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5. 08:50


앙증스런 대회 입간판

 

 

 


CSUN 입구에서

 

 


학술대회장에 들어서며

 

 

 

LA, 그 바벨탑의 체험

-2016 ASPAC 참가기-

 

 

 

 

 

지난 달 10-12일(미국 날짜). 2016 ASPAC(Asian Studies on the Pacific Coast) 학술대회 참석 차 LA 인근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노스리지 캠퍼스(CSUN: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에 다녀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캠퍼스에 갖가지 사막 식물들이 삶의 원기를 방출하는 곳. 주렁주렁 노랑 오렌지들이 캠퍼스 도처에 향을 내뿜고, 하늘에 닿을 듯한 야자수들이 가로수로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 이면의 문제들이야 그곳이라고 없을까만, 외관만으로는 말 그대로 에콜라지컬 유토피아(ecological utopia)’였다. 캠퍼스 전체가 식물원에 가까운 컨셉이었지만, 학술행사가 열린 이스트 컨퍼런스 센터(East Conference Center)’ 앞의 버태니컬 가든(botanical garden)’은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번 행사는 그 숲 한 가운데서 미국인들과 아시아인들이 함께 어울린 학술의 난장이었다.

 

캠퍼스 하우징의 한 복판에서 인도의 젊은 인류학자 프라빈 박사(Dr. Pravin S. Khandagale/School of Hyderabad, India)를 룸메이트로 만났고, 또 다른 인도의 법학자 쿠마르 교수(Dr. Saroj Kumar Dhal/Symbiosis International University, India)와 중국학자 왕 교수(Dr. Wang Wuyun/Gifu City Women’s College, Japan), 호주 학자 앤드류 선생(Andrew De Lisle/PhD Candidate/School of Culture, History and Language, College of Asia and the Pacific) 등 무수한 외국학자들을 같은 공간에서 패널리스트이자 청중으로 만났다. 유럽계 미국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아시아인들이 두루 섞여 이루어진, 그들 말로 한시적인 용광로(a temporary melting pot)’였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태국어, 인도어 등으로 각자의 모국어는 달랐으나, 발표장이나 식당에서는 순식간에 영어로 바뀌어 나오는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룸메이트 프라빈과 하우스메이트 쿠마르의 인도 영어(Indian English)’는 얼마나 특이한가. 그들의 영어에 적응되기까지 몇 시간은 그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내가 듣기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인도 말과 영어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인디언 잉글리쉬(Indian English)를 대표적인 혼합영어(pidgin English)로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콩글리쉬(Korean English)’보다야 소통의 면에서 훨씬 나은 건 사실이지만.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백인 중에서 특히 잉글랜드 출신의 영국계, 기독교 중 신교도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나 그에 근접하는 백인들이 주류사회의 정점을 형성하는 미국사회에서 그 주류사회의 오만(pride)과 유색 이민자들의 영어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 with English)언어(영어) 제국주의(linguistic imperialism)국가 미국의 두드러진 표지(標識)’이자 이민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점, 이창래 작품(Native Speaker)의 주제를 이루는 주인공의 깨달음도 결국은 이런 장벽을 피하고자 한 지점에서 얻게 되었다는 점 등이 내 발표의 핵심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뉴욕이나 LA를 로마에 이은 바벨탑으로 규정한 것도 그 도시들이 신의 뜻을 받아 지은이상적 공간은 아니라는 점, 그래서 그런 도시들의 마이너리티들은 결국 썩은 내 나는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한 채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아프게 확인한 것이 이창래의 본뜻이었으리라. 이민자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주류 출신 아내 릴리아가 이민자들의 모국어로 하나하나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작품의 결말도 알고 보면 긴 좌절과 방황을 거친주인공의 현실적 타협의 소산에 불과한 것 아닌가. 어차피 영어가 모국어 아닌이민자들이 주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 옛날 바빌론처럼 이 새로운 바벨탑들이 무너질 가능성 또한 없을 것이다. 소설이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임을 인정하면서도 결말은 얼마간 이상이나 추상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의 벽을 깨기가 현실적으로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다양한 인종들의 용광로(melting pot)가 지금의 미국인데, 당신의 그런 부정적인 결론은 비현실적이거나 부정확하다고 보지 않는가라는 백인 학자의 질문에, ‘사실 내가 비관주의자일지는 모르지만, 멜팅팟은 비현실적 상징(idealistic symbol)이거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은유(metaphor for glossing over the reality)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표 마지막 날. 만찬장에서 만난 인도계 미국 노학자 람 교수(Dr. Ram M. Roy/Emeritus Professor of International Relations & Political Science, College of Social and Behavioral Sciences, Cal. State Univeristy, Northridge)의 초대로 몇몇 학자들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나는 내 말이 맞았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저택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산 중턱에 우뚝 서있는 그의 붉은 색 2층 벽돌집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50년이 훨씬 넘는 경력을 쌓은 그였다. 이른 나이에 풀브라이트(Fulbright)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무용담(?)과 함께,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학교의 중심 건물에 독자 연구실을 부여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점을 푼수 없이되뇌는 그를 보며, 이민생활 50년에 LA 인근 산록(山麓)의 붉은 벽돌집 한 채로 현시(顯示)되어 있는 아메리칸 드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의 콤플렉스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간파하고 나니 얼마간 처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 지식사회에서 그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그의 영어에서 느껴지는 인도인의 혀 놀림(Indian tongue)은 어쩔 수 없음을, 주방의 미니바에 즐비하게 세워놓은 와인 병들을 따서 권하는 그의 호기 너머에 잠재된 외로움의 흔적은 지울 수 없음을 나는 그만 알아채게 된 것이다. 발코니 건너 편 겹겹의 산맥 넘어 태평양으로 스러져가는 석양이 80대 노인의 깊은 주름에 반사되어 수심과 외로움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챈 건 아마도 일행 중 나뿐이었으리라!

