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5. 07:15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 분포도

 

 

 


타오 시내 역사구역 도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장로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침례교회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 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반델리어 유적지가 자리 잡은 프리욜레 계곡을 벗어난 시각이 오후 4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기로 한 애당초 계획을 버리고 별 수 없이 로스 알라모스의 한 부분인 화이트 락(White Rock)에서 1박을 하며 반델리어의 감동을 정리하기로 했다. 창밖으로 산타페 산맥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먹은 다음 프런트의 아가씨에게 일기예보와 타오(Taos) 에 관해 물었다. 눈 올 확률은 20%. 그러나 타오는 반드시 들러 가야 할 곳이라고 강추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이 쌓이면 며칠 묵어가지. 앞으로 언제 이곳에 또 올 것이냐. 그래서 산타페 쪽으로 다시 돌아가 I-40을 타는 대신, 그 반대편에 있는 타오(Taos)로 기수를 돌리기로 했다. 푸에블로 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타오의 집단 거주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화이트 락에서 타오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구간보다 아름다웠다. 겉으로 낙후되어 보이긴 했으나 연도의 촌락들도 모두 평화로웠고, 황량한 산하는 그 나름의 정제된 미학을 갖추고 있었다. 군데군데 퇴락한 도회들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멋지게 뻗은 502번 도로로 화이트 락의 호텔을 출발하여 잠시 가다가 30번으로 갈아탔고, 에스파뇰라(Espaňola) 턴파이크에서 68번으로 갈아탄 다음 두 시간 넘게 걸려 타오에 도착했다.

 

달리는 중간 중간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의 경관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주춤거리기도 했다. 예컨대, 아리바 카운티(Arriba County)를 지날 때 길 가에서 녹슨 간판을 보고 찾아 들어간 작은 도시 벨라르데(Velarde)에서 과달루페 성모가 모셔진 작은 성당 과달루페 성모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 Guadalupe Mission Church]를 만난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동네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 성당은 참으로 정결하고 가난해 보였다. 작은 나라에서 대형 교회들만 보아오던 내 눈에 큰 나라의 작은 교회가 주는 감동은 작지 않았다. 그런 감동을 안고 다시 먼 길을 달려 해발 2,124m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면적 13.9 의 소도시 타오에 진입하게 되었다.

 

멀리 타오 마운틴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시가지가 비교적 널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좁았으나, 도시를 채우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들은 따스해 보였다. 무엇보다 성당과 교회 및 공공건물들 대부분이 어도비 양식인 점이 좋았다. 번쩍이는 빌딩 식 교회들보다는 어도비의 그 따스함 속에 구원의 손길이 깃들 것만 같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타오 푸에블로(Taos Pueblo)’까지는 타오 신도시[Modern City of Taos]에서 북쪽으로 1마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St. Francisco de Asísi Church]’이 매혹적인 자태로 서 있는 것 아닌가. 안 들를 수 없는 일. 앞쪽으로 가보니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건축미가 돋보였다. 이 지역의 교회들을 들르면서 느끼는 것은 종교적인 경건함보다는 건축미가 먼저 마음을 흔든다는 점이다. 교회 문을 살짝 밀고 들어서니 누가 죽었는지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경건하고 슬픈 분위기를 해칠까 저어되어 살그머니 되돌아 나왔으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자꾸만 우리의 발걸음을 지척이게 하였다. 거기서 몇 블록을 전진하자 이번에는 어도비 양식의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등이 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록 문은 잠겨 있었으나, 외양을 감싼 고즈넉한 분위기가 세상의 번잡함을 정화시키고 있는 듯 했다. 역시 그곳의 자연환경과 일치되는 분위기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쉽게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전체에서 풍겨나는 따스한 느낌 때문인가 이 지역의 교회를 볼 때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폭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생소한 모습으로 번쩍이는 교회로부터 구원의 희망을 찾기란 어려운 일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주변에 널린 갖가지 유혹들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타오 푸에블로. 타오 마운틴을 뒤로 하고 먼지 풀풀 이는 벌판에 그득하니 서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단 거주지였다. 밝고 따스한 주택의 색깔이 주변의 붉은 흙빛, 뒤에 버티고 선 타오 산의 푸른빛, 마을을 뚫고 흐르는 리오 그란데 강의 옥색 물빛 등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가니 단층도 있고, 복층의 경우 5층까지 올린 집들도 있었다. 하나로 되어 있는 외벽 안쪽에 각자의 집들이 조합된 건축방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기본구조였다. 이 공동체에는 1,900명 이상의 푸에블로 인들이 속해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근처에 현대식 집을 짓고 살다가 시원해지면 푸에블로의 자기 집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대략 15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타오 푸에블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 문화 유적으로서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집들의 외양,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들과 집 앞의 빵 화덕들은 스카이시티나 마찬가지였다. 사철 물이 흘러내리는 냇물을 보니,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거지는 냇물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왼쪽 주거지의 중심부에 멋지게 지어진 가톨릭 교회도 있었다. 앞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거의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인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스페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은 결과라고 보지만, 신교 보다 가톨릭 쪽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이나 가치관을 더 용인해준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여러 면에서 폐쇄적이었다. 가옥의 내부는 전혀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사진 찍는 일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화덕에서 구운 빵을 판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으나, 페치카에 장작 한 올 겨우 넣고 간신히 추위를 참고 있던 할머니는 아예 카메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신들만의 세계라도 있는 듯, 이들의 구역에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경계의 눈빛을 쏘아대는 그들이었다.

