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8. 03:45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산타페 입구 세리요스 힐스에서 만난 작은 오름들

 

 

 

 


세리요스 힐스에서 바라본 산타페 전경

 

 

 

 


세리요스 힐스를 지나 산타페로 들어가는 길

 

 

 

 


1882년의 산타페 시가지 그림

 

 

 

 

 

 

 

 

 

환상과 낭만, 그리고 역사의 공간 산타페에 빠지다! [산타페-1]

 



 

 

큰 도시 앨버커키에서 산타페에 이르는 하이웨이 ‘I-25’ 역시 황량한 야산들을 끝없이 관통하는 길이었다. 뉴멕시코에 진입한 이래 키 작은 사막식물들과 작고 큰 화산 석들이 검게 그을린 채 다닥다닥 깔려 있는 야산들을 곧게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길이 대견하여 나 스스로 명명해본 것이 바로 용감한 길이었다. 그 길을 종횡무진 뚫고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자동차와 거기에 실린 내 실존적 자아가 사실은 용감한 존재들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왜 그 길에만 자꾸 내 감정을 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심리적 전이(psychological transferenc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일까. 미국에 온 이후 특히 에 집착하는 나의 내면이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될 때가 많아졌다.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한갓된 공간일 뿐인데, 그 길이 마치 살아서 내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붓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나 공간이 바로 미국 남부 지역의 길들이었으리라.

 

산타페까지 60.3 마일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거지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아 푸에블로(Zia Pueblo), 산타애나 푸에블로(Santa Ana Pueblo), 산 펠리페 푸에블로(San Felipe Pueblo),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등 푸에블로 인들은 거주하는 지역마다 구분되는 인종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 인들을 변별할 때는 거주 지역의 이름을 관치(冠置)하는 것이 통례인 듯 했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산타페 산맥이 보이고, 그 앞쪽 넓은 분지에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도회(都會)가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시 언덕을 내려가자 길옆에 비지터 센터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 안내원이 호쾌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세리요스 힐스(Serrillos Hills)의 초입이자, 길 건너 산 속 산토도밍고 푸에블로의 인접지였다. 자료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앞 쪽에 제주도의 큰 오름을 연상케 하는 화산봉들이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고, 산타페 진입을 위해 I-25에서 285로 갈아타는 턴파이크(Turnpike)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페 카운티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산타페 시내 외곽의 신시가지를 거쳐 목표지점인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산타페 산맥 앞에 자리 잡은 산타페 시티는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20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도비 건물들 일색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타페 알트 슈타트(Alt Stadt)쌩얼이 우리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넓게 퍼져 있는 산타페 신시가지의 주택들

 

 

 


산타페의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구시가지 중심부

 

 

 


주지사 궁(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과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

 

 

 


산타페 구시가 중심부의 야경

 

 

 

***

 

거룩한 믿음[Holy Faith]’을 뜻하는 스페인어 ‘Santa Fe’. 식민시대의 생생한 산물이 바로 이 도시다. 뉴멕시코 주도인 산타페는 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타페 카운티의 청사 소재지이며, 무엇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캐피털 시티다. 2012년 기준으로 69,204명의 인구를 보유한 이곳은 카운티 전역을 포함하는 표준 통계지역[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의 으뜸 도시이기도 하다.

 

산타페의 완전한 명칭이 ‘La Villa Real de la Santa Fé de San Francisco de Asís’ 아씨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로열 타운[The Royal Town of the Holy Faith of St. Francis of Assisi]’임을 알고 나서야 구시가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의 존재의미가 이해되었다. 대성당 뿐 아니라 시 청사 앞을 비롯한 시내의 곳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산타페의 수호성인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서야 왜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앞쪽에 중앙 광장과 주지사 집무실 및 공관을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왜 그로부터 상가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방사상(放射狀)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프란체스코 성인-대성당-아름다운 산타페'의 상관구조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산타페 광장의 모습