 

그랬다. 미국에 자리 잡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뉘는 것 같았다. 아메리칸 드림이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자(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젊어서 뭣 같이 벌어놓은재산에 기대어 힘 빠진 노년기를 그나마 불편 없이 보내는 게 미국에 자리 잡은 그들의 꿈이라면 할 말은 없다. 우리 몇 사람을 강권하여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간 람 교수. 어쩌면 그는 붉은 벽돌집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 여부를 우리로부터 직접 확인받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은 아메리칸 드림의 가장 성공적인 성취 사례임을 그의 면전에서 거듭거듭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그곳 사람들은 -(CSUN: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으로 부르며, 이 대학을 사랑했다. 노스리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찍이 자리 잡은 곳이고, 그 분의 따님인 안수산 여사가 일생을 사시다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가. 이곳 주민들 가운데는 한국계가 가장 많았다. 우리 가족이 안수산 여사를 방문, 그 분의 팔순 생신연에 참여한 1999년 1월은 우리가 인근의 UCLA에 머문지 1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벌써 18년 전의 일. 아름답게 채색해놓았던 당시의 추억은 세월의 모진 풍우에 빛이 바랬고, 곱게 웃으시던 안수산 여사의 표정도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그곳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슬픈 한계를 재확인하게 된 마음이 자못 착잡할 따름이었다.

 

 

 


이창래의 작품들

 

 


이창래에 대한 언론의 관심들

 

 


학술대회가 열린 East Conference Center

 

 


첫날 발표 후 프라빈 박사(인도), 필자, 쿠마르 박사(인도), 치앤타이 교수(태국)

 

 


점심 뷔페

 


 


점심식사 광경

 

 


점심시간에 담소하는 각국 학자들

 

 


이틀째 발표가 끝난 뒤 행사장 밖에서

 

 


야자수 무성한 CSUN 캠퍼스의 모습

 

 


캠퍼스에서 맛난 걸 요구하는 청설모(?)

 

 


먹을 것을 주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앞에서 재주를 보여주는 부부

 

 


인간과 동식물의 공존

 

 


선인장

 

 


이름모를 풀꽃

 

 


대나무 숲길

 

 


오렌지향은 바람에 날리고...

 

 


초대받아 간 람 박사의 자택

 

 


람 박사 자택 발코니에서 석양을 담기에 바쁜 손님들

 

 


람 박사 자택에서 바라본 태평양 연안의 연봉들

 

 


와인 시중을 들고 있는 람 박사

 

 


람 박사 자택에서 내다 본 석양

 

 


밤 하늘, 그리고 달...

