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8. 23:47


 1월 29일 아침 9시.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바르셀로나의 맥박을 느끼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28일 밤늦게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부터 비행기로 날아와 1박을 한 까딸루냐 사바델(Catalonia Sabadell) 호텔. 호텔은 좋았으나 휴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바르셀로나의 정수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기는 싸늘했으나 햇살은 깨끗했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으로 고풍스런 건물들과 정갈한 거리의 풍경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이크를 잡은 김은경 선생은 차분한 음성으로 바르셀로나의 핵심을 잘도 짚어 주었다.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170 만 명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마드리드와 항상 경쟁관계에 있는 문화와 역사, 그리고 경제 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베소스강과 요브레가트 강 사이의 평야지대에 있으며, 제조업과 관광업 금융업 등으로 스페인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1992년 이곳에서 개최된 올림픽과 당시 위원장 사마란치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 몬주익 언덕의 황영조와 FC바르셀로나 같은 축구클럽을 생각나게 하는 스포츠의 도시,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식을 뛰어넘는 건축미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6)의 도시, 피카소 미술관이 있고 고딕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한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안고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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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부터 1, 2, 3은 바르셀로나 시가지. 4는 수도국(아그바르) 건물, 5는 해변길. 6과 7은 점심식사를 한 식당의 요리사와 해물빠에자, 8은 그 식당에 진열되어 있는 하몽.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6. 01:10

 발견의 기념비를 둘러 본 다음 지하도를 통해 건너 간 곳이 제로니무스 수도원. 동 마누엘 1세가 해양을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연 선구자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502년 이곳에 세운 수도원이었다. 바스코다가마가 인도 항해를 마치고 벨렝 지구의 항구를 통해 들어온 직후였다. 수도원의 건축 양식은 고딕 후반기에 나타난 마누엘 스타일로서 대항해 시대의 풍부한 재화와 이역(異域) 문화의 수용 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표면, 특히 창문이나 난간 등에 자연 및 해양생활 모티프의 화려한 장식을 해 놓았는데, 동양적 양식이 두드러져 보였다. 남쪽 문으로 들어가니 성모 마리아 교회가 나왔다. 그곳에 동 마누엘 1세와 성 제로니모, 동 엔리께 등의 상들이 서 있고, 천장의 아름다운 장식이 볼 만 했다.

 ***

 벨렝 지구를 떠난 우리는 리베르다도 대로를 통하여 리스본의 중심부인 바이샤 지구로 이동했다. 에두아르두 7세 공원, 레스따우라도리스 광장, 로시우, 꼬메르씨우 광장 등을 돌아본 다음, 동부의 알파마 지구로 이동하여 성 조르지 성, 대성당 등을 둘러봄으로써 대항해 시대의 첨병 포르투갈 맛보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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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제로니무스 수도원 1, 2, 성모마리아 교회의 본당과 제대, 성모마리아 교회 안의 성가족, 성모 마리아교회의 아름다운 천장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7. 05:10
 

똘레도를 출발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 드넓은 스페인의 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들판은 정연하게 늘어선 올리브 나무들. 뿌리와 꼭지만 남아 새 계절의 발아(發芽)를 꿈꾸는 포도나무들, 장미의 농원, 그리고 푸른 보리밭이 전부였다. 과연 스페인은 농업의 대국, 풍요가 땅 전체에서 넘쳐 났다. 면적 505,955평방킬로미터,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달하면서도 인구는 4,350만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소득 3만 5, 6천불에 이르는 부국의 기틀이 이처럼 평평하고 기름진 땅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구역이 바로 라만차 지방. 돈키호테의 고향이었다. ‘건조한 땅’을 이르는 아라비아어 ‘라만차’. 작은 나라 대한민국 백규의 눈에는 부럽기 짝이 없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황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심은 올리브 나무들은 이곳의 황량함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시대와 사회에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세르반테스(1547~1616)의 의중이 라만차를 달리는 내내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그가 태어나 활약하던 시기는 이미 중세가 끝난 시점이었으나, 아직도 구체제가 남아 세력을 발휘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르반테스로서는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돈키호테라는 정신 나간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제의 시대착오적 허구를 통렬히 웃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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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게소 벽에 붙어 있는 동키호테>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풍차마을을 만났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복잡한 마을 이름이었으나 언덕 위엔 10개 정도의 풍차들이 서 있었다. 언덕에 올랐다. 거대한 풍차였으나, 이미 맥박은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덕에 불어대는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바람은 모자를 날리고 입을 얼려, 말을 이룰 수 없었다. 아, 이 바람. 이런 바람이라면 그 옛날엔 웅웅거리며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릴 수 있었겠다! 어둑발이 내린 평원 저쪽을 걸어오던 돈키호테에게 언덕 위에서 소리 내며 돌아가는 풍차는 아주 도전적인 존재로 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창을 비껴들고 풍차에 달려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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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풍차 아래쪽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라만차의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이 정겨웠다. 저 동네 어느 골목에선가 로시난테에 몸을 맡긴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대동하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시내에는 요소마다 돈키호테의 상이 서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캄포 데 크립타나로부터 차를 달려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 이곳에서 ‘벤타 델 키호테’를 만났다. ‘돈키호테의 정자’로 번역되는 이름의 허름한 주막 겸 레스토랑이었다. 돈키호테가 대관식을 가진 곳이 바로 이 집이라는 것. 우물도 있고, 장창을 곧추 잡은 돈키호테도 서 있었다. 가게에는 돈키호테의 캐릭터 상품들이 그득했다. 돈키호테를 뜯어먹고(?) 사는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갖고 있는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들이 새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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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17:20
 