 

 

 

 


산타페 시청 정원과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Hometown Hero" 2011. 7. 12.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인저 상

 

 

 

 


산타페 시내에서 만난 멋진 화랑 입구

 

 

 

 


또 다른 화랑 입구

 

 

 

 


길 건너편에서 발견한 인디언 기념품 가게

 

 

 


길거리 상가에서 만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길가 주택의 뜰에서 만난 인상적인 디자인의 두상

 

 

 

 

 

뉴멕시코 진입 후 며칠이 지나면서 고도(高度)의 변화에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뉴멕시코 주 전반의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에 가까웠고, 이 가운데 해발 2,134 m인 산타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도였다. 가끔씩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특히 고도에 민감한 내 신체 구조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산타페의 면적은 96.9인데, 그 가운데 96.7가 땅이고 나머지 0.2는 저수지나 강, 호수 등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여름이 이곳 날씨의 공식이라서인지 햇볕이 내리쪼임에도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달달 떨어야 했다. 한겨울인 12월의 평균온도 0.9, 한여름인 7월의 평균온도는 21.2이며,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8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하며, 6~8월까지는 심한 비가 내린다고 한다.

 

1848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atado de Guadalupe Hidalgo/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뉴멕시코의 역사적정치적 향배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된 이듬해인 1846년에 일어난 것이 멕시코-미국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한 멕시코의 평화협정 요청에 미국이 서명한 조약이 바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인데,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등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때 미국 땅으로 바뀐 뉴멕시코 땅을 밟으면서 나는 미국과 판이한 멕시코의 향기, 멕시코를 지배한 스페인의 향기가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례교 위주의 개신교 교회들 대신 웅장한 규모의 가톨릭 성당이 구시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멕시코 음식 그 자체이거나 멕시코 풍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인디언들의 식습관이라야 자연 재료의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니, 유럽풍, 멕시코 풍을 만나면서 그 정체성을 맥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지역의 어딜 가도 인디언 음식이라고 내오는 것들이 대부분 멕시코 음식 일색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코머(Acoma Pueblo), 코치티(Cochiti Pueblo), 이즐레타(Isleta Pueblo), 히메즈(Jemez Pueblo), 케와(Kewa Pueblo)[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Pueblo)의 이전 이름], 라구나(Laguna Pueblo), 남베(Nambe Pueblo), 오케 오윙에(Ohkay Owingeh Pueblo), 피쿠리우스(Picuris Pueblo), 퍼와이키(Pojoaque Pueblo), 샌디아(Sandia Pueblo), 산 펠리페(San Felipe Pueblo),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Pueblo), 산타애나(Santa Ana Puebl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Pueblo), 타오(Taos Pueblo), 터수키(Tesuque Pueblo Santa Fe), 지아(Zia Pueblo), 주니(Zuni Pueblo) 20 개에 가깝다.

 

 

 

 


산타페 시가지의 야경

 

 

 


호텔 로레토(Loretto)의 환상적인 모습

 

 

 


호텔 라폰다(La Fonda) 외관의 전통미

 

 

 


미국-멕시코 간의 전쟁,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협정문,
그로 인해 변한 양국의 국경 등을 보여주는 자료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의 패배를 풍자한 그림[털 뽑힌 독수리]

 

 

 

 


산타페 '순교자들의 십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6. 04:25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안내소 및 입구
[여기서 암각화 현장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이상 달려가야 함]

 

 

 

 


건너편 길에서 잡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탐방로 입구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암각화들을 열심히 살피고 있는
미국인 부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벼랑길 탐방로

 

 

 

 

 

돌에 새긴 푸에블로 인들의 꿈

 

 

 

 

 

 

우리나라 울산의 천전리 각석[국보 147]과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를 가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수렵에 의존해 살던 수천 년 전인 선사시대의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생활예술이 바로 그것들이다. 고래, 호랑이, , 멧돼지, 거북, 사슴, 토끼 등 바다와 육지 동물들이 두루 등장하고, 20여명이 작지 않은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근처의 천전리 암각화에는 좀 더 추상화된 그림들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마름모꼴이나 동심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대상의 세밀 묘사에 치중한 사실화와 함께 내재된 의미를 암시하는 기호의 형상에 치중한 추상화가 같은 지역에 공존한다는 것은 선사시대에 이미 우리 조상들의 미학이 대단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울산 천전리 암각화[왼쪽의 동심원을 유심히 보아 두시지요.]

