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3. 01:33

새해를 맞으며

 

 

 

2016년 12월 31일 득량만에서의 해넘이

 

 

2017년 1월 1일 득량만에서의 해맞이

 

 

                                                  2017년 1월 1일 득량만에서 만난, 추억의 아침 연기

 

 

1990년대 초쯤일까요. 복거일의 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를 읽고 나서, 한동안 타임머신을 저 자신의 화두(話頭)로 틀어쥐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불혹에 접어들면서 시간의 위력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제 내면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었지요. 그로부터 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욕망이 망상(妄想)의 근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호걸들도 그저 ‘(역사를) 앞사람으로부터 받아서 뒷사람에게 이어주는고리에 불과하다는 진리. 바로 그 진리란 특별한 공부 아닌 나이가 알려주는 자연법칙이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 것이지요.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작비금시(昨非今是)'! 요즘 연말연시만 되면 누구나 한 번씩 인용하곤 하는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명구이지요. 고백하건대, 길을 잃고 헤맸으나 아직 멀어지진 않았으니/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는 도연명의 깨달음에 힘입어, 나와 조상의 지난날들을 찾아 헤매다가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의 어떤 점들이 잘못 되었고, 지금은 어떤 점이 옳거나 나아졌는지, 참으로 궁금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해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저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감수(甘受)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손쉬운 타성에 푹 젖어들고 말았습니다.

 

작년에는 참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소천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가족관계의 허망함을 깨달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을 통해 치열한 삶과 성취보다 건강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는 예수의 말씀(마태복음 1626)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입니다.

 

가치와 중요성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들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들일까요? 가치가 있어서 중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중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참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모두에게 가치 있는, 아니 모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서로 물고 뜯으며 적개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지내온 지난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움이 더욱더 크게 증폭될 올해를 걱정합니다. 이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데, 다시 어느 편에 서서 불편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것이 뻔한 2017년이 두렵습니다.

 

반복하건대, 손에 잡히지 않는 타임머신을 타고서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그 당시 정의와 최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호걸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는 새해만 되면 지난 시간대의 자신을 후회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그들의 말을 듣고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저는 그저 크게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살아가렵니다. 좀 더 따스한 눈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다독일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지도 못할 일들을 하겠노라 떠벌이게 될 정치인들을 미움 아닌 연민으로 바라볼 여유와 폭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 여러분들에게 신의 가호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새해 벽두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9. 15. 23:34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몇 년이나 지났을까.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가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가 마무리 멘트로 던진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일 내로 쓴물이나 한 잔 허세!”

 

쓴물이라?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커피를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무릎을 쳤다. 그 날부터 아침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그가 깨우쳐 준 쓴 물의 다의성(多義性)과 함축성을 곱씹기 시작했다. 최근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우리네 막대커피의 우수성(?)을 서양인들도 인정하기 시작했다지만, 사실 커피의 매력은 쓴 맛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양동이만한 커피 잔을 안고 다니는 게 일종의 패션처럼 되어 있다. 대부분 나로선 이름도 외우기 힘든 달달한 커피 일색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친구들, 쓴물의 철학적 원리나 약리(藥理)를 알 리가 없다.

 

공자는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이요. 忠言逆於耳而利於行)"고 말씀하셨다. 내 경험상 익모초 달인 물을 비롯, 전통사회의 약들은 으레 몸서리쳐질 정도로 쓴 것들뿐이었다. 현대인들의 병 가운데 상당수가 당분의 과다섭취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요즘 대부분의 약은 달콤한 설탕을 겉에 바른 당의정(糖衣錠)’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쓴 약은 먹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인간의 본능적 기호(嗜好)를 역으로 잘 보여주는 경우 아닌가.

 

쓴물과 비슷한 표현에 쓴잔이 있고, 그것을 한자어 고배(苦杯)’로 쓴다. 어떤 시도가 실패할 경우 고배를 마셨다고들 한다. 그러나 쓴물혹은 쓴잔고배가 항상 같은 의미범주인 것은 아니다. 인류사 최고의 극적인 쓴물은 성서에서 발견된다. <<신약성서>>마태복음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은 그야말로 지극한 의미의 쓴잔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예수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당하신 온갖 모욕과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말 속의 쓴잔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경우의 은 패배의 그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적 고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쓴맛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도 있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을 다투던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에 관한 고사다. 치고받고 싸워오던 과정에서 위기를 모면한 월왕 구천이 다시 월나라로 돌아와 곁에 쓸개를 놔두고 항상 그 쓴맛을 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하다가 결국 패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니, 쓴맛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약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승리의 환희보다 패배의 고통을 훨씬 자주 경험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패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승리는 큰 의미가 없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입장에서 보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의 삶도 알고 보면 성공과 실패’(혹은 승리와 패배’)가 반반, 아니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남의 성공만 볼 뿐, 실패는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실패 속에 고심참담하던 그들의 모습은 아예 보려하지 않는다. 남의 화려한 성공만을 보고 부러워하는 게 장삼이사들의 보편적인 심성이기 때문이다.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내 친구의 허허로운 이 말 속에는, 성공을 소망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장삼이사의 철학이 들어있다. 툭하면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그들, 아니 우리들. 늘 실패를 맛보면서도 내일은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새로운 도전의 결기를 다지는 게 아닌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3. 15. 09:40