 

 

 


타오 푸에블로 입구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앞 쪽의 반타원형 구조물은 빵을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공동묘지를 갖춘 가톨릭 교회터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가톨릭 교회

 

 

 

타오 푸에블로 왼쪽 주거지와 리오 그란데강 지류

 

 

 


타오 푸에블로에서 만난 푸에블로 소년과 검은 개

 

 

 

 


타오 푸에블로의 빵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주거지

 

 

 


차양 밑에서 보호받고 있는 화덕

 

 

 


리오 그란데 강물과 나무 다리

 

 

 


빵을 굽고 있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타오 푸에블로

 

 

 

 

이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살아갈 것 같은 그들만의 주거지를 간신히 돌아본 다음, 우리는 타오 외곽으로 리오 그란데의 강줄기를 찾아 차를 돌렸다. 30분 정도 황야를 달렸을까. 엄청난 규모와 높이의 다리 리오 그란데 죠지 대교[Rio Grande George Bridge]’를 만났다. 저려오는 오금을 달래며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듯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밀려들었다. 멀리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나서야 이 다리가 없던 시절엔 타오가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고립지에 주거지를 건설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외부와 단절된 곳에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지역들이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오늘날 그들이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것도 그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나온 본능적 반응일 것이다.

 

대략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타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 북쪽의 여덟 개 푸에블로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사적인 영역을 많이 갖고 있는 부족이었다. 서기 1,000년부터 1,450년 사이에 세워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공동체인 타오 푸에블로. 그곳에서 우리는 화석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싶긴 하지만, 적빈(赤貧)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인들의 접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과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아직도 지킬 만한 것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었지만, 외부인들로서는 그 점을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속물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자신들의 원래 모습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가?

 

타오 푸에블로 인들의 고집스런 표정을 대충 마음에 담아둔 채 우리는 뉴멕시코를 재빨리 벗어날 지름길 엔젤 마운틴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리오 그란데 강줄기와 계곡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Rio Grande Jeorge Bridge]'

 

 

 


광야를 가르며 죠지 다리 밑을 지나는 리오 그란데 강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 부근에서 바라 본 광야

 

 

 


산타페 광장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보여주는 타오 중앙광장

 

 

 


타오 광장 주변의 상가들

 

 

 


타오 외곽에서 만난 갤러리 'Happy Trails'

 

 

 


자료사진-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단무용 '콘 댄스(Corn Dance)'

 


 


타오 카운티를 비롯한 뉴멕시코의 영역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1. 13:59

 

 

 

