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9. 10. 3. 17:54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 중에서>

 

                연행록이 급하다!

 

                                                                                                                                                                                       조규익

 

연초부터 중국의 한 젊은 학자가 이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하북대학(河北大學)의 량짜오(梁钊) 박사. 연행록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조직했으니, 꼭 참석하여 주제발표를 해달라는 요지였다. 처음 몇 번은 으레 던져오는 ‘낚시 성 이메일’이려니 시큰둥하게 여기고, 치지도외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거듭되는 연락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연행록에 관한 내 글들을 읽으며 공부해온 입장에서 첫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발표자로 꼭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내용을 반복하여 보내왔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이 단순한 의례 차원의 ‘말 건넴’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외국의 학자인 그가 내 글들을 읽었다는 점과, 악장에 밀려 한동안 책상 밑에 던져두었던 연행록을 재소환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악장에 매달려 정신은 없었지만, 그간 논문 두 편을 겨우 쓰고 팽개쳐 둔 최현의 <<조천일록>>을 이번 기회에 다른 관점으로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 덕으로 원고지 300매가 넘는 분량을 한 달에 걸쳐 탈고하게 되었다.

 

9월 27일~29일까지 하북대학 문학원 주최로 열린 “제1회 연행록과 연조문화(燕趙文化) 국제학술회의”는 내 경험상 내용에서도 의전(儀典)에서도 돋보이는 학술모임이었다. 그간 나도 국내에서 크고 작은 학술회의들을 조직하거나 참여해보기는 했지만, 궁핍함 속에서 무언가를 도모하고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의들에 가끔 참가해온 나로서는 중국인들의 치밀함과 대범함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학술대회들은 그 방면의 달인들이나 큰 기관에서 주관한 것들이니 으레 그러려니 해왔지만, 이번에는 30대 중반의 젊은 학자 량짜오가 동분서주하며 성사시킨 행사라는 점에서 놀라움이 더욱 컸다. 물론 학교 및 문학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겠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큰 배를 끌고 나가는 젊은 학자 량짜오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체류 10년 동안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도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를 통해 중국 학계의 미래를 미리 훔쳐 본 것은 또 다른 소득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연행록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제 막 자리를 잡은 대학의 핵심 과제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일까. 그에게 사연을 들었다.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의 전문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였다. 그러나 전문대학 공부를 하던 중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대구 소재 한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즐거움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대학을 졸업한 뒤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김문기 교수의 지도 아래 연행가사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그 후 정우락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연행록의 매력에 빠져든 그는 고향의 대학인 하북대학 문학원과 경북대학 인문대학 간 교류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하북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연행록을 하북대학의 중점분야로 삼으려는 꿈까지 갖게 된 것이었다. 연행록연구소를 신설하고자 노력해온 1년여 사이에 그는 혼자서 한문 연행록 20여 권을 컴퓨터로 입력해내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가로지른 다음 만나는 관문이 산해관이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으로부터 북경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지역이 오늘날의 하북성인 계주(薊州) 영역이었다. 말하자면 하북성은 당시 연행사들이 반드시 거치던 노정의 핵심 부분인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하북대학을 연행록 연구의 메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발상 아닌가. 그는 연행록 텍스트 모두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연구자들에게 서비스하고, 연행노정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꿈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내 꿈이기도 했다. 그런 꿈의 실현을 위해 이미 15년 전에 <<연행록연구총서>> 10권을 발간했고, 연행록 사전의 편찬을 기획하기도 했으며, 어떤 여행사 사장과 함께 연행노정들을 학생들의 ‘역사현장 답사 공간’으로 개발하는 문제를 논의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꿈으로 그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점점 현실화 되고 있던 차에 량짜오 선생으로부터 그런 계획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 꿈은 좌절될 가능성이 많은 반면, 그의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방대한 한문 전적들의 컴퓨터 입력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경험이 많고, 그런 작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많으며, 그런 일을 수행할만한 인력이 풍부하다는 점은 중국이 갖고 있는 최고의 강점이었다.

하북대학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이점에 량짜오 선생 같은 ‘한국통’이 주도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성사(盛事)일 것이다. 지금 중국 유수의 대학들이 연행록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무진 애들을 쓰고 있는데, 량짜오가 있는 하북대학 또한 그 그룹의 선두에 설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였다.

 

                                                     ***

 

당시 중국에 파견되던 사신들[정사-부사-서장관]과 자제군관들은 지체나 벼슬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중세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의 본산이었고, 바깥세상으로 나 있던 유일한 통로였다. 중국의 현실이나 변화의 기미(幾微)는 우리 왕조의 안위나 존망에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글깨나 읽은 사람들은 그런 글들의 원산지인 중국을 선망한 것이 당연하고, 그 글의 내용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 또한 제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학식과 의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행단에 합류하고 싶어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정치와 외교, 안보 등 국사에 보탬을 주고자 하던 공적 사명감과 함께 중국의 생생한 속살을 견문하고자 하던 ‘앎의 욕구’가 기록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연행록이었다. 이처럼 최고의 지식인들이 현장에 가서 보고 듣는 것을 기록한 것이야말로 후대의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료(史料)’가 아닌가.