 

 


람 박사 자택의 야경

 

 


람 박사의 아끼는 아들 소개

 

 


인도의 두뇌 쿠마르 교수와 프라빈 박사

 

 


벨기에 화가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Lucas van Valckenborch)가 1568년에 그린 바벨탑(Tower of Bable)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7. 08:59

 


장영배 교수 자택 앞에서


장영배 교수 댁 거실


장영배 교수의 빛나는 따님 혜나 양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미국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2

 

Dr. Chang, Young-Bae

 

 

 

미국에 도착한 지 3주가 다 되어가는 오늘. 한국에서부터 읽기 시작한 박계영(Kye-Young Park)의 책 <<The Korean American Dream>>을 다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그가 만들어 사용한 어구 하나가 !’ 하고 떠올라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바로 ‘anjŏng ideology’란 말.

 

그는 그 말의 동의어로 ‘Establishment, Security, Stability’ 등을 제시했는데, ‘(생활기반의) 구축, 안전, (지속적) 안정성쯤으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안정 이데올로기란 바로 먹고 사는 방도의 모색, 각종 위해(危害)나 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 외부의 충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는 기득권의 지속성등이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 이민들에게서 비로소 시작된 정신이랴.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거친 황야와 강줄기들을 넘어가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해 왔고, 드디어 한반도에 정착함으로써 정착민으로서의 안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해온 것 아닌가. 그러니 어딜 가나 한 곳에 뿌리박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 습관은 조상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남의 땅에서 아예 뿌리박기로 작정하고 떠나 온 이민들 뿐 아니라 우리처럼 단 몇 개월 혹은 1년 동안 머물려고 이 땅에 온 사람들에게도 안정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철학이다. 더구나 단 시간 내 안정 이데올로기를 구현해야 하는 단기 체류자들로서는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을 못 해 휘청거리면서도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15년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안정적인 주거, 이동 및 통신수단의 확보 등은 미국 생활에서 가장 긴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많아서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 있는 LA와 달리 드넓은 평원 스틸워터에서 도움을 줄 한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시차로 비몽사몽 하루 이틀 지내면서 우리는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 온 비상식량도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40도에 육박하는 햇살 아래 걸어 다니면서 무언가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전에 OSU의 학부생으로부터 한두 번 받은 이메일을 뒤지다가 몇몇 한인 교수의 이름을 발견했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 가운데 한 분인 장영배 교수[OSU 기계공학과])’를 찍어 전화를 드렸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나자 그 분이 대뜸 내가 연락을 해야 하는데, 먼저 연락 주셔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재미한인들의 상위 1%안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는 성공적인 직종이 전문직, 그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직종이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다. 미국에 온 한국인들로부터 연락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대개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라는 어떤 선배의 귀띔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내 스스로 그 분들에게 연락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통화를 시작으로 장 교수님은 기꺼이 나서서 우리의 정착을 돕기 시작했다. 장 교수님은 사모님과 함께 우리를 멋진 호숫가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셨을 뿐 아니라 수시로 차를 몰고 와서 우리의 시장보기를 도와주셨고, 소개해 주신 한국인 학생의 도움으로 전화를 개통했으며, 결국 몸소 우리를 차에 태우고 에드몬드 시에 가서 자동차를 사게 하심으로써 정착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 많을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 같으면 대충 후보차종을 고른 다음 이 차 사는 게 어때요?’라고 권할 법 한데, 그 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선 우리로 하여금 사이트를 통해 후보 차종을 몇 개 고르고 조건들을 모두 확인하도록 하신 다음, 다시 각종 사이트들을 알려 주시면서 여러 가지 지표들을 통해 그것들을 세밀히 비교하게 하셨다. 그런 다음 각 차종의 문제점들이 보고되어 있는 다른 사이트를 통해 해당 차종들을 또 한 번 스크린하게 하셨다.

 

그 과정에서 섣불리 결정하지 마세요라는 충고를 빈번히 건네시는 것이었다. 차를 사게 하신 것은 물론 보험사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신 장 교수님. 그 과정에서 성미 급한 나로서는 약간 답답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귀한 가르침이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 단순히 차 사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사 자체의 소중한 지표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실력 있고 열정적인 교수로서의 학교생활, 다정다감한 가장으로서의 가정생활, 실천적 목자이자 신도로서의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시는 장 교수님 덕에 생면부지의 땅 스틸워터에서 이제 막 시작된 가을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남을 돕는다는 것. 특히 해외에서 조건 없이 동포를 돕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평소 닦아 온 신앙의 힘과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