 


올디스트 하우스(Oldest House)

 

 

 

 

 


올디스트 하우스의 내부

 

 

 

 

 

 


올디스트 하우스 내부의 예배실

 

 

 

 

 


올디스트 하우스의 건축에 쓰인 어도비 벽돌

 

 

 

 

 


시가지의 앤틱 가게 앞에 세워진 롱혼 캐틀(long horn cattle) 부자 상

 

 

 

 

 


시가지의 한 예술품 가게 앞에 놓인 '공부하는 아이' 상

 

 

 

 

 


옛 66번 도로에 대한 방향 표지판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산타페-완]

 

 

 

 

우리는 산타페의 구 시가지로 들어왔고, 한동안 구 시가지를 뱅뱅 돌았으며, 구 시가지의 한켠에서 숙박도 했다. 구 시가지는 산타페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광 비수기라서인지 광장은 홈리스들의 차지였고, 멀쩡하게 생긴 성인 남자들도 당당하게 한 푼을 구걸하면서 지나쳤다. 그러나 앞서 말한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물론 박물관들도, 시 청사도, 숙박업소도, 선물가게도, 화랑도, 레스토랑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의 대단한 보물급들이었다. 볼그레하고 따스한 어도비 건축물들이 우리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만드는 곳이 산타페임을 걷는 동안 우리는 느껴 알 수 있었다.

 

앞의 글에서 빠뜨리긴 했지만, 올디스트 하우스(Oldest House)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였고, 아침에 찾아간 앤틱 선물가게 또한 안팎이 예술로 뒤덮인 아름다움의 덩어리였다. 올디스트 하우스는 말 그대로 이 지역 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이었다. 1598년 후안 데 오네이트(Juan de Onate)의 인도 아래 첫 스페인 정착자들과 함께 멕시코로부터 틀락스깔란(Tlaxcalans) 인디언들이 도착하여 산타페 강 위쪽의 고원에 정착했다. 그들의 집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건물이다. 건물 속에 박힌 나무들의 나이테로 미루어 이 집은 약 16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집의 구조로 보아서는 훨씬 더 오래 전인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집은 버려진 고대 푸에블로인들의 정착지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비좁고 불편해 보이긴 했으나 당시의 방식대로 조촐하게 살림을 꾸리며 행복을 일궈나간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할 만큼 낮았으나, 작은 거실과 예배실, 식당, 창고, 농기구, 그리고 밝은 빛을 들이기 위한 창 등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올디스트 하우스는 말하자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인 셈이었다.

 

올디스트 하우스를 나와 뉴멕시코 미술박물관[New Mexico Museum of Art]’ 가는 길엔 골동품이나 장식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더러 있어 눈으로나마 산타페 시민들의 잔잔한 생활미학을 느껴볼 수 있었다. 산타페가 뉴멕시코에서 66번 도로의 핵심적 경유지임과 이곳이 미국 교통의 요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도 만나는 등 길에 설치된 대부분의 표지들이 예술작품이었고, 역사의 알림판이기도 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에는 개관 시간인 10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박물관은 외관처럼 내부 또한 아름다웠다. 원래 창작미술 박물관으로 불리던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서, 산타페에 있는 네 개의 국영 박물관들가운데 하나이자 뉴멕시코 주 문화부에 의해 관리되는 여덟 개의 박물관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아이삭 랩(Issac Rap)이 설계하여 1917년 건립된, 어도비 양식의 이 박물관은 원주민과 스페인의 설계양식이 종합된 가장 유명한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다량의 미술품들을 영구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작품들, 지역 예술품과 전국 혹은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작품들을 교체 전시하고 있기도 했다.

