리


대초원 저편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흰소와 검정소들


대초원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는 long horn cows

 

***

 

두 대의 버스는 호텔로부터 두 시간 가량 달려 TGP로 들어섰다. 까마득히 넓어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대초원. 안내자로 나선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들으며 초원 사이로 난 트레일을 느릿느릿 달리는 버스의 창을 통해 그 넓이를 마음으로나 가늠할 뿐이었다.

 

오세이지(Osage) 카운티에 속해 있으며, 포허스카(Pawhuska) 다운타운으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한 TGP. 초원 보호구역으로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역사의 현장이자 유물인 셈이다. 원래 텍사스로부터 마니토바(Manitoba)까지 14개 주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도시의 확장과 농지의 전용으로 남아 있는 공간은 원래에 비해 겨우 10% 정도라 한다. 엄청난 크기와 기괴한 표정의 검정 소 바이슨(bison)들이 무리를 지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생태공간이다.

 


                                           톨그래스 프레이리 구역도       

 

TGP의 관문인 포허스카는 19세기 이래 오세이지 부족의 중심역할을 해온 도시인데, 오세이지 족은 갠자스에 있는 보호구역의 땅을 팔고 포허스카를 둘러싼 땅을 새로 사들였다고 한다. 지나면서 얼핏 보기에 새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이 구역의 오세이지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석유의 발견으로 그들은 농업과 목축으로부터 벗어나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 그룹들 가운데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오세이지 족은 자기들 땅의 광물 채굴권을 갖고 있으며, 특히 석유와 가스는 오세이지 부족원들 뿐 아니라 그들 영역 안에 사는 다른 부족원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수입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TGP 1986년 이래 오클라호마의 웅장한 자연경관과 독특한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해 온 미국의 자연 보호 단체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만들어졌다. The Nature Conservancy의 오클라호마 지부가 총면적 77,000에이커[120평방 마일]에 달하는 12개의 보호구역을 소유하거나 돌보고 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TGP에 들어선 우리는 바이슨 루프(Bison loop)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바이슨 관찰에 나섰다. TGP 본부 사무실보다 4~5마일 앞선 곳에 까마득한 넓이의 면적이 원형의 트레일로 구획되어 있는 곳이 바로 바이슨 루프였다. 풀이 없는 겨울 동안 녀석들이 먹을 건초 덩어리들을 쌓아놓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앞마당에 모여 있던 수십 마리의 바이슨들이 우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곤 길 건너 풀밭으로 슬금슬금 피해가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녀석들은 길을 건너가면서도 우리 쪽을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무어라 투덜대는 게 분명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불만이었을 텐데, 만약 우리가 다급하게 뒤쫓았다면 그 무서운 뿔을 곧추 세우고 덤벼들 것 같은 위기를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저 멀리 초원 한복판으로 몰려간 바이슨들은 길게 1자 대형을 유지하며 지평선으로 접근해갔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가물가물 멀어지다가 그들의 대열이 지평선과 합치되면서 우리는 자리를 떴다.

 


풀을 뜯고 있는 바이슨(borrowed from Google.com)


우리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바이슨 무리


바이슨들이 물러난 자리에 남겨진 엄청난 거름

 

한때 개체 수가 3천만 마리를 상회하던 바이슨은 대초원의 왕이었다. 어깨 높이 180cm1톤이 넘는 체중을 자랑하는 웅장한 체격의 바이슨.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 규모로 떼를 지어 초원을 배회하는 바이슨은 결코 식물이나 토양을 황폐화 시키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적당히 먹고 계속 움직여 뜯어먹은 곳의 식물을 다시 복원시키기 때문이다. 1800년대 후반에는 1000 마리도 남지 않아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보호에 힘입어 현재는 약 35만 마리 정도로 불어났다고 한다. 멸종의 위기는 벗어난 셈이고, 15000마리는 미국 내 공공의 땅에서, 나머지는 The Nature Conservancy에 의해 사유물로 각각 관리되고 있었다. 지금 The Nature Conservancy는 생태 시스템 복원작업의 한 부분으로 보호구역에 바이슨을 재입식해오고 있는데, 우리의 버스들이 바이슨 루프에서 시속 10마일로 서행한 것도 바이슨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안내원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이슨 무리를 좇고 있는 각국의 학자들


인도의 탁월한 농학자 파트로 교수와 함께

 

사실 이 지역에 바이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감에도 야생화들은 화려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기이한 종류의 풀들이 그득했다. 갖가지 새들은 지천으로 날아다니고, 여우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의 개체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TGP 조성 이후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아 수질과 토양이 개선되면서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빚을 최소한으로라도 갚고 있다는 증거였다.