 

반대로 중국 정부나 학자들이 연행록을 보면서 느낄만한 점들을 생각해보자. 조선의 문사들이 중국의 영토 안에서 옛 한자와 고문으로 적어놓은 ‘중국인들의 민낯’을 확인하며,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당연히 ‘호감[혹은 호기심]과 불쾌감[혹은 당혹감]’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학자들의 입장에서야 좋든 싫든 그런 기록들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무궁한 탐토[探討/탐구와 토론]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호감과 불쾌감의 정체를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언필칭 ‘속방(屬邦)’의 한사(寒士)들이 ‘대국(大國)’의 규모 앞에서 스스로들을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가 천자의 나라에 와서 자신을 낮춰 부르던 일인칭 대명사]’이라 칭하며 머리 조아리는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꼈겠지만, 중국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불쾌함과 부끄러움도 느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영역 밖에서 생산된 한적(漢籍)[이른바 역외한적(域外漢籍)]들에 큰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의 존재 확인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집∙분류∙분석∙가공하는 일에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중국 변방’의 나라들 가운데, ‘한적(漢籍)의 양으로나 질로 보아 한국을 능가할만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연행록을 포함,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범주 안에 묶이는 한적들을 무수하게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의 지식사회가 우리나라의 이런 한적들을 보며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 만난 량짜오 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학자들로부터 나는 순수하게 학구적인 이유로 연행록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매우 정치적인 국가 수뇌부의 입장에 서면 이런 생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변함없이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의 지도부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향수를 버릴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이란 폭력적인 명칭으로 과거사를 날조하고 있는 그들로서 연행록에 내포된 ‘지배-피지배’의 정치 논리적 도식을 간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한국의 고대사를 훼손하고 미래 세대 패권전쟁의 무기로 삼으려는 그들에게 연행록은 역사날조에 유용한 근거 자료일 따름이다. 연행록의 바탕을 형성하는 ‘조공-책봉’의 도식이야말로 미국과 동맹관계로 존재하는 한국을 탈취하여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의 의도를 역사적∙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완벽한 근거 아닌가.

이미 중국정부로부터 ‘국가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은 중국 유수의 몇 대학들에서는 연행록 본문의 입력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만간 그들은 그 서비스를 웹상에서 전 세계인에게 제공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한국인들도 연행록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돈을 내고’ 중국의 웹에 접속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계의 인문학도들이 세계 기행문학 사상 첫 손가락에 꼽히는 연행록을 ‘중국의 것’으로 오해하고, 그것을 배우거나 연구하기 위해 한국 아닌 중국으로 유학하는 일이 일반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쯤 되면, 중국의 지도부는 과감하게 연행록을 유네스코에 자기네가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할 것이다. 텍스트가 한문으로 되어 있고, 중국의 ‘문화∙제도∙풍습∙자연’에 대한 견문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기록이 연행록이다. 그것을 중국인들이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가공하여 전 세계로 제공하는 마당에 ‘그것이 대한민국의 기록유산’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항변한들 세계의 누가 받아들여주겠는가. 기록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기록자인 사신들은 언필칭 자신들을 ‘중국 천자의 배신(陪臣)’이라 했다. 기록 문자도, 내용도, 기록자도, 기록의 가공 및 보유자도 모두 중국인들이라면, 어느 구석에서 우리의 연고권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연행록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의 기존 태도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먼저 국가나 연구기관에서 집단 작업을 추진했어야 한다. 자료에 대한 완벽한 수습을 광범위하게 수행했어야 하고, ‘분류→분석→입력→번역→데이터베이스 구축→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일관작업으로 진행했어야 한다. 연행록에 관한한 지금이 비상시국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순서를 바꾼다면, 그나마 만회할 방도가 없지는 않다. 우선 정부의 담당 관청은 국내 연행록 분야의 학자들과 만나 각 분야에서 진행된 연행록 연구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연행록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지금 즉시 추진해야 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추진과 함께 연행록 텍스트의 ‘조사∙확보∙분류∙입력’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중국이 앞서 시도한다면,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유산을 눈뜨고 강탈당할 수도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제 것도 못 지키는 ‘세계의 바보국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 중에서>

 

<중국 하북대학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8. 10. 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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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학술논문집 『한국문학과 예술』2집을 펴냈다.