 

마침 르네상스부터 고야(Goya)에 이르는 시기의 스페인 미술품들이 특별 전시되고 있었다[Renaissance to Goya: prints and drawings from Spain]. 대부분 소품들이었지만, 20131214일부터 201439일까지 3개월 간 열리는 이 특별전이야말로 산타페의 예술적 향취를 더해주는 특별 이벤트였다. 아직도 스페인 문화나 멕시코 문화의 잔영이 지역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이 도시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야 같은 대가의 미술품들을 무더기로 친견하게 된 것이 우리에게는 사실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직접 스페인에 가지 않고서야 그토록 많은 고야의 작품들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 전경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의 '르네상스에서 고야까지' 특별전 현수막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R.C.Gorman 작 'Seated Navajo Woman', 1978[Cast bronze]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Don Robert Hazlitt 작 'Mom at Dawn', 1988
[Mixed media on Canvas on board]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Min Kim Park 작 'Lynn 2009-From the Series Zummarella'
[Pigment print]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Will Shuster(1893-1969) 작 'Winnowing Wheat', 1934[Fresco]

 

 

 

 

 

 

이 박물관은 엄청난 컬렉션들을 갖고 있었다. 지난 100년 동안 활동해온 타오(Taos) 및 산타페 지역 미술 창작 집단의 작품으로부터 이 지역 혹은 세계 최첨단의 현대예술 작품들까지 두루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에 갖추어진 2만여 점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들은 싱코 삔또레스(Los Cinco Pintores)’ 즉 다섯 명의 화가들[The Five Painters]이 남긴 작품들, 타오 미술창작 집단[The Taos Society of Artists]의 작품들, 구스타브 바우만(Gustave Baumann)의 콜렉션, 루시 리파드(Lucy Lippard)의 컬렉션, 오키프(Georgia O’Keeffe)의 미술품 콜렉션 등을 포함한 창작 미술품들과, 여성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제인 리스 바우만(Jane Reese Baumann)의 콜렉션을 포함한 주요 미국인 작가들의 사진작품, 비디오 장치를 포함한 뉴미디어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1921년에 결성된 로스 싱코 삔또레스(Los Cinco Pintores)’. 윌 슈스터(Will Shuster), 프레몬트 엘리스(Fremont Ellis), 월터 므룩(Walter Mruk), 죠지프 바코스(Jozef Bakos), 윌라드 내쉬(Willard Nash) 등 다섯 명의 화가가 그 멤버들인데, 그 해 12월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은 그들의 작품을 함께 묶어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다섯 사람은 모두 30세 이하의 젊은 예술가들로서 산타페의 신예들이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싱코 삔또레스로 불리면서 이 지역의 창작미술을 대표해왔고, 그 산파역을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이었다. 산타페 시내를 배회하다 보면 멋지게 꾸민 화랑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 박물관과 함께 이 지역 창작미술 활성화의 주역들이었다. 산타페가 예술품 거래의 양으로 미국 전역에서 3위 안에 드는 도시임을 감안하면, 그런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뉴멕시코 역사박물관[New Mexico History Museum]’을 찾았다. 우리가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을 거쳐 왔다고 하자, 입구의 직원은 입장료를 할인해주며 하나의 입장권으로 이 박물관과 주지사궁[Palace of the Governors]을 모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주지사 궁은 산타페 광장의 팰리스 애비뉴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타페 역사구[Santa Fe Historic District]’안에 있는 주지사 궁은 수 세기 동안 뉴멕시코 주 정부의 중심 건물로서 미국의 가장 오래 된 공공건물이었다.

 

페드로 데 페랄타(Pedro de Pralta)’는 미국 남서부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스페인 영토에 새로 임명된 주지사인데, 그가 바로 1610년에 이 건물의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뉴멕시코의 지배자가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 이 궁의 소유권도 함께 넘어갔다. 1680년 푸에블로 반란 이후, 또한 1693년에서 1694년까지 스페인이 이곳을 재정복함으로써 내내 스페인 소유로 있었고,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함으로써 멕시코 소유가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1848년 미국의 소유로 넘어간 것이다. 처음에 이 궁은 한 때 오늘날의 텍사스,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포함한 스페인의 뉴멕시코[Nuevo Mexico] 식민지정부가 들어 있던 건물이다. 멕시코 독립전쟁 이후 뉴멕시코의 산타페 지역은 주지사 궁에서 관리되었으며, 이 궁은 뉴멕시코가 미국 땅으로 합병되면서 뉴멕시코의 첫 지역 의회 의사당으로 바뀌었다.