 

***

바이슨과 이별한 우리가 점심식사를 위해 멈춘 곳은 TGP Research Center였다. 그곳에는 우리의 점심 도시락을 싣고 온 트럭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배분된 샌드위치 속의 바비큐가 바이슨 고기인지 묻고 싶었으나, 바이슨들의 표정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오클라호마 음악에 미친 복합문화적 영향[The Multi-Cultural Influences of Oklahoma Music]”이란 제목의 강연 겸 공연을 접하게 되었다. 강사는 Dr. Hugh Foley[Professor of Fine Arts at Rogers State University]였고, 그 아들이 특이한 복장으로 나와 인디언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새로운옛날 음악을 새파란 젊은이로부터 듣는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부자가 음악으로 통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이론으로 설명하면 아들은 타악기로 직접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TGP 리서치 센터 강당에서 공연 중인 휴 폴리 교수의 아들


휴 폴리 교수와 그의 아들

 

분명하진 않으나 노래들의 가락이 우리의 전통음악과 상당히 유사하여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설명하고 들려준 건 Red Dirt Music. 우리말로 번역하면 황토음악쯤 될까? Red Dirt Music은 오클라호마에 흔히 보이는 누런 흙에서 그 이름을 얻은 음악장르라 한다. 원래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가 Red Dirt Music의 중심으로 알려져 왔는데, 텍사스에도 Red Dirt Music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한때는 두 장르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2008년부터 그 차이가 소멸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음악, 특히 원시음악과 Red Dirt Music을 비교한다면,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연 내내 드는 것이었다.

 

점심 겸 공연이 끝난 뒤 랜취 하우스와 뮤지엄, 초원 사잇길 등을 거쳐 들른 곳이 오세이지 박물관[Osage Tribal Museum]이었다. 도착하니 그들은 이미 우리를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연사는 Kathryn Red Corn.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으로서 오세이지 족 출신의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오세이지 족의 역사와 TGP에 대한 부족의 흥미'를 주제로 30분 이상 차분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나는 현재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는 어떻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앞으로 얼마나 부족의 정체성[tribal identity]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나 ‘Government 차원에서 다른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것, 각종 민속행사 등을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등 매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을 뿐, 그런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Dr. Cheryl Matherly와 함께


Tall Grass Prairie 뮤지엄 앞에서

 

미국 최초의 인디언 부족 박물관인 오세이지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의 전통에 따라 생활해왔거나 현대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오세이지의 역사, 전통, 관습 등에 정통한 사람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뮤지엄은 오세이지 부족원들의 역사를 기념하거나 그것들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1년 내내 많은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의 대표란 사람이 전통복장으로 행사장에 앉아 있었지만, 흡사 쇼윈도에 앉아 있는 마네킹처럼 생기 없이 인디언 부족의 미래를 대변하는 듯 했다.

 


오세이지 박물관(The Osage Tribal Museum)


오세이지 박물관에서 만난 공주(2013년 선발), 부족대표, 여성명사


오세이지 박물관 안에 붙은 그림


오세이지 박물관 벽을 채운 오세이지족 인물들


오세이지 족이 분배 받은 땅(지적도) 


오세이지 족의 대표와 함께


오세이지 박물관 관장 Kathryn Red Corn과 함께


TGP에서 석유를 채굴하던 옛날의 채굴기(오세이지 박물관 뜰)

 


오세이지 부족 사무소 앞에 세워진 기념 표지판

 

***

 

시간의 단층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역사의 뒤안길을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주파한 셈이었다. 대초원에도, 바이슨의 눈빛에도, 인디언들의 마음에도 그들 과거의 기억들은 화석화 된 채 촘촘히 박혀 있는 듯 했다. 지혜로운 후세의 누가 있어 정을 들고 그 화석들을 캘 날이 있으리라. 종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할 유전자가 그 화석들 속에서 검출되고, 종국엔 이 땅에서 사라진 영광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초원과 인디언들이 내게 주는 무언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사라지겠지만, 내일을 위한 씨앗 정도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오늘 톨 그래스 프레이리에서 강하게 느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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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훈식

    우리의 전통음악과 그들의 황토음악(?)에서 어떤 의미있는 결과가 도출될지 궁금합니다.

    그네들의 소도 질펀하게 거름을 배출하는 건 일반인 것 같습니다.^^

    2013.11.07 22:2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전문가들이 현장에 있었더라면 분명 공통되는 뭔가를 찾아냈을 겁니다. 당시 만난 인도 학자들은 인디언의 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디다만, 나는 우리에게 있다고 말했지요. 그들의 생활도구를 보아도 그렇고, 피부색이나 무뚝뚝한 표정 등도 그렇고, 음악에서 느껴지는 미학적 공통성도 그렇지요. 전문적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감'일 뿐이지만. 여하튼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2013.11.14 01:01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