 


영화의 포스터

 

 


글래스의 아들을 죽이는 피츠제랄드

 

 


글래스를 덮친 갈색곰

 

 

 

죽음을 초극하게 하는 것은 뭘까?

-영화 <레버넌트Revenant>를 보고-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라고! 처음엔 그저 천재적인 괴짜의 무책임한 발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의 죽음, 사랑하는 제자들의 죽음, 집안 어른들의 죽음, 친구 부모들의 죽음, 직장 선배들의 죽음, 사회 저명인사들의 죽음 등을 거쳐, 최근 저세상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나는 드디어 어렴풋하나마 나름의 사생관(死生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그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의 엄혹한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표정이 그토록 평화롭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할 줄 뻔히 아시면서도 어머니는 늘 아프지 않게 죽을 순 없을까?’라고 내게 묻곤 하셨다.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얼굴을 뵈며 스티브 잡스의 말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

 

어머니 소천 며칠 후 영화 <레버넌트>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어머니 소천 훨씬 전부터 우리 사회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스카상 수상 소식이 매스미디어들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려웠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그랬는가. 광고화면의 영화제목엔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단어의 뜻까지 부기되어 있었다. 그래, 주인공 그는 어떤 표정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을까. 과연 그는 죽음을 초극했을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죽음은 어떤 표정으로 삶과 대치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휴 글래스의 가면을 쓴 디카프리오와 피츠 제랄드의 가면을 쓴 토머스 하디가 죽음을 놓고 벌이는 설원의 결투. 처절하게 아름답고 야만적인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서사시의 처음과 끝을,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실마리를 잃어버린 이쯤에서 잘근잘근 씹어보고 싶었다.

 

19세기 개척시대 미국의 맥박이 은막 가득 출렁였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대자연은 갈피갈피 시퍼런 산소를 내뿜고, 그 속을 누비며 욕망의 껍질들을 벗겨내는 모피 사냥꾼들은 일렁이는 물풀 속의 송사리들처럼 가냘펐다. 사랑하는 인디언 여인은 글래스에게 혼혈의 아들을 남겨주었고, 그 세 사람을 엮는 접착제는 가슴 저릿한 사랑과 부성애였다. 더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어 누르는 갈색곰(grizzly bear)과의 사투에서 살아나오게 한 힘도 바로 그 부성애였을 것이고,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에서 벌떡 일어나게 한 복수심도 그 근원은 부성애였을 것이다. 현존하는 사랑을 삭제해버린 불구대천의 피츠 제랄드. 그를 죽여야 아들에 대한 사랑의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운 김을 눈 쌓인 대지에 불어내는 그의 야성(野性), 인디언들의 추적을 피해 칼날처럼 저미는 급류의 한기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초월적 강인함도 아들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리라.

 

사랑과 복수. 무엇이 되었건 그 끝은 죽음이다. 레마르크 원작의 소설이자 영화인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는 사랑에 대한 대립어로서의 죽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죽음이 없다면 사랑의 찬란함을 부각시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는 더 극적이고 원시적인 죽음의 근원이다.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르고, 그 악순환은 대개 죽음에 의해 마무리된다.

 

눈 쌓인 광야에 선혈을 뿌리며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두 사나이. 두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모습에서 풍겨나는 분위기야 말로 그 갈색곰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등가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그는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다. 피츠 제랄드가 몇 마디 변명으로 응수해보지만, 이미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된 그들에게 무슨 꼼수나 변명이 필요할까. 피츠 제랄드를 죽이고 눈밭에 뻗어버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다 이루었다!’였으리라. 굳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을 받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악한 원수를 징치하여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와, ‘원수를 사랑하라시며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는 분명 정반대이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림을 드나들며 복수를 통한 사랑의 구현’,  그 서사를 완성해간 영화 속의 주연과 조연. 그들은 정녕 대자연의 존재원리를 완성시킨 두 마리의 짐승들이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초극한 대자연의 소품들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한 번 더 보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복수에 나선 글래스

 

 


눈밭에 누워 복수를 꿈꾸는 글래스

 

 


복수의 화신, 글래스

 

 


피츠 제랄드 역의 톰 하디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