뉴멕시코 주 의회가 뉴멕시코 박물관을 세운 1909년에서 2009년까지 주지사 궁은 주 역사 박물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9년 주지사 궁 옆에 문을 연 뉴멕시코 역사박물관은 뉴멕시코 주 문화부가 관리하는 아홉 개의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역사박물관을 보고 자연스럽게 주지사 궁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역사박물관에는 뉴멕시코 중심의 생활사 및 자연사 자료들이, 주지사 궁에는 역대 주지사들과 관련한 지배 주체의 변천 자료 등 정치사 관련 유물들과 각종 성화 및 성구 등 가톨릭 관련 유물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 충분한 콜렉션들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은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양적으로 충분하고 질적으로도 뛰어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만날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성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산타페에는 이 두 박물관 외에도 죠지아 오키프 박물관[The Georgia O’Keeffe Museum],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연구소[The Institute of American Indian Museum], 인디언 예술 문화 박물관[The Museum of Indian Arts and Cultures], 국제 민속 예술 박물관[The Museum of International Folk Arts]’ 등 뛰어난 박물관들이 있었다. 물론 컨셉이나 소장품들의 성격상 겹치는 것들도 적지 않겠지만, 사실은 다 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 이들 모두를 둘러보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어디 국 맛을 알기 위해 한 솥의 국을 모두 마셔야 하는가?’ 우리는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산타페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주인이 바뀐, 무상한 역사의 도시이자 치밀한 계획도시이며 아름다운 어도비 건축물의 도시 산타페는 간단치 않은 역사와 두꺼운 예술의 적층(積層)을 토대로 한 현대판 이상향이었다. 어느 언론매체의 조사 결과처럼, 가장 인기 있는 예술의 도시이자 은퇴 후에 숨어 살기 좋은 전원도시가 바로 이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뉴멕시코 역사박물관 소장품

 

 

 

 

 


뉴멕시코 역사박물관 소장품[뉴멕시코주 문장]

 

 

 

 

 


주 지사 궁[the 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인 주민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9. 23:5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산타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대성당 내부

 

 

 

 

 


대성당 안에서 만난 예수 수난상

 

 

 

 

 


대성당 앞뜰에서 만난 '물 위에서 춤 추는 프란체스코 성인'[Monika B. Kaden의 작품]

 

 

 

 

 


대성당 앞뜰에 서 있는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상'
미국 최초의 인디언 여성 성인으로 추존되었음. 

 

 

 

 

 

산타페의 가톨리시즘은 세속화된 미국을 정화시키는가? [산타페-2]

 

 

 

산타페의 구시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어느 도시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신 성당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산타페 로만 가톨릭 대 주교구[The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Santa Fe]’의 모태 교회가 바로 이 성당인데, 이 성당의 뜰엔 눈길을 끄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으로 추존된 인디언 출신의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순결의 덕목과 육신의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짧은 생애에 많은 기적을 이룬 그녀였다. 결국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2012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에 의해 시성(諡聖)된 스물넷의 아름다운 그녀가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나온 후 지금은 홈리스들에 의해 점령된 산타페 광장으로부터 대성당 앞을 지나 잠시 걷자 스프링 모양의 계단으로 유명한 로레토 채플(Loretto Chapel)이 나왔다. 채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린즐리(Richard M. Lindsley)씨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 안내문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 진심으로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 날짜 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실상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1852년 가을 로레토 수녀회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켄터키로부터 산타페에 도착하여 이 성당의 전신인 로레토 학원을 건립한 역사가 한글판 소개문에는 실려 있었다. 특히 강조된 내용은 원형계단의 건축학적 특징이었다. 수녀들이 도착한 몇 년 뒤 로레토 학원이 완성되었고, 그 후 몇 년 뒤에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마루와 성가대석을 연결하는 통로를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일이 성사되기를 염원하며 수녀들은 9일간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의 마지막 날 한 백발노인이 당나귀에 연장을 싣고 도착했다. 수녀원장을 만나 그 일을 해결해주겠노라고 말한 그는 톱 하나와 T, 망치하나만을 갖고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단시일에 이 원형 계단을 완성했다. 중심 지주도 없이 33개의 디딤판만으로 360도 원형의 계단을 완성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성 요셉에게 기도를 드린 수녀들은 이 불가사의한 일이 그 기도의 응답임을 믿었으며, 상당수는 그 늙은 목수를 성 요셉으로 믿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수녀들이 보여준 지극한 신앙의 증거물이었다. 내 느낌에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발타키노와 같은 컨셉으로 보이는 이 원형계단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Built in 1873]