1년에 두 번(3월말, 9월말) 펴내는 논문집의 이번 호는 ‘조선조 사행록 특집호’로 제작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논문>

조선조 사행록 텍스트의 본질---조규익(숭실대 교수)

조선조 전반기 대명 사대정책의 사상내인(內因)의 분석---이암(북경 중앙민족대 교

수)

조선조 후기 북학파 문인들의 연행과 한중문인들의 정신적 교유---김병민(연변대

총장)

열린 텍스트로서의 연행록 읽기---김문식(단국대 교수)

외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조선 통신사, 그 기록의 허와 실---손승철(강원대 교수)

기록문학으로서의 조선통신사 사행록의 동아시아적 보편성---나카오 히로시(교토

조형예술대학 명예교수)

18세기 말 동서 지성의 해외체험, 성찰의 방향과 그 의미---이혜순(이화여대 명예

교수)

 

<자료소개>

『조천록일운항해일기(朝天錄一云航海日記』

해제--조규익

자료영인

 

<서평>

시조문학, 이념과 풍류의 연관성-전재강의 『시조문학의 이념과 풍류』: 류해춘(성

결대 교수)

재미있고 쉽게 풀어쓴 이야기 한국음악사-송혜진의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

: 문숙희(한국문예연구소 연구교수)

허위적 세계를 전복시키는 비범한 정신-류종영의 『웃음의 미학』: 엄경희(숭실대

교수)

은밀한 꿈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의 시학-엄경희의 『숨은 꿈』: 김인섭(숭실대 교

수)

문학 모티프와 테마를 찾아서-이재선의 『현대소설의 서사주제학』: 김은정(성신여

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일제말 문인들의 만주인식에 대한 사적 고증의 한 걸음-민족문학연구소의 『일제

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 차봉준(숭실대 강사)

Posted by kicho
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6. 3. 09:09
천하의 큼을 보고 나를 깨닫는 연행 길에 나서며
      -연행 길 사진전, 그 철학과 의미-              


                                                                 조규익(숭실대 교수)

한양에서 북경까지 넉 달 넘어 걸리던 왕복 6천리 길. 삼사(三使)와 군관, 시종 등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여행 길이었다. 교통편이 없으니 숙소며 식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한둔’이라 불리던 ‘한뎃잠’을 자야했으며, 윗사람들이라고 따뜻한 방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을 에는 만주벌의 밤 추위에  가끔씩 맹수들이 출몰하기도 하던 험지의 고행 길이었다. 먹는 것 역시 변변치 않았고, 목욕을 한다거나 때에 따라 입성을 갈아입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사치였다. 병들어 아파도 몸 보전하고 누울 자리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병이 나으면 행운이고, 죽는 일 또한 허다했다. 시신을 떠메고 가거나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중도에 그냥 묻고 가야 했다. 끔찍한 고행 길이었으나, 지엄한 왕명이니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사직과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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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행차가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에 이른다. 조·명, 조·청 간 외교적 현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제나 문화 교류도 그런 행차들에 숨겨진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다. 극동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던 작은 나라 조선이 세상을 보려면 중국이란 창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큼과 세상의 넓음을 서책을 통해서나 알 뿐이던 당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고행 길인 줄 알면서도 이런 저런 연줄을 통해 사행에 참여하려 했다. 말로만 듣던 ‘대국’의 선진문물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지식인들을 설레게 했다. 특히 중화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들의 사는 모습이 무엇보다 궁금했을 것이다. ‘한 번 몸을 일으켜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겠노라’던 홍대용의 포부는 연행에 나서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들을 연행에 나서게 한  보다 직접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중화주의와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조선조 교조적 성리학자들의 당면과제였다. ‘오랑캐 청국’의 존재는 그들에게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오랑캐가 차지한 중원을 보고자 한 당대 지식인들의 깊은 속내엔 자존심을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맞바꾸어야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가고자 했다. 뻔한 일이긴 했으나 가보지도 않고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담함을 뼈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기술해나간 것이 연행록들이다. 번화한 도회와 풍족한 물화를 보면서 ‘고인 물’ 같던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에도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문하던 이들에게 중국의 모습은 해답 그 자체였다.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그른 점은 그른 점대로 중국은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해나갈 모델이었다. 시시콜콜 적어놓은 견문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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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한양을 출발하여 수많은 산과 물, 촌락과 도회들을 지나 연경에 도달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고 같다지만, 인정과 풍속이 현격한 이국의 그것들이 어찌 우리와 같을 수 있었으랴. 그래서 연행 떠난 지식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기와 감동을 바탕으로, 오랑캐들도 소중화의 조선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중국의 산하와 문물이야말로 수백 년 간 배워온 성경현전(聖經賢傳)보다 그들에겐 더 큰 스승이었다. 조선조 지식사회에 북학(北學)의 기조가 정착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행 덕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에 태어난 카메듀서 신춘호 선생. 그는 지난 수년간 동호인들을 인솔하고 스스로 연행사가 되어 그 길을 되짚어 훑었다. 연도(沿途)의 풍물들을 모두 기록한 그 옛날의 연행사들처럼 그도 렌즈 속에 그 모든 것들을 잡아넣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국내와 중국의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담기에 바쁜 그다. 사실성과 예술미가 조화를 이룬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라. 이미지들의 배경엔 수 백 년 전 연행사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의 모습만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곳의 모습을 찍는 순간,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의 분위기까지 포착해 내고 있지 않은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