 

 

 

 

세계문화사적 관점에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이나 문화적 자존심을 선양하기 위해 그것들을 잘 보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인데, ‘그냥 깔아뭉갤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를 두고 벌이는 말씨름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이곳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서 나는 그와 유사한 암각화들을 만났다. 물론 화질이나 형상화의 수준으로 우리나라 것들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

 

앨버커키 도착 사흘 째 되던 날, 빛나는 햇살은 시가지에 서린, 찬 기운을 녹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앨버커키를 따라 17마일[27km]이나 이어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를 찾았다. 안내소를 통과하여 한참을 운전해 가니 앞쪽으로 푹 파인 분지가 나타났고, 분지의 뒤로 병풍처럼 생긴 고원(高原)이 펼쳐져 있었다. 총 넓이 7,236 에이커[29.28]의 분지와 고원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화산작용으로 생긴 분지는 시가지의 주택가를 향해 열려 있었고, 그 주변을 길게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벼랑엔 화산활동으로 생긴 현무암들로 뒤덮여 있었다. 분지 위쪽은 공사로 인해 폐쇄되어 있어 부득이 분지 앞쪽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 시커먼 돌 더미들 사이에 무슨 의미 있는 것들이 숨어 있을까. 참으로 단순 소박한 황량함, 그리고 침묵만이 검은 돌들과 함께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구역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공간인 국립 암각화 유적지’. 다섯 개의 화산 분화구, 수백 개의 고고학적 현장, 고대 푸에블로 인들과 스페인 정착자들에 의해 그려진, 대략 24,000여 점의 그림들을 포함한 문화와 자연 자원들을 포함하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정문을 통과하여 수백 미터를 전진, 산길 바로 앞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댔다. 나무다리를 건너 돌산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푸에블로 인들이 그 사이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 수많은 중얼거림이 돌들 사이에서 울려 나왔다. 그곳에 있는 돌들은 일종의 낙서장, 일기장, 혹은 소중한 게시판이자 광고판이었다. 푸에블로 인들이 돌에 새긴 자신들의 생각이나 소망이 바로 엊그제 올망졸망 유치원생들이 화판에 그린 그림들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 가운데는 뱀이나 새 등 동물들도, 사람들도, 십자가도 있었으며, 알 수 없는 기호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그린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만큼, 그것들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쉽지 않았다. 예컨대 다음의 그림 같은 것들은 매우 복합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보였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첫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둘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셋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넷째 그림[본문 설명]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의 소재는 모두 독수리다. 그러나 첫 그림이 비교적 사실적임에 비해 둘째 그림은 약간 추상적이다. 일부 미국인 학자들은 이것을 앵무새[parrot]라 한다하나, 내가 볼 땐 턱없는 생각이다. 이들이 이 황야에서 살아가던 무렵에는 사냥이 주업이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이 바라본 독수리 같은 맹금류야 말로 사냥의 귀재가 아니었을까. 그간 돌아 본 10여 인디언 네이션들 대부분이 독수리를 상징동물로 채택하고 있었으며, 추장의 옷이나 모자 장식에도 독수리의 깃털이 주된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확인했는데, 그건 그들이 독수리의 사냥 능력을 숭배해 왔다는 증거이리라. 어떤 인디언은 지금 미합중국의 상징 새가 독수리인데, 그것도 자기들의 것을 본뜬 결과라고 강변하며 웃었다.