 

 

 


로레토 성당 입구의 안내 표지와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목수

 

 

 


채플 안에 있는 '기적의 계단'

 

 

 


로레타 채플 내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최초의 어도비 건축 양식의 성당인 산 미구엘 미션[San Miguel Mission]’이었다. 스페인 식민시대 멕시코의 성당이었던 산 미구엘 미션1610~16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로 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때 손상을 입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재점령한 1710년에 재건축되어 스페인 병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 후 수없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많이 가려지긴 했겠으나, 원래의 어도비 양식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또한 아름다웠는데, 특히 제단 뒤쪽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벽[reredos]의 아름다움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장식들 속에 자리 한 미카엘 성인 상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1709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의 국가 역사 유적으로 지정된 이 성당은 산타페를 영적으로 충만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산 미구엘 성당[San Miguel Mission]

 

 

 


미구엘 성당 내부

 

 

 


미구엘 성당 제대 뒤의 장식벽[Reredos]. 아래쪽 중앙이 미카엘 성인 상

 

 

 


산 미구엘 성당의 종

 

 

 

 

그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지역 종교적 성향의 핵심인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로서,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곳이었다. 주 제단 뒤쪽의 벽장식은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내부 장식 모두는 멕시코 바로크 풍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31년 멕시코 아즈텍 종족 출신의 후안 데 디에고(Juan de Diego)에게 현신하여 성당을 지을 것을 명령한, 갈색 피부를 가진 원주민 형상의 성모가 바로 과달루페 성모.

 

이 사건을 계기로 테페야크 언덕을 비롯한 각지에 성당들이 건립되면서 멕시코는 급격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했다. 성모 현신의 이야기는 토착신앙에 물들어 가톨릭의 전파가 어렵던 당시 가톨릭 교단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설화로 보이는데, 그 덕에 지금은 미국의 땅이 된 산타페에서 그 성모와 성당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75~1795년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과달루페 성소3피트 정도의 두꺼운 벽을 가진 어도비 건축물이었고, 그 중심에 1783년 멕시코 거장 호세 데 알지바[Jose de Alzibar]의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었다. 멕시코 전통 양식으로 조각채색된 예술품의 정수로서 리어다스(reredos)’라 불리는 제단 뒤쪽의 장식 벽, 19세기 진품 성구(聖具) 보관소, 각종 미술사적 자료들, 대주교 쟝 뱁티스트 레이미(Jean Baptiste Lamy)에게 봉헌된 도서 및 자료관, 성지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어놓은 정원 등, 이 성당을 이루는 핵심 부분들은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 성모 상 

 

 

 

과달루페 성소의 내부 

 

 

 


과달루페 성소의 스테인드 글라스 

 

 

 

과달루페 성소 그림[Tom Mallon 작, Oil on Canvas 42"×22"]

 

 

 

산타페의 정신적 바탕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지만, ‘이곳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그것과 구별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성인 가데리 데각위타나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후안 데 디에고 등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정착시킨 결정적 존재들이 있었고, 로레토 성당산 미구엘 성당과달루페 성당 등 핵심적 성소들이 어도비 건축양식을 채용함으로써 지역 전통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보다 산타페만의 독보적인 모습이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가톨릭 교회들의 존재는 미국의 강한 세속성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산타페만의 매력일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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