스페인 기행 2-1 : 똘레도의 감동, 그리고 질기게 따라붙는 동키호테



1월 24일.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똘레도로 출발했다. 인구 6만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한때 마드리드를 위성도시로 거느리던 스페인의 수도였다. 이슬람 시절에 쌓아올린 가파른 성벽을 금대(襟帶)처럼 타호강이 에둘러 흐르고, 복잡한 시가지 안에는 고급 문화유산으로 그득했다. 스페인이 보유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은 대충 헤아려도 39점이나 된다. 그 중 35점이 문화유산, 2점은 자연유산, 그리고 나머지가 복합유산이다. 이곳 똘레도는 시가지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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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똘레도 대성당의 대시계문, 아래는 정면>

마드리드에서 버스에 오르니 1시간 10분 만에 똘레도의 웅장한 성채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좁은 언덕길에 올라 버스에서 내리니 붉은 색 벽돌집들이 골목에 빽빽했다. 타호강은 허리띠 혹은 오그린 두 손바닥처럼 사람들의 삶과 온갖 문화유산들을 감싼 채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굵직한 것들만 꼽아도 대성당,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 산후안교회, 의사당, 산타크루즈 미술관, 알카사르 요새 등등 숨이 차오를 정도. 우리가 찾은 곳은 대성당과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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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 그레코 산토 또메 교회>

 예상대로 대성당은 똘레도의 중심에 있었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이루어져 있고 그 주변에 상가와 주택가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확인한 대로였다. 똘레도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27년 페르디난도 3세가 착공하여 1493년 알폰소 8세가 완성한 전형적인 고딕식 건축물이 대성당이다. 길이 120m, 폭 60m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90여m의 두 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18톤에 달하는 종이 매달려 있다 한다.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 없는 이 탑은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엘 그레코의 아들 조르쥬 마누엘(Gorge Manuel)이 세웠고, 내부의 프레스코화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은 엘 그레코와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이라고. 

 수리 공사 중인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뒤쪽의 대시계문(Puerta del Reloj)으로 입장한 우리는 장엄한 내부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내진(Capilla Mayor), 성가대석(Coro), 참사회 회의실(Sala Captular), 보물 보관실(Tesoro), 성구실(Sacristia), 예배당(Capilla), 회랑(Claustro)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고전적이면서도 화려했다. 스페인 천주교의 중심인 수석 대교구 성당이 바로 이곳이었다.