 

우리가 바위에서 독수리 그림을 보고 있는 사이에도 하늘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선회하며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 아래 왼쪽에는 작은 동물 한 마리가 들어 있는 네모 칸이 그려져 있다. 내 생각엔 이 그림은 아마도 땅 위의 작은 짐승들을 귀신같이 잡아내던 독수리의 사냥능력이 자신들에게 전이되기를 기원하며 행하던 유감주술[類感呪術, homeopathic magic]’ 행위의 소산일 것이다. 두 번 째 그림에는 독수리와 동심원이 함께 등장한다. 그 동심원은 사실적이기만 한 다른 그림들에 비해 비교적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과연 무엇을 형상한 것일까. 동심원은 자아를 중심으로 번져가는 형상이다. 말하자면 자아 중심의 세계 인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독수리로부터 받은 자신들의 힘과 권능이 주변 지역을 거쳐 결국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믿음이나 기원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약간 복잡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 세 번째 그림에는 거북이, , 물고기, 작은 짐승들, 새 등이 등장한다. 말을 타고 땅 위의 짐승들을 사냥하던 모습이 그 내용인데, 집에 있던 부녀들이나 노인들이 사냥 나간 부족의 전사들이 풍성한 포획을 안고 돌아오길 기원하며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네 번째 그림은 앞의 것들에 비해 추상도가 더 높은 경우다. 두 명의 인물과 알 수 없는 형상 등 세 개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 이 그림의 내용인데, 일종의 추장 추대식혹은 대관식을 형상한 내용으로 보인다. 즉 머리카락 한 올을 달고 있는 맨 왼쪽의 인물은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이고, 가운데 인물은 풍성한 머리칼 혹은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이며, 왼쪽의 추상적 존재는 독수리의 상징적 의미[아름다운 깃털, 밝고 지혜로운 눈, 용맹한 발톱]를 부각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즉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부족의 원로가 새 추장으로 선출된 인물에게 독수리의 권능이 실린 추장의 모자를 그에게 씌워 줌으로써 부족 통솔의 전권을 맡기는, 일종의 대관식 현장을 그린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방울뱀[rattlesnake]을 그려놓은 단순화도 등장한다. 사막지대인 이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방울뱀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표지로 그려 놓았을 가능성이 크고, 독수리가 방울뱀을 잡아채는 그림에도 독수리의 힘으로 방울뱀을 제어해주길 기원하는 주민들의 염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방울뱀 그림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뱀을 잡은 독수리 그림

 

 

 

 

 

***

 

벼랑에 깔린 검정 일색의 화산암들은 천연의 캔버스였다. 일찍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푸에블로 인들에게 이 산은 커뮤니티의 단합이나 시공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현장이었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 이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형상이었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던 훌륭한 기호였다. 구체적인 그림들 속에 동심원 등 추상화 단계의 기호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발전이 순조로웠다면, 글자의 고안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 인들의 도래로 인해 자체의 발전은 종말을 고하고, 결국 거대 권력의 품 안으로 스며들게 됨으로써 푸에블로의 문화적 정체성은 한갓 돌멩이들 위의 낙서로 남아 백규 같은 호사가들을 위한 상상의 자료로나 기여하게 된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나 천전리의 예술을 주도했던 선사인들이 이곳까지 진출한 것으로 밝혀지길 기대하는 한국인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암각화나 동굴화를 두고 동일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 무리일 것이다. 글자의 바로 앞 단계가 추상화된 기호이고, 그 앞 단계가 구체적인 그림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느 지역의 종족이나 부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화발전 단계의 보편적인 현상일 뿐. 굳이 이 지역의 그림에서 울산의 암각화를 떠올리며 흥분할 일만은 아니리라.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바라본 앨버커키 외곽의 주택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바라본 앨버커키 외곽의 주택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암석과 암각화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바위산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십자가 그림.
스페인 사람들이 온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동심원 그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