 성구실에는 엘 그레코의 <성의의 박탈>, 고야의 <그리스도의 체포>, 모랄레스의 <슬픔의 성모> 등 대작들이 전시되어있어 질적으로 큰 미술관에 못지않았다. 그 옆의 의상실에는 중세 성직자들이 입었던 수직(手織)의 화려한 미사복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역사와 시간을 뛰어넘은 그 모습이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소예배당의 보물 보관실에 전시된 성체 현시대는 또 하나의 놀라운 물건이었다. 금은보배로 장식된 구조물이 대성당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성현일에 이 성체 현시대를 둘러메고 거리를 순례하는 행사는 지금도 반복된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성당을 나온 우리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을 돌아 산또 토메 성당으로 갔다. 엘 그레코의 명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당을 재건한 오르가스 백작. 그의 장례식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안장하는 모습, 그 뒤에 배열한 참배객들의 슬픈 표정들,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 그림의 뒤쪽에 천국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백작의 영혼을 맞이하는 모습 등 매우 인상적이며 감동적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천국으로부터 두 성인이 강림하고,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영접하는 모습 등은 오르가스 백작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종의 기적을 염원하는 독실한 신심의 발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오르가스 백작이 재건한 산토 또메 성당은 이 그림이 있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똘레도는 중세정신이 살아있는 보물 창고였다. 성채를 빠져나와 바라보니, 타호강 너머에 앉아있는 똘레도 자체가 하나의 요새요 금성철벽이었다. 사실 똘레도의 존재를 전투와 관련시키려면 알카사르 요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538년 카를로스 1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하여 1551년 요새의 원형이 이루어졌고, 1936년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파의 주둔지가 되었던 곳. 프랑코파가 인민 전선군에 강하게 저항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 요새였던 만큼 똘레도는 종교와 함께 정치, 군사적으로 의미가 큰 지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스페인 역사의 영욕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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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하몽(돼지 넓적다리를 염장한 식품)을 먹은 식당 라 쿠바나는 타호 강을 경계로 똘레도 요새의 맞은편에 있었다. 딱딱하고 맛깔스러운 스페인 빵과 짭짤하고 고소한 하몽 한 점으로 스페인 역사의 질곡을 맛보게 되었다면, 과장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06:05
 

스페인과의 첫 상봉, 돈키호테를 만나다


아침 8시 40분 인천공항을 출발,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도달한 것이 유럽시각으로 오후 12시 34분. 12시간의 먼 거리였다. 2시에 암스테르담을 떠나 4시 30분에 드디어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부터 무려 15시간이나 걸린 장도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지만 바람은 매섭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눈이 쌓이고 한파가 맵게 몰아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항 주변의 마을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럽을 돌면서 나를 주눅들게 했던 아름다운 건축들의 추억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드디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나라에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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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드리드 시가지>
 
600만의 대도시 마드리드. 재작년 대비 35%나 감소할 만큼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마드리드는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아토차 역을 지나 프라도 미술관, 솔광장 등을 지나 사바티니 정원, 바일렌 거리를 지나 스페인 광장에 도달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산호세 교회 앞까지는 대략 1.3km에 달하는 그란비아(Gran Via), 말 그대로 ‘대로(大路)’가 펼쳐져 있었고, 이곳이 마드리드 구시가의 중심이었다.

 왕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원형지붕을 지닌 엄청난 자태의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이 좌정하고 있었다. 바일렌 거리와 만나는 마요르 거리(Calle Mayor)를 따라가니 마드리드 시청사, 시장 관사 등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다. ‘마요르’란 시장(市長)을 뜻하는 ‘메이요(mayor)'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톨레도 거리와 마요르 거리가 만나는 곳의 남동쪽에는 마요르 광장이 있었다. 마요르 광장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솔광장이 다시 나왔다. 솔광장으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니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가 등장했다. 국회의사당과 이코 미술관 등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 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거쳐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니 다시 그란비아와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시벨레스 광장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을 한 바퀴 돈 셈이었다.

 그러나 어둑발이 들 무렵, 그란비아가 시작되는 곳의 스페인 광장은 처음 만나는 마드리드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공간이었다. 형형한 눈빛의 돈키호테가 장창을 꼬나든 채로 날아오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옆엔 나귀를 탄 산초 판사가 그 반대쪽엔 연인 둘시네아가 돈키호테를 옹위한 채로 서 있었고, 돈키호테의 뒤로 세르반테스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는 이 기념비는 스페인 빌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마드리드 타워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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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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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 앞의 플라타너스 길과 노인들>

어릴 적 만난 돈키호테는 촌놈인 내게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적이 있었다. 소에게 풀을 뜯기러 찾아간 바닷가 백사장의 햇살 따가운 모래밭에 누워서 누군가가 번역한 <<동키호테>>를 읽었다. 책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어도 읽어도 다함없는 재미가 샘솟았다. 오늘 그 스페인에 온 것이다. 3년 반 전 자동차로 유럽을 돌다가 그만 ‘초읽기’에 몰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스페인이다. ‘말꼬리에 붙어 천리 간다는 파리’처럼 나도 수준 높은 일행의 꽁무니에 슬그머니 붙어 만리 장도 스페인을 밟았으니, 열 두어 살 시절 촌놈의 꿈을 지금서야 이루는 셈이다.

 오늘 밤엔 꿈이나 거창하게 꾸어볼 일이다. 스페인이여, 부디 내 품에!

Posted by kicho